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대륙시기

中華民國大陸時期
Zhonghua Minguo Dai liu shi qi
중화민국대륙시기
국호 중화민국(中華民國)
국기 오색기(중화민국).png
오색기
(五色旗)
1912년 ~ 1928년
청천백일만지홍기
(青天白日滿地紅旗)
1928년 ~ 1949년[1]
국장 국장(중화민국).png
십이장국휘
1912 ~ 1928
대만 국장.png
청천백일
1912 ~ 1949
영토 중화민국 대륙시기 (1945년).png
1945년 최대 강역
존속 기간 1912년 1월 1일 ~ 1949년 12월 27일
성립 이전 청나라
천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대만정부)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정식 명칭 중화민국(中華民國), 약칭 중국(中國).

중화민국이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대륙에 그 통치권이 미치는 임시정부를 건국한 시기부터 1949년 장개석국공내전 중 마지막 국공내전인 충칭에서 모택동에게 패하고 대만으로 물러가 대륙의 통치권이 끊긴 시기까지를 말한다. 통칭 중화민국 대륙시기(中華民國大陸時期). 말 그대로 중화민국이 대륙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청 말기, 계속되는 부정부패, 외세의 침입과 그런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쓰러지는 청조는 청내 모든 백성들에게 황조의 인식을 추락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여러 봉기가 일어났고 성공하여 중화민국을 세운 봉기인 신해혁명도 그 중 하나였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의 주체인 호북신군(湖北新軍)은 무한(武漢, 우한)에서 최초로 봉기해 당일 바로 그곳을 점령하고 대륙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남경(南京)을 수도로 정했다. 한편 혁명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받은 원세개도 혁명군과 싸워 청을 지켜봤자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여 바로 혁명군의 주체 손문과 합의해 총통직을 위양받고 중화민국이 청나라를 계승하였음을 천명했다.

이로써 1913년 10월, 중화민국 정부는 북경(北京)[2]에서 정식 성립했고 북양군벌의 수장 원세개가 총통을 맡았기에 역사상 이 중화민국을 중화민국 북양정부라 부른다.

하지만 청나라 시기 부패한 나라사정은 별로 변한게 없었고, 모든 권력을 차지한 원세개는 더욱더 자신의 독재를 강화해 중화민국의 약법을 폐지한 뒤 중화제국을 선포하여 황제 등극에 이른다. 기껏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운 혁명군과 국민들은 당연히 반발할수밖에 없었고 혁명군은 원세개의 과욕에 맞써 다시 혁명을 일으켜 제정을 폐지했으나, 복고된 중화민국의 임시집정이 된 단기서의 강압적인 군벌폐지로 중국 대륙은 고대 춘추전국시대를 재현하듯 군벌들끼리 갈라져 오랜 내전을 진행하는 전국시대가 되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패권싸움에 밀려난 손문은 진형명의 도움으로 광동을 수복하여 그곳에서 국민당을 바탕으로 1949년 국부천대하여 대륙을 잃을때까지 대륙을 통치한 국민당의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선포했다. 이후 국공합작을 체결해 공산당과 힘을 합쳐 대륙 수복을 꾀했고, 손문은 군벌들을 굴복시키고 대륙을 통일하기 위한 북벌을 주장하다 곧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된 장개석은 손문의 의지를 이어 북벌을 감행해 차례로 고토를 수복해나갔으나 중간에 4.12 사건으로 공산당과의 갈등은 골로 깊어져 공산당과는 협력에서 적대관계로 나아갔고 이러한 갈등도 훗날 대륙을 두고 내전하는 국공내전의 시초가 되었다. 그 이후 장개석은 북쪽으로 나아가 마지막 군벌인 장작림봉천군벌에게 대승을 거둬 완전한 대륙 통일에 한발짝 나아갔고 장작림의 아들이자 2대 수장인 장학량이 항복하여 국민정부는 대륙을 다시 통일한다.

허나 이번에는 일본 제국이 대륙을 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만주국을 세워 자신들의 야욕을 현실에 옮기고 있었고 국내 목소리도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그만두고 항일할 것을 주장, 시안 사건을 계기로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금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하여 협력해 일본에 저항할 것을 선언했다. 1930년대 중화민국은 교통, 위생, 교육,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한 시기이기에 일명 황금의 10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1937년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을 함락하자 중국은 존립의 위기에 처했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의 개입이 확인되자 장개석이 선전포고해 중일전쟁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중화민국을 비롯한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여 만주, 내몽골, 대만을 반환받아 현대 중국 영토를 고정시켰고 1946년 공산당과의 화의 결렬로 다시 2차 국공내전에 돌입한다.

1947년 중화민국은 헌법을 공포하고 헌법에 맞는 정부로 개편했으며,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정치, 경제적 혁신을 통해 그 지위를 공고히 하려 했으나 인플레이션의 발생으로 실패했고 그 결과 중화민국의 존립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은 1948년 9월부터 1949년 6월까지 3번의 전투와 도강전투(渡江戰役)에서 승리해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을 점령했고, 최종적으론 국민당의 마지막 할거세력인 충징지역까지 점령하여 국민당 세력을 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대륙을 상실한 중화민국은 대북으로 정부를 이전하여 그곳에서 지금까지 통치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난세이기도 하다. 신해혁명, 호국전쟁, 북벌, 중원대전, 중일전쟁, 국공내전에 이르기까지 38년동안 진정한 평화는 없었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한 대규모 인명, 경제적 피해와 소련의 간섭으로 몽골을 빼앗기고 영국티베트를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데 개입했다. 또한 중일전쟁은 최종적으론 승리했으나 전쟁 도중엔 일본에게 영토의 반을 뺏기기까지 하는 참극을 당했다. 중화민국은 2차대전 연합국 중 하나였으며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돌아가자 승전국,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어 현대 중국의 국제적 지위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근대 국가였기에 중국 역사상 사상과 문화가 번성했던 시기로 그동안 발전한 문예, 정치 사상은 중국의 향후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서방으로부터 유입된 근대 물품들 역시 중국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영향을 끼쳤고 이 영향은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국호[편집 | 원본 편집]

孙中山肖像.jpg
손문(孫文)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中華民國)으로 한족의 중화(中華, 중국의 옛 이름중 하나)를 회복하고, 인민들의 나라라는 뜻에서 민국(民國)을 조합해 결정했다. 중화민국이란 국호는 미래의 민권주의, 공화제도를 실현할 중국을 생각하여 만들었다. 또한 1916년에 왜 중화공화국이 아닌 굳이 중화민국인지에 대해 말했다.

