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 스펜서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Diana Frances Spencer
인물 정보
다른이름 결혼 전: Lady Diana Frances Spencer
왕세자비 시절: 웨일스 공비(公妃)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이혼 이후: Diana, The princess of Wales
출생 1961년 7월 1일
잉글랜드 노퍽주(Norfolk) 샌드링엄(Sandringham)
사망 1997년 8월 31일 (향년 36세)
프랑스 파리
국적 영국
학력 Riddlesworth Hall School (졸업)
West Heath Girls School (중퇴)
Institut Alpin Videmanette (수료)
직업 前 왕족(왕세자비) → 일반인
종교 성공회
신체 178cm
배우자 전남편 찰스 3세
가족 아버지 존 스펜서 백작, 어머니 프랜시스 로슈, 새어머니 레인 스펜서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시아버지 필립 마운트배튼 공
전남편 찰스 3세
큰언니 사라 맥콜쿼데일(Sarah McCorquodale), 작은언니 제인 펠로우시(Jane Fellowes), 남동생 찰스 스펜서
시누이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
시동생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자녀: 장남 윌리엄 왕세자, 차남 해리 왕자
큰며느리 캐서린 미들턴, 작은며느리 메건 마클
손자 조지 왕자, 루이 왕자, 아치 왕자
손녀 샬럿 공주, 릴리벳 공주
활동기간 1981년 왕세자비 책봉(결혼)
1996년 이혼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전처. 1981년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인 찰스 왕세자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며 왕실에 입성하여 전 세계적인 인기와 주목을 받았으나,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이혼했으며 이후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사망한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기억되고 있다.

친정[편집 | 원본 편집]

친가인 스펜서 가문과 외가인 로슈 가문은 모두 부유하고 유서 깊은 귀족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다이애나는 행복하지 못했는데, 부모의 부부싸움으로 인한 가정불화 때문이었다. 아버지 존과 어머니 프랜시스는 성격 차이와 아들 출산 문제 등으로 인하여 자주 다투었고, 아들(넷째)을 낳은 후로도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어린 다이애나는 부모의 싸움을 매일같이 보면서 불안에 떨었다. 부모는 별거 끝에 결국 다이애나가 8살이던 1969년에 이혼했고, 아버지는 곧장 재혼했다. 다이애나와 형제들은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다시 아버지가 있는 친가로 돌아왔으며, 어머니와는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무심했고, 새어머니인 레인은 불편했으며, 보모들은 자주 바뀌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어린 시절은 다이애나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소녀시절[편집 | 원본 편집]

Riddlesworth Hall School(초등학교)을 졸업한 다이애나는 West Heath Girls School(중학교고등학교 통합 과정)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정원이 약 100여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사립 여학교로, 귀족 가문의 딸들을 위한 기숙사 학교였다.

학창시절의 다이애나는 체육무용에 소질이 있었다. 특히 수영, 테니스, 발레를 좋아하며 잘했다. 피아노 연주와 프랑스어에도 뛰어났으며, 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소설을 즐겨 읽었다. 하지만 공부는 잘하지 못해서, 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언니들과 남동생은 모두 영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옥스퍼드대학 출신인데 형제들 중에서 자신만 공부를 못하여 열등감을 가졌고, 어린 시절의 불안정했던 가정환경과 함께 다이애나의 성격을 소심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이애나는 이후 Institut Alpin Videmanette라는 교양교육기관에 다녔다. 이곳은 귀족 및 상류층의 딸들이 요리, 재봉, 예법 등등을 배우며 결혼을 준비하는, 일종의 신부수업 강습소였다.

이 무렵 다이애나는 스펜서 저택에서 독립하여, 외할아버지 모리스 로슈 남작이 런던에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친구들과 살았다. 모리스는 다이애나뿐 아니라 그녀의 형제들에게도 (집값이 비싼 런던에) 아파트를 1채씩 마련해주었고, 다이애나는 함께 사는 친구들로부터 방세를 받았다.

신부수업을 받는 한편, 다이애나는 귀족 사회의 인맥으로 몇 가지 일을 했다. 귀족 유치원에서 보조교사로 일했고, 먼저 시집간 언니들의 소개를 통하여 귀족 가문의 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그녀는 특히 다른 사람을 돌봐주는 일과 어린아이들을 좋아하여, 유치원 교사와 보모 일에 재능이 있었다.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풀죽어 있는 아이를 보면,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고 놀아주며 달랬다고 한다. 이외에 귀족 저택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도 하고, 귀족 집안의 개인 파티에서 웨이트리스로도 일했다.

