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작전

1941년 말~42년 중엽에 걸친 일본군동남아시아 점령전.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전반적인 배경은 진주만 공습의 원인과 일맥상통한다. 중일전쟁으로 인한 계속되는 중국 침략으로 물자난은 가중되었는데 ABCD 포위망으로 전쟁에 필수적인 전략자원인 석유 수급이 어려워진 일본으로서는 석유, 고무와 같은 핵심 전략자원 확보를 위해 서구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를 기필코 획득해야 했다. 사실 진주만 공습은 남방작전을 위한 과정에 불과했지 목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목적인 남방작전보다 과정인 진주만 공습이 더 중요시된 이유는 일본의 동남아 점령을 막을 유일한 군사적 위협이 미 태평양함대뿐이었다는 데 기인했다. 1941년 동남아의 유럽세력은 실로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인도차이나 반도프랑스 식민정부는 프랑스 침공으로 본국 정부가 독일에 항복한 뒤,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진주를 막을 수가 없었고 비시 프랑스는 결국 이를 허용할 수밖에 없어 인도차이나 전역이 명목만 프랑스령인 사실상의 일본령이 되어버렸다. 네덜란드는 본토가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고, 버마말레이시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힘겹게 본토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 세력과 싸우는 중이었다. 미국의 필리핀 주둔군이 가장 큰 난관이었으나 태평양함대만 격파한다면 제해권 없는 미군이 필리핀을 방어해내긴 어려웠다. 동티모르포르투갈 세력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약소했다.

어쨌든 일본으로서는 어떻게든 동남아시아 전역을 확보해서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시키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일본은 유럽전쟁에 휩쓸린 열강국가들이 프랑스처럼 식민지를 포기할 것이라 기대했고,[1] 아울러 동남아시아를 모조리 장악하면 고립된 중국이 희망을 잃고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대본영은 진주만 공습이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서태평양과 동남아시아를 모조리 석권하는 치밀한 전략계획과 타임 테이블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문제점[편집 | 원본 편집]

일본군[편집 | 원본 편집]

사실 남방작전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진주만 공습이 성공해야 한다는 가장 큰 전제가 무너지면 모든 작전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일본으로선 다행히도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여 첫 고비는 넘겼지만 이제부턴 그보다 더 큰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장, 일본이 점령해야 할 지역이 너무 많았다. 영국의 최전선기지인 홍콩, 영국 동양함대의 기지인 싱가포르, 미국의 서태평양 주요 기지들인 필리핀, , 웨이크섬, 동남아 최대 석유산지인 보르네오, 여기에 주요 항로를 장악하려면 자바섬과 수마트라섬, 그리고 테르나테섬 등등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석권해야 했다. 동남아 유일의 독립국인 태국이 어느 쪽에 붙을지도 초기에는 미지수였으며, 이후 태국이 일본의 동맹국으로 참가하긴 했지만 태국과 인도차이나를 방위하기 위해 버마까지 장악해야 했다.

안 그래도 이미 중국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전쟁중이었던 일본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년, 짧게 잡으면 반년 정도만에 이 광대한 지역을 모조리 점령한다는 건 아무리 연합군이 약체화되어 있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홍콩의 영국군만 2만,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만 10만, 필리핀에도 약 15만에서 20만이라는 병력이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제외하더라도 전함 2척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 동양함대가 있었다.

즉, 일본군은 최대한 신속하게 각지에 분산된 연합군을 각개격파하면서 주요 전략거점들을 하나하나 빠르게 점령해나가야 했다.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일본군 내 소수의 상식인들은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연합군이 다 바보인줄 아나?"와 같은 말을 내뱉으며 일본의 미래를 염려했다.

연합군[편집 | 원본 편집]

사실 연합군도 제대로 된 준비가 전혀 없었다. 대대적인 침공은 명백했으나 그것이 언제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나마 홍콩이나 필리핀이 최우선 공격목표일거라고 생각했고 이들 지역에서의 방위전이 준비되었을 뿐이었다.

