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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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中正肖像(上色).jpg
蔣介石 (장제스)
본명 개명 전 지청(志淸, 지칭)
개명 후 중정(中正)
족보 이름 장주태(周泰, 저우타이)
개석(介石, 한국어)
카이 섹(介石, 광동어)
제스(介石, 표준중국어)
부모 부친 장조총(蔣肇聰), 모친 왕채옥
재임 중화민국 총통
1950년 3월 1일 ~ 1975년 4월 5일
생몰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국적 청나라북양정부국민정부
계급 특급상장(대원수)

지금은 타이완만 통치하는 국민당의 초대 총통. 개석(介石)은 자(字)이며 실제 본명은 중정(中正)이다. 학명(學名)은 지청(志淸), 장씨 족보에선 장주태(蔣周泰)로 적혀있다. 본명보단 자인 장개석으로 유명하며 실제 중국 본토에서도 장개석의 현지 발음인 장제스(Jiang Jieshi)라 부른다.

1887년생. 유년기엔 일본으로 유학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했고 1912년 본토에서 제정을 폐지시키는 신해혁명에 가담했으나 손문을 속이고 황제를 선포한 원세개의 축출엔 실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 그곳에서 전전하다 중국으로 돌아와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자신만의 기반을 만든다.

이후 스승인 손문이 사망하자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내에서 힘이 강했던 왕정위를 몰아낸 다음 국민당 1인자가 되어 북벌을 감행해 원세개 이후 중국의 마지막 전국시대인 근대 군벌시대를 종식시켜갔고, 최종적으론 봉천군벌[1]의 장학량이 일본의 압박으로 국민당에 투항하자 중국을 다시 통일했으며 법 제정의 통과를 두고 그것에 반대한 염석산, 풍옥상의 반란을 진압해 1인자의 입지를 다졌으나 곧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장학량의 만주를 빼앗고 그곳에 전(前) 청나라의 황제였던 선통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 만주국을 선포, 중국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소멸 직전의 공산당을 치기 위해 서안(西安)까지 이동하여 국민당군을 지휘하려 했으나 빼앗긴 만주 수복이 아닌 공산당 축출만을 앞장서는 장개석에 반감을 품은 장학량이 그를 감금하여 강제로 항일을 목적으로 하는 국공 합작을 체결시킨다. 곧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고, 일제가 이를 빌미삼아 중국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한다.[2] 낙후된 인프라, 미발달된 농업 국가, 보급의 한계에 부딪혀 화북, 수도인 난징까지 빼앗겨 난징대학살이란 피해까지 겪었으나 약 8년간의 긴 항쟁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여 중국 보존에 성공한다.

한편 국공합작 당시 국민당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공산당은 중일전이 끝나자 마자 다시 내전을 재개해 국민당을 공격했다. 이전 중일전쟁의 후유증과 여러 개혁정책의 실패로 인한 민심 하락은 국민당을 약화시키게 했고 공산당에게 처참하게 밀리는 모습을 본 미국마저 지원을 중단하기까지 이른다. 서서히 대륙을 상실하자 마지막엔 대북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본토 수복을 꾀한다. 하지만 수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대만으로 이동한 후 자신에게 반발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해 자신의 독재를 강화했다.

비록 커다란 대륙을 잃고 국가적 위신마저 실추당하기까지 했으나 본토 수복과 명(命)을 보존한 국민당의 발전을 위해 경제 성장, 문맹 퇴치, 부정부패 척결을 실시, 성공했고 대만을 용(龍)의 반열에 올리기까지 하는 대업을 이루기도 했다. 대만을 통치하던 장개석은 1975년 89세로 사망하였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내력과 초기[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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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왕채옥

장씨 집안은 오월인 집안으로 장개석은 1887년 당시 청나라의 절강성 평화현에서 장조총과 왕채옥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개석은 훗날 자신을 오대십국시대 후량 당시 현실의 더러움에 관직을 버리고 은거했다던 장씨의 시조 장종패(蔣宗霸)의 후손이자, 장종패의 후손인 송나라 시기의 인물 장준명(蔣浚明)의 후손이라고 했다. 장개석의 조부는 장사천, 부친은 장조총, 어머니는 왕채옥이다. 장씨 일가는 대나무, 밭 등을 포함해 30묘(畝, 단위)[3]를 가진 부유 일가였으나 명망 있는 향신은 아니였다.

장개석의 조부 장사천은 토지를 세놓아서[4] 마을에 소금 가게를 열었다. 아버지 장조총은 장사천의 세를 계승해 사업을 계속했으나 돌연 장개석이 8살때 사망했고 그 이후부터 장개석 일가는 어려워졌다. 이복 형이자 장조총은 첫째 아들은 큰아버지 장조해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연스레 전처 쪽관[5] 갈라졌고 남은 형제자매 중 남자가 장개석 혼자만 남자[6]모친 왕채옥은 장개석의 교육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당시 중국은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변동되기 이전인, 봉건제 사회였으므로 장개석 역시 유학(儒學)을 몇년동안 배웠다. 장개석이 근대 교육을 받기 시작한 시점은 17세부터며 봉록학당에서 영어, 산술을 배웠고 그곳에서 고청렴(高淸廉) 선생을 만나 그의 권유로 왕양명(王陽明), 증국번(曾國本)의 저서를 읽게 되었고, 그것의 영향을 받아 혁명 사상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신축조약[7]으로 그 인식이 나락에 떨어졌고 청조 자체도 제구실을 못하자[8] 장개석은 외국에 나가 학습을 쌓기로 생각했다. 이후 1906년 고향에서 장씨 일가에게 모든 토지와 부당한 밭세를 내라는 관리들의 행패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법대로 하라'며 신식 교육을 바탕으로 한 '민(民)과 같이 맞서 싸운다'의 이론으로 저항하다 19세의 나이로 옥에 갇히기까지 했다가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던 장인의 도움으로 옥에서 겨우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 장개석은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일어서겠다고 다짐하는 미래를 생각했다.