다만 귀족 가문의 딸인 다이애나가 이런 일들을 했던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재산이 어마어마하여, 굳이 일하지 않아도 생계에 지장이 전혀 없다. 단지 취미생활, 소일거리, 명예 등을 위하여 짬짬이 몇 가지 활동을 하는 것뿐이지, 평민들처럼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고 온종일 일하지 않는다.[1]

비록 뛰어난 학력과 경력은 없었으나, 당시 귀족 사회의 여성으로서는 특별한 흠이 아니었다. 귀족 가문의 딸들에게는 그런 것들보다 결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이애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주변의 다른 귀족 여성들처럼 자신도 비슷한 상류층의 남성과 결혼하여 귀부인, 현모양처, 가정주부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편집 | 원본 편집]

친가와 외가 모두 귀족이기에, 다이애나는 다른 귀족들뿐 아니라 왕실과도 인연이 있었다. 본래 왕실에서는 찰스 왕세자의 신붓감으로 다이애나의 큰언니 사라를 생각했으나 무산되었고, 대신 다이애나가 왕세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찰스 왕세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3남 1녀 중 맏이로, 1961년생인 다이애나보다 13년이나 연상인 1948년생이었다.

1981년 7월 29일, 갓 20살의 다이애나는 런던 성공회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찰스 왕세자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관심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환호하며,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을 축하했다. 사람들은 젊고 아름다운 다이애나에게 매료되었고, 장래 영국의 왕세자비가 되고 왕비가 될 그녀에게 많은 기대를 했다. 수많은 축복 속에서 시작된 다이애나의 결혼생활은 행복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찰스 왕세자의 진짜 사랑[편집 | 원본 편집]

사실 찰스 왕세자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찰스 왕세자보다 1살 연상인 카밀라 로즈메리 섄드였다.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는 서로 사랑했지만, 영국 왕실에서는 카밀라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밀라는 매우 부유한 집안의 딸이며 그녀의 조상 중에는 귀족도 있었지만,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가 20대 초반이던) 1970년대 영국 왕실의 기준으로는 며느릿감으로 부족한 인물이었다. 신분도 낮았고, 찰스 왕세자보다 나이도 많았고, 또한 이성교제 경험도 문제가 되었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큰며느리 캐서린 미들턴과 작은며느리 메건 마클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다. (캐서린의 친정은 부유하지만 평민이고, 메건은 남편 해리 왕자보다 연상이며 이혼녀였다.)

예전에도 영국 왕실에 이러한 ‘금단의 사랑’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는 미국인 유부녀 월리스 심프슨과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왕실과 의회에서 “왕위와 월리스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요구하자 왕위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했다. (그래서 에드워드 8세의 동생인 조지 6세가 형을 대신하여 왕위를 이어받았고, 조지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큰딸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왕위가 계승된 것이다.) 하지만 찰스 왕세자는 ‘왕위’와 ‘사랑’ 중에서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했다.

결국 찰스 왕세자가 영국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던 1973년, 카밀라는 찰스 왕세자의 친구인 앤드루 파커보울스[2]와 결혼했다. 그 소식을 들은 찰스 왕세자는 몹시 크게 충격을 받으며 슬퍼했고, 그때 자신이 카밀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카밀라는 앤드루와의 사이에서 1974년에 아들 톰을, 1978년에 딸 로라를 낳아, 번듯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한편 차기 국왕이 될 찰스 왕세자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했다. 그가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는 카밀라였지만,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왕세자비 자리와 장래 왕비 자리를 채워주고 자손(특히 아들)을 낳아줄 적당한 여자가 필요했다. 친가와 외가 모두 명문 귀족이고, 신실한 성공회 신자이며,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20살 처녀인 다이애나 스펜서는, 왕세자비 자리에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다이애나는 결혼 직전에 카밀라에 대해 알았지만, 이미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후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 당시 파혼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친정 가족들도 모두 가문의 체면과 이익을 위해 다이애나에게 왕세자와의 결혼을 종용하여, 다이애나는 결국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와 결혼한 후로도 계속 카밀라와의 만남을 계속했고,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절망했다.

