의자왕

백제의 역대 국왕
30대 무왕 부여장 31대 의자왕 부여의자 32대 풍왕 부여풍

의자왕(義慈王, 생년 미상~660년, 재위 기간 641년~660년)은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흔히 삼천궁녀 설화로 알려져 있지만 삼천궁녀는 사실이 아닌 과장이 뒤섞인 이야기이다.[1] 재위 초기에는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포함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고 죄수를 사면하는 등 백제의 부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후기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결국 당나라에 의해 나라가 멸망했다.

단, 이 기록은 조작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버지를 잘 섬기고 그것이 타인의 모범이 되어 당시 중국의 효자라고 불렸던 '증자'를 합하여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또한 형제간의 우애도 좋았으며 용맹하고 결단력이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태어난 시기는 알 수 없고 의자왕의 맏아들인 부여웅이 615년에 태어났음을 부여웅 묘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최소 20살에 아이를 낳았다고 가정한다면 대략적으로 595년즈음 태어났다고 가정 할 수 있다.

632년 40세가 다 되어가던 때에 태자로서 등극했다. 태자치고는 상당히 늦은 시기이다. 이는 어머니가 지금까지 불분명하다는 점이[2] 크게 작용한 탓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모계 권력이 있는 다른 형제들보다 부단히 노력해서 태자의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된다. 물론 이후 행적을 보면 이를 처세술의 일환으로 모든 것이 연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641년 3월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백제의 31대 왕으로서 등극하였다. 이에 당나라에서는 의자왕을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이라는 자리에 책봉함으로서 약한 지지기반에 힘을 더하게 되었다. 이에 같은 해 8월에 사신을 보냄으로서 왕이 되었음을 알렸다.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려함에 백제와 신라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는데 신라는 이에 응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백제는 이를 거부하고 비어있는 신라를 공격했다. 이에 분노한 당나라는 의자왕이 죽을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고 수교마저 끊어버리게 되었다.

655년 의자왕이 향락에 빠지게되며 백제가 기울게된다. 당시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를 뒤에 둔 상태로 밀고 들어오면 밀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의자왕이 여러 궁녀와 사치, 향락에 빠지면서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삼천궁녀 이야기가 나오는데 삼천궁녀는 과장한 이야기에 가깝다.

이에 유명한 일화로 백제본기에 좌평 성충이 왕께 사치와 향락에 빠진 왕을 말리려고 하니 그를 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성충은 스스로 배를 굶어가며 서서히 죽어갔는데 이 때 성충이 글을 하나 썼다고 한다. 육군은 침현, 해군은 기벌포를 방어하면 능히 적을 상대 할 수 있다고 적었다 한다. 하지만 왕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고 있어서 결국 나당연합군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수도까지 진군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는 '대부인'이라 부르는 은고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의 대부인이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을 흐리고 참된 신하를 죽였기에 화를 불렀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같은 일본서기에는 7월 13일 당나라의 소정방에게 사로잡혀 당에 끌려갔다고 서술되어 있다.

660년에 사망하였으며 사망한 지역은 당나라 장안성 인근으로 현재 중국의 산시성 시안시로 보고 있다.

각주

  1. 이는 불교에서 따온 표현법으로 고전문학에서 '삼천(三千)'은 불교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때 삼천은 1천을 3제곱한 값으로 10억을 말한다. 즉 10억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렸다는 것조차 말이 안됀다. 따라서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과장하기 위한 단어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2. 의자왕의 어머니가 권력이 작거나 없는 경우 다른 형제들에게 밀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