제군들은 중화민국의 뜻을 아는가? 왜 중화공화국이라 하지 않고 중화민국이라 하는지 아는가? 이 민(民) 자의 의미는 10여년 동안 연구하여 얻어낸 결과이다.

미국(美國) 공화국은 우리 중화민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20세기의 나라는, 창제(創製)의 정신을, 18,9 세기에 만들어 진 성법(成法)을 본받으며 발(足, 신체의 일부분)처럼 여길 것이다.

공화정체(共和政體)는 각 국가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 깃발 아래 예속된 자, 그리스와 같이 귀족, 노예의 계급이 있었으나 지금은 구별이 없다. 이것을 전제공화(專制共和)라 한다.

미국은 이미 14개의 성(省)을 갖고 있고, 직접 민권을 얻었으며, 스위스는 직접 민권 제도를 갖췄다. 비록 현대에 독단적으로 처리하기 쉬우니 대의 정치가 되었지만, 어찌 구태여 스스로 억압하여 남들보다 뒤에 쳐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앞으로 온 국민이 정신을 가다듬고 세계에 빛을 발해, 나아가 직접 민권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의정치의 그늘 아래 우리 국민이 누리는 것은 대의권의 일종이다. 직접 민권이라면 창체권, 폐지권, 퇴관권(退官權)이 있다. 그러나 이런 민권은 광막(廣漠)한 성(省)에 행하는 것은 해롭기에 현(縣) 단위로 지방 재정은 전적으로 지방에서 처리하며, 중앙의 정비(政費)를 분담한다.

나아가 각종 실업(實業)의 경우, 미국 트러스트의 폐해를 중점으로 하여 처벌한다.

몇 년만 지나면, 반드시 장엄하고 찬란했던 중화민국이 동대륙에서 발견되어 세계공화국 위에 설 것이다.
— 손문(孫文, 1866 ~ 1925)

손문은 1923년 10월 20일 광주(廣州) 전국청년연합회(全靑年聯合會) 연설에서 중화민국은 인민 위주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영문 공식 명칭은 'Republic of China' 인데, 이는 민(民)을 번역하지 않은 형태이다. 손문의 뜻에 따른 중화민국은 'People's Republic of China' (인민들의 중화 공화국)' 로 번역해야 한다.

이 문서의 '제목'인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중국어 위키백과의 中華民國大陸時期(중화민국대륙시기)에서 따온 제목이다. 당시 중화민국이 대륙을 유지하고 있을때 국호는 "중화민국" 그대로였으며 중국어 위키백과와 이 문서의 제목인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중화민국은 그 역사가 굴곡있고 많은 사건을 겪었기에 시기상 후대에 편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역사적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중화민국은 신해혁명이라는 무력투쟁을 통해 성립되었다. 신해혁명은 중국의 2천년동안 이어져 오던 제정을(帝政), 더 나아가 5천년동안 이어져 오던 군주제를 폐지시키고 현대 국민에게 권리가 있는 공화정을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기에 중화민국의 건국을 알려면 신해혁명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당시 청나라는 서방 세력이 일으킨 아편전쟁,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 운동으로 큰 피해를 겪고 서양으로부터 생산된 기술에 주목하여 이는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으로 청나라의 11대 황제 광서제 근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청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 당시 섭정인 서태후와 군권의 최고책임자인 원세개의 정변(무술정변)으로 이러한 근대화 운동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청조는 멸망할때까지 서방에게 시달리게 된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의화단(義和團)이란 종교 비스무리한 단체가 등장했고, 그 종교가 백련교[3]와 합쳐지면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청조 내에서도 서방세력의 유입으로 기독교가 퍼지자 유교적인 중국의 뿌리가 흔들릴것에 위기감을 느낀 중국인들이 많아졌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틈타 의화단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의화단은 서방 공사관, 서방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고 서방세력은 이러한 의화단의 만행과 청조가 의화단과 연합하여 이 운동을 조장하자 연합국을 구성해 청조와 전쟁을 벌였고 승리하여 신축조약을 맺고 청을 사실상 식민지화 시킨다.

중화민국의 건국[편집 | 원본 편집]

청나라가 무력하게 쓰러져가고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이 증오는 모두 청 황실에게 향했다. 이 시기 손문은 홍중회를 조직해 혁명세력의 기반을 만들었고, 이 혁명세력이 동맹회로 커지자 구체적인 공화정과 임시정부를 구상했으며 손문이 초대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한다는 계획을 완성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은 후, 혁명군은 무한에서 처음으로 봉기해 당일내로 그곳을 점령한 뒤 청조의 최고 군권 책임자 원세개와 협상하여 청이라는 봉건적인 체제를 형식적으로라도 무너뜨린 뒤 원세개한테 총통직을 양위해 중화민국을 견고히 한다.

혁명당이 굳이 원세개와 협상해 중화민국을 형성한 이유는 아무리 무너져가는 청이라도 오합지졸인 혁명군이 정규군을 이길 정도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무한은 청 황실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쉽게 점거가 가능했지만 청 조정과 가까운 곳일수록 혁명군이 패배했기에 혁명군은 최소한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청이라는 그 근본적인 존재부터 형식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군권 최고책임자인 원세개와 협상한 것이다.

원세개의 반동[편집 | 원본 편집]

원세개 초상.jpg
원세개

원세개는 손문을 비롯한 혁명당과 협상하여 청을 멸망시키는 대신 총통직을 위임받아 대륙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한다. 이렇게 원세개가 집권하여 형성된 중화민국 정권을 원세개의 군벌 소속이 북양군벌이기에 북양정부라 부른다.