한편 이때 일본 제국이 약소 국가라는 인식에도 불과하고 러시아 제국을 이기자(러일전쟁) 장은 깨달음을 얻어 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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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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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

장개석은 청의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변발을 잘라 어머니에게 넘기고 군사학을 위해 출국을 요구했다. 어머니는 장개석의 요구에 동의하여 출국 경비를 보내줬고 장개석은 일본에 도착해 동경청화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의 경감[9] 진기미를 만나 반청 사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돈의 부족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없게 되자 부득히 장개석은 귀국했고, 장개석은 같은 해 겨울 청조로 돌아와 이듬해 여름 청 정부에서 설립한 통국육군속성군관학교에 입학해 일본인 강사에게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인 교사는 중국인을 싫어했고 수업 도중에 책상 위의 흙덩이를 보고선,

흙덩이. 흙덩이에 약 4억개의 미생물이 있는데, 마치 중국의 4억 인구와 같다.

중국인을 세균에 비유하는 혐오 발언을 하자 많은 중국인 학생들이 분개하던 중, 중국인 장개석이 교단 앞에 나아가 흙덩이를 8개로 쪼개며 말했다.

일본인 5천만명이 있습니다. 이 조각의 5천만 미생충과 일본인들이 같다면, 당신들은 이 흙덩이에 기생하고 있다는 겁니까?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 사건이 곧 교장의 귀로 들어갔으나 교장 조이태(赵理泰)는 따로 장개석에게 벌을 주지 않았다.

장개석은 꾸준한 자기 단련으로 우수한 성적을 받아 우등생으로 뽑혀 일본의 진무학당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일본어 위주의 군사학을 배웠으며 1909년 진기미의 소개로 중국 동맹회에 가입해 그 과정에서 11살 위의 진기미의 심복이 되었고, 진기미의 두 조카인 진과부, 진입부와도 가까워졌다. 또한 1910년 6월 단향산(檀香山)에 도착해 그의 평생의 스승이 되는 손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손문은 혁명당의 청년은 명분이 아닌, 임무에 충실하며, 임무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고 더불어 미국 건국에 워싱턴이 있는데, 그 혼자만의 힘이 아닌 모두의 힘이 있음을 강조했다. '수천만 명의 이름 없는 워싱턴이 싸웠는데...."의 발언은 장개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장개석에 대한 손문의 인상도 따뜻했다.

1910년 11월 진무학교 졸업 당시 장개석의 등수는 전체 62명중 55등으로 그닥 우수한 성적은 아니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제13사단으로 배치되어 그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장개석은 어느때나 새벽에 일어나 몸을 가지런히 정돈했으며 군대의 식사와 대우가 열약해도 견뎌냈다. 이후 신해혁명 중 무창봉기가 성공, 자신도 상하이로 귀국해 진기미를 도와 항주를 공략하는데 성공하고 상해로 돌아와 상해군 제2사단 제5연대장이 된다. 항주봉기의 승리는 장개석의 명성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도성장 암살과 원세개의 반동[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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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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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

1912년 1월 14일, 혁명당 내의 간부 도성장(陶成章)이 상해 광자병원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세한 내막은 불분명하나 다른 자료엔 장개석이 이 일과 연루되었으며 즉, 도성장을 죽였다는 건데 자세한 내용은 이렇다.

도성장은 손문을 중심으로 한 혁명당 사람이다. 진기미와 같은 혁명당 인원이였으나 혁명당 내의 자금문제로 진기미[10]와 손문을 비난하자 그때부터 진기미와 도성장의 사이가 나빠졌고 진기미는 결국 심복 장개석에게 명령해 장개석이 도성장을 죽였다는 것이다. 당시 발간된 신문엔 장개석이 이 일에 연루되지 않았다라 했고 손문은 이 일에 '정확하고 신속하게 추적하여 범인을 검거하라'고 했다.

이러한 혁명당 내의 분열의 조짐이 구리지만 없어진 후, 국내 정세는 총통직을 손문에게 위임받은 원세개송교인 암살, 선후차관[11]을 일으켜 독재를 강화해 나가자 손문은 2차 혁명(계축전쟁)을 일으켜 원세개를 토벌하려 했고 장개석은 총사령관이자 선임인 진기미의 지휘 아래 상하이 강남제조국(江南製造局) 전투에 참전한다. 상해군 도독 양선덕(楊善德)은 장개석을 체포하기로 결정했고 진기미의 군대도 부진하자 장개석은 도주했고 혁명 8월차엔 호남의 담연개도 패배를 선언하여 혁명은 실패한다.

도주한 장개석은 9월 1일 나가사키에 도착해 국민당과 합류한 후 진기미와 의형제를 맺고 중화혁명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이후 장개석과 진기미는 북경에 가서 원세개에게 거짓 항복을 하고 1914년 다시 손문의 의지를 이어 상해의 원세개 토벌군 조직을 주관하고 일본 하얼빈으로 한 달동안 그곳에서 아시아 정세를 파악한다. 중국 본토에선 결국 모든 권력을 장악한 원세개가 21개조 요구를 통한 매국, 기어이 황제를 선포하자 국민당은 다시 봉기를 준비했고(호국전쟁) 당계요, 채악, 이열균이 원세개에게 제제 취로를 요구했으나 거부하자 무력만이 답이라는걸 느낀 호국군은 원세개의 중화제국과 전쟁을 선포한다.

