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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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 {{출생일과 나이|1950|8|15}} 출생
*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 {{출생일과 나이|1950|8|15}} 출생
*사위 마크 앤서니 피터 필립스: {{출생일과 나이|1948|9|22}} 출생. 1973년 11월 14일 결혼,  
*사위 마크 앤서니 피터 필립스: {{출생일과 나이|1948|9|22}} 출생. 1973년 11월 14일 결혼, 1992년 4월 28일 이혼
1992년 4월 28일 이혼
*사위 티모시 제임스 해밀턴 로런스: {{출생일과 나이|1955|3|1}} 출생. 1992년 12월 12일 결혼.
*사위 티모시 제임스 해밀턴 로런스: {{출생일과 나이|1955|3|1}} 출생. 1992년 12월 12일 결혼.
**외손자 피터 마크 앤드루 필립스: {{출생일과 나이|1977|11|15}} 출생. 영국 왕실 최초로 병원에서 태어난 왕족이다. 이후부터 왕족들도 왕궁 대신 병원에서 출산하기 시작했다.
**외손자 피터 마크 앤드루 필립스: {{출생일과 나이|1977|11|15}} 출생. 영국 왕실 최초로 병원에서 태어난 왕족이다. 이후부터 왕족들도 왕궁 대신 병원에서 출산하기 시작했다.

2024년 1월 31일 (수) 13:46 판

엘리자베스 2세
Elizabeth II
인물 정보
본명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Elizabeth Alexandra Mary)
다른이름 요크의 엘리자베스 공녀 전하(Her Royal Highness Princess Elizabeth of York)
엘리자베스 공주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Elizabeth)
여왕 폐하(Her Majesty The Queen)
출생 1926년 4월 21일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메이페어 브루턴 거리 17번지
사망 2022년 9월 8일 (향년 96세)
스코틀랜드 애버딘셔 밸모럴성
국적 영국
학력 홈스쿨링
직업 왕족(공주여왕)
종교 성공회
신체 163cm, O형
배우자 필립 마운트배튼 공
가족 아버지 조지 6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여동생 마거릿 로즈 공주
자녀: 장남 찰스 3세, 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 차남 앤드루 왕자, 3남 에드워드 왕자
손자: 윌리엄 왕세자, 해리 왕자
외손자 필립, 외손녀 자라
증손자 조지 왕자, 루이 왕자, 아치 왕자
증손녀 샬럿 공주, 릴리벳 공주
활동기간 1945~1952년 영국 육군 장교(최종 계급: 대위)
1952년 2월 6일 즉위

영국 윈저 왕조의 제4대 국왕. 1952년에 재위하여 2022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70년간 재위하면서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탄생과 어린 시절

1926년 4월 21일, 조지 5세 국왕의 차남인 앨버트 왕자의 장녀로 태어났다. 앨버트 왕자는 귀족(백작) 가문의 딸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결혼한 지 3년 만에 첫째 엘리자베스를 낳아서 무척 기뻐했고, 조지 5세도 첫 손주인 엘리자베스를 무척 귀여워했다. 엘리자베스는 순조롭게 자라서, 생후 1개월이 지난 5월 29일에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 엘리자베스 공주는 자신의 이름인 ‘엘리자베스’를 잘 발음하지 못하여, 주위 어른들은 그녀를 ‘릴리벳’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엘리자베스’의 애칭으로는 ‘엘리’, ‘리사’, ‘리자’, ‘베스’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릴리벳’이라는 애칭을 사용한 인물은 엘리자베스 2세가 유일한데, 훗날 엘리자베스 2세의 손자인 해리 왕자는 2020년 왕실에서 독립한 이후에 태어난 자신의 딸에게 할머니의 애칭에서 따온 ‘릴리벳’이라는 이름을 붙여 화제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30년 8월 21일에는 여동생 마거릿 로즈 공주가 태어났다. 이로써 엘리자베스 공주는 언니가 되었다. 공주 자매는 학교를 다니는 대신에 상류층(왕족, 귀족) 딸들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즉 궁정에 개인 가정교사들을 초빙하여 교육을 받았다. 당시는 일종의 과도기였는데, 상류층의 딸들도 하나둘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보우스라이언에게 “딸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유했지만, 보우스라이언은 전통적 방식의 교육을 고수했다. 나중에 자매는 학교에 다녀보지 못하여 아쉬움을 느꼈다고 한다.

