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투

오키나와 전투
Battle of Okinawa
군사 충돌 정보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
날짜 1945년 4월 1일 ~ 6월 22일
위치 일본 열도 오키나와 제도 오키나와 섬 및 그 부속도서, 해역
결과 미국의 대승
일본 본토 진공을 위한 전진기지 마련
교전단체
일본제국 미국
우시지마 미츠루†
조 이사무†
사이먼 B.버크너 †
로이 가이거
병력:
140,000명
전함 야마토 외 함정 10여 척
항공기 수백기
강제동원 민간인 40만
병력:
183,000명
항모, 전함 등 함정 수백여 척
항공기 수천여기
손실:
사망 71,000명
부상 15,000명
포로 7,400명
손실:
사망 24,000명
부상 55,000명
민간피해
사망 6만명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이던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여 동안 오키나와 섬 및 그 인근지역에서 전개된 미일 양국의 최후의 대전투. 물론 실상은 일본의 마지막 발악을 미군이 엄청난 화력과 물량으로 철처지 부숴 버린 것이긴 했지만 본토까지 내몰린 일본의 저항도 격렬해서 미군도 고전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943년 이래 체스터 니미츠가 지휘권을 쥔 태평양 해역군과 해군,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가 지휘하는 남서태평양 해역군은 각각 별개의 진공루트를 가진 채 일본열도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이중 맥아더의 남서태평양 해역군은 뉴기니 이후로 필리핀 탈환에 최우선을 두어 1944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필리핀으로 진격, 45년 4월 무렵이면 필리핀 대부분의 지역을 수복한 상태였다. 반면, 태평양 해역군의 경우 본래 목적은 을 포함한 북마리아나 제도를 탈환한 다음 대만을 공격하고 이를 발판으로 중국 연안지역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문제는 1944년 중국 전선에서 일본 육군이 감행한 제1호 작전(대륙타퉁작전)으로 중국 전선의 형세가 급박하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미군 지휘부에서는 중국군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게 되었고, 무리하게 대만과 중국 연안으로 진격해도 헛될 뿐이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남서태평양 해역군의 전략목표가 상실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될 경우 태평양전의 주도권이 맥아더와 남서태평양 해역군, 그리고 육군에게 완전히 넘어간다는 위기감에 해군 수뇌부는 새로운 공격목표를 몰색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격목표는 너무 금방 선정되었다. 다가올 일본 본토 진공을 위한 전진기지이며 수복한 필리핀과 거리도 가까운 오키나와였다.

전투 준비[편집 | 원본 편집]

미국[편집 | 원본 편집]

남서태평양 해역군은 필리핀의 일본군 패잔병 소탕 및 뒤이은 오보에 작전(보르네오 섬 진공)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준비는 전적으로 태평양 해역군이 맡게 되었다.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대장이 지휘하는 제5함대(TF 50으로 편제)는 휘하에 고속항모부대(TF 58)을 두었는데 정규항모만 11척에 경항모 6척, 전함 7척과 순양함 18척의 전력을 지닌, 당시 잔존 일본 해군을 모두 다 합쳐도 이길 수 없는 초강력 함대였다. 여기에 윈스턴 처칠이 직접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졸라 태평양전에 참전시킨 영국 항모기동부대(TF 57)에도 항모 4척에 전함 2척, 순양함 5척과 구축함 14척을 동원한 상태였다.

지상군은 육군 제24군단, 해병대 제3수륙양용군단[1] 2개 군단이 준비되었는데 24군단은 7, 7,77, 96 4개 보병사단을 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충분한 중화기와 전차들을 갖춘 상태였다.[2]

아울러 일본 본토 공습을 담당하던 사이판의 제21폭격기사령부에도 동원명령이 내려져 오키나와 전투를 지원할 일본 본토의 후방세력을 타격, 제압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수백여 기의 B-29 폭격기들이 규슈 지방 방면 공습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일본[편집 | 원본 편집]

오키나와 방위는 육군 제32군 예하 3개 사단과 4개 혼성여단이 전담하고 있었으며 부족한 병력을 메꾸기 위해 해군의 기간요원들도 일반 보병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사실 일본도 필리핀 이후 미국의 목표가 오키나와가 되리라 예측하였으나,제해권과 제공권을 잃은 형편에 오키나와에 병력과 장비를 증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필리핀 증원을 위해 이동하다 항로가 차단되어 오키나와에 머물던 100mm 이상 중포들을 활용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에게 귀중한 이 중포들은 미군에게 사단 포병으로 굴러다니는 물건들이다.(...)

미국의 막강한 기갑부대에 맞서기 위해 2개 기갑연대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95식 경전차97식 전차 치하땅으로 M4 셔먼에 맞서야 했다.(...)

이처럼 병력의 수도 부족하고 화력도 열세에 빠지자 일본군은 주민들의 자원입대를 받아들여 수만 명 단위의 민병대를 조직했다. 물론 말로만 자원입대고 실제로는 그냥 보이는 성인 남자들은 다 끌고가서 강제로 무기를 쥐어주고 병사로 편제시켰다. 심지어 고등학생들까지 징집했고 여고생들은 강제로 동원해 전선 간호부대로 투입했다.