일단 청이라는 근본적인 존재부터 무너뜨리고 출범한 공화국이었으나 원세개는 총통직을 양위받자마자 바로 자신의 독재를 강화하여 여러 정적들을 암살하고 매국 행위를 일삼아 열강들의 환심을 샀다. 이 결과 많은 국민들과 혁명당이 반발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공화국의 상징인 국회까지 해산하여 황제와 다름 없는 만행을 보이더니 기어이 1914년 12월 20일 국호를 중화제국(帝國), 연호를 홍헌(洪憲)이라 선언하면서 진짜 황제로 등극한다.

전국시대의 도래와 군벌의 병립[편집 | 원본 편집]

당연히 이런 반동행위에 민심과 혁명당은 반발했고 원세개의 매국 행위(21개조 요구)와 제국 선포가 중첩해 민심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당계요, 채악, 이열균을 비롯한 혁명군이 원세개에게 제제취소 공문을 보냈으나 답변이 없자 무력으로 공화정을 쟁취하겠다고 결심한 군벌 세력에 의해 호국전쟁이 일어났고 원세개의 직속 부하들마저 혁명당에 투항하자 원세개는 제제를 취소하고 총통으로 내려가겠다고 했으나 군벌들은 원세개의 완전한 해임을 요구했다. 결국 원세개는 권력을 상실했으며 그의 부총통이었던 여원홍이 중화민국 의 3대 총통이, 단기서가 임시집정이 되었다.

다시 공화정으로 복고된 중화민국이었으나 단기서와 여원홍 간 국회 해산에 관한 문제, 정권 문제[4]로 정쟁이 극화되다가 단기서가 여원홍에게 국회 해산을 건의한 계기로 여원홍은 그를 해임하기까지 한다. 분노한 단기서가 멸망한 청나라의 유신 장훈과 협력해 여원홍을 몰아내려 했으나 북경으로 입성하는 장훈은 여원홍을 공격하긴커녕 오히려 멸망한 청나라의 황제 선통제를 복위시키는 이른바 장훈복벽을 일으킨다. 반란으로 간주되었단 장훈복벽은 단 12일만에 진압되었고 모든 반대파들이 없어지자 단기서는 독재를 일삼았으며 남쪽에 세력권을 형성하던 군벌들에게 강압적인 통합명령을 내렸다. 결국 이에 반발한 군벌들과 단기서의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무력충돌하여 호법전쟁이 일어났고 정부에서 소외된 손문을 비롯한 구 혁명파들도 남군벌에게 협력하여 진정한 공화국 수립을 꾀한다.

호법전쟁은 대륙 통일을 목적으로 일어난 내분이었고, 손문에겐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중의 평화 요구로 정부를 개편하고 군 부대를 재편성하자는 남북간의 화의는 결렬되었고 손문은 일전 임시로 화의가 맺어질 때 군벌들에게 추방되어 일본을 전전하다 진형명의 도움으로 광동만을 수복해 그곳에 정착하는데 이것이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시초이다. 한편 손문은 광동에서 국민당을 선포하고 다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북벌론을 주장했으나 곧 죽었다. 화의의 결렬은 중국을 근 10년간 전국시대를 재현하듯이 대륙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당의 북벌과 전국통일[편집 | 원본 편집]

蔣中正肖像(上色).jpg
장개석

국민당을 선언한 손문의 뒤를 이은 그의 부하 장개석이었다. 장개석은 스승 손문이 주장하던 북벌론을 받아들여 일전에 그 북벌론을 비웃고 반대하던 진형명을 영풍함 사건을 계기로 축출한 후 국민당 내에서 모든 반대파(공산당, 왕정위)와 정적들을 몰아내고 국민당의 1인자가 되었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광동에서 출발해 바로 6성을 점령하고 1927년 3월 공산당이 남경을 점령하자 열강의 도움을 받아 공산당원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한 후 남경을 수복해 그곳에서 독자적인 남경정부를 세웠다.

남경정부를 세운 장개석의 국민당과 기존 우한의 국민당 정부가 공존했기에 자칫하면 또다른 내전에 처할수도 있었지만 곧 영한합작이란 회의를 통해 두 국민당은 하나가 되었고 장개석은 하야했지만 곧 복귀했다. 이후 장개석은 마지막 군벌인 봉천군벌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1928년 12월 29일 봉천군벌의 2대 수장인 장학량의 항복을 받아 대륙을 다시 통일했다.

일본의 침략[편집 | 원본 편집]

하지만 또다른 외세가 대륙을 노리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일본 제국이었다. 일본은 국민정부가 대륙을 통일하기 전 장학량의 아버지이자 봉천 1대수장 장작림을 거슬려했고 그가 패퇴하자 그가 타고있던 열차를 폭파시켜 그를 죽인 전례가 있었다. 장학량도 일본의 압박을 못 견디고 국민당에 항복한 것이기도 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대륙침략 야욕을 이전부터 꿈꾸고 있었고, 중화민국 대륙시기엔 만주사변을 일으켜 장학량의 만주를 빼앗고 그곳에 만주국을 세웠다. 서안 사건을 계기로 2차 국공합작을 맺은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초기엔 만주를 빼앗고 소극적인 침략만 했으나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그것을 구실삼아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한다.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통일의 불완전성과 잦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력을 이끌고 대항하려 했으나 내전의 후유증, 미발달된 농업국가의 한계로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화북 전역과 수도 남경까지 빼앗기는 참패를 당한다. 곧 국토의 절반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고 임시 수도인 중경까지 폭격을 맞아 중화민국 존립 여부가 갈리는 위기에 처했지만 미국이 개입하여 중일전쟁은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 연합국의 압박에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일본의 중국 침략은 종결되었고 국민당은 연합국으로부터 상임이사국, 승전국 지위를 얻었다.

국공내전 패배, 국부천대[편집 | 원본 편집]

중화민국정부천대.png
대륙을 유지하던 중화민국의 정부 이전 과정
남경 -> 광주 -> 중경 -> 성도 -> 서창 -> 최종적으론 대북에 정착한다.

중일전쟁이 끝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을 중지하는 화의를 진행했지만 국민당은 미국의 압박으로 인해 화의를 파기하여 두 진영은 다시 내전을 재개하게 된다.