왕위 계승자

엘리자베스 공주의 아버지인 앨버트 왕자는 차남이었으므로, 본래 왕위 계승과는 관련이 없었다. 또한 그의 형 에드워드 왕세자는 건강하고 똑똑한 인물이었던 반면, 앨버트 왕자는 형보다 여러 모로 부족했고 특히 말더듬이 증세로 고생했다. 누가 보더라도 에드워드 왕세자가 차기 국왕으로 손색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에드워드 왕세자는 1936년 ‘에드워드 8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했다. 당시 그는 미혼이었으나 아직 젊었기에, 곧 결혼하여 후사를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는 1936년 즉위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스스로 왕위를 포기했다. 그가 사랑한 월리스 심프슨이라는 여성 때문이었다. 심프슨은 외국인(미국인)이었고, 유부녀였으며, 게다가 이미 1차례 이혼한 경력이 있었다. 당시 영국 왕실의 법도로는 도저히 며느릿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왕실과 의회는 에드워드 8세에게 “왕위와 월리스 심프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고, 에드워드 8세는 사랑하는 여인을 택했다. 심프슨은 남편과 이혼했고, 왕위와 왕족 신분을 모두 버린 에드워드는 그녀와 결혼하여 프랑스에서 살았다.

이로써 본래 왕위와 전혀 무관했고 왕위에 뜻도 없었던 차남 앨버트 왕자는, 형을 대신하여 ‘조지 6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조지 6세와 왕비 보우스라이언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었기에, 고작 10살이던 큰딸 엘리자베스 공주가 자연스레 다음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었다. 당시 영국의 왕위 계승은 남자 우선이었으므로[1] 남동생이 태어났다면 엘리자베스 공주는 부담을 피할 수 있었겠지만, 두 딸을 모두 제왕절개로 낳은 보우스라이언 왕비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했다.

공주 시절

조지 6세가 재임하던 시절은 영국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격동의 시대였다. 그는 말더듬이 증상을 고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고[2], 매일같이 연설하며 국민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전쟁이 심해지자 왕실과 의회에서는 국왕 일가의 피난도 고려했지만, 조지 6세는 피난을 거부하고 런던의 왕궁을 지켰다.

신하들은 보우스라이언 왕비에게 “두 공주만이라도 캐나다로 피난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왕비는 “공주들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나는 국왕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국왕은 왕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는 런던에 독일군의 공습이 퍼부어지고 있었고, 왕궁도 습격을 받아 직원 1명이 사망하기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도 국왕 일가는 국민과 함께하겠다며 왕궁을 지켰고, 처음에 조지 6세를 못미더워하던 국민들도 조지 6세와 그의 가족을 더없이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전쟁 당시 엘리자베스 공주는 10대의 어린 소녀였으나, 공주이자 왕위 계승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녀는 유모, 가정교사, 시종들을 거느리고 정기적으로 런던 시내를 순회하며 국민들의 생활을 살펴보았다. 또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국민들, 특히 자신과 같은 또래의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전했다.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왕궁에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며 위로하는 행사도 개최했는데, 이때 엘리자베스 공주는 왕실 요리사로부터 조리법을 배워서 손수 팬케이크를 만들었다.

1945년, 19세가 된 엘리자베스 공주는 영국군 장교로 입대했다. 아버지 조지 6세는 딸이 군대에 가겠다고 하자 반대했으나, 엘리자베스 공주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거듭해서 청하여 결국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영국 육군 여군부대에서 운전과 정비 업무를 했다. 동년 8월 15일, 전쟁은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1947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공주는 21세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사회는 어수선하고 어렵던 시절이었다. 차기 왕위 계승자로 예정되어 있던 그녀는 “나의 삶이 길건 짧건 간에,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녀는 2022년 9월 8일에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사랑과 결혼

