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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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三國時代

892년 ~ 936년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견훤이 892년에 신라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때부터 후백제가 고려에 항복하여 후삼국이 통일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엄밀히는 발해 및 그 후계국가가 평안남도 이북 지역에 잔존하고 있었고, 도중에 신라의 한 왕자가 또다른 나라를 선포한 적도 있으므로 이 시기에 존재한 국가 수가 3개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한 '군웅할거' 시대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방 호족의 발흥과 중앙권력의 붕괴, 이로 인한 호족 군벌간의 항쟁과 삼국정립 등 이 시대는 여러모로 중국의 삼국 시대와도 비슷한 면을 많이 띠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문화 컨텐츠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드라마 태조 궁예왕건.

배경[편집 | 원본 편집]

혜공왕 이후의 하대신라는 진골 사이의 왕권다툼이 격화되며 중앙권력이 점차 약해지고, 이에 따라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상실해가고 있었다. 중앙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지방 각지에서는 그 지방의 유력자들이 호족으로 성장하여 사실상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비록 헌강왕(875-886) 시기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개드립기록이 있기는 하나, 이러한 모습은 권력과 돈이 집중된 경주 중심부의 모습이었을 뿐 지방은 이미 따로 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진성여왕(887-897) 대에 이르면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호족들은 본격적으로 군벌화되었으며(당시의 대표적인 군벌이 북원 일대를 장악한 양길이다) 이들의 군사행동 또한 노략질 수준에서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고, 신라 중앙은 이를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진성여왕 이후 신라의 세력권은 경주와 그 주변 수십 ㎞ 정도로 축소되고 말았다.

신라가 지방의 독립을 막을 수 없었던 데는 통일 이후의 지방정책 또한 한 몫을 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기존 세력은 신라의 골품제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고, 통일신라 자체가 극단적으로 경주 중심으로 돌아간 국가였기 때문에 소외된 이들 지역은 신라 중앙에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견훤궁예가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던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태봉(후고구려)과 후백제의 성립[편집 | 원본 편집]

일반적으로 견훤이 독립한 892년을 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호족 출신으로 신라 중앙의 장군직에 있던 견훤은 서남해안의 해적과 호족들을 공격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는데, 견훤은 오히려 이들을 비롯한 지방세력을 포섭한 후 무진주(현 광주광역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신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했다. 이후 견훤의 세력은 북쪽의 완산주(현 전주시) 일대까지 확대되었고, 백제의 주요 지역이었던 완산주를 중심으로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선언하며 정식으로 (후)백제의 왕위에 오른다(900년).

승려 출신으로 양길 휘하의 장수였던 궁예는 894년 명주 일대를 장악한 이후 신라의 동쪽과 북쪽 변경을 차례차례 접수하였고, 896년 왕륭왕건 부자를 비롯한 서북부의 호족들이 자신에게 투항해 오자 왕륭의 본거지인 송악을 수도로 삼고 본격적으로 독립하였다. 궁예 또한 고구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으며 이후 빡친 양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신라 북부의 넓은 영토를 장악,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정했다.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건국되었다고 해서 수많은 호족들이 다 정리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즉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사실상 각각 견훤과 궁예를 지지하는 수많은 호족들의 연합체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하위 호족들의 동향에 따라서 후삼국의 정세가 크게 흔들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패서 지역의 호족들이 궁예에게 등을 돌리면서, 패서 호족을 대표하는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것 등이 있다.

태봉과 후백제의 세력 확대와 항쟁[편집 | 원본 편집]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주변의 호족들을 정복하거나 포섭하면서 계속 세력을 넓혀 나갔다. 신라는 완전히 무력해져 경주 주변 지역만을 다스리는 소국으로 전락했고, 400여 년 만에 왕위가 김씨에서 박씨에게 다시 넘어가는 등 계속된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본격적인 첫 충돌은 엉뚱하게도 후백제에서도 한참 남쪽에 있는 금성(현 나주시 일대) 지역에서 벌어졌다. 궁예는 해상세력인 왕건 일가를 중심으로 수군을 편성, 한참 남쪽의 금성으로 출병했던 것. 이후 후백제는 이 지역을 탈환하고자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지만, 함대가 화공을 당하는 등(...) 여러 차례 패배하면서 꽤 오랫동안 되찾지 못했다.

한편 신라에 대한 공세도 계속되었다. 후백제는 유명한 대야성(경남 합천)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고, 후고구려는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세력권을 죽령 동북부까지 넓혔다.

