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larger - edit1.jpg
이오지마 전투성조기를 세우는 미군
군사 충돌 정보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날짜 1941년 12월 7일 ~ 1945년 9월 2일
결과 일본제국 패망, 일본 식민지 해방
교전단체
일본제국 및 괴뢰국
태국
미국
대영제국
중화민국
기타 참전국은 본문 참고
손실:
사망 148만명
부상 20만명
손실:
사망 512,000명

태평양전쟁(Pacific War, 太平洋戦争)은 1941년 12월 7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4년여간 태평양 전역을 중심으로 미국일본이 주축이 되어 벌인 전쟁. 중일전쟁의 연장선상에 놓인 전쟁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범주에 속하는 전쟁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미국과 일본의 충돌 가능성은 20세기 초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태평양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나라는 열강은 미국과 일본뿐이었는데, 미국은 필리핀을 발판으로 서태평양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며 태평양상의 우위를 보장받고자 했고, 일본은 서태평양과 중국에 대한 전체적인 우위를 주장하며 이에 맞섰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양국이 각각 필리핀과 한국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긴 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종료 후 일본이 독일의 중국, 태평양상의 이권과 식민지를 대부분 획득하고 미일 양국이 대규모 건함에 들어가면서 두 나라 사이에 태평양 패권을 두고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 1920년대부터 있었다.

그러나 양국 지도부는 서로 간에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명백히 인식하였고, 건함파를 억누르고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체결하며 충돌 가능성을 크게 낮췄다. 그러던 것이 30년대 초, 일본이 급격하게 군국주의에 기울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동북지역을 지배했으며, 상해사변을 연달아 일으켜 중국 침략의 기회를 엿보았으며 국제사회가 이를 규탄하자 워싱턴 군축 조약 및 런던 군축 조약을 파기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최종적으로 1937년 노구교 사건을 핑계로 중국을 전면 침공,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각오한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1937~38년 당시 일본 군부는 미국과 전쟁을 회피하고자 했는데 파나이 호 사건처럼 일을 저질러놓고도 뒤늦게나마 사과하며 저자세로 나오는 등 미국의 눈치를 봤다. 이는 중국이 조기에 항복할테니 그때까지만 참자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전쟁수행을 위한 전략물자 상당수를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다는 현실적 문제가 동시에 작용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일본의 거듭된 침략과 만행을 용납할 수 없었던 미국은 일본에 대해 계속 압력을 가했고, 일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침략을 계속했으며 독일, 이탈리아와 추축동맹을 체결한 후 1940년, 유럽열강이 전쟁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 비시 프랑스를 협박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을 주둔시켰고, 네덜란드에게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자원을 일본에게 내놓으라는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략자원의 수급이 힘들어지자 이를 수급하고, 동시에 유럽열강의 공백이 생긴 동남아시아를 일본의 새 팽창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전쟁 발발전 일본과 연합국의 해군전력차이

이러한 일본의 팽창야욕에 미국은 ABCD 포위망[1]을 형성, 일본에 대한 전면적인 무역봉쇄에 돌입했다. 그 핵심은 석유였다. 석유의 대부분을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일본은 당장 석유 부족에 직면했다. 석유의 부족은 곧 전쟁수행 불가와 산업기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포위망에 가담하지 않은 국가중에는 소련이 있었으나 소련 역시 할힌골 전투로 일본과 우호관계라 보기 힘들었으며, 소련 석유 대부분은 머나먼 바쿠에서 산출되고 있어 일본에 공급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이 전략자원을 수출해줄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팽창주의 군부와 군부가 차지한 내각은 전쟁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포위망을 해체시키기 위해 미국과의 전쟁을 불사한다는 강경모드로 나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 모두 전쟁을 피하려고 외교접촉에 나섰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미국은 만주국의 승인을 조건으로 대신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의 침략행위 중단과 군의 전면적인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으로 보며 거부하고 오히려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대립은 커져만 갔다.