처음에는 호국군이 밀렸는데 호남 전선에선 당천희의 호국군 합류, 사령관 마계증의 병사로 북양군이 패퇴했다. 그러나 주문병의 호국군 격퇴로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다 상황을 보라고 파견된 육영정이 광서성의 독립을 선언해 원세개를 배반하자 원세개는 장훈에게 출병을 요구했지만 장훈에게도 거부당해 절망으로 빠져든다. 일본은 이미 조약은 체결되었으니 중립만 지킬 뿐이였고, 원세개가 믿었던 서구 열강들도 일명 '손절각'을 날카롭게 보고 있었다. 게다가 중화제국 하의 군벌세력들도 독립을 선언하여 궁지에 몰린 원세개는 국민당의 중추중 하나인 진기미를 암살했으나 이미 상황은 진기미 하나를 죽인다고 변하는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인 진환[12]도 배반하자 충격을 크게 받은 원세개도 병으로 쓰러진다. 그 병이 요독증으로 발전하여 살 날이 얼마 한남았다는걸 느낀 원세개는 제제를 취소하고 다시 총통으로 돌아가겠다고 권력을 잡으려 했으나 모든 중국 국민과 군벌들은 그의 하야를 원했고 중화민국은 다시 복고된다. 원세개는 얼마 안가 요독증이 악화되어 죽었고 그 뒤를 이어 여원홍이 새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이번에야 말로 혁명이 성공하여 진정한 공화정을 찾은 것이였다.

손문 보좌[편집 | 원본 편집]

제국은 다시 민국으로 복고되었으나 얼마 못가 여원홍단기서를 경질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단기서가 이에 반발해 각 성을 점령해가자 여원홍은 장훈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장훈은 그 명에 동의하는 척 하더니 민국의 국회와 약법을 폐기하고 다시 청나라를 부활시키는 장훈복벽을 일으킨다. 여원홍과 단기서는 위기를 느끼고 다시 협력해 장훈과 그가 부활시킨 청나라를 몰아내고 민국체제를 활성화시킨다. 다만 이전에 장훈이 폐기한 국회와 약법은 부활시키진 않았다.

이후 단기서가 강압적으로 남쪽 군벌들을 무력통일하려 하자 당연히 남방군벌들은 단기서측에 불만을 품었고 민국의 권리를 잃어버린 손문을 비롯한 국민당원들은 남방과 협력한다. 그리고 그 무력통일에 반발하여 다시금 대륙은 호법전쟁이란 혼란에 빠진다. 남군벌과 협력한 손문은 이 기회로 대륙을 진정한 민국으로 되돌리는 듯 했지만 사실 남군벌들은 손문의 '혁명의 주체'라는 정통성을 이용해 자신들의 세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고 손문의 혁명은 뒷전이였다. 그리고 호법전쟁이 일시적으로 화의가 체결되자 거슬리는 손문을 추방하기까지 한다.

이후 손문은 진형명의 도움으로 광동에 도착해 국민당의 정권, 약법 회복을 위해 북벌(北伐)을 주장한다. 장개석은 광동으로 이동한 손문의 보좌를 맡았다. 손문은 그곳에서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위한 북벌을 준비했으나 진형명은 그와 북벌을 너무 과대망상적이라며 비난했고 '대포(허풍)'이라며 모욕까지 했다. 이러한 노선 차이로 인한 갈등은 곧 영풍함 사건[13]으로 나타났고 손문은 믿었던 진형명이 배반하자 어쩔줄 몰라 당황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장개석이 영풍함을 타고 나타나 손문을 구했고 손문을 숨긴 다음 홀로 배위에서 진형명의 전함과 싸우는 그 모습은 손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사건 이후 손문은 장개석을 신임하게 되었고 이후 양희민, 유진환의 도움으로 진형명을 축출하여 광저우를 수복해 그곳에서 국민당의 기점을 만들게 되었다. 동시에 자신의 입지도 다졌다.

마지막 전국시대 통일[편집 | 원본 편집]

1차 국공합작 시기[편집 | 원본 편집]

진형명의 반란을 진압하고 광동을 수복한 장개석은 스승 손문의 신임을 받았다. 참고로 이 시기엔 손문이 북벌을 현실화하기 위해 제1차 국공합작을 맺기도 했다. 이후 장개석은 황푸군관학교의 교장이 되어 학생들을 국민혁명군으로 양성하기 위한 일에 힘썼고 자신의 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국민당의 중추로 성장했다.

그 이후 1924년 광주 상단 사건[14]으로 상인 세력의 제압과 정적 진형명을 완전히 몰락시켰으나 광저우의 이익[15]을 탐낸 양희민, 유진환[16]이 군벌 통합 정책에 반발하여 객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도 장개석이 진압했다.

국민혁명[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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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군벌시대 당시 중국의 군벌 병립도

국민혁명을 다른말로 북벌(北伐, 병음: běi fá / 베이 파)이라 부르기도 한다. 보통 북벌이라 하면 이 국민혁명을 가리킨다.

장개석의 스승 손문은 민족통일에 힘쓰다 1925년 힘이 다해 죽었다. 장개석은 손문이 생전 주장했던 북벌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아 당 내의 공산당과 협력하여 이전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여러개로 분열된 중국 통일에 앞장선다. 광동성에서 출발한 국민당은 호남, 호북, 복건, 절강, 강서, 안휘의 6성을 통일하고 작은 군벌이 아닌 실력자 군벌인 오패부(吳佩孚)[17], 손전방(孫傳芳)[18]을 제압하고 마치 원말명초 당시 주원장진우량의 대치처럼 장개석은 봉천군벌(만주)의 군벌 장작림과 2인자 구도를 이룬다.

