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본토 공습

태평양 전쟁 중 일본 본토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에 관한 항목.

44년 이전[편집 | 원본 편집]

역사적인 첫 일본 본토 공습은 1942년 4월 18일 둘리틀 특공대에 의해 감행되었다. 다만 둘리틀 공습은 해당 항목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타격을 주기보다는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보복 차원으로 무리하게 감행된, 정치적이고 선전 목적의 작전이었다.

둘리틀 공습으로 도쿄, 오사카 등 주요 대도시에 폭탄 몇 발을 투하하긴 했지만 당연히 실질적인 피해는 주지 못하였다. 다만, 기습 직후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낮아진 미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고 일본에게는 신국불멸의 허상을 깨트리며 위협을 주었다.

1943년 중반, 알류산 열도의 애투 섬, 키스가 섬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쿠릴 열도 북단의 몇몇 섬들에 B-24 폭격기와 일부 항모 함재기를 동원해 공습을 가해 군사시설을 파괴했다. 일단은 이 작전도 일본 본토 공습의 범주에 포함되는데, 일본 본토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지만 어쨌든 쿠릴 열도는 일본제국령 남사할린인 가라후토청 관할인데 가라후토가 1943년 4월 1일부로 내지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1943년까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공격을 가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그나마 일본과 가까운 미국 영토 중 웨이크섬, , 필리핀은 모조리 1941년~1942년 초기에 걸친 남방작전의 여파로 상실된 상태였다. 기지를 제공할 수 있는 동맹국 중 중국은 일본과 가까운 해안지방을 모조리 상실한 상태였고, 소련은 대독전에서의 동맹국일 뿐이지 대일전에서는 아직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1944년 들어 급변한다. 마침내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못하던 초장거리 전략폭격기 B-29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944년[편집 | 원본 편집]

인도-중국 작전[편집 | 원본 편집]

문제는 B-29가 실전배치되었음에도 이를 일본 본토 폭격에 투입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아무리 B-29가 항속거리가 긴다 한들, 근본적으로는 대전형 폭격기로, 대륙간 폭격은 꿈도 못꿨다. 즉, 미국으로서는 B-29를 발진시키기 위한 전지기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1944년 6~7월에 걸쳐 예정된 북마리아나 제도 공략을 끝낸 후 이곳을 B-29의 기지로 삼고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플랜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미 초도양산된 B-29들이 놀고만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높으신 분들은 B-29를 일본 본토 공격이 아니더라도 다른 용도로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제20폭격사령부 산하 4개 비행단이 1944년 봄부터 인도에 전개, 당시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태국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 태국은 버마 주둔 일본군으로 향하는 모든 보급선이 이어지는 요충지였던 데다가, 때마침 임팔 작전이 시작되어 일본군이 대규모 공격을 단행했기에 영국군을 지원하는 측면에서 방콕에 공습을 가하였다.

한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하루속히 일본 본토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길 원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B-29를 중국 내륙에서 출격시킨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육군항공대 주류는 이와 같은 구상에 가능은 하지만 효율이 낮을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대통령이 강행하면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장개석 역시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서 무언가 기여를 해야 했던 상황이었기에 흔쾌히 이 제안을 수락하였고, 1944년 6월까지 히말라야 산맥을 횡단하는 수고 끝에 인도에 있던 B-29 비행단 4개가 모두 중국 내륙으로 옮기게 된다.

마침내 1944년 6월 15일, B-29에 의한 최초의 일본 본토 공습이 시작되었다. 58폭격비행단 소속 B-29 75기가 투입되어 큐슈의 야와타 제철소를 폭격한 것을 시작으로 1944년 말엽에 이르기까지 규슈 일대에 대한 폭격에 나섰다.

그러나 배치된 폭격기의 수량이 적었고, 주 기지인 청두에서 목표인 일본 열도까지 항속거리가 아슬아슬하여 큐슈정도만이 겨우 폭격권에 들어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 고고도 정밀목격에 중점을 두다보니 생각만큼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배치된 B-29기들은 초도양산분으로서 아직까지 기체 곳곳에서 여러 가지 잔고장이 많이 발생하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같은 해 대륙타통작전으로 일본군이 한때나마 중국 내륙 깊숙히까지 진격, B-29 비행장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결국 1945년 1월 6일 마지막 출격을 끝으로 마테호른 작전은 중지, 중국에 전개된 기체들은 모두 마리아나 제도로 이동 배치된다.

