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 |
---|---|
4.19 혁명에 참여한 시위대의 모습 |
|
사건 정보 | |
날짜 | 1960년 3월 15일 ~ 4월 26일 |
장소 | 대한민국 전역 |
참가 | 대한민국 국민, 민주당 |
원인 | 3·15 부정선거 |
목적 |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
결과 |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출범 |
인명피해 | 사망 185명, 부상 1,500여명 |
4·19 혁명(四一九革命) 또는 4월 혁명(四月革命)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마산 3·15 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생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1]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 출처 : 위키백과:4·19 혁명#배경
1960년 1월말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운동 도중 신병 말기라는 판정을 받게 되어 하와이 병원으로 급히 갔으나 결국 선거 한달 전인 2월 15일 신병 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은 건재하였고, 이 소식을 듣고 이승만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활동에 열을 올렸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도록 하는[2]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대구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15일 자유당의 대대적인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함으로써, 마산 시민들의 분노감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결국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고, 내무부장관이 홍진기로 교체·임명되는 등 정국을 수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4월 18일의 서울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평화행진을 하면서 귀교하는 도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로부터 취재한 기자들 일부와 함께 학생들이 피습된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다.[3]
경과[편집 | 원본 편집]
3·15 부정선거와 의거[편집 | 원본 편집]
1960년 3월 15일에 국민투표에 의해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당시 부통령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경쟁자였던 조병옥 민주당 후보가 갑자기 서거하여 자연스럽게 당선되었으나 부통령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과정에서 정치 깡패를 동원하고 자유당에 투표한 가짜 투표용지를 투입하는 등 부정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마산시에서는 민주당 간부들이 선거 당일날 경찰들의 제지를 뚫고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하는 모습을 확인하였다. 민주당 간부들은 당일 선거 포기 선언을 하고 시위를 준비하였고, 이내 1000여명의 마산 시민들이 민주당 당사에 모여서 시위를 하였다. [4]
3·15 마산시위는 2010년 3월 9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시민 의거로 인정받았고, 실질적으로 '국가기념일'로 확정됐다.[5]
제2차 마산시위[편집 | 원본 편집]
같은 해 4월 11일, 마산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김주열 시체 인양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무기고 문을 파괴하고 수류탄 1~3를 탈취했으며 경찰서장실 앞뜰에 투척 폭발시켰다.[6]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편집 | 원본 편집]
한편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생 3,000여 명이 구속학생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시가를 행진하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고려대학교 유진오(兪鎭午) 총장의 만류로 오후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귀교하던 도중 종로 4가 천일백화점에서 대한반공청년단 소속의 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하면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7]
4월 19일[편집 | 원본 편집]
4월 19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선언문에 자극을 받은 많은 대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이기붕 부통령 당선인의 자택으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는 곡사포까지 동원해서 학생들의 진입을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경찰들이 공격하는 과정에서 몇몇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제1공화국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기붕은 이미 자택을 빠져나와, 경기도 양주의 모 육군부대로 피신하였다. 경찰로부터 무기를 탈취하여 기동화된 무장시위대원들은 저녁무렵 종로와 을지로 일대를 휩쓸었다. 오후 6시40분경 소방차와 트럭등에 분승한 시위대원들이 종로3가를 지나다가 동대문 경찰서 앞을 통과할 무렵 경찰은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이곳에서 쌍방간 최초의 사격전이 벌어졌다. 40여대의 차량에 분승, 밤거리를 질주하며 시위하던 수백명의 시위대는 숭인동 근처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고 잠시 주춤했으나 밤8시경부터는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태우면서 27자루의 카빈총마저 탈취, 창동쪽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이에 앞서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앞에서 경찰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8]
무장시위대의 일부는 20여대의 차량에 분승,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쪽으로 몰렸다.[9] 안암동 근처 산에서는 20일 새벽까지 무장시위대원과 무장경찰 사이에서 사격전이 끝까지 벌어졌다.[10] 하지만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계엄군에 선제발포를 금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여 사태를 수습했다.[11]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시위 참여[편집 | 원본 편집]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력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 광정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선명하는 바이다. [중략]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 4월 혁명 제1선언문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데모가 있던 날 저녁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자유당 국회의원인 최규남으로부터 "서울대학생들도 데모에 나올 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4월 19일 아침 8시에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각 단과대학 학장회의를 소집했다.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데모를 벌일 기세를 보여 학장들이 황급히 달려나가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학생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윤일선은 경찰청과 법원에 전화를 걸어 학생들의 데모 참여를 만류할테니 최대한 관대한 처리를 요청하였다.