하지만 국민당 내부엔 내부분열이 사그라들지 않았고 이러한 불길한 징조는 곧 중산함 사건[19]으로 드러났다.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 장개석은 위협을 느꼈지만 이 기회를 틈타 국민당 내의 공산당 인원과 경쟁자 왕정위를 몰아내고 그 누구도 뭐라할수 없는 1인자가 되었다.

이후 장개석은 본격적으로 북진하여 앞장서지만 이전의 중산함 사건으로 인해 내부분열이 악화되가기 시작했고 1927년 3월 공산당원들이 일으킨 상해 폭동으로 손전방을 몰아내고 상하이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그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열강과 절강재벌[20]이 공산당원과 절연할 것을 강권했고 이로써 장개석은 공산당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갖추었다. 1927년 3월 공산군이 남경을 점령하자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함대가 공산당의 남경을 향해 폭격을 가했고 열강들은 국민당 우파[21]를 지원해 좌파와 공산당을 몰아내고 상하이 노동자 무장회와 총공회를 해산시켰다. 이 사건은 1차 국공합작의 결렬을 뜻하며 1950년 5월 1일까지 이어질 국공내전의 시작이 되었다. 실각한 공산당의 많은 인원들은 무자비하게 처형되었고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학살은 소련에서 유학 중이던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이 그를 비판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남경을 다시 빼앗은 장개석은 그곳에 독자적으로 남경정부를 세운다. 국민당이 분열해 이전에 있던 무한의 국민정부와 장개석의 남경정부와 내전에 돌입할 뻔 했지만 아직 북쪽엔 봉천군벌이 남아있기에 외형상 협력해 북벌을 진행했지만 무한에서도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두 국민당의 통합의 발제되었고 무한은 통합 조건으로 장개석의 하야를 요청했다. 결국 장개석은 하야했고 임삼이 총통으로 선출, 두 개의 국민당은 하나의 국민당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분열은 끝나지 않았고 다시 장개석이 총통으로 복위한다. 복위한 이후 장개석은 장작림의 봉천군벌을 공격해 북경을 빼앗았다.

장작림 입장에서 이 전투는 자신의 정권의 유지를 결정하는 최후의 발악이였으나 북경을 뺐긴 기점에서 패배나 다름없었고 기차를 타고 후퇴하여 다음을 노렸지만 장작림을 거슬려한 일본제국의 음모로 타고 가던 기차가 폭파하여 사망한다. 장작림이 죽고 봉천군벌은 그의 아들 장학량이 이었지만 장학량에겐 국민당군을 막을 힘도, 일본의 요구를 거부할 힘도, 일본과 협력하여 국민당을 몰아내는 반민족적인 결정을 내려서 국민들을 기만하고 정권을 유지시킬 힘도 없었다. 결국 장학량은 국민당의 장개석에게 굴복하여 만주를 장개석에게 넘긴다. 1928년 12월 29일, 연도가 바뀌기 불과 몇일 만에 전국시대를 재현한 대륙이 드디어 통일된 순간이였다.

장개석이 봉천군벌을 통일하여 대륙 전역을 통일한 형태의 중화민국중화민국 대륙시기를 참조. 말 그대로 중화민국이 대륙 전역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다.

국민당의 내분[편집 | 원본 편집]

중원대전[편집 | 원본 편집]

사실 장개석이 중국을 마지막으로 통일했고, 중화민국 대륙시기가 군벌들을 통일한 중국이라 하지만 그 통일의 한계가 없진 않았다. 이 통일의 과정엔 상술했듯 열강의 간섭과 장개석과 군벌들의 타협으로 이루어졌기에 보통 인식하는 '전국구에 통치력이 미치는 통일'이 아닌 그저 군벌들과의 타협, 이해관계에 따른 협력으로 인한 '외형상 통일'일 뿐이였다. 물론 이전 봉건제적인 왕조의 통일이 아닌 여러 이념차이를 겪고도 왕조에서 공화제로 변화시킨, 국가 자체를 바꿨다는 그 의의는 대단하지만 중국의 내분은 아직 완전히 끝난게 아니였다.

어쨌든 북벌을 완수한 장개석은 그간 피폐해진 중국의 경제개발, 내부 안정을 위해 군벌들과 논의한다.(편견회의) 이 편견회의는 앞으로의 중국을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관한 회의다. 유익한 회의였으나 논의 중, 장개석이 전국 8개의 편견구 가운데 반절인 4개를 차지하면서 자신의 군세 확충을 노렸고, 풍운산과 장개석이 호남과 산동을 놓고 갈등하면서 장개석의 군 감축에 반발한 염석산, 풍운산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이 반장전쟁[22]을 일으킨다. 내전의 전개는 이러했는데, 이전 광서성을 통치하는 계계군벌의 이종인이 중앙집권에 반발하여 호남 사건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고 이종인의 반란을 장개석이 무력진압하자 이에 분노한 풍운산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염석산, 풍운산, 이종인, 백승인, 왕정위, 서산회의파가 합류하여 중원대전으로 발전한다.

이때 북벌 당시 마지막으로 국민당에 합류한 군벌 장학량은 반장측과 장개석 두 파에게 합류권유를 받고 있었다. 장학량은 고민끝에 장개석에게 합류했고 장개석을 지원해 장개석이 반장들을 제거하고 다시 패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만주사변[편집 | 원본 편집]

공산당 정벌[편집 | 원본 편집]

Mao Zedong portrait.jpg
모택동

반대파인 반장들을 제거하고 권세를 확고히 한 장개석은 이전에 몰아냈고 본토에 주둔하던 공산당들을 몰아내기 위해 초공작전을 실시한다. 1차, 2차로 연이어 공산당 토벌은 실패하는듯 했지만 독일의 고문인 한스 폰 젝트를 고용하고 여러 인프라를 재건하여 기반을 만든 후 5차 초공작전땐 공산당을 완전히 소멸하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공산당은 그 유명한 대장정의 길에 올랐고 공산당군 인원은 수 만명에서 단 3만명으로 줄어든 수준이였다.

