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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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충돌 정보 | |||||||||
냉전 |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1] | ||||||||
위치 | 한반도 | ||||||||
결과 |
정전 후 대치상태 DMZ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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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단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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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피해 | |||||||||
200백만~300백만 명 추정 |
- 열전으로 번진 냉전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괴 북한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정전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졌다. 한국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아직까지 정전 상태라는 이유 때문에 특히 군 관련 기관에서는 이 전쟁을 가리켜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확실히 '종전(=평화협정 체결)'한 건 아니니 틀린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쟁 중인 것도 아니다. 만일 정말로 휴전 상태라면 여전히 한반도는 국제법상 내전중으로 규정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4]
냉전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무기를 들고 맞붙은 전쟁으로,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참전국 보면 세계대전이 맞는 것 같은데 세계사, 특히 냉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한반도의 분단[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 후에도 일본 제국은 끝까지 저항을 하였으며, 이에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얻어내기 위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한편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체결한 결의에 근거해 8월 8일 일본 제국에 막타 보너스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 157만 명의 대군을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시켰다.[5]
한반도 문제에 소련의 참여를 인정했던 미국이었지만,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에 이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소련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의 군사작전 한계선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해군부는 39도선 분할을 제시했지만 국무부와 육군부는 이미 소련이 한반도에 주둔한 시점에서 미군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의 한계점이 38도선이라고 판단,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38도선 분할안을 결재하게 되었다.[5]
미국으로부터 38도선 분할 안건을 받은 소련정부는 즉각적인 회답에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로서 38도선을 경계로 일반명령 제1호를 통해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에게, 이남의 일본군은 미국에게 항복을 받는다는 방침이 확정되었다. 이 분할점령에 의해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서로 다른 정치권력이 들어섰다.[5]
군정과 신탁통치[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9월, 미국은 남한의 군정 포고문을 발표했지만 구체적 게획이 전무한 상황인데다 정치경험이 풍부한 한인 지도자들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후 미군 장교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이 고문으로 활약하였으며 이는 해방을 갈망했던 한국인들의 반발을 사기 시작했다.[6]
산업경제가 붕괴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남한의 행정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한 미군은 10월부터 일본인 고문들을 퇴임시키고 그 자리를 한국인으로 대체해 일제의 악법들을 폐지했으며, 최종적으로 남한을 군정과 신탁통치를 거쳐 자유 민주주의 독립국가로 형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해왔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앙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모든 정파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결과 남한은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6] 겉만 보면 건강하고 올바른 정치 체제인데 북괴 때문에 안 될거야 아마.
한편 소련은 1945년 8월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38도선 일대에 초소를 건설해 남북을 왕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을 강화하고 남북을 잇는 철도, 도로, 통신을 차단했다. 초기에는 민족주의자들의 명망과 조직을 이용해 안정화를 꾀했으며 한국인 정치인을 기용했다. 그러나 고문관에는 소련군 장교가, 실권은 소련계 한인들이 쥐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민족주의자들을 내치고 토사구팽 친소련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10월 14일 소련군 대위 혹부리우스 김일성을 앞에 내세워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만들었다.[6]
소련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포퓰리즘을 이용해 공산주의를 신봉하게 만들고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비협조자들이 숙청당하거나 남한으로 도망갔으며, 김일성은 빠른 시일에 북한의 권력을 쥐게 되었다.[6]
남북을 분할점령하던 미국과 소련은 1943년 카이로 선언을 구체화하기 위해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무장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인에 의한 한반도 정부 수립을 위해 최대 5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임을 결의했다. 신탁통치 결정이 알려지자 남북한 모두 거센 반발을 보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남북한 좌익세력은 입장을 바꿔 신탁통치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반탁운동을 전개하던 우익세력과 충돌을 일으켰다.[7]