한편, 당시 중국 공산당을 이끌던 마오쩌둥은 전후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서 공산당 세력하의 중국 북부에 B-29 기지를 유치하고 이를 토대로 만주의 일본 주요 산업시설을 폭격하자는 제의를 했으나 미국은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데 집중하고 있던 상태였고 또 이 제의가 들어온 시점에 이미 마리아나 제도 탈환이 완료되었기에 마오쩌둥의 제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리아나 제도 작전[편집 | 원본 편집]

사이판 전투를 통헤 일본제국 본토 폭격을 위한 전진기지가 확보되자 미국은 즉시 공장에서 막 뽑아낸 B-29들을 사이판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전투가 채 종료되기도 전에 미군은 공병대를 투입하여 B-29용 비행장과 정비소를 건설하고 있었고, 이렇게 건설된 활주로로 B-29들이 하나둘씩 착륙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사이판은 어디까지나 Main Base 역할이었지, 로타나 티니언, 괌 등 탈환된 다른 섬에도 B-29를 위한 예비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나중에는 사이판 섬 비행장에 착륙하려 보니 이륙하는 폭격기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섬의 비행장에 착륙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정도.

일본 폭격을 맡은 제21폭격기사령부는 10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에 돌입했다. 먼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전, 개구리 작전으로 건너뛴 중부 태평양의 일본군 점령하 섬들을 대상으로 연습에 가까운 폭격을 시작했고, 11월 1일에는 B-29 편대가 도쿄 상공에 출현, 주요 타겟들의 항공사진을 촬영한 뒤 돌아갔다.

사이판에서 발진한 B-29의 첫 일본 폭격은 11월 24일에 시작되었다. 도쿄 외곽 무사시노 항공기 공장을 주요 타겟으로 한 폭격은, 중국에서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성공적이라 할 수 없었는데 예상치 못한 제트기류의 방해와 함께 정밀폭격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목표에의 명중률이 지극히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11기의 B-29가 투입된 이 공습에서 손실은 단 1기에 그칠 정도로 일본군의 방공망은 B-29를 격추시킬 수단이 없었고 이후 B-29는 일본 본토 상공을 제집 드나들듯 하기 시작한다.

이후로도 21폭격기사령부는 줄기차게 무사시노 공장 및 나카지마 항공기엔진 공장 등 주요 타겟을 폭격하는 한편 나고야 등지로 폭격의 대상을 확대했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찾아온 1945년, 일본 본토 공습에 또 다른 획기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1945년[편집 | 원본 편집]

B-29의 폭격[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1월, 유럽전선에서 중국의 제20폭격기사령부를 거쳐, 일본 본토 폭격의 최적임자로 거론되어 몇 달 만에 다시 제21폭격기사령관이 된 사람이 있었다. 미 육군항공대 소장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었다.

부임 직후 르메이는 기존의 일본 본토 폭격작전을 분석한 결과 고고도 정밀폭격 껒여!라는 결론을 내린다. 르메이가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 아무리 최신예 정밀폭격용 관측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정밀폭격의 명중률은 저고도 폭격보다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일본군 방공망이 도달할 수 없는 안전고도에서의 폭격시에는 제트기류로 인해 안 그래도 떨어지는 명중률이 개판난다.
  • 주요 전략타겟 몇 개만 부신들 큰 효과 없다. 일본이 중국서 소이탄 폭격하는 거 봐라. 어차피 도시채로 날려버리면 전략타겟도 같이 날아간다. 무고한 민간인 따위는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으로 적 해군이 전멸한 지금, 우리 해군 항모함재기들이 적극적으로 호위로 붙을 수 있다. 아울러, 이오지마 전투로 중간기착지를 확보하였으니 여기서 발진하는 장거리 호위전투기들로 B-29를 호위할 수 있으니 안전고도 훨씬 아래로 폭격할 수 있다.