한편 엘리자베스 공주는 13세 때부터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상대는 5살 연상인 그리스 왕자 필립이었다. 그리스 왕실이 망하면서 필립과 그의 가족은 그리스를 떠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등 여러 나라들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필립의 가족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어머니 앨리스는 선천적으로 청각장애가 조금 있었고[3], 힘든 망명생활로 신경쇠약을 앓다가 정신질환(조현병)을 얻어서 요양원에 입원했다. 셋째 누나 체칠리아는 1937년 넷째를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시동생 루트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런던에 가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하여 26세에 요절했고, 그녀의 남편 게오르크ㆍ장남 루트비히ㆍ차남 알렉산더도 함께 사망했다.[4]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아내와 셋째 딸의 비극으로 방황하며 나머지 자녀들을 돌보지 못했고, 필립은 큰외삼촌 조지 마운트배튼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았으나, 체칠리아 일가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조지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필립을 돌보는 것은 작은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의 몫이 되었다. 필립은 루이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루이도 필립을 몹시 아꼈으며, 필립의 아이들을 손주처럼 예뻐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필립은 열심히 공부하여 영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훤칠한 장신의 미남이었으며, 공부도 운동도 모두 잘하는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1939년 조지 5세 영국 국왕이 보우스라이언 왕비, 큰딸 엘리자베스 공주, 작은딸 마거릿 공주와 함께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18세의 생도였던 필립은 국왕 일가를 안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엘리자베스 공주는 필립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이후 엘리자베스 공주는 계속 필립에게 편지를 보내고, 사관학교로 그를 면회하러 갔지만, 필립은 당시 고작 13세였던 그녀를 그저 어린아이로만 생각했다. 그래도 공주이자 장래 왕위 계승자인 엘리자베스의 편지와 면회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성실히 답장을 보내주고 면회에도 응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필립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1943년 12월, 휴가를 맞이한 필립은 왕궁에서 열린 왕족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여 오랜만에 엘리자베스 공주와 만났다. 17세가 된 그녀는 한층 아름답고 성숙해져 있었고, 그제야 필립도 그녀에게 반했다. 이듬해에 필립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엘리자베스 공주는 그 자리에서 즉시 수락했으나, 아버지 조지 6세는 “아직 엘리자베스는 어리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결혼하라”고 만류했다.

1947년 11월 20일, 26세의 필립과 21세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종전된 지 고작 2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사회의 모든 부분들이 부족하고 혼란스럽던 중에, 장래 왕위 계승자가 될 공주의 결혼은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경사였다. 필립은 그리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고, 영국으로 귀화했으며, 종교도 정교회에서 성공회로 개종했다. 한편 필립의 누나들과 그 가족들은 아무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필립의 매형들이 모두 나치당원 내지는 나치 독일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싸웠기에, 종전 직후 독일에 대한 감정이 몹시 험악하였다.)

이듬해(1948년) 11월 14일, 엘리자베스 공주 부부는 첫째 찰스 왕자를 낳았다. 공주 부부는 첫 아이의 탄생을 무척 기뻐했고, 찰스 왕자는 부모와 양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1950년 8월 15일에는 둘째 앤 공주가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남편, 아들,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여왕 즉위와 재임 시절

1952년 2월 6일, 케냐를 순방 중이던 엘리자베스 공주 내외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공주의 아버지 조지 6세 국왕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향년 56세). 조지 6세는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올라, 어려운 시대에 재임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심신의 고통이 심했던 그는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이 때문에 폐암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보우스라이언 왕비는 시아주버니 에드워드 8세와 형님 월리스 심프슨을 무척 미워했다.)

‘공주’로서 출국했던 25세의 엘리자베스는, 이제 ‘여왕’으로서 귀국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3년 6월 2일,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사람들은 새 시대의 젊은 여왕에게 환호하며, 그녀에게 많은 기대를 했다.