1946년 3월, 신탁통치의 결정을 위해 미국가 소련의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으나 양측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좌익을 협의대상으로 삼길 바랬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모두에게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의 의사표명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한 단체만 받아들임으로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1947년 5월에도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한 두 국가간의 협조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소련과의 협조를 통해 한반도 통일정부수립을 원했던 미국은 방침을 철회하고 국제 연합으로 문제를 넘겨버렸다.[7]
남북한 독립정부 수립[편집 | 원본 편집]
두 차례에 걸친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북한과 남한의 좌익세력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남한의 우익세력간의 대립이 극심해지자 미 군정은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1948년 5월 10일 소련의 반대로 UN 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갈 수 없는 북한을 제외한 남한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했다. 만 21세에 달하는 모든 남녀에게 선거권이 주어졌고, 선거반대가 극심했던 제주도를 뺀 남한 전역에서 후보들이 출마했으며,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개개인의 손으로 대표를 뽑는 주권을 행사했다.[8]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을 중심으로 제헌의회가 구성되었고 7월 12일 헌법을 제정, 20일에 이승만과 이시영을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내각을 출범시킨 대한민국은 8월 15일 건국을 선포함으로서 한반도 최초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UN은 48대 6으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으며, 미국은 외교승인과 동시 미군정을 폐지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모든 것을 이관하였다.[8]
처음부터 한반도 통일정부를 원치 않았던 소련은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해 공동위원회가 한창 열리고 있을 무렵 김일성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권력을 장악, 1946년 11월에 인민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1947년 2월, 임시가 아닌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북한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만들었으며, UN에서 남한정부 수립 결의안을 채택하자마자 인민헌법을 만들고 한반도의 합법정부로 내세웠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같은 날 김일성이 내각수상으로 선출되었다.[8]
주한미군 철수[편집 | 원본 편집]
미국은 한반도 통일정부가 물건너가고 안보전략의 조정에 따라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 재정의 압박으로 군축을 실시했는데 전시동원으로 1,200만 명에 달하던 병력 중 수백만이 본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대규모의 군대를 보유한 소련이라는 존재가 있었음에도 막강한 공군! 공군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원자폭탄이라면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소련의 주력이 동유럽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는 비교적 위협수치가 낮았다.[9]
미국은 동맹국인 중화민국이 내전에서 패배할 것을 대비해 1947년부터 일본을 새로운 방파제로 삼으려는 계획을 검토하였다. 소련이 미국을 겨냥, 태평양 방면으로 침공해올 것을 상정해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방어전략을 마련했다. 소련과 전면전이 발생하면 이 지역의 해공군기지를 활용해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최종적으로 본격 아포칼립스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한반도로 소련이 진격하게 되면 전면전을 피할 수 없었거니와 지상군 작전보다 한반도를 우회한 해공군으로 적의 본거지, 소련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다.[9] 천조국스러운 소련 평탄화작전. 그런데 적이 한반도만 노리면 어떡하지?
그러나 미국은 한국을 단순히 공백지로 둘 수 없어서 이에 미국은 한국과 1948년 8월 24일 군사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군사협정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이 주한미군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49년 6월 30일 철수가 완료된 시점에도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이 남아 한국군의 군사원조를 지원했다.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북한의 군사침공의 대비보단 내부 치안과 경제원조에 원점을 두었다. 심지어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각종 항공기와 중화기의 지원을 본토에 요청하였지만 미국 정부에서 거절하였다.[9] 북한에 4,300명의 군사고문단과 10개 이상의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각종 장비와 중화기를 제공한 소련과는 대조적인 상황이 벌어졌다.[10] 본격적인 의미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정전 후 10월 1일에 체결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의 표현, 애치슨 선언(?)[편집 | 원본 편집]
미국의 대외정책이 애치슨 선언[11] 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이것이 한국전쟁을 야기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에 대해 애치슨 선언이 한국을 배제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의견이라 해명한 미국의 공식문서가 존재한다. 일본과 필리핀을 잇는 전략적 방어라인은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미국을—당시 일본은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었던 미국의 해외 영토인 반면 대한민국은 어엿한 주권국가다—지키는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지, 마치 미국이 한국을 일부러 무방비상태로 두었다는 식으로 해석한 기자들을 질타한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만국 공통 기레기의 존재. 실제로 미국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한국을 지키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파병을 실행하고 UN을 끌어들이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12] 그런데 이건 이거대로 미국이 노린 거라는 음모론이 존재.[13] 지켜줘도 뭐라 그러지 지키지 않아도 뭐라 그러지.
