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1 머스탱

노스 아메리카 P-51 머스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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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D 머스탱
항공기 정보
종류 프롭 전투기
제조 노스 아메리카
설계 노스 아메리카
운영 미국
사용연도 1942년~1984년(도미니카 공군)
생산량 15,000 이상
정원 1명
엔진 롤스로이스-멀린 61
출력 1,490 마력
속도 703km/h
무장 12.7mm(50구경) M2 브라우닝 기관포 6정
250kg 항공폭탄 ×2 , T-64 HVAR 5인치 로켓
길이 9.83m
11.28m
높이 4.08m

P-51 머스탱미국 노스 아메리카의 전천후 프롭 전투기다.

가장 뛰어난 프롭 전투기로 평가되는 머스탱은, 연합군의 전천후 전투기다. 긴 항속거리를 이점으로 유럽 전선과 태평양 방면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전후에도 한국전쟁을 비롯한 전선에서 활약하며 프롭기계의 전설로 회자된다.

개발[편집 | 원본 편집]

배경[편집 | 원본 편집]

히틀러나치 정권 아래의 독일 제3제국은,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어권 지역을 장악해 가며 유럽으로 급격한 팽창정책을 펼쳤다.

이에 유럽의 안보 상황이 불안해지며 점차 전쟁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자 영국은 군비를 재정비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특히 최강을 자랑하는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에 맞설 공군의 전투기 전력 확충이 시급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영국은 걸출한 프롭 전투기인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생산하고 있었지만 막 생산을 시작해 수량을 확보하는 수준이라 유럽의 정세에 대비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였고 다른 기종들은 루프트바페의 Bf109를 상대하기엔 성능적으로 무리라 보았다.

그래서 당장 급한 전투기 전력 확보를 위해 해외 직도입을 선택한 영국은 우호적인 동맹국이면서 국제정세 상 무기 도입이 가능한 미국에 접근하여 전투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한다.

영국은 구매 사절단을 꾸려 미국으로 보내 전투기 기종을 물색하게 했고 결국 미국이 가지고 있던 기종 중 비록 요구사항은 충족하진 못하지만 당시 상황에는 감지덕지였던 P-40 워호크를 도입 도입 하기로 한다.

그러나 워호크의 생산 업체인 커티스 사의 생산 현황이 당장 미군 납품 물량을 대기도 빠듯했던 상황이라 결국 노스 아메리카 사에도 위탁생산을 건의해 물량을 충당하기로 한다.

하지만 노스 아메리카 사는 영국 사절단에게 역제안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넉 달의 기간만 주면 워호크를 능가하는 새 전투기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신형기를 만들어 준다니 영국 입장에선 환영할 일이였지만 이 무모한 제안에 긴가민가 하면서도 요구사항 충족할만한 전투기를 만든다면 이를 300대를 구매하기로 계약을 맺는다.

그렇게 머스탱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탄생[편집 | 원본 편집]

사실 노스 아메리카가 제안한 이 무모한 도전이 할만 하다고 생각했기에 선뜻 영국 사절단에게 제안한 것이였다. 이미 노스 아메리카는 미군 육군항공대에 제시했던 신형기 설계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걸 조금만 손보면 영국 친구들이 원하는 전투기를 바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노스 아메리카의 수석 설계사 에드거 슈무드의 작품인 NV-73 계획은 이전과는 다른 개념을 채용해 속도와 항속거리 면에서 출중한 성능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하였다.

개발팀은 NV-73을 바탕으로 제시 기간보다 짧은 117일 만에 시제기까지 완성해 냈고 NV-73의 성능을 확인한 영국군은 크게 만족하며 머스탱이란 이름을 붙여 320대를 도입한다.

처음 나온 머스탱 Mk.1을 1942년에 실전 투입한 영국군은 대체적으로 호평했고 스핏파이어와 적기 Bf109에도 뒤지지 않는다 평했으나 문제는 4,000미터 이하 낮은 고도에서만 제 성능을 발휘했고 그 이상에선 급격한 성능 하락이 발생하여 대다수 고공에서 발생한 실전에 비춰 봤을 때 실 공대공 전투엔 부적합한 기종으로 판단한 영국 공군은 머스탱에 실망하고 지상공격기로 차츰 전환된다.