초기에는 국민당이 미국의 지원, 승전국 지위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곧 내전은 종식될 것으로 보였으나 무리한 점령지 확산과 모택동의 게릴라전에 취약했던 국민당은 곧 속수무책으로 영토를 뺏기기 시작한다. 또한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이전 전쟁의 후유증, 경제 개혁의 실패로 민심이 추락했지만 공산당은 이 점을 극복하여 민심을 포섭한것이 중화민국의 승리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 되었으며 미국의 지원을 받는것이 무색하게 수도 남경, 요충지 상하이를 공산당에게 빼앗긴다.

모택동은 1949년 10월 1일 북경까지 세력권을 넓힌 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차례로 광주, 중경을 함락해 국민당을 대륙에서 축출해가기 시작했다. 대륙에서 저항하기 힘들어짐을 느낀 장개석은 작은 섬 타이베이로 탈출해 그곳에서 대륙 수복을 노렸으나 국민당군의 사실상 마지막 항전지인 성도까지 1949년 12월 27일 함락당하자 대륙을 완전히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빼앗기고 만다.

중화민국의 대륙 통치기는 1949년 성도를 빼앗김을 기점으로 종료되었다. 중화민국 명맥 자체는 대만 땅으로 이전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49년 이후의 중화민국은 대만 참조바람.

정치[편집 | 원본 편집]

중앙정부[편집 | 원본 편집]

중화민국 정부는 1911년 무창(武昌, 우한의 일부)에 건국된 중화민국 임시정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남경(南京)임시정부, 북경임시정부, 북양정부, 국민정부로 여러 정권 교체를 거쳤다.

무창봉기[5] 바로 다음날, 중화민국군정부 악군도독부(鄂軍都督府)[6]를 설립했고 여원홍이 도둑을 맡아 손문이 편성한 '혁명방략(方略)'에 따라 청나라의 선통 연호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 나라 이름을 중화민국으로 정하기로 했다. 이는 중화민국 역사상 첫 군정기로, 중화민국이 정식 출범하기 전까지 사실상 중화민국을 구성했다.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공식 수립되었고 중화민국 임시 약법이 공식 시행된 후에 남경 임시정부는 북경 임시정부로 이어지며 1913년 10월 10일 중화민국 북경정부(북양정부)[7]가 수립되었다.

군벌이 주축이었던 북양정부는 1912년부터 1928년까지 존속했다. 이 존속기간에도 집권자는 자주 바뀌었는데 목록은 다음과 같다.

구 혁명군의 주체 손문은 추방된 후 1921년 4월 2일 광주 군정부의 대총통이 된 뒤,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새 국기로 제정하여 북양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혁명당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호법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와해당하고(영풍함 사건) 1923년 3월 2일 다시 돌아와 육해군대원수대본영(陸海軍大元帥大本營)을 비롯한 군정을 새로 구성했다. 손문이 사망한 후엔 장개석이 광동정부를 계승하여 북벌을 진행해 본격적인 통일사업에 착수한다.

장개석 시기엔 짧은 기간동안 국민정부는 1927년 남경정부, 무한정부로 분열되기도 했으나 영한합작으로 하나가 되었다. 북벌 성공 후 남경정부는 북양정부를 통합하여 중화민국의 중앙정부이자 최고행정기관이 되었다. 1948년 5월 20일 국민정부는 중화민국 정부로 개편되었으며 주석이란 국가원수의 호칭도 총통으로 격상되어 대만으로 축소된 지금까지 이어진다.

중화민국 초기 국가 원수의 호칭 변화는 초기엔 대총통, 장개석의 북벌 이후엔 주석, 1947년 헌법 제정 후엔 총통 순으로 바꼈다. 손문은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대총통, 원세개는 초대 공식 총통, 초대 주석은 왕정위[8], 헌정 이후 초대 중화민국 총통은 장개석이다.

정부 수반 총잭임자 직함은 북양정부 시절엔 국무총리, 국민정부 시기엔 행정원장, 중일전쟁 당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최고 권력기관이었으며 위원장은 장개석[9]이었다.

지방[편집 | 원본 편집]

중앙정부가 통치하는 대륙 외에 중화민국 국경내엔 많은 지방할거세력이 존재했다. 그 중에는 독립을 선언한 외몽고, 티베트 그리고 공산당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10], 일본 제국의 꼭두각시 정권(왕정위 정권)이 있었다.

복드 칸국(외몽고)[편집 | 원본 편집]

1911년 12월 29일 잡중담바 호특트는 대륙의 중앙통치권이 약해진 틈을타 복드 칸국을 선포하고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천명했다. 1915년 6월 9일 중-러-몽 협략의 체결로 독립을 취소, 중화민국에 병합되어 자치가 실시되었으나 1921년 러시아 백군이 몽골에 주둔하던 중국군을 몰아내면서 정권을 자연스레 회복했고 1924년 복드 칸(잡중담바 호특트) 사망 후 동년 11월 26일 헌법을 개정해 입헌군주제 대몽고국을 몽골 공화국으로 개편하였다. 중화민국은 1946년 1월 5일 몽골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투바 인민 공화국[편집 | 원본 편집]

투바 지역은 1757년 캬흐타 조약[11]으로 청나라에 복속된 지역이었는데, 신해혁명으로 청이 붕괴하자 투바는 독립을 선언했으나 3년 후 러시아 제국한테 병합당했다. 그러나 그 러시아도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해 다시 국민당군이 점령하여 중화민국에 합병되었다. 이후 투바 지역엔 1920년 러시아 내전적군백군이 투바를 놓고 싸우다 적군이 최종적으로 점령, 적군과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 하의 독립 선언으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티베트[편집 | 원본 편집]

1911년 무창 봉기 당시 성(省) 단위로 청에 편입된 민족들은 청이 붕괴하자 각각 독립을 선언했고 티베트도 그러한 성 중 하나여다. 1912년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 13세가 티베트의 라싸로 돌아와 구 청군을 몰아내 독립에 성공했나 곧 1913년 10월 티베트, 영국, 중화민국 북양정부와 조약 중 영국은 티베트를 분할해 중국의 영향력 하에 속하게 했고 영국은 티베트에 공사관을 설치해 티벳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명목상으론 티베트는 중화민국의 영토였으나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고 1932년 사천성의 군벌 유문휘(劉文輝)의 세력과 티베트 간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화민국은 이후에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기 전까지 티베트를 속국으로 취급했으며 영국 역시 티베트를 괴뢰국으로 대우했다.