또한 애치슨 선언은 오히려 국내 불안을 야기하기는커녕 다시 한국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재확인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제임스 마크레이의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 에 따르면 에치슨의 연설의 주 목적은 남한을 방어선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는데 일부 학자들이 애치슨의 표현인 "방어선 (defensive perimeter)"[14] 에 집착해 애치슨 발언의 나머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한국이나 몇몇 학자들이 아직도 애치슨 발언이 한국전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15] 공개된 구소련 문서에는 전쟁의 시작 원인에 애치슨 발언이 끼친 영향이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1950년 1월 애치슨 관련 발언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애치슨 선언으로 한국이 배제되었으니 문제가 된다는 관점의 기사가 거의 없다.
가장 먼저 애치슨 선언을 언급한 경향신문엔 이승만과 기자 간의 대담이 실렸는데, 여기서 이승만은 애치슨이 1월 12일 기자구락단(Press Club) 연설에서 한국에 대한 확고한 지원을 해줄 것이라 말했으니 국민들은 걱정하지 말고[16], 트루먼과 애치슨에게 정말로 감사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17] 거기에 애치슨 선언은 한국을 확고한 방어막으로 형성한 것이라 말하고 있어 에치슨 선언의 의미는 남한을 방어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있다.[18]
물론 애치슨 선언에서 한국을 명시하지 않은게 문제였다는 의견도 있었다.[19]
발발 원인[편집 | 원본 편집]
한국전쟁은 왜 발생했는가? 이는 냉전사 최대의 난제이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냉전의 원인에 대한 의견은 한국전쟁 이전, 마샬플랜이니 스탈린의 제1차 베를린 점령이니 등으로 그 모습이 드러났다고 보지만 구체적인 냉전체제가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의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함께 연구되어왔다. 현재 냉전사에 대한 의견은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로 나눠져 있고, 냉전사 연구 및 한국전쟁 연구를 선도하는 곳은 조지 워싱턴 대학의 우드로 윌슨 센터 가 있다.
전통주의적 입장[편집 | 원본 편집]
냉전은 소련 탓!!!! 이라 주장하는 전통주의는 기본적으로 한국전쟁도 소련 때문에 발발되었다고 주장한다.
달린의 경우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기획된 음모라 보았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이 기만질에 능통한 개새끼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영향력을 팽창시키고 싶은데,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피해가 극심해서 미국과 맞짱을 뜨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하여 다른 방안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고, 위성국의 군대로만 전쟁을 일으키는 방안을 세운다.역시 난 천재!!!! 그래서 스탈린은 어디에서 시험할까 고민하던 중에 막내 중 가장 존재감 없던 김일성을 불러서 “남침해라 물자는 지원해줄게”라 말했고, 이에 김일성이 “네 형님”하고 지시에 따랐다는 것이다.[20][21]
서울대 김영호 교수는 롤백이론을 제시했는데 김영호의 말을 요약하자면 김일성이 졸라서 전쟁이 났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구소련문서가 중요한 사실을 배제하고 있고, 단순한 요약본이라는 점을 들어 이것은 러시아가 선별한 자료라 신빙성이 없다고 거부하였다. 그러면서 김영호는 설혹 김일성이 떼를 쓴 게 사실이라고 해도, 스탈린이 전쟁을 거부한 게 아니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1948년 베를린 봉쇄가 실패하면서 소련의 입지가 개차반이 되었는데 갑자기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자신감을 얻은 소련이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세력을 팽창하려고 하였고, 한국을 그 기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스탈린은 마지못해 전쟁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전쟁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22]
수정주의적 입장[편집 | 원본 편집]
수정주의는 냉전은 미국 탓[23] 으로 시작했다가 냉전은 소련이외의 요소 결과라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라는 입장에서 내인론 또는 내인론과 외인론의 결합 등으로 변화되고 있다.