전후 현대의 왕실은 더 이상 전제군주정이 아닌, 상징적인 입헌군주정이 되었다. 젊은이들은 왕실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의아해하기 시작했고, 기존 질서에 대해 도전하고 저항했다. 이러한 시대의 왕실을 이끌게 된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실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대관식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했는데, 이는 영국 역사상 최초이자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일이었다. 윈스턴 처칠 총리는 반대했으나, 젊은 신세대였던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끝내 이루어냈다. 성유(聖油) 도유(塗油)와 영성체 장면을 제외한 전 장면이 생중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대관식을 시청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계기로 텔레비전이 많이 팔렸을 정도였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는 즉위 이후로도 이어졌다. 영국 왕실은 공영방송 BBC와 합작하여 왕실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했고, 왕족들의 공적인 업무와 사생활을 국민에게 공개했다. 영국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부지런히 공무를 수행하는 왕족들을 보며 국왕과 왕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왕족들의 평범한 가정생활과 사적인 모습을 보면서 친근감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2세는 해외순방도 꾸준히 했다. 과거 대영제국 시절 영국은 수많은 식민지를 두었는데, 영국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로 독립한 식민지들이 모여 ‘영연방(英聯邦、Commonwealth of Nations)’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영국 국왕이 수장을 맡고 있다. 영연방 국가들끼리는 경제ㆍ사회ㆍ군사 등등 여러 부문에서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고 있으며, 엘리자베스 2세는 영연방 국가들을 순방하며 그들과 영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2년에는 윈저성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엘리자베스 2세와 왕족들은 본궁(本宮)인 버킹엄궁전보다 윈저성을 더욱 좋아하고 편안히 여겼기에, 윈저성의 훼손은 무척 큰 충격이었다. 복구에 소요되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국민들의 세금으로 마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갑론을박이 많았다. 여왕은 버킹엄궁전을 개방하여 윈저성 복구비용에 사용했고, 면세 특권을 포기하고 세금을 납부하기 시작했다.

2011년 5월, 엘리자베스 2세는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아일랜드는 영국 바로 옆에 위치한 나라이지만, 영국 왕족의 방문은 엘리자베스 2세가 최초였다. 영국으로부터 오랫동안 식민통치를 받으며 싸워왔던 나라이기에, 영국 국왕의 방문은 매우 의미가 깊고 상징적인 행사였다. 여왕은 아일랜드어로 관용과 화해의 중요성에 대하여 연설했다.

2012년에는 런던에서 제30회 하계올림픽이 열렸다. 관습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는 개회선언을 했고[5], 개막식 영상에도 출연했다. 물론 헬기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장면은 대역이 대신 연기했다.

한국과의 인연

1999년 4월, 엘리자베스 2세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국빈 방문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체험했고, 장상(張裳) 총장의 안내로 이화여자대학교를 둘러보았다. 경상북도 안동시에서는 봉정사(鳳停寺)와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도 관람했고, 전통 방식으로 고추장김치를 만드는 모습도 흥미롭게 보았다. 마침 여왕의 73번째 생일이라, 하회마을에서는 전통 한국식 생일상도 장만하여 대접했다.

한편 풍산 유씨(豐山柳氏)의 종가(宗家)인 충효당(忠孝堂)에서는 (한국식으로) 구두를 벗고 대청마루에 오르는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이 서양인 기자들로부터 큰 화제가 되었는데, 서양에서는 외부에서 발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기 때문이다. 여왕을 취재하러 왔던 서양인 기자들은 일제히 카메라를 들이대고 촬영하기 바빴지만,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가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국인 기자들은 그 모습에 어리둥절했다고.

한국 방문에 대한 답례로, 엘리자베스 2세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를 런던 버킹엄궁전에 국빈으로 초청했다. 이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최초였다.

2020년 6월 25일은 6.25 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한국을 도왔던 참전국의 국가원수와 군주들은 기념 메시지를 보냈고, 엘리자베스 2세의 메시지는 주영한국대사가 대독했다.

가정사와 자녀들의 스캔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5세의 나이로 즉위할 당시 이미 4살배기 아들(찰스 왕세자)과 2살배기 딸(앤 공주)의 어머니였다. 즉위 이후인 1960년에는 차남 앤드루 왕자를, 1964년에는 3남 에드워드 왕자를 낳았다.