결국 일본은 미국을 공격하여 전열에서 이탈시키고 동남아시아를 정복하여 세력권에 편입시킨다는, 후대가 보기에 실로 황당무계한 목표를 세우며 미국과의 결전에 나섰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1941년: 선전포고 없는 공격, 깨어나는 거인[편집 | 원본 편집]

어제, 1941년 12월 7일은 치욕스러운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1941년 12월 8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 일본 선전포고 요청 의회연설에서
이제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 헐시 제독, 진주만 공습 후 진주만에 귀항하면서
우리는 잠자는 거인을 깨운 것일지도 모른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공격 성공 후에 미국의 잠재력을 걱정하면서자업자득, 거인이 그냥 거인이 아니라 울트라맨이었다.

1941년 12월 7일 8시경(일본 시각으로는 12월 8일), 일본 제국해군 연합함대 소속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한 300여 기의 항공기들이 하와이의 진주만 하늘을 뒤덮은 뒤 대대적인 폭격에 나섰다. 미국 정부에 선전포고가 채 전달되기도 전에 이루어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태평양함대는 보유한 전함을 모두 잃으며 반신불수가 되었다.

동시에 일본은 홍콩, 말레이 반도, , 웨이크섬, 필리핀 등지로 동시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괌은 공격 하루 만에 점령되었고, 홍콩과 웨이크섬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해를 넘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영국 해군 동양함대는 말레이 해전으로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를 잃으며 패퇴했고, 순식간에 서태평양의 제해권을 일본군이 장악하게 된다.

선전포고 없는 공격에 미국 전역은 일제히 격분, 12월 8일 하원은 만장일치로, 상원은 반대 1표로 대일 선전포고안을 통과시키며 총력전 태세에 돌입했다.

한편, 독일이탈리아는 일본과 미국이 전쟁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추축동맹이라며 미국에 선전포고한다. 하지만 일본은 독일과 달리 소련과 중립을 유지, 1945년 8월 9일까지 소련과 충돌하지 않았다.

1942년: 미드웨이, 과달카날. 일본의 운은 다하다.[편집 | 원본 편집]

42년 초 일본군은 남방작전으로 순식간에 동남아시아를 석권했다. 태국은 일본의 동맹국으로 참전했고, 일본군은 영국령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버마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석권하고, 필리핀 바탄 반도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던 웨인라이트 중장의 미군으로부터 끝내 항복을 받아냈다.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루즈벨트의 탈출 명령을 받고 항복 직전 탈출하여 호주로 이동했다.

일본 해군은 호주 북부의 포트 다윈을 폭격하고, 뒤이어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인도양 해운을 마비시키고 실론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인도양 방면에서 영국군의 위협을 제거했다. 뒤이어 남방의 방어선을 확고히 하고 호주 공격을 위해 뉴기니 섬 남해안의 포트 모르즈비를 공략하려 했으나 산호 해 해전으로 저지되었다.

그러는 동안 미군은 둘리틀 특공대를 동원, 일본 본토를 폭격하며 전의를 되새겼다. 본토가 폭격받자 당황한 일본은 미국 해군 항공모함 세력을 섬멸한다는 목표로 미드웨이 제도를 공략하기로 결정, 항공모함 4척을 동원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미군은 가용 가능한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 반격에 나섰고, 일본은 동원항모 4척을 모조리 잃고 미군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하는 참담한 패전을 겪으니, 이것이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 미드웨이 해전이다.

미드웨이 해전 패배 이후 일본은 호주와 미국간의 해상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미군이 즉시 섬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탈취했고, 이후 1943년 초까지 이어지는 과달카날 전투가 계속된다.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쪽바리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것입니다!
— 헐시 제독이 과달카날 부임 후 일본에 이길 방법을 묻는 기자에게 한 말.

이 긴긴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에 막대한 소모를 강요하며 최종적으로 승리, 전세를 뒤집고 마침내 대반격을 시작한다.

1943년 : 태평양을 가로지르며[편집 | 원본 편집]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미군은 파죽지세로 일본 본토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북방에서는 빼앗겼던 알류산 열도의 애투 섬과 키스가 섬을 탈환하고, 남쪽에서는 맥아더가 뉴기니에서 북상을 시작하며 일본군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남방전선을 시찰하던 제국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통신감청 및 암호를 해독하고 준비중이던 미군 전투기에 의해 탑승기가 격추당하며 사망했다. 일본의 뉴기니 방어는 실패로 끝났고, 남방 지역의 일본군은 고립되어 저항하는 처지가 되었다.