그러나 머스탱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이들은 머스탱의 한계가 설계상 문제보단 단지 사용 엔진이 문제라고 생각했고 엔진을 교체하는 간단한 변경으로 고성능 전투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 보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영국 공군의 시험비행사 롤란드 하커는 머스탱의 고고도 성능의 한계가 낮은 엘리슨 엔진의 출력 때문으로 스핏파이어의 롤스로이스 멀린 61 엔진을 달면 그래도 쓸만한 기종이 될 것이란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의 의견에 따라 5대의 머스탱 Mk.1의 엔진을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으로 교체하였고 1942년 10월에 시험비행을 개시한다.

환골탈태[편집 | 원본 편집]

그러나 비교적 쓸만한 기체가 되리라 생각했던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새로운 머스탱은 당시 어떤 프롭기를 상회하는 성능의 고성능 제공기로 환골탈태 하며 영국군의 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머스탱 Mk.2로 명명된 이 신형 머스탱은 모든 영역의 고도에서 당시 최고의 비행 성능을 보여주었고 700km 이상의 고속 성능과 긴 항속거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정작 환호한 쪽은 영국보단 본 제작국인 미국이었다. 갑작스럽게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은 비교적 구형 기종으로 편성된 전투기 전력을 가지고 많은 피해를 봤는데, 영국처럼 제공 임무는 힘들다 판단하여 공격기로 굴리던 머스탱(당시 제식명: A-36)이 느닷없이 최강의 제공기로 변모하는 걸 목격한 미군은 멀린 61엔진을 라이센스해 A-36을 재배치한다.

비록 처음엔 공격기로 쓰던 기억 때문에 P-51이란 제식명을 부여받고 실전에 투입된 뒤에도 공격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장거리 항속능력에 힘입어 P-47 썬더볼트 대신 미 육항대의 폭격기 호위기로 점차 전선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성능[편집 | 원본 편집]

머스탱은 최고의 프롭 전투기란 칭호답게 제2차 대전기의 여러 쟁쟁한 타 프롭기와 동급으로 평가된다.

머스탱의 핵심은 긴 항속거리와 고속 비행성능으로 축약할수 있는데, 이러한 강점은 라미나 윙 방식의 주익과 머스탱에게 새 날개를 달아준 영국제 롤스로이스 멀린 61 엔진의 조합에서 비롯되었다.

새로운 방식의 라미나 윙 익형은 날개 굴곡이 주익 중심에 위치하여 가운데가 불룩 튀어나온 방추형 단면을 띄게 되며 굴곡이 날개 전면부에 위치했던 당대 항공기들보다 익단이 유체와 접촉하는 면이 좁았고 이는 항력의 감소라는 큰 이점을 부여하며 동일 조건에서 타 기종들보다 높은 연료 효율과 빠른 속도를 내는 것이 가능했다. 거기다 고출력의 터보차저 엔진인 롤스로이스 멀린 61 엔진은 1천 마력이 넘는 1,460 마력의 출력을 제공하였고 고성능 과급기가 장착되어 있어 강제로 연료를 분사하는 체계로 고도에 상관 없이 제 성능을 발휘하며 머스탱의 우수한 공력 특성이 맹점 없이 발휘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머스탱은 항속거리가 기본 1,600km를 넘어섰고 보조 연료탱크를 달 경우 2,700km라는 경이적인 항속 능력을 보여주며 최고의 폭격기 호위전투기로 떠올랐고 저고도,고고도 모두 성능 변화 없이 수평 비행 기준으로 최대 700km/h가 넘는 고속을 내, 당시 프롭기들 중 독보적인 고속 성능을 낼 수 있었다.