첫째 찰스 왕세자와 둘째 앤 공주에게는 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엘리자베스 2세도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고, 왕위 계승과 공무로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찰스 왕세자는 맏이이며 차기 계승자였기에,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지 못하고 동생들보다 더욱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반면 여왕이 나이를 먹고 즉위한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난 후에 태어난 셋째 앤드루 왕자와 넷째 에드워드 왕자는, 형과 누나보다 비교적 여유롭고 편안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자녀들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했는데, 막내를 제외한 모두가 이혼했고, 찰스 왕세자와 앤 공주는 재혼했다. 1990년대는 자녀들의 스캔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던 시절이었다. 1992년에는 찰스 왕세자ㆍ다이애나 왕세자비 부부와 앤드루 왕자ㆍ사라 왕자비 부부가 별거를 시작했고, 4년 후인 1996년에 이혼했다. 앤 공주는 1992년 4월 마크 필립스와 이혼했고, 동년 12월에 재혼했다. 마크는 앤 공주와의 결혼생활 중에 미술교사 헤더 통킹과 불륜을 저질러 1985년 차녀 펠리시티를 낳았고, 앤 공주와 이혼한 이후에는 승마선수 샌디 플루거와 재혼하여 1997년 3녀 스테파니를 낳았으나, 2012년부터 샌디와도 별거하고 있다. 앤 공주와 마크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장남) 피터와 둘째(장녀) 자라는 스테파니와 이복남매로서 교류하며 지내지만,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인 펠리시티와는 교류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다이애나 스펜서는 이혼 이후로도 유명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한편, 왕세자비 시절부터 해왔던 자선과 구호활동도 계속했으며, 도디 알파예드[6]라는 남자친구도 사귀었다. 그러나 그녀의 새로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도디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하여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혼하여 왕실을 떠난 왕세자비의 사고사’라는 사건은 오랜 역사의 왕실에서도 전례가 없던 일이었기에 엘리자베스 2세와 왕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고, 보우스라이언 대비는 왕실의 애도 표시와 장례식 참석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많은 영국인들은 다이애나의 죽음을 무척 슬퍼하는 한편, 침묵하고 있는 여왕과 왕실에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여왕은 前 맏며느리의 죽음을 추모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가족들과 함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2002년, 영국 왕실은 1달 간격으로 2차례의 장례식을 치렀다. 2월 9일에는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 마거릿 로즈 공주가 사망했다(향년 71세). 하나뿐인 형제의 죽음에 이어, 3월 30일에는 어머니 보우스라이언 대비가 사망했다(향년 101세). 1952년 남편 조지 6세가 사망한 이후로도 50년을 더 살았던 대비는 고령에도 무척 건강했으나, 작은딸의 죽음 이후로 급격히 쇠약해져서 끝내 남편과 작은딸을 뒤따르고 말았다.

2011년 4월에는 엘리자베스 2세의 장손인 윌리엄 왕세손이 캐서린 미들턴과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세인트앤드류스대학 재학 시절부터 교제해온 캠퍼스커플이며, 캐서린은 부유한 평민 가문 출신이다. 왕실 며느리, 특히 장래 왕비가 될 왕세손비가 평민 출신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캐서린 왕세손비는 스스로 원해서 왕실에 시집온 만큼 열심히 노력하고 생활하여 왕실에 적응했고, 귀엽고 건강한 아이들을 3명이나 낳아서 자신과 왕실의 입지를 굳건히 하여, 시할머니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인정받았다. 특히 여왕은 손자며느리의 ‘인내심(=왕실 여성의 전통적인 덕목)’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2018년에는 윌리엄 왕세손의 남동생 해리 왕자가 미국인 배우 메건 마클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여러 모로 파격적이었다. 메건은 외국인이고, 해리 왕자보다 연상이고, 유색인종(흑백혼혈)[7]이고, 연예인 출신이며, 부모도 이혼했고 본인도 1차례 이혼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같았으면 왕족과 결혼할 수 없었을 악조건이 1가지도 아니고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기도 했고, 장래 왕위 계승자인 윌리엄 왕세손과 달리 해리 왕자는 차남이라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하여, 메건은 왕실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2019년에는 첫째(장남) 아치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메건 왕자비는 왕실에서 여러 불협화음을 일으켰고, (결혼 준비 때부터) 형님 캐서린 왕세손비와도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해리 왕자와 메건 왕자비는 2020년 “왕실에서 독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할머니 엘리자베스 2세, 아버지 찰스 왕세자와도 제대로 의논하지 않고서 저지른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듬해(2021년) 태어난 둘째(장녀)의 이름을 할머니의 어린 시절 애칭인 ‘릴리벳’으로 짓고, ‘서식스 공작’과 ‘서식스 공작부인’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고, 각종 방송과 출판 등에서 왕실과 왕족들을 험담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말년과 사망