공산당 내에선 장국도 등이 실각하고 모택동이 공산당의 1인자로 떠올랐으며 당시 중화민국 대륙시기의 상황은 일본제국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봉천군벌을 몰아내고 만주국이란 괴뢰 정부를 세워 전 청나라 황제 선통제를 괴뢰 황제로 옹립해 대륙침략 야욕을 실현하는 중이였는데 장개석은 그런 장학량을 비롯한 군벌들을 앞세워 공산당 정벌에 앞장섰다.

상술했듯 타협으로 이루어진 외형상 통일은 어찌보면 군벌들을 굴복시킨게 아닌 그저 중립화했을 뿐이고 군벌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여전히 통치력을 행사했고, 그들에게 최우선 사항은 자신들의 세력 유지였다. 장개석은 이전부터 중앙집권화를 노렸고 이 초공작전 역시 그러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공산당 토벌에 군벌군을 앞세우고 자신의 중앙군을 군벌 영지에 보내서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는 방식이였다.

이전부터 군벌들은 중앙집권화를 매우 싫어했고 장개석의 군벌을 이용하는 이러한 태도에 반발한 진명추, 채정개, 장광내가 복건사변[23]을 일으켰고 위의 군벌 영지를 보낸것처럼 양광쪽에 공산당 토벌을 명목으로 중앙군을 보내고 정치적 압박을 시도하자 양광 일대의 계계군벌, 월계군벌이 양광사변을 일으켜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장학량의 배반(시안 사건)[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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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량

위의 두 반란들은 장개석의 빠른 대처, 반란세력 중심부의 붕괴 등으로 신속히 진압되었다. 그러나 중화민국 대륙시기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화민국 대륙시기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봉천 2대수장 장학량은 광대한 땅인 만주를 통치했고 한때 그의 아버지 장작림이 장개석과 2인자 구도를 형성할 정도로 강했던 세력이였다. 하지만 그러한 위상과 땅은 만주사변 당시 일제에게 패해 만주 땅을 일제에게 모조리 빼앗겼고 국민당의 장개석은 중국을 침략하려는 일본보단 내부의 적인 공산당 토벌에만 앞장서고 있는 상황이였다. 게다가 만주 땅에 지원군을 보내줄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장개석의 초공작전은 결정적으로 군벌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방식이였다.

장학량은 장개석의 이런 태도에 불만을 품었고 비밀리에 공산당의 주은래와 접촉하여 독단적으로 공산당과 비밀협정을 맺어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켰다. 장학량의 군부대는 서안에 위치했는데 장학량은 서안이 위급하다며 장개석에게 서안으로 와달라고 청했다. 이후 장개석이 잠든 틈을 타 장학량은 손명구(孫銘九) 등을 시켜 자고 있는 장개석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장개석은 경호원들과 도주했으나 중간에 넘어져 다쳤고 그 통증으로 인해 멀리 도망가기 힘들어진 상황이였다.

결국 동굴 속에서 장학량군이 가까워지자 장개석은 동굴에서 나와 항복하고 일단 총통의 예로 장학량에게 인도된다. 장학량은 공산당과의 제2차 합작을 건의했으나 장개석이 완강히 거부하자 그를 감금하기까지 한다. 장개석은 좁고 더러운 방에 갇혀 있었는데 장학량이 좋은 방과 식사 등을 제공한다 해도 계속 거부했으며 이전에 다쳤던 통증이 심해져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어졌다.

이때 장학량과 접촉했던 공산당의 주은래가 서안에 도착하여 '같은 중국인인끼리 싸워선 안 된다'로 장개석과 타협하여 공산당과의 내전을 일시 중지시키는데에 동의했고 장개석은 당일 25일날 석방되어 남경으로 돌아왔다. 공산당과의 타협은 내전의 중지 뿐만 아니라 장학량이 주장하던 중국을 노리는 제3의 적 일본을 막아내는 조항도 있었다.

제2차 국공합작의 체결[편집 | 원본 편집]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장개석의 국민당은 다시 공산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맺고 일본과의 항일 투쟁에 나선다. 당시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제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다지만 미발달된 농업 국가였고 이때문에 장개석은 사회 인프라 발전에 투자해야 했다. 장개석은 한스 폰 젝트를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초빙하여 독일식 군사를 본따 군대를 양성하고 이탈리아,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도움으로 상해, 남경을 공업화해 근대 이동수단의 상징인 비행기도 생산하는 근대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만 상해, 남경 일대만 공업화를 시도했을 뿐 중화민국 대륙시기 전역은 미발달된 농촌이 대부분이였고 이 드넓은 영토를 전부 공업화하기엔 장개석 입장에선 돈도, 시간도, 역량도 부족했다. 사실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상술했듯 중앙집권화에 따른 이해관계의 어긋남으로 여러 내전부터 진압해야 할 상황이였기 때문이다.

중일전쟁[편집 | 원본 편집]

일전에 일본은 장학량의 만주를 공격해 만주를 빼앗고 그곳에 만주국을 세워 선통제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대륙 침략을 위한 야망을 꿈꾸고 있었다. 당시엔 일본이 중화민국을 공격할 명분이 부족했기에 소극적으로 중국 영토를 노렸으나 1937년 노구교 사건[24]을 구실로 일본은 중국 침략을 가속화하기 시작한다. (중일전쟁) 이전에 장개석은 일단 전국을 근대화한 후 대륙에 주둔하던 일본을 몰아내려 했으나 결국 일본이 먼저 침략하자 최선의 방법으로 일본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미발달된 농업 국가에 공업력도 부족했고 물자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중국군이 당시 세계 1,2위를 다투던 일본 제국을 상대로 선전할리 만무했다. 만주-노구교에서 시작된 일본의 야욕은 화북 즉 북경과 천진을 점령하고 중국 본토의 중심부인 상해까지 깊숙히 확대하여 동년 12월 중화민국의 수도인 남경을 점령한다. 그곳을 점령한 일본군은 남경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 강간, 약탈하는 난징대학살을 일으켰고 장개석은 중경을 임시수도로 삼은 뒤 그곳에서 항일을 계속한다.