맥아더는, 뉴기니 각지 및 미크로네시아(당시 국제연맹의 일본 위임통치령으로 일본명 남양군도)의 주요 거점 몇 곳만 공략하고 대부분의 섬들은 폭격만 퍼부은 다음 지나쳤는데, 이로서 남양군도는 일본 본토와 완전히 유리되었다.

1943년 11월, 미군은 큰 희생을 치루며 타라와 환초를 점령하고 필리핀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1944년 : 열도의 턱밑까지 올라오다[편집 | 원본 편집]

유럽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서부전선이 형성되던 6월, 미군은 괌과 북마리아나 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이를 막기 위해 출격한 제국해군 연합함대는 보유한 함재기를 거의 대부분 상실하고 항공모함 3척을 상실하는 재기불능의 대참패를 당한다.(필리핀 해 해전) 방해가 사라진 미군은 괌을 탈환하고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 진주만 공습 당시 지휘관이던 나구모 주이치와 사이판의 일본군민들은 모조리 자살한다.

뒤이어 미군의 필리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감행된 레이테 만 해전에서도 일본군은 또 다시 대패하여 항모 4척, 전함 3척, 중순양함 6척을 잃고 최소한의 제해권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미군은 레이테 섬을 시작으로 필리핀에 발을 내딛으며 민도르, 민다나오, 루손 등지로 빠르게 진격하며 필리핀을 탈환했다.

동남아와 중국 전선도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무다구치 렌야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임팔 작전을 단행하였지만 대참패, 동원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버마전선의 붕괴를 초래하고 말았다. 중국에서도 제1호 작전(이치고 작전)으로 칭한 대륙타통작전을 전개, 만주와 광동성을 철도로 연결하려 시도했으나 병력 부족과 보급의 악화, 그리고 중국군의 저항으로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45년 : 일본제국의 최후[편집 | 원본 편집]

전 전선에서 일본의 패배는 명확해졌다. 1945년 2월, 오가사와라 제도이오섬의 수비대가 전멸되었다.(이오지마 전투) 뒤이어 커티스 르 메이가 지휘하는 B-29 폭격기들이 3월 도쿄대공습을 신호탄으로 일본 본토 공습을 단행, 일본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요 대도시는 초토화되고 산업능력은 급감했으며 수많은 사망자와 피난민으로 도시는 마비되었다. 더군다나 남방-본토의 항로가 제해권의 상실로 두절되고, 미국의 잠수함들이 서해와 동해까지 들어오면서 해운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일본 연안에 대대적으로 부설된 기뢰는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1945년 3월이 되면 미군은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 필리핀의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게릴라전으로 전환했으나 미군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뒤이어 미군은 보르네오섬에 상륙, 일본의 얼마 안 되는 유전지대까지 빼앗았다. 영국군은 버마 전선에서 총공세를 개시하여 3년여 만에 버마를 탈환, 일본군은 버마에서 태국으로 향하는 비참한 패주에 나섰다.

그보다 조금 앞선 1945년 4월, 마침내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했다. 이를 구원하려던 전함 야마토는 순식간에 격침당했고, 가미카제라는 극단적인 수단까지 동원하여 발악한 일본군은 제대로 된 전과도 없이 막대한 희생만을 치렀다. 육상에서도 민간인들을 방패와 자살폭탄으로 활용하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서슴치 않았음에도 미군의 오키나와 함락을 막지 못했다.

7월이 되면 미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일본 연안에 붙어서 함재기로 공습을 가하는데도 이를 막을 전력이 없었으며, 미국 전함이 해안가의 제철소를 주포 사격으로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7월 말, 세토내해구레에 정박중이던 연합함대의 마지막 함정들은 미군 함재기들의 총공격을 받고 전멸되었다.(구레 군항 공습)

그럼에도 일본은 신국불멸1억 총옥쇄를 외치며 민간인들에게 죽창을 주어 전투훈련을 시키는 미친 짓을 서슴치 않으며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인류 역사상 최초의 핵폭격을 감행하여 항복하지 않는 일본에게 정의의 응징을 가했다.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공격이 이루어졌다.