동투르키스탄(위구르)[편집 | 원본 편집]

위구르족 역시 1933년 11월 12일 신장성 카슈가르에서 동투르키스탄(위구르) 제1공화국을 선포해 독립을 시도했으나 1934년 2월 6일 회족군벌 마중영(馬仲英)에 의해 1년만에 붕괴되었다. 1944년 8월 신장성 북부의 이리(伊犁), 탑성(塔城), 아산(阿山) 세 개의 지역에서 혁명(삼구혁명)이 일어났고 중화민국군을 몰아낸 알리한 투라소련의 지지를 받아 제2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중화민국 내부에서 혼란이 진정되자 장개석장치중을 파견해 동화정책을 시도했고 설상가상으로 독립의 주축이자 당시 지도자였던 에흐메탄 콰짐이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자 급속도로 독립운동은 와해되었다. 독립운동이 와해당했을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 중이었고 승리하여 새로 대륙을 접수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위구르와 합병조약을 체결해 정식으로 위구르를 합병하였다.

중국공산당혁명근거지[편집 | 원본 편집]

1927년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국민당이 대대적인 공산당 탄압에 들어가자 공산당은 정강산혁명근거지, 중앙혁명근거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화소비에트공화국서북연방을 수립해 국민당을 상대로 투쟁을 계속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망명은 최종적으론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대장정으로 이어진다.

  • 중화공화국

복건사변 당시 장개석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군벌들이 선포한 공화국이나 1년만에 반란이 진압당해 소멸되었다.

일제의 괴뢰 정권[편집 | 원본 편집]

  • 만주국 - 만주사변으로 장학량을 몰아내고 만주를 점령한 일본이 멸망한 청나라의 황제 선통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운 괴뢰 정권이다.
  • 중화민국 임시정부 (괴뢰 정권) -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중국 본토와 만주국 사이 완충 지대를 두기 위해 중국의 친일 관료들을 중심으로 수립한 괴뢰 정권이다. 왕정위 정권에 통합됨.
  • 중화민국 유신정부 - 일제가 난징대학살을 일으키고 그곳을 통치하기 위해 수립한 괴뢰 정권. 왕정위정권에 통합됨.
  • 왕정위 정권 - 위의 두 정권을 흡수해 만들어진 일제의 괴뢰 정권으로 왕정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부라 왕정위정권이라 부른다. 장개석과 달리 왕정위는 일본에 긍정적이었고 그에 따라 협조를 받아 별도의 국민정부를 수립했으나 곧 일본이 패배하자 붕괴,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통합되었다.

법률[편집 | 원본 편집]

중화민국 헌법은 손문의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 중시), 오권헌법(권력분립)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삼민주의의 삼민은 민족, 민권, 민생을 나타내며 각 민족과 타국간 사이좋게 지내는 민족주의, 국민으로부터 권력이 나와 국민이 정부를 다스리는 민권주의, 또한 정부는 인민을 위해 헌신하고 경제, 사회를 번영시켜 민족의 삶을 향상시키는 민생주의를 구축해야 하므로 중화민국 헌법은 중화민국을 민족이 가지고, 민족이 통치하며, 민족 중심의 공화국이라고 명시하였다.

5권헌법 중 오권(다섯 개의 권한)은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고시권[12], 감찰권을 말하며 이는 삼권분립에서 더 나아간 일명 오권 분립에 해당한다. 중앙정부는 이 5가지의 권한에 따라 오원정부(五院政府)를 구성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한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헌법에 관해 이전부터 헌법 초안이 발제되었고, 1928년 동북역치로 중국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한 후 중앙상무위원회에서 훈정이 통과되었으며 이후 1936년 헌법 초안을 마련해 대만으로 이동한 지금까지 쓰이는 헌법을 마련하였다. 헌법은 1946년 정식으로 선포했다.

사법부는 각 성 단위에 고등재판청을 설립했으며 지역 행정구를 개편했다. 상부(商埠)에는 지방재판소를, 현 단위엔 초급재판소를 설치했다. 이후 추가로 공포하여 3심제를 제정했고 각 성의 고등재판청은 고등법원으로 바뀌었으며 지방재판소 역시 지방법원으로 개칭되었다. 각급 검찰청은 검찰로 바뀌어 청장직을 폐지하고 수석 검사를 따로 두었다. 검찰은 각 성의 일부로, 사법부와 지방정부 하에 속했다.

1932년 법원 설립을 중앙에 중앙법원을, 성(省)에는 고등법원, 현에는 지방법원을 설치하는 식으로 개편했다.

정당[편집 | 원본 편집]

  • 중국국민당 - 국민당 1당 독재 체제로 국공내전 이후 대만으로 물러가 대륙 통치권을 상실했다.
  • 중국공산당 - 1949년 국공내전으로 국민당 축출.
  • 중국청년당
  • 중국민주사회당
  • 중국치공당

강역[편집 | 원본 편집]

중화민국 대륙시기 지방별 분류.png
중화민국 대륙시기 강역

1912년 중화민국 임시약법엔 중화민국의 영토를 22성, 내외부 몽골(투바), 티베트, 청해(靑海)까지로 명시했으며 1931년 중화민국 훈정시기 약법 1조엔 각 성 및 몽골, 티베트를 포함한다고 명시하였다. 이후 상단의 사건을 거친 결과 투바와 외몽골은 상실하였다.

중화민국 대륙시기의 육지는 연면적 11,418,194㎢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이기도 하다. 중화민국 대륙시기가 통치했던 광대한 영토를 통칭 '중국 대륙'이라 칭하며 이 중국 대륙은 1949년 국공내전에 패배해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전부 빼앗기고 대만 땅으로 축소당했다.

다음은 중화민국 대륙시기에 제정된 행정구이다.