일본의 침략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중경까지 진입하여 문화재와 국민들을 폭격해 죽이는 그 유명한 충칭 대공습을 일으켰다. 중국 본토는 점점 초토화되어가고 있었고 일본은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를 괴뢰 정부화하여 중국을 목죄어갔다. 이전에 왕정위마저 배반하고 일본에 붙기까지 했으나 장개석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고 공산당이 일본과 내통하여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자 공산당 신4군을 정벌하는 환남사변을 일으키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한편 일본이 중국 침략을 가속화하는 모습을 본 미국이 일본에게 '중국을 더이상 침략하면 물자 공급에 제약을 주겠다' 라고 통보해 일본은 미국의 명을 거부, 이제야 이루어진 대륙 정벌의 꿈을 포기라는 두 갈래에 빠졌으나 결국 중국을 침략하기로 결정하고 미국의 함대 기지 진주만을 공격해 미국에게 선전포고했다. 중일전쟁은 곧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가 개입을 선언하였다.

일본은 미국을 적대 관계로 만들어 석유 등 물자 수입에 차질을 빚자 동남아로 전선을 확대해 그곳을 바탕으로 물자 활성화, 세력 유지 및 확장을 도모했지만 이 시기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 여러 열강이 개입했고 일본은 미국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렸으며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련의 침공까지 들이닥치자 결국 일본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당시 일본의 천황[25] 히로히토가 1945년 8월 14일 오후 8시 30분 항복을 선언하여 중일전쟁은 중화민국의 승리로 끝났고 2차세계대전도 동시에 연합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중일전 승리와 입지 상승[편집 | 원본 편집]

장개석은 중국을 목죄오던 일본을 몰아낸 항일영웅이 되었다. 비록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그간 중국을 침략하던 일본을 몰아내 자주권을 회복했으며 2차대전의 공로를 연합국에게 인정받아 승전국의 지위, 그 전에 일본이 빼앗아간 만주, 내몽골, 그리고 후에 공산당에 밀리는 동안 유일하게 수복하고 스승의 의지를 간신히 유지시킨 인생의 땅 대만을 돌려받았다. 이 외에도 국제연합(UN)에서 본래 일본이 상임이사국이고 국제적 위상도 일본이 중국보다 위였는데, 이 승리를 계기로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고 위상마저 올라가 일본 위에 서게 되었다.

장개석은 당시 하나의 중국인이란 주제로 공산당과 합작했으나 사실 그의 마음엔 완전한 중국 통일을 원하고 있었다. 동시에 공산당 역시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과 협력보단 자신의 세력 확충에만 힘썼기에 서로는 믿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이 시기 상황만을 보자면 공산당은 그저 게릴라군에 불과했고 국민당은 미국에게까지 인정받고 국제적 위상까지 올라간데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전력만으로만 보면 공산당을 압도했다. 그러나 개혁정책의 실패, 내부 문제, 망설임, 미국의 압력을 간과했고 그 결과 죽을때까지 되돌릴 수 없는 참패를 겪고 만다.

국공내전의 재개[편집 | 원본 편집]

이전에 장개석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승리가 유력해보이자 카이로에서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카이로에서 회담을 가져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기까지 하여 연합국 내에서 그의 입지가 확인되기까지 하였다. 결과적으로 2차대전은 승리하여 일본과 추축국은 몰락했으나 중화민국은 승전국이라 하더라도 내부 피해가 극심해 상처뿐인 승리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 대표 장개석과 공산당 대표 모택동은 중경에서 화평교섭회담(和平交涉會談)을 개최하여 앞으로의 중국에 대해 논의했고 이 회담의 주요 내용은 내전을 그만두고 독립, 자유, 부강의 신중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미국의 원조와 압박 하에 중공과의 국공합작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의 조지 케틀렛 마셜 장군이 중재를 시도했으나 회의는 결렬되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대륙을 상실하다[편집 | 원본 편집]

초기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국제적 위상까지 올라간 국민당이 우세했으나 군의 피로도를 종식시키지 않고 무리하게 점령지를 확대한 결과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켜 각 부대의 전력을 감소시켰고 이전 중일전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채로 벌인 무리한 통일 전쟁은 민심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틈을 탄 공산당이 토지 개혁으로 중화민국 국민들의 민심을 획득하자 전세는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공산당은 늘어난 전력으로 북경에 입성한 다음 양자강을 건너 4월 23일 중화민국 대륙시기의 수도 남경을 함락하고 5월 27일 깊숙히 들어가 상해까지 점령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공산당의 대표 모택동은 1949년 10월 1일 북경에서 지금의 대륙을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초대 국가주석으로 취임했다. 중공군은 순서대로 광주, 중화민국 대륙시기의 임시수도 중경을 함락하자 장개석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본토와 약간 떨어진 자그마한 섬인 대만으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대륙 수복을 노리지만 평생 본토 땅을 밟지 못했으며 동년 12월 27일 중공군은 성도 일대를 지배하고 그곳에서 항전하던 국민당 잔류군을 몰아내 완전히 대륙을 수복한 것을 선언한다.