한편 서쪽의 소련은 유럽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4월부터 극동군을 보강했다. 8월 9일(모스크바 시각 8월 8일), 수십만 대군으로 만주 국경을 둘러싸고 관동군을 신나게 박살냈다. 특히 험준한 다싱안링 산맥을 기계화부대로 돌파하면서 관동군의 허를 찔렀고, 동쪽에서 한반도로 내려가는 퇴로를 차단하면서 관동군을 고립시켜 19일 즈음 작전을 실질적으로 완수했다.

그제서야 일본은 항복을 결심, 8월 15일 히로히토 덴노가 항복방송을 하는 것으로 짧게는 4년여의 태평양 전쟁, 길게는 6년이 넘게 진행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었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고, 8월부터 미군이 일본 전역에 주둔하기 시작, 전범들을 체포하고 일본군을 해체했다. 이루 도쿄 전범 재판을 통해 전범들이 처벌되었고,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와 맥아더 원수에 의한 일본 통치가 1952년까지 지속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었다.

일본은 패전의 대가로 모든 해외영토를 상실했고[2] 오키나와는 70년대에나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식민지 중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되긴 했지만 독립했고 대만은 중화민국으로 반환되었으며, 남사할린 및 쿠릴 열도는 소련에게 넘어가고 북마리아나 제도는 미국이 차지했다. 미크로네시아는 시일이 지난 후 독립한다.

또한 침략과 패전의 대가로 영구히 군대를 가질 수 없게 되고 전쟁 행위가 불가능해졌으며 최소한의 자국 방위를 위해 자위대가 창설된다.

인명피해가 상당히 많은 참혹한 전쟁이었는데 주 교전당사자인 미일 양국보다는 일본의 강압통치로 인하여 기아와 질병으로 숨진 식민지인들이 매우 많았다. 중국, 인도차이나,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대대적인 식량 공출 등에 따른 기아로 수백만 명이 숨졌다. 미국은 2차대전 기간 약 48만 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그중 태평양전에서 입은 피해는 20만여 명이었다. 일본은 중일전쟁 포함 약 148만여 명이 죽었는데 그 대다수가 1943년 이후 미국과 벌인 전쟁에서 수세로 몰린 이후에 발생했다.

관련 전투 및 문서[편집 | 원본 편집]

특징[편집 | 원본 편집]

바다의 전쟁[편집 | 원본 편집]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인 태평양을 무대로 펼쳐진 전쟁이다 보니 해전, 상륙전이 전쟁의 핵심이 되었고 지상전은 부수적 위치에 놓였다. 지상전은 몇몇 섬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치뤄졌고, 이 때문에 미일 양국에 의해 상륙작전과 이의 지원에 대한 전술적 연구와 발전이 계속 이루어졌다.

반대로 말하자면 지상전의 비중이 상당히 낮았다. 중일전쟁을 제외하면 지상에서 전선이 형성된 지역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버마-인도 전선이 지상에서 전선이 형성된 곳이었다. 1944년 5만을 투입한 동남아 지역 최대 공세인 임팔 작전의 대실패로 버마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유럽 전선에서 십만 이상씩 동원되던 것을 생각하면 지상전의 비중과 규모 모두 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편집 | 원본 편집]

우리는 대미 선전포고를 피할 수 없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 미국은 일본과 싸우기도 버거울 테니까 이제는 비행기다, 무기다, 수송편이다 해서 영국을 섣불리 지원하기 어려울 것이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41년 12월 10일 일기.[3]그리고 천조국은 영국, 소련에 미친듯이 무기와 물자를 퍼주기 시작했다.