  • 북양정부
    • 성(22): 직례(直隸), 봉천, 길림, 흑룡강, 산동, 하남, 하북, 산남, 강소, 안휘, 강서, 복건, 절강, 호북, 호남, 섬서, 감숙, 신강, 사천, 광동, 광서, 운남, 귀주
    • 상부(2)
    • 특구/지방 (각 4개)
    • 지구(地區, 3개)
  • 국민정부
    • 성(28): +영하, 청해, 수원, 차하르, 열하, 대만 추가
    • 직할시(6): 남경, 상해, 북평, 청도, 천진, 한구
    • 행정구/지방 각 2개

외교[편집 | 원본 편집]

북양정부[편집 | 원본 편집]

선후대차관 사건 당시 5개국을 비롯한 열강에 차관(돈)을 빌리기도 했다. 중국은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국을 선포했으며 1917년 3월 14일 독일과 단교, 동년 8월 14일 독일에 대해 공식 선전포고했다. 1919년 9월 15일 중국은 독일과의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선언했으나 파리 강화 회의에선 그 국익을 보호할 수 없었다. 중화민국은 독일이 빼앗아간 산동반도를 내놓을 것을 주장하지 못했고 산동 반도가 일본에게 넘어가는 상황을 막지 못하자 중화민국 북경에선 5.4 운동이 일어나 그에 대한 반대집회를 연다. 중화민국은 조약 항의의 표시로 조인을 거부했다.

국민정부/대륙시기[편집 | 원본 편집]

일본과는 이전 제남을 두고 충돌한 적이 있으며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과 화의를 맺은 적이 있다. 소련과는 1929년 7월 장학량이 소련이 장악한 중동로를 수복하기 위해 소련 직원들을 추방하자 소련은 남경정부와 단교를 선포했으며 만주 장학량의 봉천군벌과 소련 간의 봉소전쟁이 발발했다. 결과는 봉천군벌의 패배로 끝났고 의정서를 체결해 소련은 중동철도의 모든 권익을 회복했다.

이후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일본에게 빼앗긴 국민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미온적인 반응만이 나왔고 일본에게 항의해도 일본은 그를 무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이 발발하자 일본은 그를 구실삼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일본이 태평양까지 전선을 확장하자 중국도 정식으로 선전포고해 연합국에 가입하여 카이로 회담을 통해 여러 땅의 반환과 한국의 독립에 대해 다른 나라와 논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돌아가자 중화민국도 그 공을 인정받아 상임이사국에 가입되었다.

1945년 외몽골 독립 국민투표 결과 97%이 독립에 찬성하자 1946년 1월 5일 중화민국은 몽골의 독립을 승인했다.

군사[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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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군

경제[편집 | 원본 편집]

경제발전[편집 | 원본 편집]

중화민국이 탄생하면서 성냥 공장 등을 설립하였는데 이 성냥 공장의 주요 인력과 기계, 기술의 출처는 일본이었다. 중국 내부에선 유홍생(劉鴻生)이 세운 쑤저우 성냥공장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홍생의 성냥공장이 서방에서 생산된 성냥에 대항하기 어려워지자 다른 민족 기업 둘과 합작해 상하이에서 대규모의 성냥주식회사를 세우기도 했다.

이 중화 성냥공사(公司)는 연간 15만 상자의 성냥을 생산해 당시 최대 규모의 민족성냥업체가 되었다. 성냥을 생산하는것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홍보해 모든 이들의 눈길을 끌었으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공장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 1921년 방액선(方液仙)이 중국 최초로 화공공장을 설립하여 치약, 모기향, 세탁용 비누를 생산해 외국산 수입품에 맞서 민족성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고 방액선은 국화대왕(國貨大王)이라는 별칭으로 찬사되기까지 했다.

북양정부(원세개) 시기엔 1915년 독일, 덴마크 등 서방 국가에서 기술자를 초빙해 군수공장을 운영했고 1921년 봉천군벌 장작림이 봉천군기공장(奉天軍器工場)을 설립하기도 했다. 베이징의 스징산구엔 제철소를 지으려 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중단되었다가 중일전쟁 당시 그 일대를 점령한 일본에 의해 일본군의 철강기지로 쓰이기도 했다. 이 제철소는 1919년부터 1949년까지 30년간 28만의 철을 생산했다.

1931년~1936년 5년 사이 중국의 공업성장률은 평균 9.3%에 달했고 사회, 경제가 발전해나갔으며 민국 건국 이래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이 시기 전력산업은 연평균 9.4% 증가, 탄광업은 7%, 시멘트업은 9.6%, 철강산업은 40% 증가했다. 이 밖에도 농업은 농촌 자치, 협동, 서민 교육을 3대 목표로 삼아 농경을 운영했고 시장 통합을 위해 현대적 경제제도를 도입했다.

금융체제[편집 | 원본 편집]

1914년 2월 7일 국폐조례(國幣條例)를 반포하여 청조때부터 이어지던 통화의 혼선을 없애고 화폐 통일, 은본위를 채택(정확히는 유지), 은화를 국화로 정하였다. 이후 지폐공장을 설립해 1935년부터 500년동안 이어지던 은본위 화폐제를 폐지하고 법화를 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개혁은 1927년 국민정부가 남경으로 수도를 정하면서 공채의 발행 중심지가 남쪽으로 이동하자 북쪽의 증권거래소가 운영하는 공채는 이전의 유리함을 잃으면서 경영 상황이 나빠져 문을 닫기까지 했으며 국민정부가 프랑스 화폐를 대량 발행해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자 새로운 화폐로 대체했으나 이것도 성과를 거두지 못해 경제적 손실이 커져갔다.

이 외에 공식 통화 외에도 중국 대륙에선 각 지방마다 자기들끼리의 화폐가 통용되기도 하엿다.

사회 인프라[편집 | 원본 편집]

중화민국이 건국된 1912년 당시 손문은 교통에도 중요함을 느껴 약 10만 마일의 철도를 완성하기 위해 청사진(青寫眞)을 기획했다. 이 사업은 북양정부 시기 노정사(路政司)를 세워 구체화시켰으며 사퇴한 손문은 상해에서 중국철도총회사를 설립하고 전국철도건설을 감독했다.