불행한 결혼생활[편집 | 원본 편집]

카밀라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결혼식에도 나타났고, 찰스 왕세자는 신혼여행 중에도 카밀라가 선물해준 장신구를 착용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여러 차례 호소해도, 찰스 왕세자는 카밀라와의 관계를 그만두지 않았다.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도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사랑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나이 차이도 너무 많았으며, 성격과 취향도 맞지 않아 대화도 잘 통하지 않았다. 반면 카밀라는 다방면의 화제에 박식하고 화술도 뛰어나서 찰스 왕세자의 좋은 대화 상대였으며, 까다로운 성격인 찰스 왕세자의 비위를 잘 맞추어주었다고 한다.

한편 남편과 원만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인기는 굉장했고, 그녀는 가는 곳마다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왕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찰스 왕세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다음으로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왕족이었는데, 이제는 자신보다 아내에게 훨씬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솔직하고 풍부하게 감정을 표현했고, 소탈하고 평범한 행보를 많이 보였으며, 자주 사회적 약자들을 방문했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기존 왕족들의 엄격하고 절제된 언행과 정반대라서 굉장히 파격적이었고, 일반인들로부터는 많은 호감을 얻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와 영국 왕실은 다이애나의 인기를 경계하고 시기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신했는데, 입덧이 몹시 심하여 고생했다. 그녀는 남편과 시집 식구들에게 힘들다고 호소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찰스 왕세자는 카밀라에게 빠져 (적당히 장식용으로 왕세자비 자리에 앉혀놓은) 아내에게 무심했고, 그때까지 영국 왕실의 여자들은 아무도 입덧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몸이 좋지 않은 와중에도 여러 행사에 참석하면서 힘들어했으며, 출산 역시 찰스 왕세자의 일정에 맞추어 유도분만으로 해야 했다. 난산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내 자연분만으로 건강한 첫 아들 윌리엄 왕세손을 낳았는데, 병원에서 제왕절개를 권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고 한다.

왕세자 부부의 득남에 영국은 열렬히 환호했고, 찰스 왕세자도 아들의 탄생을 기뻐했다. 당시 영국의 왕위 계승은 남자 우선이었으므로, 찰스 왕세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바로 아래 남동생인 앤드루 왕자가 찰스 왕세자의 뒤를 잇게 되는 것이었다.[3] 힘든 임신과 출산이었지만,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이때 몹시 기뻤다고 한다. 2년 후인 1984년에는 차남 해리 왕자를 낳았다.

두 아들을 낳은 후에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왕실 생활은 힘들었다. 여전히 찰스 왕세자는 카밀라와의 밀회를 계속했고, 왕궁ㆍ왕족 사회ㆍ언론에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경계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에 일거수일투족이 악의적으로 보도되는 것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녀는 거식증과 폭식증을 오가는 섭식장애를 겪었고,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유일한 행복은 두 아들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따뜻한 가정에서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기에, 자신의 아이들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아이들을 평범하게 키우려고 노력했고, 약자를 돕는 따뜻한 심성을 길러주려고 시설이나 봉사활동에도 데리고 다녔고, 다른 학부모들처럼 아이들의 학교행사에도 직접 참석했다. 학교 운동회에서 다른 엄마들과 함께 달리기도 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반격[편집 | 원본 편집]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의 불륜은 계속되었으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태도는 바뀌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기로 결심했다. 맞바람을 피우기도 했고[4], 왕실의 차갑고 냉정한 면모를 출판과 방송을 통해 폭로하기도 했다.

1992년, 왕세자 부부는 대한민국을 국빈 방문했다.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노태우였다.) 부부동반으로 참석한 공식석상이자 해외순방이었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쇼윈도 부부’조차도 되지 못했다. 극히 싸늘하고 어색한 분위기만이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이를 감돌았다. 방한(訪韓)을 마치고 영국으로 귀국한 후, 결국 왕세자 부부는 별거하기 시작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점점 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여전히 사회봉사와 구제활동을 활발히 하여 마더 데레사[5] 수녀와 함께 주목을 받았고, 특히 ‘대인지뢰 제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많은 편견에 시달리던 에이즈 환자들과도 맨손으로 악수하여 큰 화제가 되었고, 그녀의 이러한 행보는 환자들에 대한 인식 개선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왕실에서 금지하는 의복도 입기 시작했다.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운동하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검은색 드레스에 진한 색의 매니큐어를 바른 모습도 화제가 되었다. (본래 영국 왕족들은 장례식 때만 검은색 옷을 입을 수 있으며, 여성 왕족들은 연분홍색 투명한 매니큐어만 바를 수 있다.) 왕실에 대한 일종의 ‘반항’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패션이었다.