개전 시기 기준으로 일본은 서태평양과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였고 세계 7대 열강의 하나였으며, 스스로 걷어차긴 했지만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잠재력을 가진 국가였고 그 잠재력을 전쟁 직후부터 미친 듯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국이 국가총력전으로 전환하면서 쏟아낸 병력과 물자는 일본으로선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총력전 체제의 돌입에 있어서도 미국과 일본의 접근방식은 달랐다. 일본은 병력 확보에만 매달리다보니 군수공장 등에서 일해야 할 숙련공들과 기술바들까지 징집한 반면, 미국은 월트 디즈니의 항의를 받고 만화가를 돌려보내줄 정도였다.[4] 미국은 효율적으로 국가총력전을 수행하며 인력을 활용했고, 일본은 그러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당시 새로 취역한 미-일 항공모함의 평형

단순한 산업능력의 차이에서도 양국의 차이는 10배 이상에 달했고, 석유, 철 등의 전략자원이나 식량같은 기본적 물자의 생산량에서도 일본은 미국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했다. 인구에 있어서도 일본은 식민지 조선, 대만, 만주의 인구를 다 합쳐야 미국과 비등했는데 당시 식민지의 경제 및 교육 수준을 생각하면 식민지인의 인력을 본국인과 동일하게 여길 수도 없었다. 그나마도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조적이나면 모를까 최대 식민지인 조선부터 일본의 전쟁수행에 비협조적이어서 조선 출신 병사들의 탈영이 속출했을 정도니... 거기다 일본 본국의 인적자원 역시 신체조건같은 기본적 요소부터 교육수준 등 모든 부분에서 미국에 열세였다. 당연히 소득 수준과 그에 비례하는 교육 수준의 차이가 넘사벽이니...

영향[편집 | 원본 편집]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끝이 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이 패권을 잡고 있던 20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달라지게 되었다.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의 산물이었던 식민지 조선 그리고 타이완은 독립하였고, 만주국은 해체되었다.

일본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동아시아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일본의 패배로 공백이 생긴 동아시아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식민지의 해체와 패전으로 인해 일본 밖에 나가 있던 재외 일본인들과 패전병들은 일본내 사회적 문제로 자리잡게 된다. 조선과 관련된 사항은 패전 후 일본인들의 귀국 과정를 참조 바란다.

태평양 전쟁은 비단 일본 뿐 아니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에게도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일본군의 징집, 징용및 전쟁 범죄로 인해 수많은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인들이 희생당해야 했다. 또한 이 시기 식민지에 대한 수탈의 강도도 거세졌다.

이런 일본의 행동들은 전쟁이 끝난 20년대 중, 후기는 물론이고 21세기인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중요한 국가간 갈등 요인 및 정치적인 요소로 강력하게 남아있는 문제이다.

태평양 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제대로 체험할 수 없었던 극한의 환경을 자랑하는 정글과 섬들 그리고 그들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일본군의 행동으로 인해 많은 문화적 충격을 받기도 한 시기였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 영화나 작품은 보통 서부전선과 다르게 전쟁의 영광과 영예를 소재로하기 보다는 베트남전과 함께 전쟁의 비참함, 극한 상황등의 메세지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일본에서 현재 공식 명칭도 태평양전쟁이지만 일본 내 우익~극우파들은 대동아전쟁(大東亜戦争)이라는 명칭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태평양 정부 당시 극우 군부 정권이였던 일본정부가 자의적으로 사용했던 명칭이라 패전 이후 GHQ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었음에도 2010년대 일본의 우경화로 인해 꼴통 우파민족주의 정치인들과 관련단체들이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밀어붙이고 있다.

각주

  1.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 네덜란드(Dutch)의 약자를 딴 것이다. 신나게 쳐맞고 있던 중국을 빼고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를 넣어 ABDA 포위망이라고도 한다.
  2. 자세히 적시하자면 청일전쟁 이후 얻은 모든 영토다. 대만, 조선, 쿠릴 열도, 남사할린(가라후토), 북마리아나 제도, 미트로네시아
  3. 이안 커쇼, 히틀러 2 몰락 1936~1945.(2009) 548p
  4. 개전 직후, 정부와 미군은 디즈니사에 전시 선전만화의 대규모 제작을 의뢰했는데 젊은 만화가들이 징병 대상이 되어 군대에 끌려가자 디즈니가 납기 내에 만화 못그린다고 항의했고, 이에 미군은 징집해간 만화가들을 파견 형식으로 돌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