2019년 말~2020년 초부터 전 세계에는 코로나19가 널리 퍼졌다. 영국에도 많은 환자가 발생했으며,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한 왕족들도 여럿 코로나19에 걸렸지만, 여왕은 “우리가 코로나19 사태를 잘 극복한다면, 후손들은 우리를 ‘강인했던 세대’로 기억할 것”이라고 사람들을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2021년 4월 9일,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100번째 생일을 2달 앞두고 사망했다(향년 99세). 1939년 엘리자베스 2세와 처음 만난 지 82년, 1947년 결혼한 지 74년 만이었다. 항상 자신을 지지해주며 사랑과 외조를 아끼지 않았던 남편과의 이별에 여왕은 많이 슬퍼했고, 매년 12월마다 해오던 크리스마스 인사에서도 쓸쓸한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슬픔만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다.

2022년 2월 6일, 엘리자베스 2세는 즉위 70주년(platinum jubilee)을 맞았다. 영국 전역에서는 성대하고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기념식, 각종 파티, 군대의 시가행진, 연주회 등등에 많은 영국인들이 참가하여 여왕의 치세와 만수무강을 축하하고 찬양하며 기뻐했다. 다만 여왕은 이 모든 행사에 100% 참석하지는 못했는데, 역시 95세라는 고령 때문에 몸이 쇠약해진 탓이었다. 직접 참석하지 못한 행사에는 영상 인사를 보냈다. 매년 의회에서 해오던 연설도 찰스 왕세자가 대신했다. 즉위 이래로 여왕이 의회 연설에 결석한 일은, 셋째 앤드루 왕자와 넷째 에드워드 왕자를 임신했을 때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2022년 9월 6일, 신임 총리 리즈 트러스(Liz Truss)가 엘리자베스 2세를 알현했다. 이것이 여왕의 최후 공무로, 이틀 뒤인 9월 8일에 여왕은 평온하게 영면했다. 향년 96세였으며, 사인은 노환이었다. 여왕의 장례식은 엄숙하게 치러졌고, 찰스 왕세자가 ‘찰스 3세’라는 이름으로 다음 국왕에 즉위했다.