4월 19일 낮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신태환 서울법대 학장 등 7,8명의 학장들과 함께 국회의사당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까지 간 서울대 데모대를 찾아가 학교로 되돌아가라고 설득했다.[11] 학생들은 공부가 학생들의 본분이며,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학생들의 귀교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11]"이었다. 이어 학생들의 귀교 조건으로 내세운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동대문경찰서장을 만나고 왔는데 서울대생들은 건대, 중앙대 등의 데모대 대열과 함께 중앙청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11] 시위가 격화되면서 그는 학생들 옆을 따라갔다. 동아일보사 사옥 앞에서 서울대생도 아닌 불량차림의 청년이 데모대열에 끼어들어 선동하는 것을 본 윤일선은 "너 학생이냐"라고 물었다.[11] 학생들 사이에 끼어들어 유언비어를 선동하는 자들을 막기도 하면서 그는 시위 학생들과 동행하였다. 국민대학교 앞에 이르러 경찰들이 발포 사격을 가하자 그는 학생들의 앞에서 이를 가로막고 중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대학 앞에서의 경찰의 총격에 학생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사태를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11] 이어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학생들의 학교 복귀를 촉구하는 한편 경찰에 찾아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사면을 호소하여 학생들의 석방, 사면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데모대에 가담했던 학생들도 자연 해산했고 그도 학교로 되돌아왔다.
이후[편집 | 원본 편집]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되어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권유, 설득하였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외무부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했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In my younger days I certainly knew my people well and even now felt myself certainly one of them.
(내가 젊었을때에는 우리국민들을 잘 알고 이해해 왔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승만의 대답
이승만의 하야[편집 | 원본 편집]
이에 장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설득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결정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 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고 병원을 찾아 부상 학생들을 위문한 뒤, 방송에 애도의 뜻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 사임선언을 했다.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연설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승만 대통령 대국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
이리하여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후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추종자들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힘을 잃었으며, 연설 발표 당일 오후 4시에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한민국 부통령 장면이 그보다 하루 먼저 사퇴하였으므로 궐위 중인 부통령과 총리를 대신해 외무부장관 허정이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이기붕 일가 변사[편집 | 원본 편집]
4월 26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허정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관련자 처벌을 약속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이기붕 처벌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기붕의 처벌을 거부했다.
4월 27일 경무대의 비서관 박찬일이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의 집을 방문했다.[13] 박찬일은 이기붕의 딱한 처지를 말하며 망명의 길을 열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13] 허정은 이기붕의 망명을 결정하였다. 허정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박 비서관에게 확실한 언질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만송('이기붕'의 호)을 해외로 내보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13]'
그는 '만송('이기붕'의 호)이 부패와 부정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산 국가에서처럼 실권(失權) = 곧 죽음이라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민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체면에도 관계되는 일이었다.'[13] 고 했다. 그는 사태가 가라앉아 만송에 대한 공정한 재판이 가능할 때까지만 그를 해외로 안전하게 피신시킬 생각이었다.[14]
한편, 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은 4월 27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8일 새벽 0시경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승만은 이기붕 가족을 조문한 다음날 5월 29일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15] 작가 최인호는 그의 연재소설 《가족》에서 이승만의 죽음에 대해 '독재자다운 비참한 말로'라고 비평하였다.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편집 | 원본 편집]
1960년 4월, 부통령 장면은 잔여임기를 4개월 남겨놓고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그는 당시 현직 대통령 이승만의 유고 시 대통령직 계승서열 1위권자였다.
“ 장면 부통령 대국민 담화문
1. 본인은 오늘로서 부통령직을 사퇴한다. 3·15 부정선거로 인하여 3천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 불법과 불의에 항쟁하다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게 됨을 볼 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 것이다.
동시에 본인의 사퇴로서 권력을 갈취하여 압제와 폭정을 계속하는 이승만 정부에게 경종을 울리고, 나아가 자유·민주의 정신을 이 땅에 소생시켜,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조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2. 본인이 국민 여러분의 지지로서 부통령에 당선된 이래, 헌법이 본인에게 부여한 직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를 수행할 기관들은 이승만 정부의 고의적인 방해로 인하여 그 구성조차 보지 못하였으며, 그 외에도 독재화하여가는 정치, 파탄되어가는 국민경제, 혼란 일로의 사회상, 고립되어가는 외교 등을 시정하기 위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행정부에 대한 충고를 하였고, 이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함도 수차이었으나, 그때마다 거부당하였으며, 부득이 서면으로 한 본인의 진언도 아무런 반향을 보지 못하였다.
금년의 선거를 앞두고 이 박사의 4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유당과 정부는 재작년 12월에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야당 의원을 폭력으로 축출· 감금한 후,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을 개악했으며, 언론 기관과 야당활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평화적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 대한 불법 제한을 더욱 강화하는 등으로 부정선거의 복선을 갖추었고, 헌법정신에 배치되는 3월 조기선거, 유령 유권자의 조작, 입후보 등록의 폭력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부정 무더기표 투입, 3인조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에 대한 각종 방해, 부정개표 등으로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97퍼센트 내외의 여당 득표를 조작 발표함에 이르러서는 정권욕의 불법수단이 극한에 달하여 민주선거제도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17]
3. 이러한 부정, 살인선거 등에 대하여 국민의 분함은 가슴에 사무쳤고, 진리와 정의에 민감한 청소년 학도들의 시위운동은 전국 각지를 휩쓸게 되었다. 집권자의 사병화한 경찰은 평화적 시위 학도들에게 총탄을 퍼부었으며, 그도 부족하여 학살한 보복살상과 고문을 무수히 감행하여 국민을 경악케 하였고, 또다시 총탄을 퍼붓는 등 무단정책을 사용한 나머지, 드디어 법적 요건에 어긋나는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는 수치스런 사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대위기에 즈음하여 이 대통령은 3·15 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또 12년간 누적된 비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할 것이다.