또한 머스탱의 주 무장은 좌우 주익에 배치된 12.7mm 50구경 기관총으로 초기형은 4정, 후기형부턴 6정을 보유해 일제사격시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였고 추가적으로 로켓 6발을 장착하여 지상을 공격하는 공격기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하지만 머스탱은 대전기 프롭기 중 최강이라곤 할 순 없었는데, 오히려 타국의 상위급 제공기들과의 비교했을 시 머스탱이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당장 미군 내에서만 해도 고고도 고속성능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머스탱을 압도하던 콜세어가 있었고 Bf109K형과 Fw190D형처럼 후기형 독일 전투기들도 머스탱보다 순항 속도를 제외한 선회력과 상승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그리폰 엔진을 쓰는 영국의 후기형 스핏 파이어에게도 부분적인 열세를 보이며 전반적으로는 제공기보단 장거리 호위전투기에 가까웠던 기종이라 평가된다. 그래도 태평양 전선에서 만난 일본 전투기들의 경우, 일부 선회전 상황을 제외하고는 머스탱의 상대가 될 수 없어서 태평양 전역에서만큼은 고성능의 제공기로 활약할 수 있었다.

머스탱의 설계 자체도 문제가 없다곤 할 수 없었으며 가장 큰 문제는 연료 탱크의 배치와 머스탱의 강점이기도 한 라미나 윙 방식의 층류익이다. 무엇보다 개량으로 추가된 중앙 연료탱크는 옥의 티로, 어중간하게 연료가 남아있을 경우 무게중심이 뒤로 쏠리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전 상황에서 조종사들에게 부담을 주었다. 이에 중앙 연료탱크의 연료를 먼저 소진해 작전구역에 도달할 시점에선 관련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했다.

층류익의 경우, 날개에 흐르는 공기가 음속에 가깝게 가속되며 발생하는 항력을 감소시키는 점에 있어 머스탱의 항속거리와 고속성능의 핵심이 되었지만 높은 받음각에서는 양력을 발생시키지 못하며 기체가 실속할 위험이 컸다.

활약[편집 | 원본 편집]

제2차 세계대전[편집 | 원본 편집]

머스탱은 2차 세계대전 동안 9천여대의 적기들을 격추시키며 연합군 기종 중 가장 많은 격추수를 기록하였다.

유럽 전역[편집 | 원본 편집]

Bott4.jpg

전투기로서 머스탱이 전장에 모습을 보인 건 1943년 독일 본토폭격 작전이다.

연합공군의 폭격 부대를 호위하던 호위기들은 중부 유럽에 위치한 독일 인근까지가 항속 한계라는 단점이 있어, 폭격기가 독일 영공에 진입한 이후엔 귀환해야 했다. 루프트바페(독일 공군)[1]의 요격기들은 이 점을 간파하고 독일 영공에 들어온 시점부터 Bf109와Fw190로 구성된 요격부대가 무방비 상태의 폭격기들을 습격했다.

연합 공군은 같은 일이 반복되자 일시적으로 작전을 중단할 만큼 큰 피해를 입었고 대책 마련이 필요하게 되었다. 루프트바페의 전력에 타격을 주기 위한 대규모 항공 작전인 일명 대주간(The Big Week)을 수립하면서 당시 재배치 되기 시작한 머스탱이 작전에 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긴 항속거리를 보유한 머스탱들이 8공군 주력 전투기로 배치가 시작되었다.

1944년 2월 20일 부터 재개되어 25일까지 5일 간 진행되었던 이 작전에서, 머스탱은 폭격기 부대를 밀착 호위하며 독일 영공으로 진입하였고 여느때와 같이 요격을 위해 접근하던 독일 전투기들을 궤멸시키며 큰 성공을 거둔다. 머스탱으로 인해 상승하는 족족 격추당하며 이전같은 일방적인 요격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된 루프트바페는 사실상 제공권을 상실한데다 요격전 과정에서 많은 전투기 전력을 잃게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대주간으로 인해 독일군 에이스들이 대부분 전사함으로써 루프트바페는 물적 전력 복구는 상당부 달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인적 전력은 종전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대주간을 기점으로 머스탱은 제8공군의 정식 호위기로 배치되었지만 대부분 임무는 대주간 때와 동일하게 폭격기를 밀착 호위하는 방향으로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둘리틀 준장[2][3]이 지휘권을 잡게 된 후부터 밀착 호위는 비 효율적이라 판단한 그에 의해 프리 헌트(Free Hunt)란 자유 요격 작전으로 운용 방침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밀착 호위 임무에서 벗어난 머스탱들은 긴 항속거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독일 영토 깊숙히 내습해 들어갔고 독일로 침투한 8공군의 머스탱 부대들은 비행장과 전략 거점들을 파괴해 제3제국의 항공력을 말소하였다.