그리고 르메이가 고고도 정밀폭격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대규모의 폭격기를 저고도로 진입시켜 도시에 네이팜탄 도배를 해버리는, 말 그대로 도시 지우기였다. 기체 및 파일럿의 피해가 급증할 것이 명백했으나 어쨌든 르메이는 일본본토 폭격을 전담하는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이었고, 독일에서 나름 성과를 거둔 적도 있었기에 르메이의 의견이 먹힐 수 있었다. 르메이도 무작정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양반은 아니어서, 형편없는 일본군 야간 방공전 능력을 거론하며 첫 대공습을 야간에 실시하기로 했다. 1945년 기준으로 야간방공전 능력이 가장 탁월한 나라는 주야 가릴것없이 신나게 두들겨맞고 있던 독일이었고, 그 다음이 영국이었으며 일본의 야간방공전 능력은 44년 말엽의 공습을 통해 그 수준이 형편없음을 입증된 상태였다.

그리고 1945년 3월 9일, 346기의 B-29 폭격기가 이륙, 그중 279기의 폭격기가 1,600여 톤의 네이탐판을 도쿄 시가지에 뿌려댔다. 사망자만 8만에서 10만에 달할 정도였고, 건물 267,000여 채가 파괴되었는데 이는 당시 도쿄의 건물 중 25%에 달하는 수치였다. 바로 도쿄 대공습이다. 도쿄 대공습 이후에도 도쿄는 4월 초 및 5월 중순, 8월 초에도 수십여 기의 B-29로부터 집중폭격을 받았다.

도쿄 대공습이 일본인들에게 끼친 심리적 영향은 해당 항목 참조. 그런 심리적 영향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미군도 도쿄 대공습의 성과에 크게 환호했는데 격추 14기에 손상 42기라는 생각보다 경미한 피해에다가, 항공정찰 사진 판독 결과 말 그대로 도쿄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의 시원찮은 공습과 달리 이제서야 제대로 된 피해를 주었다고 미군은 인식한 것이다.

도쿄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르메이는 3월 11일에 310기의 B-29를 투입하여 나고야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나고야 공습은 폭격을 가한 범위가 도쿄보다 광범위한 덕에 피해는 적은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고 실제로는 5.3km2에 해당하는 도시 면적이 소각되었고 더군다나 폭격기 피해가 전무했다. 도쿄 대공습 이후 3월의 전략폭격은 다음과 같다.

  • 3월 9~10일 도쿄 : 279기 투입. 사망자 8~10만. 건물 267,000여 채 파괴. 도시면적 41km2 전소.
  • 3월 11일 나고야 : 310기 투입. 도시면적 5.3 km2 전소.
  • 3월 13~14일 오사카 : 274기 투입. 도시면적 21 km2 전소.
  • 3월 16~17일 고베 : 331기 투입. 도시면적 18 km2. 사망자 8천 이재민 65만여 명.
  • 3월 18~19일 나고야 2차 : 도시면적 7.6 km2 전소.