자손

  • 장남 찰스 3세: 1948년 11월 14일 (75세) 출생
  • 맏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 1961년 7월 1일~1997년 8월 31일(향년 36세). 1981년 7월 29일 결혼, 1996년 8월 28일 이혼.
  • 맏며느리 카밀라 로즈메리 파커보울스: 1947년 7월 17일 (76세) 출생. 2005년 4월 9일 결혼.
    • 손자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왕세자: 1982년 6월 21일 (41세) 출생
    • 손자며느리 캐서린 왕세자비: 1982년 1월 9일 (42세) 출생
      • 증손자 조지 알렉산더 루이 왕자: 2013년 7월 22일 (10세) 출생
      • 증손녀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공주: 2015년 5월 2일 (8세) 출생
      • 증손자 루이 아서 찰스 왕자: 2018년 4월 23일 (6세) 출생
    • 손자 헨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 왕자: 1984년 9월 15일 (39세) 출생. 흔히 애칭인 ‘해리’로 더 많이 불린다.
    • 손자며느리 레이첼 메건 마클 왕자비: 1981년 8월 4일 (42세) 출생
      • 증손자 아치 해리슨 왕자: 2019년 5월 6일 (4세) 출생
      • 증손녀 릴리벳 다이애나 공주: 2021년 6월 4일 (2세) 출생
  • 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 1950년 8월 15일 (73세) 출생
  • 사위 마크 앤서니 피터 필립스: 1948년 9월 22일 (75세) 출생. 1973년 11월 14일 결혼, 1992년 4월 28일 이혼
  • 사위 티모시 제임스 해밀턴 로런스: 1955년 3월 1일 (69세) 출생. 1992년 12월 12일 결혼.
    • 외손자 피터 마크 앤드루 필립스: 1977년 11월 15일 (46세) 출생. 영국 왕실 최초로 병원에서 태어난 왕족이다. 이후부터 왕족들도 왕궁 대신 병원에서 출산하기 시작했다.
    • 외손자며느리 어텀 패트리샤 켈리: 1978년 5월 3일 (45세) 출생. 본래 가톨릭 신자였지만, 피터와 결혼하기 위해 성공회로 개종했다.[8] 2008년 5월 17일 결혼, 2021년 6월 14일 이혼.
      • 외증손녀 사반나 앤 캐슬린 필립스: 2010년 12월 29일 (13세) 출생. 엘리자베스 2세의 첫 증손이자 앤 공주의 첫 손주.
      • 외증손녀 아일라 엘리자베스 필립스: 2012년 3월 29일 (12세) 출생
    • 외손녀 자라 틴달: 1981년 5월 15일 (42세) 출생
    • 외손녀사위 마이클 제임스 틴달: 1978년 10월 18일 (45세) 출생
      • 외증손녀 미아 그레이스 틴달: 2014년 1월 17일 (10세) 출생
      • 외증손녀 레이나 엘리자베스 틴달: 2018년 6월 18일 (5세) 출생
      • 외증손자 루카스 필립 틴달: 2021년 3월 21일 (3세) 출생
  • 차남 앤드루 앨버트 크리스티안 에드워드 왕자: 1960년 2월 19일 (64세) 출생
  • 둘째며느리 사라 마거릿 퍼거슨: 1959년 10월 15일 (64세) 출생. 1986년 7월 23일 결혼, 1996년 5월 30일 이혼.
    • 손녀 베아트리스 엘리자베스 메리 공주: 1988년 8월 8일 (35세) 출생
    • 손녀사위 에도아르도 알레산드로 마펠리 모치: 1983년 11월 19일 (40세) 출생
      • 증손녀 시에나 엘리자베스 마펠리 모치: 2021년 9월 18일 (2세) 출생
    • 손녀 유지니 빅토리아 헬레나: 1990년 3월 23일 (34세) 출생
    • 손녀사위 잭 크리스토퍼 스탬프 브룩스뱅크: 1986년 5월 3일 (37세) 출생
      • 증손자 어거스트 필립 호크 브룩스뱅크: 2021년 2월 9일 (3세) 출생
      • 증손자 어니스트 조지 로니 브룩스뱅크: 2023년 5월 30일 (0세) 출생
  • 3남 에드워드 안토니 리처드 루이 왕자: 1964년 3월 10일 (60세) 출생
  • 셋째며느리: 소피 헬렌 리스존스 왕자비: 1965년 1월 20일 (59세) 출생. 1999년 6월 19일 결혼.
    • 손녀 루이즈 앨리스 엘리자베스 메리 마운트배튼윈저: 2003년 11월 8일 (20세) 출생
    • 손자 제임스 알렉산더 필립 테오 마운트배튼윈저: 2007년 12월 17일 (16세) 출생

각주

  1. 2015년부터 법이 바뀌어, 직계+나이순으로 계승 서열이 정해진다. 바뀐 법을 제일 먼저 적용받게 되는 공주는 엘리자베스 2세의 증손녀인 샬럿 공주이다.
  2. 이 과정을 다룬 영화가 <킹스 스피치>이다.
  3. 다만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독순술도 배워서, 다른 사람들이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4. 너무 어려서 데리고 가지 못했던 셋째(장녀) 요한나도, 얼마 후에 병으로 사망했다.
  5. 군주국에서는 군주가 개회선언을 한다.
  6. 이집트인 백만장자인 모하메드 알파예드의 아들.
  7. 아버지는 백인, 어머니는 흑인이다.
  8. 영국 왕족들은 모두 성공회를 믿으며, 같은 성공회 신자와 결혼해야만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