1944년 이후, 루프트바페는 대주간과 자유요격 작전으로 인해 완전히 제공권을 상실했고 머스탱들은 지상군을 지원하며 잔존한 독일 기갑전력과 지상병력들 공격으로 많은 수가 전용된다.

유럽 전선에서 머스탱은 에이스들의 기체로 유명하였고 10대 이상 격추수를 낸 슈퍼 에이스에는 머스탱 조종사들이 상당수 포진되어 있었을 만큼 전황을 바꾼 병기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기종이다.

태평양 전역[편집 | 원본 편집]

유럽에서의 인상깊었던 활약이 무색하게 태평양에선 그 활약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도 그런것이 태평양에서의 전략 폭격은 후반부 부터 진행 되었는데다가, 머스탱이 유럽에서 활개칠 수 있었던 가장 큰 강점이 우월한 항속거린데, 태평양에선 해당 구역까지 항모 기동부대에 의해 움직이는 해군 함재기들은 굳이 긴 항속거리가 없어도 해당 구역의 항모에서 이착함을 하면 그만이라 딱히 육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태평양에선 걸출한 기종인 F6F 헬캣이 일본 항공전력을 박살내 놓은 뒤였기에 상대적으로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늦게 전선에 투입되었어도 악명 높던 독일기들을 상대한 그 위력은 여전했기에 상대적으로 허접했던 일본기들에게 재앙을 선사해 주었다.

절대국방선이 뚫리고 일본 본토를 폭격 할 수 있게 되면서 유럽 전선에서처럼 머스탱은 폭격기들을 호위하면서 일본 본토를 공습했고 내습 작전에도 투입되어 주요 시설들을 공격하는 공격기의 역할도 맡았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국지방공 전투기들과 다수 교전을 벌였으며 손상을 입고 불시착한 기체를 일본군이 노획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편집 | 원본 편집]

머스탱은 우리 대한민국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전투기다. 1950년 6월 26일에 일본으로 건너간 10명의 조종사들이 7월 2일에 10대의 머스탱을 몰고 우리 영공에 들어오며 대한민국 공군의 전투기 운용 역사가 시작된다.

1952년 1월 12일에 있었던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선 미 공군이 끝끝내 성공하지 못한 폭격 임무를 인계받은 공군은, 12일의 두차례 시도에선 실패했지만 제1전투비행단장 김신 대령에 의해 초저공 폭격으로 전환한 15일 폭격에서 철교 2군데를 파괴하면서 임무에 성공한다. 6대의 머스탱으로 성공시킨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은 우리 공군의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입증한 작전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공군의 대표적인 활약상이다.

공군의 머스탱은 8,495 소티를 기록하였지만 이미 제트기들이 장악한 하늘 대신 공습 및 항공지원 임무를 수행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후[편집 | 원본 편집]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이 머스탱을 운용했다. 아랍 연합국의 전투기와 교전하거나 지상공격에 사용되었는데, 이때 날개와 프로팰러를 이용해 초저공 비행으로 연락선을 끊어놓으며 활약한 머스탱 조종사도 있었다.