현대에선 장개석의 패배 원인을 전쟁 후유증 회복 실패와 개혁 정책의 연이은 패배, 경제 문제 해결의 실패를 꼽는다. 8년간의 긴 전쟁은 중국을 초토화시키기 충분했고, 전쟁이 끝난 이후 일단 내부문제에 신경써야 하는데 그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내전만을 재개하여 전쟁을 지속했고 군비 충당을 위해 화폐를 찍어내면서 경제 통제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장개석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했기에 화폐 개혁을 실시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민심은 악화될대로 악화되었는데 반해 공산당은 민심을 위하는 토지개혁을 바탕으로 민심을 포섭하자 상황은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공산당에게 허무하게 밀리는 중화민국을 바라본 미국은 그런 모습에 질려 원조를 끊어버리기까지 하였다.

대만 통치기[편집 | 원본 편집]

개혁정책과 대만의 경험[편집 | 원본 편집]

한때 광대한 영토였던 대륙을 통치했고, 일본에게서 승리한 그의 승전국 위상은 하루아침에 소멸해버렸다.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대륙이 아닌 대륙 밑에 딸려있는 작은 섬 대만이 되었고 국제적 위상까지 추락하여 미국의 지원이 끊겼고 정식 국가로 승인받지도 못했다. 대륙 상실은 그에게 있어 죽을때까지 잊을수 없는 상처가 되었지만 자신이 대륙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패배한 경험을 살려 작은 땅인 대만에서의 새로운 개혁정책을 펼친다.

장개석은 본토에서 실패했던 개혁 정책을 바탕으로 대만 땅을 발전시키기로 했다. 먼저 토지개혁을 실시해 대만만이라도 근대화시켰고 복지 향상에도 신경써 의무교육을 실시해 9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했으며 이는 큰 성과를 거두어 문맹률을 대폭 낮추었고 이전 경제 실패 경험을 떠올려 식료품의 가격을 안정화하였다. 동시에 본토 시기 큰 문제점이였던 부정부패를 척결하였다.

이러한 실패에서 배운 경제 정책은 두 차례엔 성공하여 서방 국가, 아시아에 비해 빈부격차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까지 했으며 본토를 통치하는 바로 위의 중공이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으로 혼란기에 빠질때 대만은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고 국민들의 생활 역시 본토때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은 대만의 본토 수복을 위한 당위성 마련과 기반이 되기도 했다.

개혁의 그림자[편집 | 원본 편집]

위에서 말했듯 장개석은 중공에게 계속해서 밀리자 대만에 임시로 정부를 옮긴 후 그곳에서 본토에 잔존한 국민혁명군과 본토 수복을 노린다.

하지만 장개석에겐 대만은 법률상 대륙시기에도 본토에 포함되긴 했어도 동떨어진 이질감이 느껴지는 한번도 가본적 없는 땅이였다. 대만 거주인들 역시 본토는 명목상 같은 중화민국이지만 떨어져 있는 땅 특성상 본토인과 대만인의 이질감은 느껴질수밖에 없었고 장개석이 중공에게 패해 대만으로 정부를 이전할 때 본토인이 대만의 요직을 차지하고 대만 원주민을 배척하는 차별 정책은 원주민의 불만을 사기 충분했다. 게다가 본토인은 대만 사람을 내성인/본성인, 대만 사람은 본토인을 외성인이라 부르는 등 같은 나라 사람인데도 서로 다르게 보는 시각까지 굳어져 갔다.

같은 나라 사람인데도 서로 다르게 보는 이유는 이전 대만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대만은 이전 50년간 일본의 지배 속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등 일본의 생활방식을 사용했는데 본토인과의 차이점은 본토인이 대만인을 멸시적으로 바라보는 원인이 되었다. 바로 위에 대만에선 부정부패를 척결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 이 시기엔 외성인이 요직을 차지하면서 부정부패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차별의 누적은 비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다.어느날 담배를 밀매하던 과부 임강매(林江邁)가 담배를 밀매하다 공무원에게 적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담배는 단속품이였기에 임강매는 단속을 당한 것이다. 위법 행위기에 문제가 되지만 여기서 공무원이 임강매를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세게 치는 등 강압적으로 대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 본성인들이 이에 항의하여 경찰과 충돌하다 학생 진문계(陳文溪)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자 이 시위는 대만 전국으로 퍼져 무력시위로 확대되었다. 대만인은 그전부터 억눌려져있던 차별 대우와 서로 간의 민족 감정으로 타협이 되지 않았고 같은 민족이 서로를 죽이는 비극적인 사태가 전개되었다.

한편 대만섬 행정장광 겸 총사령관 진의(陳儀)는 갈등 해결 방안을 모색했지만 본성인들과 외성인들의 갈등과 무력시위는 대만내 병력으론 진압하기 어렵다 판단, 뒤로는 장개석에게 연락하여 본토에서 중공군과 싸우고 있던 국민혁명군을 개입시켜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만 외성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이 계엄령이란 이름의 학살은 약 1주일간 지속되었는데 사망자의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약 1만 8천명에서 2만 8천명이 죽었고 본성인의 비공식 주장에 따르면 4만명이, 이 외에 외성인 7~8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있다.

이 외에 장개석의 권위주위적 성향은 대만 독립과 민주화 운동을 철저히 탄압했고 4천명을 정치범으로 몰아 처형하기까지 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독재자였으며 국민당 이외의 정당은 인정하지 않으며 이름 뿐인, 중공처럼 대만은 국민당이 일당 독재 체제였다. 위에서 상술한 학살 사건은 바로 2.28 사건이라 부르는 사건이며 대만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손꼽힌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反攻大陸... 解救同胞... 反攻大陸.... 救中國... 反攻大陸... 救中國...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동포를 구한다...대륙을 다시 공격해서...중국을 구한다...대륙을 다시 공격해서...중국을 구한다...[26]

개혁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미 본토를 잃어버리고 공산당에게 패해 미국의 지원을 잃어버린 대만은 날이 갈수록 그 위상이 추락해갔으며 1971년 장개석이 죽기 4년 전엔 유엔의 결정으로 중화민국은 상임이사국 지위와 회원국의 자격까지 상실해버린다. 게다가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이 중공에 방문해 관계를 개선하자 대만으로 축소된 중화민국은 세계 사이에서 그 고립이 더욱더 심해져갔다. 대만 시기 인프라와 경제의 발달로 본토 수복을 향한다 선언했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했고 패배자의 말년을 보내던 중 1975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89세였다.