그 외에 해군은 규슈 일대에 해군항공대를 집중 배치하여, 그놈의 가미카제 공격으로 오키나와 방위를 지원할 계획을 갖추었다.

전투[편집 | 원본 편집]

미군의 상륙과 섬 북부 장악[편집 | 원본 편집]

3월 26일, 미 육군은 오키나와 본섬에서 서쪽으로 14km 정도 떨어진 게라마(慶良間) 제도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이 작은 섬을 중심으로 자살보트 공격을 하지 않을까 우려되어 행해진 후방소탕 작전이었다. 소규모의 전투 끝에 일본군은 몰살되고 게라마 제도의 민간인들은 대개 집단자결하며 사이판의 참극을 재현하고 오키나와의 비극을 예고했다.

4월 1일, 마침내 오키나와 본섬으로 미군 주력부대가 상륙을 개시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예상을 깨고 섬의 중서부에 상륙했는데, 일본군은 미군이 섬 남부로 침공할 것이라 예측했고 실제로 방어전 준비도 남부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중부 해안에 대한 방위가 매우 취약했다. 상륙 당일, 미군은 가데나 비행장을 점령하였고 4월 5일에는 섬을 남북으로 분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본군의 방위태세가 남부중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미군은 배후인 북부부터 빠르게 정리하기로 하고 공세에 돌입, 4월 18일 섬 북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보다 이틀 전인 4월 16일에는 섬 북서쪽의 작은 섬 이에를 공략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했다. 이에 섬 전투서부터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로 내모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일본은 민간인 포함 약 4천여 명의 사망자를 낸다.

오키나와 구원을 위한 최후의 특공[편집 | 원본 편집]

한편, 일본 해군은 오키나와 전투를 지원해야 한다는 명분과, 제국 해군이 이런 결전에서 아무것도 안 할 수 없다는 허울뿐인 자존심으로 전함 야마토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함대를 편도로 오키나와로 보냈다. 편도로 오키나와에 도착한 후 해안가에 좌초하여 고정포대로서 육군을 지원하라는 황당한 발상.(...) 그 결과야 뭐 당연히...

야마토는 미군 항공기들의 집중공격을 받아 굉침, 동행하던 경순양함 야하기도 역시 침몰, 동행하던 구축함 중 4척도 같이 침몰. 반면 미군의 피해는 대공포에 의해 격추된 항공기 10기와 전사자 10명.(...)

이로서 일본 해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리타이어하였고, 규슈 남부의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가미카제 공격에 치우쳤으나 미군의 요격과 B-29의 비행장 폭격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다만 그 와중에 미 해군 항공모함 USS 벙커힐을 대파시키긴 했지만, 항공모함 1척 대파하는 정도로는 압도적인 미국의 물량을 당할 수 없었다.

섬의 남쪽으로[편집 | 원본 편집]

일본군은 섬 남단을 방어하기 위해 가카즈를 중심으로 섬을 동서로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은 능선과 같은 자연지형과 함께, 민가와 창고 등으로 이뤄진 인공구조물이 더해졌고 일본군도 가용 병력을 총투입했기에 상당히 튼튼한 편이었다. 실제 이는 4월 19일부터 시작된 미군의 공세가 실패하는 이유가 되었다.

미군은 대대적인 포병지원 속에 공세를 개시했으나 기존의 능선에다가 동굴까지 조성한 일본군 주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30여 대에 달하는 강력한 전차부대를 투입했으나 일본군의 거센 화력으로 보병의 엄호가 없는 틈을 타 일본군 대전차자폭조가 대전차폭탄을 들고 전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터트리는 식으로 저항하면서 투입 전차 대부분을 잃는 쓰라린 패배를 당했다.

4월 19일의 공세실패로 미군은 당황했고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체스터 니미츠 원수가 당황해서 직접 현장격려 차원에서 오키나와를 방문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일본군도 미군의 공세를 막느냐 상당한 병력손실을 입어서 19일 전투에서의 병력손실은 일본군이 더 많았다.(...)다만 주요 지상전투에서 미군은 일본군과 병력교환비에서 대부분 1:3 이상(...)을 찍다 보니...

결국 패배의 교훈을 되새긴 미군이 그 다음날인 20일부터 훨씬 더 강화된 화력을 퍼붓고 보전합동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차근차근 공세를 강화하자 일본군은 방어선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특히 방어선을 담당한 62사단의 경우 이미 사단 괴멸에 가까운 상태에 놓여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갑론을박 끝에 주력부대를 방어선으로 증파, 62사단을 구원하고 미군을 저지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일본군은 약 10일여동안 미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으나, 여기에 너무 자신감을 얻은 나머지 미군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한다는 기본전술을 포기하고 5월 4일을 기해 총반격을 개시했다. 이 반격은 전선에서의 공세 외에도 과감하게 미군 상륙지로 역상륙작전을 펼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망했어요.