일단, 연합군은 총병력 자체는 많았으나 넓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산개된 총병력은 의미가 없었다. 넓디 넓은 동남아시아는 공격하는 일본군보다도 연합군에게 더 큰 장애였다. 거기다 대부분이 섬으로 이루어진 동남아시아 지리 상황에서 병력의 재배치도 어려웠고, 그나마 육지로 이어진 지역들도 정글덕분에 도로나 철도의 부설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병력 재배치가 어렵긴 매한 가지였다.

이런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해권과 제공권이었다. 그런데 미국 태평양함대는 진주만에 있었을뿐더러, 그마저 개전 당일 날아가 버렸다. 네덜란드의 함대는 애당초 보잘 것 없었다. 남은 건 영국 동양함대였는데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비록 최신예 전함이긴 해도 그게 끝이었다. 동행한 리펄스는 1차대전형 구식 순양전함이었고, 이들을 뒷받침해줄 다른 주력함이나 지원함 세력이 크게 부족했다. 이 시기 영국 해군 주력함대는 다 지중해와 북해에서 독일-이탈리아와 대치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본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털러 갔다 하더라도 나머지 전력만으로도 이정도는 문제도 안 되었다.

제공권으로 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영국군의 가용 전투기 대부분은 본토와 북아프리카에 있었고, 동남아에 있는 건 미군이 공여한 구식 F2A 버팔로뿐이었으며 수량도 충분치 못했다. 더군다나 항공모함이 1척도 없어 모든 항공지원은 지상기지의 지원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전역[편집 | 원본 편집]

서태평양 도서[편집 | 원본 편집]

개전 초 일본군은 자국령이었던 북마리아나 제도, 위임통치지역이었던 남양 군도의 팔라우를 중심으로 주변의 미국령 도서들을 빠르게 제압해나가기 시작했다. 필리핀을 제외하면 최서단의 미국령이었던 섬에는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일본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괌 섬에는 미 해병대 1개 대대와 아주 약간의 소형함정만이 있었는데, 일본군은 4척의 중순양함을 끌고 와서 함포를 퍼붓고 지상군을 상륙, 큰 저항 없이 이틀만에 수비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반면, 동시에 공격을 가한 웨이크 섬에서는 미 해병대의 거센 저항을 받아 1차 공격대는 말 그대로 참패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후퇴했다. 이후 진주만 공습 갔다오는 연합함대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12월 23일에야 간신히 점령했고 그 와중에도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웨이크 섬 전투) 이 전투는 일본이 남방작전 과정에서 치른 가장 격렬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홍콩[편집 | 원본 편집]

개전이 되기 전에 이미 홍콩은 일본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중일전쟁의 와중에 이미 광동성 해안지방을 점령했고, 1940년에 주룽반도와 접한 중국 영토를 모조리 접수하여 영국군과 대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마저 일본군에 넘어가고, 동양함대도 개전 전에 이미 싱가포르로 기지를 옮긴 상태였지만 영국으로선 중국 진출의 요지인 홍콩을 순순히 포기할 수 없었다. 영국군은 주룽반도 북단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13,000여 명의 홍콩 수비대를 편성하였다. 일본군도 홍콩과 인접한 이후로 언제든지 홍콩을 공략할 수 있도록 23군을 편성하고,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성부대로 제1포병사령부를 신설하여 언제든지 홍콩을 공격할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12월 8일, 일본기에 의해 카이탁 비행장이 폭격받는 것을 신호로 본격적인 홍콩 공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새화된 주룽반도 방어선 돌파는 시일을 들여 차근차근 하기로 했었는데, 어느 한 연대에 의해 스케쥴이 크게 앞당겨져 버렸다. 공격을 맡은 38사단에서도 후미를 맡은 228연대가 전공에 눈이 멀어 공격을 감행, 원래 다른 연대가 맡기로 한 영국군 방어고지 하나를 와카바야시 도이치라는 장교가 이끄는 1개 중대의 돌격으로 공격 당일에 함락시켜 버렸다. 노발대발한 사단장이 당장 후퇴하라고 지시했으나 연대장은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명령을 무시, 추가 공격을 가해 다른 고지까지 함락시켰다.

