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개요[편집 | 원본 편집]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 낸 사건.

준비 과정[편집 | 원본 편집]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승기를 잡았지만 일본 측은 미국의 요구를 묵살했다. 미군은 일본 열도에 직접 상륙하는 몰락 작전을 계획했지만 피해가 극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연합군의 마지막 항복 권유를 일본 측이 묵살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투하 대상 지역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히로시마, 고쿠라(현 기타큐슈), 요코하마, 니가타, 교토를 목표로 정했다. 그러나 교토에서 신혼여행의 추억이 있던 헨리 스팀슨 장관의 반대로 교토에서 나가사키로 대체되었고, 최종적으로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로 정해졌다.

히로시마[편집 | 원본 편집]

폴 티비츠 부대장의 독단으로 자기 어머니 이름을 딴 '에놀라 게이' B-29기가 리틀 보이를 싣고 히로시마로 향했다. 폭격 피해가 없던 히로시마 시민들은 에놀라 게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대피하지 않았다.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기존 조준점인 아이오이 다리와 약 240m 떨어진 시마 외과병원 상공에서, 리틀 보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폭발했다. 원자폭탄 투하 직후 승무원들은 맛을 느꼈다고 한다.

히로시마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당시 출근 시간이라 피해가 컸고 화재는 히로시마의 11km2를 불태웠다. 몇 시간 뒤 방사능에 오염된 검은 비가 내리자 사람들이 받아 마셨다.

일본 군부에서는 원자폭탄이 아닌 큰 재래식 폭탄으로 이해했다.

나가사키[편집 | 원본 편집]

복스카 B-29기는 팻 맨을 싣고 고쿠라(현 기타큐슈)로 향했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아 투하할 수 없어 나가사키로 기수를 돌렸다.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팻 맨의 위력은 리틀 보이보다 컸지만, 히로시마보다 적은 피해를 주었다. 평야지대인 히로시마와 달리 나가사키는 산지 지형이였고, 기존 조준점에서 4km 이상이나 빗나갔다.

이후 소련에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미국은 추가 원자폭탄 투하를 잠시 중단했다.

이후[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냈다.

미군 장병들과 그외 점령지 주민들은 원자폭탄 투하 소식에 환호했다. 원자폭탄을 투하한 조종사 상당수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정당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등 일본에서는 이 일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원폭 투하를 자신들의 피해자 행세에 이용하며 진주만 공습을 묻어가는 짓을 벌이고 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인명피해가 더 컸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들 중 많은 한국인들이 피폭 당했다. 하시마섬에 있던 한국인들도 나가사키에서 잔해 처리 작업을 하다 피폭 당했다고 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