1,000명이 넘는 역상륙부대는 절반 이상이 해안에 상륙도 못하고 상륙주정에 갇힌 채 초계 중이던 미군 함정들에게 발각되어 죄다 격침(...)당했고 극히 일부만이 역상륙에 성공했으나 상륙지를 지키고 있던 미군에게 전멸당했다.[3]

주전선에서의 공세도 죄 실패로 돌아가, 일본군은 공세에 투입한 병력과 장비 대부분을 잃었다. 특히 방어전에선 대전차자폭조로 어떻게든 저지에 성공한 미군 전차들을, 공세전에서는 도저히 저지할 방법이 없었기에 전차에게 병력이 고스란히 녹아났고, 나름 전차를 상대하겠다고 같은 전차부대를 투입했으나 미군 전차들의 킬 마크만 늘려줬을 뿐이다.

결국 5월 4일 공세의 결과로 일본군은 전사자만 7천에 부상자 포함 약 2만(...)의 병력 손실과 그나마 있던 기갑, 포병전력을 모조리 잃었다.(...) 이후 일본군은 공격의 공자도 꺼내지 않고 오로지 방어에만 힘쓰게 된다. 반면, 미군은 그동안 전투를 담당하던 육군 24군단 외에 해병 제3상륙군단까지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군의 방어선은 보름여 동안 꾸준히 남쪽으로 내몰렸다. 미 육군과 해병대는 차근차근 일본군을 압박하며 5월 28일 오키나와 최대의 도시 나하를 함락했고, 29일에는 농성중이던 일본군을 격파하고 류큐 왕국 시절의 궁성 슈리성을 점령한다. 이에 일본군은 마지막 발악을 위해 잔존병력을 모두 섬 최남단 기얀 반도로 후퇴시켰고, 그 과정에서 다시 2만(...)의 병력 손실 및 미처 철수시키지 못한 1만여 병력을 방치하고 만다. 방치된 이들은 결국 옥쇄하거나 항복하게 된다.

기얀반도 전투[편집 | 원본 편집]

6월 4일 기얀반도 전투가 시작되기 전 일본군에게는 중장비가 전혀 없었고 병력도 3만에 불과했으며 그중 다수가 인간방패로 써먹기 위해 동원한 오키나와 현지인들이었다. 당연히 기얀반도의 일본군 주 저항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파되었고, M4 화염방사형 전차와 불도저를 앞세워 동굴진지를 무력화시키며 진격하는 미군은 일본군 중심지까지 진출했다.

이후로는 일본군이 좁아진 전선을 활용해 처절한 지연전을 펼치고 미군이 이를 뚫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전투가 끝나가던 6월 18일, 오키나와 전투를 총괄지휘하던 10군 사령관 사이먼 버크너 중장이 전선시찰 중 하필 얼마 안 남은 일본군 중화기인 47mm 대전차포의 포격을 받았다. 포탄은 미군 진지에 아무런 피해을 입히지 못하고 다 주변에 착탄(...)했지만 하필 착탄지 중에 바위가 있었고 쪼개진 바위파편이 버크너 중장의 가슴을 강타, 버크너 중장이 전사한다.

그러나 사령관이 전사하였음에도 미군은 일치단결하며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붙였고, 직후 바로 가이거 소장이 중장 진급과 함께 10군 사령관에 취임, 지휘계통에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버크너 중장이 전사한 6월 18일, 32군 사령관 우시지마 중장은 32군 해산 명령을 내리고 부대 전원에 알아서 포위망을 탈출한 후 개별적으로 게릴라전에 임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대다수의 일본군들은 포위망을 탈출하지 못한 채 사살되었고, 또 다수는 미군에 투항하였다. 21일 저녁 미군은 기얀반도 내 82고지의 사면까지 진출, 일본군 동굴이 육안으로 보이는 위치까지 나아갔다. 그 동굴은 바로 일본군 지휘부의 동굴이었다.

22일 새벽, 최후를 예감한 우시지마 중장은 할복하여 자살했고 같은 날 아침 소수의 참모와 병사들이 반자이 어택을 감행, 당연히 모두 사살되었다. 동굴에 남아 있던 병력 중 최고위 인물인 야히라 대좌는 접근하는 미군에게 항복 의사를 밝혔고, 이로서 오키나와 전투가 종결되었다.

각주

  1. 현재까지도 오키나와에 주둔중인 제3해병원정군(제3MEU)의 전신이다.
  2. 참고로 이때 24군단장은 하지 중장, 후일 한국의 군정을 관할한 그 사람이다.
  3. 적의 상륙지로 역상륙작전을 펼치는 것은 대전기 구 일본육군이 이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자주 사용한 전술이다. 기습적으로 한두 번이면 모를까, 수없이 반복하는 짓을 미군이 당할 리가 없다. 안그래도 제해권과 제공권이 없는 상황에서 역상륙이라니 얼마나 무모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