이를 본 다른 연대들도 자극받아 계획보다 앞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시작했고, 격노한 사단 사령부와는 별개로 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전면공세를 하자고 결론, 포병을 동반하여 방어선을 공략하여 개전 3일만인 11일에 방어선은 완전 붕괴되어 영국군은 홍콩 섬으로 후퇴했고, 13일에는 주룽 반도가 완전히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일본군은 주룽반도만 점령하면 홍콩 공략이 끝이라고 생각했으나, 홍콩 총독과 수비대 사령관은 홍콩 섬에서 끝까지 싸워보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주룽 반도에서 홍콩으로 이어지는 급수를 끊고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영국 총독은 항복을 거부, 일본군은 전혀 준비하지도 않은 도해작전을 계획해야 했다. 홍콩에는 최소 반 년치의 식량과 탄약, 유류가 준비되어 있어서 상륙만 막아낸다면 어떻게든 방어가 가능하다고 수비대는 생각했다. 거기에 수비대 사령관은, 광동성 전역에서 반격을 진행 중이며 길어야 몇 달 이내로 홍콩 주변의 일본군을 뒤치기할 수 있다는 국민당군 사령관의 말을 믿고 있었다.

결국 12월 18~19일 이틀에 걸쳐 일본군은 결사적으로 도해를 개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내 상륙에 성공했다. 그러나 상륙 이후 거의 진격을 하지 못했고, 간신히 니콜슨 산을 점령하는 선에서 진격이 멈췄고 전선은 교착에 빠졌다. 그러나 니콜슨 산에는 홍콩 섬 유일의 급수장이 있었고, 일본군은 이를 발견하고 급수를 끊어 홍콩은 바로 식수난에 빠졌다.

뒤이어 일본군은 맹공격으로 22일 시내의 홍콩 호텔이 점령되면서 홍콩의 영국군은 동서로 양분되었다. 잔존 영국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악착같이 공격해오며 거점 하나하나를 빼앗기는 데다 식수난까지 겹쳐 더 이상의 저항이 어려워지자 결국 25일 일본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필리핀[편집 | 원본 편집]

역시 개전과 동시에 필리핀도 공격을 받았다. 사실 필리핀의 미 극동군 항공세력은 개전이 되면 즉시 대만의 일본군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선제 공격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채 공격에 나서기도 전에 일본군의 맹공을 받고 핵심 항공전력 상당수를 상실해야 했다. 항공기 자체 숫자도 적었을뿐더러, 일본군의 제로센하야부사를 상대하기에는 P-40 워호크는 역부족이었고, 무엇보다 파일럿의 기량면에서도 아직 미군은 일본군보다 많이 부족했다.

압도적인 항공전력으로 미군 항공세력을 괴멸시킨 일본군은 바로 필리핀의 핵심이라 할 만한 루손 섬 상륙을 개시했다. 대만에서 출병한 일본 제14군은 루손섬 북부 아파리 등지로 상륙했고, 12일에는 팔라우에서 출발한 16사단이 방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루손섬 남부 레가스피에 상륙, 북상하기 시작했다. 상륙 단 5일만인 13일에 일본군은 이미 클라크필드까지 진격했고,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방어 및 지연전으로 전환하여 본국으로부터의 증원을 기다리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이에 미군은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오픈시티, 즉 무저항도시로 선포한 뒤 포기하고 전 병력을 바탄 반도로 후퇴시켜 최후의 방어전을 개시했다.

42년 1월 7일부터 시작된 바탄 전투에서 미군은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공격에 소극적이고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유럽식 사고에 물들어 공격이 크게 지연되었다는 이유로 14군 사령관 혼마 중장이 해임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관동군으로부터 병력과 화기를 증원받은 뒤 대대적인 해상/항공지원까지 받아가며 4월 3일 최후공세를 개시했다. 안그래도 좁은 바탄반도에 10만에 달하는 병력이 몰려 있던 미군은 보급문제로 허덕이고 있었고 화력과 병력의 열세 속에 4월 9일 일본군에 항복했다. 맥아더는 바탄 전투 와중에 루즈벨트의 철수 명령을 받고 호주로 탈출했다.

그러나 웨인라이트 중장이 지휘하는 마지막 수비대가 마닐라 만을 감제하는 코레히도르 요새에 은거하여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일본군의 거센 공격 끝에 5월 7일 웨인라이트 중장이 항복함으로서 필리핀 전역은 종결되었다.