왕건의 고려 건국과 후백제-고려 전쟁[편집 | 원본 편집]

한편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하던 궁예는, 패서 호족의 심장부인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고[1] 새 수도에 청주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켜 새로운 친위세력을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국가명을 마진, 태봉으로 바꾸면서 기존에 이용했던 고구려의 색채를 최대한 지워 나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기존의 중심 세력이던 패서 호족들과의 갈등을 낳았고, 궁예는 자신의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기 위해 미륵불이라 자칭하고 불교 사상을 이용한 강압 통치를 시도하였다. 패서 호족 출신인 왕비와 두 아들까지 처형하는 지경에 이르자 위협을 느낀 패서 호족들은 왕건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결국 궁예는 살해당하고 왕건이 왕위에 올라 국호를 다시 고려로 바꾸고 다시 송악으로 천도했다.

다만 다른 지역의 호족들은 왕건의 정변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는데, 명주의 호족 김순식은 약 4년간이나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으며[2], 특히 궁예의 친위세력이었던 청주와 웅진의 호족들은 왕건에 대항하여 대규모의 반란을 잇따라 일으키기도 했다[3].

처음 내부 안정이 급선무였던 고려는 후백제나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고, 후백제와는 인질을 교환하는 등 전쟁을 가급적 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려에 인질로 온 견훤의 조카가 급사하는 사건을 기화로 후백제와 고려는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되었고, 초기에 왕건은 후백제와의 접경지역에 있던 호족들이 잇따라 후백제에 투항하며 어려운 싸움을 하게 되었다.

왕건은 이례적으로 후백제와 내통한 호족들을 대거 처형하는 등 강경한 모습을 보이며 전의를 다졌지만 상황은 계속 불리하게 돌아갔다. 후백제의 신라 서라벌 함락 및 경애왕 살해를 계기로 벌어진 공산 전투에서는 1만 명 이상의 고려군과 개국공신 신숭겸이 전사하고 왕건 자신은 간신히 도망가는 대참패를 당하기까지 했다. 왕건의 장기이던 해전에서조차 후백제군에 패하며 왕건은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견훤의 항복과 후삼국 통일[편집 | 원본 편집]

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고창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는 8천 명의 병력을 잃고 다수의 장수와 책사가 포로가 되는 큰 패배를 당했는데, 신라계이던 고창(현재의 안동) 일대의 호족들이 신라에 우호적인 고려 쪽을 지원했기 때문에 고려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이후 후백제는 거꾸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얼마 뒤 후계자 분쟁이 본격화되면서 후백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장남 신검이 견훤을 유폐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견훤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탈출하여 왕건에게 항복해 버렸다. 이 사태의 의미를 간파한 왕건은 견훤을 크게 환영하였고, 후삼국 통일의 명분은 완전히 고려 쪽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였고, 거란에 멸망당한 발해의 일부 세력도 고려에 합류하여 고려는 완전히 대세를 잡게 되었다. 신검은 내부의 혼란을 간신히 평정하고 고려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고려는 그동안 모인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10만 대군을 편성하여 한방러시공격을 감행, 후백제는 일리천 전투에서 견훤을 앞세운 고려군에게 힘없이 무너지며 멸망하고 말았다(936년).

결과[편집 | 원본 편집]

대체로 후삼국시대의 종결을 진정한 민족 통합의 시점으로 본다. 먼저 통일을 이룩한 것은 통일신라였으나,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중국에 양보한 반쪽짜리 통일이었던데다 그 고구려의 영토에는 고구려계의 새로운 나라인 발해가 등장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통일로 볼 수는 없다는 것[4]. 실제로 200년이 지난 후까지 백제와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떡밥에 다수의 사람들이 호응했다는 것은, 신라의 통일이 그 때까지 사람들의 내면에까지 완벽히 와닿지는 못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고려의 재통일 이후 20세기 남북분단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은 단 한 번도 둘 이상의 나라로 갈라져본 적 없이 1천 년간 살게 되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고구려-백제-신라'라는 독립적인 의식이 온전히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멸망한 발해의 유민 상당수를 받아들이며 실질적인 민족 통합의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이후로 한민족은 고려 중기 탐라를 흡수하고 수백 년에 걸쳐 압록강-두만강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북부의 영토를 수복한 것 외에는 영토나 민족 구성에서 커다란 변동이 없이 근현대에 이르게 된다.

흥미롭게도 이는 삼국사기의 역사관과도 일맥상통하는데, 삼국사기는 신라의 삼국 통일이 아니라 고려의 후삼국 재통일까지를 기록의 대상으로 잡고 있다. 고려의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삼국통일이라는 인식(고려정통론)이 있었던 셈. 물론 삼국사기가 고려시대의 기록이라는 것 또한 감안할 필요는 있다.

각주

  1. 철원의 궁궐 터는 현재 비무장지대 한가운데(!!) 있다.
  2. 이후 왕건에게 항복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고 고려의 통일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3. 훈요십조에서 언급된 '차령 이남'은 호남지방이 아니라 이 두 지역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최근의 대세다.
  4. 그래서 남북국시대라는 호칭이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