1995년, 카밀라는 남편 앤드루와 이혼했다. 결혼 후로도 계속 찰스 왕세자와 불륜 관계를 지속하는 아내를, 앤드루는 결국 놓아주고 말았다.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가 하나 사라진 셈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 8월 28일,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16년의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마무리했다.

비극적인 죽음[편집 | 원본 편집]

이혼 이후로 다이애나는 도디 알파예드(Dodi Al-Fayed)라는 남성과 사귀었다. 그는 다이애나보다 6년 연상인 1955년생으로, 이집트 출신의 백만장자인 모하메드 알파예드(Mohamed Al-Fayed)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혼 이후로도 삼류 언론의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은 다이애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1997년 8월 30일 밤, 다이애나와 도디는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파리의 밤거리를 달리고 있었는데, 역시나 이곳에도 파파라치들이 따라붙었다. 두 사람이 탑승한 자동차는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파파라치들은 구호활동은커녕 카메라를 들이대고 촬영하기에 바빴다. 다이애나와 도디는 늦게야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고, 세계적 수준이라는 프랑스의 응급의료제도도 끝내 그들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 8월 31일 오전 4시, 다이애나는 사망선고를 받았다. 향년 36세였다.

다이애나의 죽음이 알려지자 영국과 전 세계가 큰 슬픔에 빠졌다. 마침 1997년에는 마더 데레사 수녀도 세상을 떠나,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세계는 ‘어머니’와 ‘연인’을 한꺼번에 잃었다”며 두 여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러한 와중에 영국 왕실은 선뜻 애도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아, 많은 영국인들이 실망과 분노를 표했다.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매년 그랬듯이 가족과 함께 교외의 별궁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이혼하여 왕실을 떠난 왕세자비의 사고사’란 오랜 역사의 왕실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고, 또한 여왕은 어린 손자들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끈질긴 요구에 왕실은 애도 성명을 발표했고, 여왕은 장례식에 참석하여 前 맏며느리를 추모했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은 1997년 9월 6일 영국 왕실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친정 스펜서 가문의 영지에 안장되었다.

한편 다이애나가 사망한 이후로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특히 카밀라에 대한 여론은 엄청나게 험악했다. 하지만 카밀라는 이미지 개선을 위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애썼고, 결국 2005년 4월 9일 찰스 왕세자와 정식으로 재혼했다. 그리고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사망하여 찰스 왕세자가 다음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카밀라는 마침내 영국왕비가 되었다.

자손[편집 | 원본 편집]

  • 장남 윌리엄 왕세자: 1982년 6월 21일 (41세) 출생.
  • 큰며느리 캐서린 왕세자비: 1982년 1월 9일 (42세) 출생.
    • 손자 조지 왕자. 2013년 7월 22일 (10세) 출생.
    • 손녀 샬럿 공주: 2015년 5월 2일 (8세) 출생.
    • 손자 루이 왕자: 2018년 4월 23일 (6세) 출생.
  • 차남 해리 왕자: 1984년 9월 15일 (39세) 출생.
  • 작은며느리 메건 마클: 1981년 8월 4일 (42세) 출생.
    • 손자 아치 왕자: 2019년 5월 6일 (4세) 출생.
    • 손녀 릴리벳 공주: 2021년 6월 4일 (2세) 출생.

윌리엄 왕세자와 샬럿 공주가 다이애나를 많이 닮았다. 해리 왕자 일가는 2020년 왕실에서 독립하여 미국으로 이주했다.

각주

  1. 훗날 다이애나의 큰며느리가 된 캐서린 미들턴은 윌리엄 왕세손의 청혼만을 기다리던 미혼 시절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직업을 가져라”라는 충고를 들었는데, 이는 “너는 어차피 평민에 불과하다”라는 신분차별적인 의미였다.
  2. 찰스 왕세자의 여동생인 앤 공주의 前 남자친구이기도 하다.
  3. 2015년부터 법이 바뀌어, 남녀 상관없이 직계 연장자 우선으로 계승하게 되었다. 바뀐 법을 제일 먼저 적용받게 되는 공주는, 다이애나의 장남 윌리엄의 장녀(둘째)인 샬럿이다.
  4. 그래서 둘째인 해리 왕자에 대해 ‘찰스 왕세자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소문도 있다.
  5. 가톨릭 수도회인 ‘사랑의 선교회’ 창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