태국-말레이[편집 | 원본 편집]

역시 개전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침공했다. 그러나 태국은 이미 개전 전부터 일본으로부터 인도차이나 일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참전을 약속받은 상태였고, 국경수비대와 일본군의 산발적 교전 이후 양측간 교전행위는 종식되고, 일본군의 태국 영토 진주 및 통행권, 군사기지 이용의 권리가 주어졌다.

12월 10일, 영국 동양함대가 말레이 해전으로 전멸당하는 것으로 일본군의 제해권이 확립되었고, 일본군은 육군을 말레이 반도 동해안 곳곳으로 상륙시키며 영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주력부대는 태국 국경에서부터 남하하여 서해안 도로를 따라 남하, 12월 30일에 콸라룸푸르를 점령하고 1월 하순경에 싱가포르를 포위하는데 성공, 끝내 야마시타 토모유키가 영국군 사령관 퍼시벌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동인도제도[편집 | 원본 편집]

서쪽의 수마트라 섬에서 시작해 동쪽의 뉴기니 섬으로 끝나는 남방작전 최대의 하이라이트지만, 워낙 수비하는 네덜란드군의 병력이 적어(…) 큰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일본군에 의한 일방적인 공격과 점령의 연속이었다.

동인도제도 최초의 공격은 12월 15일, 브루나이 상륙으로 시작되었다. 영국령이었던 사와라크(북보르네오)에 가해진 일본군의 상륙은 당연히 유전지대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의 방어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어 북보르네오의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목표를 점령했다. 24일에는 쿠칭이 함락되었고, 1월 11일에는 네덜란드령 남보르네오의 타라칸에도 일본군이 상륙했다. 이후 24일에 발릭파판이, 2월 10일에 반자르마신이 함락되면서 보르네오 섬은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 와중에 발릭파판 앞에서 미군 구축함전대가 일본 수송함대를 기습하는데 성공, 수송함 3척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하여 개전 후 첫 승전으로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다.(마카사르 해전) 그러나 미국에겐 안타깝게도 이때 격침당한 수송선들은 빈 배였다.

보르네오 섬 동쪽의 셀레베스 섬에도 공격이 이루어졌는데, 섬 북단 메나도에 가해진 공격은 상륙전이 아닌 일본군 해군육전대 요코스카 지대의 공수부대에 의한 공중강습으로 태평양 전역 최초의 공수작전이었다. 1월 11일, 해군육전대 공수부대에 의해 메나도 비행장에 일본군 공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네덜란드군 수비대는 거세게 저항했으나 공수부대에 의한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덕분에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다음날 2차 공수작전, 그리고 첫 공수작전과 동시에 개시된 상륙작전 등으로 일본군의 증원이 연거푸 오자 결국 패퇴, 항복하고 말았다.

메나도를 무사히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발판으로 2월에 티모르 섬과 발리 섬을 공격했다. 티모르 섬에서는 다시 공수부대가 투입되었고, 이 와중에 일본은 중립국이었던 포르투갈령 동티모르를 무단으로 침공, 영토사용권을 강제로 얻어냈다. 티모르 침공에 대한 연합국의 공격을 우려한 대본영은 2월 28일, 호주 북단의 포트 다윈을 연합함대를 동원해 폭격하여 남부의 위협을 제거했다.