국민정부의 철도는 국영위주로 되어있으며 일부 노선은 민영화 개방, 철도부가 전국 철도 업무를 관장했다. 1932년 중국 최초 철도법을 공포했으며 중일전쟁 당시 아직 통치권이 미치는 땅엔 철도를 건설해 보급을 원할히 했고 1945년 승리 당시 대륙의 철도는 점령지역을 포함해 약 30,190km였다. 또한 전화 사업도 활발해 1933년 14,800km에 불과했던 전화회선이 1936년엔 48,000km까지 대폭 올랐다. 도로의 경우 1936년 당시엔 약 108,117km까지 확장되었다.

사회[편집 | 원본 편집]

민족 구성[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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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기(五色旗)

중화민국 성립 전 혁명 세력의 수장 손문은 한족들이 혐오하던 만주족도 포섭하여 삼민주의에 따라 한족, 만주족, 몽고족, 위구르족, 장족 총 5개의 민족들을 중화민국으로 귀속시킬 것을 천명하였다. 이는 중화민국 초기 깃발인 오색기에서 잘 나타나며, 위 5개의 민족들이 중화민국을 이룬다는 뜻에서 각 민족을 상징하는 색깔들로 깃발을 만든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삼민주의에 입각하여 오족공화(화합하며 지냄), 민족 화합이라는 구조로 선전했으며 깃발 중 빨간색은 한족, 만주족은 황색, 몽골족은 파랑색, 위구르족은 백색, 장족(티베트족)은 흑색으로 나타내었다.

교육[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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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배(蔡元培)

1912년 남경임시정부 수립후 교육총장으로 부임한 채원배는 학교계통령, 소학교령, 중학교령, 전문학교령, 대학령, 사범교육령, 실업학교령 등의 법령을 잇달아 공포했고 북양정부 시기엔 하나의 완전학제 시스템으로 통합되었다. 1922년 11월 북양정부는 임술학제(壬戌學制)를 반포하여 현대 중국의 교육체계를 확립했으며 일본을 모방해 전문학교를 세웠다.

국민정부 시기엔 미국의 제도가 주류가 되었으나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서구화 학교에 불학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서양 교회 학교 등을 중국 교육부에 등록해야 했으며 종교수업, 종교신앙 및 예배를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이외에도 소수민족, 지방 등에도 모두 국립종합대를 두었다.

만주사변 당시 일본에게 점령당한 동북지역은 일본 교사에 의해 수업이 진행되었으며 강압적인 천황 예배도 시작되었다. 또한 일본식 과목을 이수하게 했다.

문자의 경우 서양의 형성문자->의음(소리 및 뜻) -> 병음 순의 문자 진화이론이 당시 서양학계를 지배했고, 중국 내부에서도 일부 지식인이 한자를 폐지하자고 주장했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무산되었고 1918년 중화민국 교육부는 알파벳과 성조를 기호로 표기하는 방법을 도입했으며 1935년 1차 간체자표를 주장했으나 간소화에 따른 비판으로 인해 상용화되지 못했다.

문화[편집 | 원본 편집]

사상[편집 | 원본 편집]

민국 초에 일어난 혁명은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 중국 천하질서관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문화적 가치를 부인하며 서구문화와 민주공화제를 인정하고 유럽 중심주의로 향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 전통문화는 서학에게 유례없는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신문학 운동 하에 진독수를 비롯한 급진파는 민주, 과학을 중시, 전통문화를 비판하며 마르크스 주의를 전파했으며 호적(胡適)으로 대표되는 온건파는 마르크스 주의를 반대하고 백화문운동(白話文運動, 우리말을 보존하자)을 주장해 현실성을 중시했다. 이 밖에 같은 시기 공교운동, 신유학 등의 사상도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악습인 전족 구시대적인 예절, 독경교육을 중단시켰다.

문학[편집 | 원본 편집]

이 시기 백화문 제창에 반대하는 개혁운동과 신문학운동이 활발해졌으며 특히 신문학은 봉건적인 문학을 비판했고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상징인 새 문화를 창시하였다. 그들은 문학 단체를 조직하고 그곳에서 걸출한 문학가들을 배출했다. 자세한건 상세 항목 참조. 호적의 경우 이러한 문학혁명의 선구자라 할 정도로 근대 문학에선 그 중요성이 크다.

예술[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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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륙을 상징하던 여가수
치파오 차림의 백홍(白虹), 요리(姚莉), 주선(周璇), 이향란(李香蘭), 백광(白光)

이 시기 고전적인 동양풍 그림에서 서비홍(徐悲鸿) 서양식 화법을 들여와 서양식 기법을 융합시켰고 제백석은 전통 수묵화와 민간 회화를 융합시켰다. 또한 1920년대와 1940년대에 총 18편의 중국산 영화가 세계로 진출하였으며 그 중 1934년 채초생(蔡楚生)이 만든 영화 어광곡(渔光曲)은 국제 영화제에서 입상하는 기염을 토했다.[13]

중국의 전통 희극은 모두 창(唱) 중심이라 오페라에 가까웠으며 20세기 초에 연극이 등장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중국사상 최초의 공화국으로 여겨지지만 그 이전에 대만민주국이란 약 6개월 존속한 공화국 정부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건 중화민국이 최초이기에 중화민국을 보통 첫 공화국으로 여긴다.

중화민국 대륙시기엔 괴뢰정부를 제외하고 총 6개의 정부가 존재했다. 1기는 임시정부 (중화민국), 2기는 북양정부, 손문이 광동을 수복하여 세운 광동군정부, 장개석이 남경을 점령하고 따로 정부를 선언하여 두 개로 잠시 나눠진 남경정부와 무한정부, 그리고 두 국민정부를 통합한 뒤 봉천군벌과 동북역치를 이루어 대륙을 1949년까지 통치한 중화민국 대륙시기(3기)로 나뉜다.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장개석이 여러 군벌들의 법적상 상사로 있었기에 지도를 그릴땐 대륙 전체를 중화민국 대륙시기의 영토로 표기하나 실제 장개석 정권은 화북 아래 일대만 통치했고 만주 등 다른 지역은 군벌들이 통치했다. 이러한 외형상 통일은 군벌들을 단순히 중립화한것에 불과하다고 비판되기도 한다.