불과 10일만에 일본의 주요도시 4개가 지도에서 지워지는 수준의 처참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 공습 직후 르메이는 일본 전역에 당당하게 폭격 경고문을 돌린 다음 그동안의 전과를 분석하며 추가 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면서 가미카제 공격을 막아 달라는 해군의 요청으로 규슈의 활주로 폭격작전에 끌려가면서 약 1달 동안 개점휴업했다. 물론 완전히 전략폭격을 멈춘 건 아니어서 르메이는 소규모의 B-29를 꾸준히 도쿄 등으로 보냈는데 이때는 폭격기 소티 부족으로 인해 부득이 정밀폭격을 해야 했다. 그래도 가끔 여유가 될 때마다 100기 이상의 B-29를 동원했는데 특히 4월 15일에는 303기의 B-29를 투입해 도쿄 인근의 도시들-가와사키, 요코하마, 시즈오카-에 불벼락을 내렸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해방된 5월 중순 이후 르메이는 다시 전략폭격에 나섰고 6월 초까지 주요 대도시를 초토화켰다. 5월 23~25일에 걸친 대공습에서 도쿄는 500기가 넘는 B-29의 융단폭격을 받았고, 5월 29일에는 519기의 B-29가 요코하마를 폭격했다. 폭격된 도시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 벌써 일본 주요 대도시는 빠진 곳 없이 모조리 폭격을 받아서 2차, 3차에 걸쳐 폭격을 받는 지경이었다. 특히 5월 공습서부터는 이오지마에서 출격한 P-51 머스탱이 100기 이상 동행하면서 폭격기들을 호위했다. 이에 맞서 일본군이 요격이랍시고 보낸 건 제로센. 성능도 밀리고 파일럿의 기량도 밀리고 숫적으로도 대등한 지경이니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6월 초가 되면 르메이와 21폭격기사령부 지휘부는 더 이상 때릴 대도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6월 중순, 사이판에서 헨리 아놀드와 만난 르메이는 협의 끝에 대도시는 그만. 이제 중소도시를 폭격한다!는 합의를 한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웬만한 도시에는 빠지지 않고 B-29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6월 19일 후쿠오카, 시즈오카, 도요하시를 시작으로 6월 28일, 모지, 나베오카, 오카야마, 사세보가 7월 1일에는 구마모토, 구레, 시모노세키, 우베가 폭격당했다. 7월 3일에는 히메지, 고치, 다카마쓰, 도쿠시마가 7월 6일에 아카시, 지바, 고후, 시미즈가 당했고, 7월 9일에는 기후, 사카이, 센다이, 와카야마가, 7월 12일에는 이치노미야, 쓰루가, 우쓰노미야, 우와지마 등등. 너무 많아서 폭격된 도시를 옮겨 적으면 내용이 지나치게 길어진다.

언급된 도시만 봐도 규슈 남단의 오이타에서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중소도시가 모조리 공격받았다. B-29의 공격을 받지 않은 곳은 홋카이도와 당시 가라후토라 불리던 일본령 남사할린 정도였다. 대신 홋카이도는 아래 따로 서술할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폭격을 받았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도 부산이나 원산, 함흥 등에 소규모의 폭격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런 전략폭격과는 별개로 6월 하순 사이판에 전개한 315 폭격비행대는 역시 B-29를 기종으로 쓰고 있었으나 당시 미국의 모든 기술력이 결집된 최첨단 정밀폭격기기를 갖추고서 야간폭격에 돌입, 일본 전국에 산재한 주요 정유시설을 정밀폭격하였다. 그러나 워낙 르메이의 초토화폭격의 인상이 강해 전쟁중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전후에는 기록 분석하니 정유시설 폭격 안 해도 어차피 정제할 기름도 없더라고 하여 평가절하되었다.

전쟁을 끝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역시 B-29에 의해 이루어졌다.

제8공군의 폭격[편집 | 원본 편집]

유럽 전역에서 폭격임무를 담당하던 제8공군은 독일의 항복 직후 재배치되어 1945년 7월 16일부터 오키나와에 전개되어 일본 폭격에 가세했다. 독일을 상대하던 미군의 주력부대가 태평양으로 재배치되는 첫 단계였다.

오키나와에 전개된 제8공군은 주로 규슈 일대에서의 제공권 제압에 나서면서 소규모 폭격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몰락 작전을 전후로 B-17B-24 폭격기를 대대적으로 투입할 예정이었으나 일본이 조기 항복하면서 약 1달여의 짧은 태평양 전쟁 참전을 끝냈다.

전투기들의 폭격[편집 | 원본 편집]

P-51로 대표되는 장거리 전투기가 배치되고, 일본과 가까운 도서지역들이 미군에게 점령되면서 미 육군항공대 전투기들도 일본 폭격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본래 이들의 임무는 B-29의 호위였으나 1945년 5월이 지나면 폭격기들에 도전할 일본 전투기가 남아나지 않는 관계(…)로 이들 전투기들도 로켓포드를 주렁주렁 매달고 소규모 공습에 나섰다.

공군 전투기들은 주로 일본군 소규모 비행장과, 융단폭격에서 살아남은 주요 공장들, 철도역 등을 타겟으로 폭격에 나섰으며 가끔 움직이는 연안 수송선이나 기관차들은 제일 먼저 공격받았다.

한편, 육군과는 별개로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도 일본 연안까지 진출하였다. 7월 14일, 항모 함재기들이 도호쿠 일대를 폭격한 걸 시작으로 7월 15일에는 그동안 폭격에서 제외된 홋카이도가 항모 함재기 공습을 받았다. 이후 항모기동부대는 일본 동해안을 따라 움직이며 보름여동안 일본의 주요 항구도시를 타격했다. 그중 백미는 구레 군항 공습.