변형[편집 | 원본 편집]

계열기[편집 | 원본 편집]

P-51A

머스탱의 최초기형으로 영국이 P-40 워호크를 도입하는 대신 노스 아메리카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개발된 기체이다. 주로 영국 공군에서 사용되었고 공중전 능력은 그렇게 좋은 평은 받지 못하며 개발 목적인 폭격기 호위 외엔 효용성이 떨어졌는데, 가장 큰 이유는 고고도에서 효율이 떨어지는 엘리슨 엔진을 사용하며 공중전에서 큰 제약이 걸린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때문에 A형을 소량 도입한 미군은 공격기로 운용하기도 했고 날개 포일과 파일런을 개량한 지상공격기인 A-36 아파치로 개조하기도 했다.

B/C형

P-51B(C형)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사용하게 되며 우리가 아는 그 머스탱의 시작이 되었다. A형과 비교했을 때 다른 전투기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변화가 큰 편으로, 엔진의 교체로 인해 최고 속도 700km/h, 최대 항속거리 2700km가 이 형식에서 달성되었다. 여기에 조종석 후방에 추가된 연료탱크[4]로 항속거리가 더욱 증가한 한편, 대용량 멀린 엔진의 장착으로 라디에이터가 기체 중앙으로 이동하면서 무게중심이 안정되는 이점까지 가져와 A형에선 그저 그랬던 2선급 기종이 단숨에 최강의 프롭기중 하나로 부상하는 역변을 거쳤다.

그래도 기체의 외형은 A형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새장형 케노피와 주익에 배치된 4정의 50구경 기관포를 유지하고 있었다.

D형

P-51D(K형)

머스탱 하면 가장 먼저 생각되는 형식인 D형은 B형의 새장형 케노피를 시야 확보가 용이한 물방울형 케노피로 변경하고 날개의 기총도 6정으로 늘려 화력을 강화했다. 여기에 K-14 자이로 조준기까지 추가되어 공중전 능력은 B형을 상회했다. 다수의 B/C형들이 개량과정을 거쳐 D형으로 재생산 되었고 2차대전 후반 미 육항대의 주력 기종으로 운용되며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에서 종전때까지 활약했다. 또한 전후 동맹 및 우방국들에 공여되기도 했으며 우리 대한민국 공군이 도입한 첫 전투기 역시 D형 머스탱으로, 한국전쟁 동안 여러 인상깊은 전적들을 남겼다.

H형

P-51H

몰락 작전을 대비해 계획되었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실제 양산은 진행되지 못했다. 전장과 날개 폭이 늘어나며 전반적인 크기가 증가하였고 상당한 경량화를 달성하여 증가한 크기에도 불과하고 중량은 이전 형식들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그 덕분에 최고속도도 시속 750km로 증가하고 항속거리 2,000km대를 보조 연료탱크 없이 달성하는 강력한 기종이 될 예정이었으나 전쟁이 끝나면서 취소되었다.

파생형[편집 | 원본 편집]

A-36 아파치

미 육군항공대에서 지상공격기로 사용하던 초기형 머스탱으로 멀린엔진 장착 전이라 고고도 성능이 좋지 못했던 당시 문제 때문에 미군 도입분들은 이처럼 지상공격 전용으로 돌려지곤 하였다.

North American F-82B USAF.jpg

트윈 머스탱

머스탱 동체 두개를 연결한 2인승 복좌기이며 주로 정찰 임무에 사용되었다. 2인승이기 때문에 교대로 조종간을 잡을 수 있었고 비록 모양새는 빠지는 편이긴 하나 한국전쟁에서 최초의 격추 기록을 수립하였다.

운용국가[편집 | 원본 편집]

대전기 운용[편집 | 원본 편집]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중화민국

소련

폴란드

대전기 이후[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이스라엘

필리핀

이탈리아

스웨덴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볼리비아

남아공

스위스

과테말라

아이티

도미니카

엘살바도르

쿠바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중화인민공화국

각주

  1. Luftwaffe, 직역하면 항공 무기란 뜻인데, 독일어로 공군을 뜻하는 보통명사다.
  2. B-25 미첼 폭격기를 항모 호넷에서 이함시켜 도쿄를 공습했던 둘리틀 특공대의 둘리틀이다.
  3. 특공대 당시 계급은 대령이었다.
  4. 상술했듯 문제가 있는 설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