4. 본인은 비록 부통령의 직을 떠난다 할지라도 민주투쟁 전열에서 국민들과 더불어 최후 승리의 날까지 분투할 것을 맹세한다.
5. 이번의 전국 학도 총궐기 운동은 우리 역사상 새로운 시기를 획하는 것으로서, 3·1 독립운동에 비견할 만한 금자탑이며, 이제부터 민족정기와 자유정신은 온갖 압제력을 물리치고, 광명의 천지를 개척하여 조국의 민주건설과 반공통일을 완수하게 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 끝으로 민주 수호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민족의 꽃'들에 대하여 그 명복을 빌며, 명예의 부상자 여러분의 쾌유를 소원한다.“ — 단기 4293년 4월 23일
장면은 부통령직 사임 이유로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대통령 직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여 이승만의 하야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18] 는 주장과, 두 번째로 부통령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 세 번째로 이승만의 불행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을 심는 것이 싫어서 였다고 하였다.[18][19][20]
장면의 부통령직 사임에 대해 이영석은 이승만이 퇴임하고 3.15 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 잔여 임기가 4개월도 안 되지만 대통령직이 장면에게 넘어오게 되어 있는데 이것을 거부한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18] [21]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에 대해 정략적 사임설을 주장, 그가 새 정부의 실권을 잡는데 보다 유리하리라는 정치적 타산에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고 비판했다. 독재 방지를 위해 내각책임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면 내각제 개헌을 실현해야 되는데, 현직 대통령에 있으면서 차기 정부 국무총리직 경쟁에 나서는 것은 여론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내다본 것이라는 것이었다.[18]
민주당 구파 인사였던 김도연은 1968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가 이승만 하야를 촉진했을 가능성은 인정하였으나, 당시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대통령직을 유지한다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18] [22]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김성식은 당시 《사상계》기고를 통해 4월 혁명의 의의를 일곱 가지로 제시했다.
- 민주주의는 가열한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것만이 가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점.
- 혁명의 성공으로 외국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을 높이 평가하게 하였다는 점.
- 혁명은 부정선거가 원인이나 근본정신은 20년간 누적된 부패정치와 사회악에 대한 항거였다는 점.
- 혁명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 민주체제가 성립했다는 점.
- 혁명으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
- 혁명으로 세계 민주운동사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점.
- 혁명으로 시민의 전체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동시에 한국 학생들의 정치, 도덕적 갱신과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는 국립4·19민주묘지가 있다. 홈페이지
각주
- ↑ '최루탄 박힌 김주열' 세계에 알렸던 허종 씨 별세 2008년 3월 23일 경남도민일보
-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1, 743
- ↑ 한대광 기자, “자유당 ‘3·15선거’서 40% 조작투표 시도 (한국어)”, 2008년 4월 17일 작성. 2010년 4월 14일 확인.
- ↑ 마산시의 민주당~:연시중,《한국정당정치실록 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지와사랑, 2001),233쪽.
- ↑ 경남CBS 최호영 기자, “50년 전 오늘, 최초의 민주화 함성이 울려퍼졌다 (한국어)”, 2010년 3월 15일 작성. 2010년 3월 30일 확인.
- ↑ 없어진 수류탄은 1~3개, 2개 폭발
- ↑ "고대생습격 깡패 빨리 잡으라" 1960년 4월 23일 동아일보
- ↑ 비화 제1공화국 (532)
- ↑ 비화 제1공화국 (533)
- ↑ 20일 새벽까지 사격전
- ↑ 11.0 11.1 11.2 11.3 11.4 11.5 4.19혁명 각계 인사 증언록 참조
- ↑ 李大統領下野決意(이대통령하야결의) 正·副統領再選擧(정·부통령재선거)도 實施(실시), 동아일보 1960년 4월 27일 기사
- ↑ 13.0 13.1 13.2 13.3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27페이지
- ↑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28페이지
- ↑ 弔辭/朴正熙가 李承晩에게 - 조갑제
- ↑ 이기택, 《한국야당사》 (백산서당, 1987) 123페이지
- ↑ 이기택, 《한국야당사》 (백산서당, 1987) 122페이지
- ↑ 18.0 18.1 18.2 18.3 18.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 ↑ 이용원-제2공화국과 장면:장면의 정치역정·생애(하), 대한매일, 1991년 6월 1일자, 6면
- ↑ 한국정당정치실록2:6.25 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연시중, 지와사랑, 2001) 241
- ↑ 야당 40년사(이영석, 인간사, 1987) 89
- ↑ 장면, 윤보선, 박정희 : 1960년대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백산서당, 2001), 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