일본군의 대응[편집 | 원본 편집]

그런 거 없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오면 오는구나 하고 신나게 두들겨 맞은 거 말고 한 게 없다.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실정이었다.

1944년 후반기의 정밀폭격시에는 대본영도 아 미국이 이제 본토로 폭격을 퍼붓는구나 하고 나름대로 대응에 나서며 요격기 부대를 배치하고, 해안을 따라 레이더를 설치하며 소형선들을 바다로 내보내 폭격기들을 사전에 탐지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라도 했다. 하지만 레이더의 성능은 신통치 않았고 소형함들은 미국 잠수함들에게 격침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미군 폭격기부대 지휘관이 르메이로 바뀌고 초토화폭격에 나서면서 대응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특히 이오지마 전투 패배로 이오 섬을 상실하면서 일본의 대공탐지능력은 급감했다. 전에는 이오지마 및 인근 오가사와라 제도에 어쨌든 레이더나 청음기를 배치해서 폭격기 탐지에 나섰다. 그러나 이오지마 함락으로 사전 폭격기 접근을 탐지하는 능력으 절반 이하로 급감했고, 탐지용으로 내보낸 소형선박들은 목표로 할 대형선이 없어 어선을 격침시키고 있던 미군 잠수함들에게 열심히 사냥당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레이더의 성능의 조악하기 그지없는데 남쪽에서 먼저 피켓 역할을 해줄 기지들을 상실하니 일본군은 그냥 망했어요. 나름대로 사전탐지를 하겠다고 군용 청음기를 도쿄 인근에 집중배치했으나 결과는 있으나마나였다.

탐지도 문제였지만 요격은 더 심각했다. B-29의 최대상승고도로 접근할 수 있는 일본군 기체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으며, 르메이에 의해 B-29들이 저고도로 내려온 다음에나 폭격기 요격을 시도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P-51 머스탱이라는 사기템이 B-29를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일본 요격기부대는 이미 구형이 되어버린 제로센이었다. 기체도 구형이지 파일럿의 기량 차이도 베테랑과 연습생 수준으로 벌어졌지, 심지어 이 시기 제로센은 재료부족 및 숙련공 부족으로 완성도도 떨어진 데다 연료마저 그냥 엔진 돌릴 수만 있으면 연료로 집어넣는 실정이었으니 방공전이 될리가 없었다. 기량좋은 베테랑 파일럿이 간신히 머스탱의 호위망을 뚫고 진입한들, B-29가 워낙 사기맷집에다가 자체적인 방어무장이 워낙 충실해서 폭격기 잡으려다 오히려 요격기가 격추되기 쉬웠다.

대공포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개전 직전 및 개전 후 U-Boat로 소수 도입한 독일제 대공포가 아니면 B-29의 비행고도까지 포탄이 날아가지도 않았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사실 필리핀 탈환 이후 일본의 패배는 기정사실이었으나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은 전쟁을 최소 1년 이상 앞당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남방 점령지와 본토과 유리되자 온갖 잡철을 긁어모으고 비축자원을 쏟아부으며 발악에 나섰지만 대규모 폭격으로 산업시설을 모조리 날려먹었다. 그리고 산업시설에서 일할 노동자들 다수가 죽거나 다치고, 생존자들도 겁에 질려 시골로 피난길에 떠났다.

이처럼 폭격받은 주요 도시 시민들은 이 전쟁은 뭔 짓을 해도 이길 수가 없다는 걸 처절히 깨달았다. 일본군은 본토와 국민들을 지켜내지도 못했고, 오히려 황거가 폭격받음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황거 폭격은 우연이었고, 미국은 발악하는 일본을 괜히 자극할까 황거 폭격을 금지했다. 결국 덴노는 일본군이 아니라 미군이 지켜준 셈. 항복방속 당시 군부나 일반 국민들이나 큰 반발 없이 항복을 받아들인 것도 계속된 전략폭격에 따른 패배감에 기인한 것이다.

관련 항목[편집 | 원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