무덤[편집 | 원본 편집]

장개석의 무덤.jpg

장개석의 무덤은 지상에 안치되었으며 그의 뒤를 이은 총통 장경국도 비슷한 형식으로 안장되어 있다. 두 장씨 부자의 무덤을 현지에선 능침(陵寢)이라 부른다.

둘러보기[편집 | 원본 편집]

역대 중화민국 대륙시기(남경정부) 주석
초대 담연개
대행-3대 임삼
2대 장개석
대행-4대 장개석
대행-3대 임삼
(국부천대, 중화민국 총통 선출)
역대 중화민국 총통
헌정 실시
대행 이종인
1대 장개석
2-5대 장개석
대행 이종인
대행 엄가감
중화민국 대륙시기 역대 행정원장
대행 송자문
대행 공상희
6대 공상희
8대 송자문
2대 장개석
5대 장개석
7대 장개석
대행 장개석
대행 진명추
6대 공상희
8대 송자문
9대 장군
국민혁명군의 역대 총사령관
신설 초대 장개석 폐지
국민혁명군 역대 제1집단군 사령관
신설 초대 장개석 폐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역대 위원장
1대 왕정위
신설
2대 장개석
초대 장개석
폐지
폐지
중화민국 대륙시기 역대 외교부장
11대 곽태기 12대 장개석 13대 송자문

참고[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만주 일대를 장악했다.
  2.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 항목 참조.
  3. 1묘의 넓이는 약 243㎡ (제곱미터)
  4. 토지를 빌려주고 거기서 세로 돈/곡물을 받음
  5. 전처는 이전에 사망했다.
  6. 장개석의 동복동생 장서청이 있었으나 불과 4살인 1898년에 사망했다.
  7. 간단히 설명하자면 의화단 운동 당시 의화단들이 청나라에 있는 서방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했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서방 연합군들이 청과 의화단을 정벌하고 북경을 점령해 강제로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은 백성들에게 '청은 무능하다' 라는 인식을 폭발시키게 했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붕괴, 중국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세워진다.
  8. 일단 청조는 근대 군부의 최고 권력자 원세개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9. 警監. 경찰 계급의 하나다.
  10. 제정 붕괴(혁명)에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 항주를 비롯한 소도시 및 남경을 점령해 혁명세력의 범위를 넓혔다.
  11. 선후대차관(선후차관)은 거액의 차관(돈)을 말한다. 원세개는 국회의 동의 없이 멋대로 돈을 빌렸고 의회가 무시당한 것에 격분한 국민당은 원세개에 맞서기로 결정한다.
  12. 사천성 군벌인데 원세개가 즉위할 당시 무릎을 꿇으며 그를 받들었다.
  13. 진형명이 손문을 공격한 사건. 사건 자체는 광동 총통부에서 일어났고 영풍함은 장개석이 손문을 구하기 위해 타고 온 배다.
  14. 광저우 지역에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상인들이 세력을 조직하여 손문에 반발한 사건으로 장개석군이 진압했다. 열강은 광저우의 반대 세력인 진형명을 지원하기도 했다.
  15. 광저우는 상업이 발달한 곳이고 여러 군벌들이 노렸던 곳이다.
  16. 상단엔 국민당에 협력하여 진형명을 몰아냈다곤 하지만 이들은 그저 광저우의 이득을 노리고 일시적으로 협력한 것 뿐이다.
  17. 나중에 2명만 남은 장개석VS장작림 구도의 장작림과 세력을 다툴 정도였다.
  18. 복건, 절강, 강서, 강소, 안휘를 원래 가지고 있던 군벌이다.
  19. 장개석이 공산당과 왕정위를 몰아내고 국민당 1인자가 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인데, 진위여부와 누가 중산함을 출발시켰는지가 불분명하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20. 장개석과 혈연적으로 이루어진 일명 4대 가족과 연관된 세력으로 장개석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장개석에게 없어선 안될 기관일만큼 그 중요성이 컸다.
  21. 공산당은 국민당을 우파, 좌파로 구분했다.
  22. 반(反) 장(將) 전쟁. 반 장개석 전쟁.
  23. 반란. 위의 세명이 주축으로 일본, 공산당과 연합한 후 장개석을 향해 반란을 일으켜 중화공화국(中華共和國, 1933 ~ 1934)를 선포했으나 2달도 되지 않아 진압당했다.
  24. 노구교라는 장소에서 몇 발의 총성이 들리고, 일본군 병사가 잠시 사라졌는데 일본은 중국군이 그 병사를 죽인 것으로 간주하여 노구교를 점령하고 이어 화북을 공격해 중국 침략을 가속화했다. 사실 그 병사는 실종된게 아닌 20분 후 돌아왔는데 일본은 그저 중국 침략을 위한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였다.
  25. (天皇, Tenno, 덴노). 일본 군주의 칭호이다. 영어권에선 그냥 황제(皇帝, emperor)로 번역한다.
  26. 장개석의 유언이라고 전해진다. 진위여부는 불확실하나 유언 자체가 인상적이고 장개석이 중국을 위해 평생을 투신했다는 점에서 장개석을 나타내는 구절로 자주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