한편, 말레이 해전 승리로 제해권을 쥔 일본군은 수마트라 섬 최대의 유전지대인 팔렘방을 공격했다. 2월 14일, 일본 육군 공수부대인 제1정진단이 우선 투입되어 비행장과 유전 지대를 공격했다. 이를 막는 방어군은 3,000여 명인데 그중 절반이 현지인 부대로 제대로 된 전력이라 하기에 어려웠고, 나머지 병력 중 1천여 명은 급파된 호주군 병력이라 현지 지리를 잘 몰랐다. 결국 일본군은 이틀에 걸친 공수작전으로 비행장을 뒤이은 육군 상륙부대의 지원으로 유전과 정유시설까지 확보, 동남아 최대의 유전 및 정유시설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남은 것은 자바 섬뿐이었다. 자바 섬 상륙을 막기 위해 ABDA 연합함대가 출격, 2월 27일 일본군 수송선단을 포착하여 공격했으나 일본군 함대가 우루루 몰려오면서 오히려 역관광, 압도적인 전력차 속에서 분전했으나 미국 중순양함 휴스턴, 네덜란드 경순양함 데 로이테르와 구축함 3척이 격침당했고 데 로이테르에 승선하고 있던 연합함대 사령관 카렐 도르만이 전사했다.(제1차 자바 해전) 뒤이어 2월 28일에서 3월 1일에 걸쳐 후퇴하려던 연합군 함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중순과 경순, 구축함 1척씩을 또 잃었다.(순다 해협 해전) 3월 1일 오후, 살아남은 잔존함정에 대한 공격까지 이루어져 영국군 중순양함 엑스터가 격침되었다.(제2차 자바 해전) 이를 모두 합쳐서 자바 해전이라고 통칭한다.

이렇게 연합군 함대가 완전히 괴멸되는 틈을 타 일본군은 2월 27일과 28일에 걸쳐 자바 섬의 동서 양쪽에 상륙했다. 동쪽에 48사단, 서쪽에 2사단, 그리고 각 사단을 지원하는 지원부대까지 대대적으로 상륙시킨 일본군은 말레이에서 그랬든 자전거부대와 97식 전차를 투입해 신속하게 진격했다. 사실상 저항능력과 의지를 상실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지상에서의 저항조차 제대로 못했고 3월 8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일본군의 공격은 뉴기니 접수로 이어졌고, 뉴기니 침공은 1942년 이후 남태평양 전역의 원인이 된다.

버마[편집 | 원본 편집]

태국이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맺게 되면서 버마 식민지도 일본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문제는 10만에 달하는 영국군 병력이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포로로 잡히고 해상세력도 괴멸되어 버마 식민지를 방위할 제대로 된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1942년 1월경부터 개시된 일본군의 공격은 국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핵심적인 지역인 남부의 랭군과 페마가 함락된 이후로는 일본군의 일방적 추격과 영국군의 후퇴만이 있을 뿐이었다. 영국군은 크게 둘로 나뉘어 인도와 중국으로 후퇴하여 부대를 재편하고 방어전으로 일관했으나 일본군은 공세능력의 부족으로 공격을 멈추고 전선을 유지했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1942년 5월이 되면 일본은 동남아시아 전역을 완전히 지배하는 데 성공한다. 태국은 일본의 군사동맹에 가담했고 나머지 유럽 열강의 식민지들은 일본의 손에 떨어졌으며, 호주와 인도양에서의 위협도 연합함대의 공격으로 제거되었다. 불과 반년 만에, 그 넓디 넓은 동남아시아 전역을 큰 피해 없이 완전히 제패한 것이다. 아무리 연합군의 사정이 열악하다 하더라도 남방작전 기간 내내 일본군이 보여준 모습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급하게 먹은 음식은 체하는 법이라고, 일본은 넓디 넓은 점령지를 억지로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할애해야 했으며 열악한 보급역량 상당수도 동남아시아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일본군 특유의 점령지 수탈 및 억압정책 + 자원수탈로 인해, 유럽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준 현지인들이 일본을 적대시하고 과거의 지배자들과 협력하여 반일투쟁을 벌이게 되어 투입병력은 더 늘어만 갔다.

그래도 일본은 남방작전을 통해 고대하던 석유, 고무 등의 전략자원 수급이 가능해지고 일시적이긴 하지만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1942년 5월은 일본 제국의 최대전성기였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아무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희망하는 협상대신 전쟁 지속을 결의했고, 일본은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주요 인물[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그런데 사실 비시프랑스조차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상황이 안 좋으니 일본군의 진주를 허용했을 뿐이지 전쟁이 끝나면 독일을 등에 업고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을 도로 몰아내겠다는 것이 비시 정부의 복안이었다. 실제로 비시프랑스가 임명한 인도차이나 총독은 비시프랑스가 망한 1945년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본이 정식으로 비시프랑스 총독을 몰아내고 인도차이나를 병합한 건 1945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