연표[편집 | 원본 편집]

  • 1911년 손문이 조직한 혁명당이 무창에서 봉기를 일으킴, 당일날 바로 무창 점령.
  • 1912년 2월 혁명군의 승세에 청조의 일부 성(省)들이 독립 선포. 동년 임시정부의 구상과 손문의 대총통 취임, 청나라 황제 푸이원세개의 압박에 퇴위하여 청조가 멸망함. 중화민국 건국 선포.
  • 동년 3월 10일 원세개 대총통에 취임. 손문을 축출하는 등 독재를 강화해감.
  • 1915년 원세개가 홍헌제제를 반포. 황제에 즉위함. 그러나 군벌과 민심이 반발하여 호국전쟁이 일어나 원세개 축출을 두고 내전이 벌어짐
  • 1916년 호국군의 승리로 원세개가 공식 퇴임함. 동년 원세개 사망, 여원홍이 2대 대총통, 단기서가 임시집정으로 취임.
  • 1917년 여원홍과 그의 임시집정(부하) 단기서의 정쟁 심화로 단기서가 그를 치기 위해 장훈을 베이징으로 출병시켰으나 도리어 장훈은 폐제 푸이를 복위시켜 청을 일시적으로 부활시킴 (장훈복벽). 그러나 12일만에 복벽은 진압당함.
  • 동년 9월경, 단기서의 복벽 제거 및 강화된 권력을 기반으로 남방 군벌들에게 강압적인 통일공고를 내림. 군벌들이 반발해 또 다시 내전이 발발함 (호법전쟁). 이후 여러 군벌들 사이 중앙장악을 두고 잦은 내전이 벌어짐
  • 1920년 축출당한 손문은 진형명의 도움으로 광동을 수복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중화민국(광동정부)를 선포함.
  • 1922년 영풍함 사건 발발, 진형명이 손문을 광동에서 축출.
  • 1923년 손문을 비롯한 국민당이 광동 재수복, 손문이 대원수 취임(광동 군정).
  • 1925년 손문 사망. 곧 국민당 내에서 중산함 사건 발발, 장개석이 이 사건을 진압하고 반대파를 몰아내 국민당 1인자로 등극.
  • 1926년 장개석 정권. 북벌 개시. 6성 점령 및 오패부와 손전방을 제압함.
  • 1927년 공산군 남경 점령, 열강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이 남경을 폭격해 공산당을 축출하고 남경을 빼앗음. 동시에 장개석은 남경정부를 수립해 기존의 국민당과 분열되었으나 합작으로 다시 통합. 장개석은 분열의 책임을 물고 사퇴했으나 다시 복위함.
  • 1928년 국민정부가 봉천군벌 베이징에서 대승을 거둠, 동년 장학량이 국민당에게 투항하여 봉천군벌 편입, 대륙 통일 완수.(동북역치)
  • 1929년 편견회의 실패로 군벌 이종인, 풍운산 등이 반란을 일으킴 (반장전쟁)
  • 동년 7월경 만주의 봉천군벌이 소련간 중동로 회수를 두고 봉천군벌과 소련간 전쟁이 벌어짐.
  • 1930년 염석산이 반장에 합류, 대규모 내전인 중원대전의 발발. 봉천의 장학량이 장개석에게 합류해 장개석을 승리로 이끎.
  • 1931년 일본 제국만주를 침략함 (만주사변). 봉천의 장학량은 만주를 빼앗기고 그 영향력이 대폭 줄어듬.
  • 1932년 5차 초공작전 개시, 공산당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음. 공산당의 대장정 개시 및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멸망. 국민당의 공산당 궤멸작전 가속화.
  • 1936년 장개석 시안 방문. 항일이 아닌 공산당 토벌에만 앞장서는 장개석의 입장에 반발한 장학량이 장개석을 배반해 시안 사건을 일으킴. 동시에 공산당의 명맥 부지와 제2차 국공합작이 체결됨
  • 1937년 노구교 사건 발발. 단순한 해프닝이었으나 일본의 억지 주장으로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 개시(중일전쟁).
  • 동년 12월 17일 일본에게 난징을 빼앗김. 난징대학살 발발.
  • 1941년 충칭 빼앗김. 충칭 대공습 발발.
  • 동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 습격. 이 기점으로 중일전쟁이 세계 대전으로 확대됨.
  • 1945년 열강과 중화민국의 방어선에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 점령지 수복.
  • 1946년 공산당과 국민당의 이해관계의 어긋남으로 국공내전 발발.
  • 1947년 대륙내 공산당의 세력이 확대되자 위협을 느낀 장개석이 대만으로 정부 이전을 시도함.
  • 동년 2월 28일 대만, 2.28 사건이 시작됨. 국민당이 수일간 조직적으로 본성인 학살.
  • 1948년 공산당 광주 점령, 임시수도인 중경마저 차례대로 공산당에게 함락당함.
  • 1949년 10월 1일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한 공산당의 1인자 모택동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함.
  • 동년 12월 27일 최후의 항전지 성도 함락. 국민당의 대륙 통치권 상실, 대만으로 정부 공식 이동.

참고[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대륙에선 1949년까지 쓰였고, 대만으로 축소된 이후에도 청천백일만지홍기, 청천백일을 공식 국기, 국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2. 남경에서 출발했는데 북경에서 성립한 이유는 원세개가 처음 청나라의 명을 받을 당시, 혁명군을 진압한다는 명분 하에 북경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3.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까지 존재했던 민간 불교 종교.
  4. 이 시기 단기서의 권한은 여원홍을 능가했고 여원홍에게 간섭하며 그를 괴뢰로 만드려 했다.
  5. 신해혁명의 첫 봉기. 당일 바로 무창 점령
  6. 악군=후베이군
  7. 군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화민국 정부.
  8. 광주국민정부
  9. 중화민국(당시 연합국 중 하나) 지휘관
  10.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선. 중공 정식 성립 이전 공산당의 국가. 대장정으로 1934년 사실상 궤멸.
  11. 청나라와 러시아 간 투바 지역을 두고 누가 접수할지 조약을 정함.
  12. 考試權. 시험에 관한 권리
  13. 국제적 당선의 최초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