플레밍의 경우 한국전쟁의 원인은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의 결과라 비난하면서 특히 에치슨 선언처럼 미국이 남한에 대해 소극적으로 지원한 결과라 주장했다. 플레밍은 당시 트루먼 행정부가 남한정부가 전쟁을 일으킬까 두려워 군사지원을 꺼려했고, 그 결과 남북한 간의 군사력 격차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 보았다.[24]
수정주의자의 전성기를 연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한국전쟁은 내부적 요인으로 발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커밍스는 한국은 이미 일제 통치기간에 계급 간 격차가 극심했는데 이 문제가 해방이후 미소 분할점령으로 더욱 극심화되었고 그 결과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을 내내 일제강점기의 계급 간 격차 및 사회문제를 설명하고 있다.[25] 그러나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요인을 잘못된 지식 하에서 서술했는데 뭐 남한이 북한을 도발했다든지, 남한 내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든지 등이 있다.[26] 당연히 전통주의자들에게 신나게 털렸다.
시몬스의 경우 김일성이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고, 한반도 내에 기반이 있는 세력에 비해 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계열이 대거 북한에 들어오는데 애들의 규모가 엄청난 양이었다. 그로 인해서 김일성의 권한은 더 불안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괴롭히고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던 박헌영이 이러게 된 이상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남침을 건의했고, 영토야욕이 있던 김일성이 이를 수용해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달려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전쟁하게 해주세요. 김일성의 부탁에 스탈린이 승인했고 이로 인해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다고 말한다.
둘을 조합한 현재 학계 정설[편집 | 원본 편집]
그런거 없다
6·25전쟁의 원인을 규명하여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가 완전하지 않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동안 6·25 전쟁에 대한 원인과 기원에 대한 자료로 활용된 것은 주요 인사들의 회고록과 일화를 중심으로 개괄적으로 연구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회고록과 일화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자기중심적으로 서술한 글로서 객관적이기보다는 자신의 일화에 대한 미화와 왜곡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이러한 자료를 연구 논문의 객관적 자료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연구논문에 대한 신뢰성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박광득, “제1장 6.25전쟁의 기원과 원인에 관한 연구.” 『통일전략』, 10권, 1호, 2010, pp.14-16
박광득이 이야기했듯이 지금 한국전쟁 중론을 도출하기 위한 객관적인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27] 그래서 손경고는 한국전쟁 연구동향을 다루는 자신의 논문[28] 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해서 명확하게 규정내리지 않았고, 그냥 이런저런 의견이 있더라 정도로 마무리하였다. 정병준의 경우도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책 서문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가 변화되었고, 명확하게 어떤 것이라 규정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즉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이에 대한 명확한 답안이 나오지 않는 상태이다. 최근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학자로는 웨더스비, 개디스, 스툭, 정병준 등이 있다.
먼저 웨더스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로 김일성이 소련을 설득한 결과라 주장했다. 웨더스비가 보기에 스탈린은 그냥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을 원했지 전쟁을 원한 것이 아니었고, 전쟁도 김일성이 땡깡을 심하게 부려서 어쩔 수 없이 승인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은 소련에게 책임이 없고, 당연히 냉전의 책임에서 소련의 역할은 적다고 주장한다.[29]
한편 같은 수정주의자인 개디스(John Lewis Gaddis)는 미국과 소련, 남북한 모두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았는데. 개디스는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둘 다 전쟁을 원하고 있었고, 전쟁을 준비했는데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지원해줘서 북한이 침공한 것이라 주장한다. 즉 미국이 소련보다 먼저 지원했다면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30]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의 경우, 한국전쟁은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이라 주장했는데, 그 이유로 그는 한국인은 독립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항이후 한국역사가 친러, 친미, 친일, 친청 등 파벌로 나뉘어 싸웠던 사실과, 이승만의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을 한 사실을 가지고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답 없는독립십이 없는 존재라 전쟁도 결정못한다고 주장했다. 미국판 식민사관 간단히 말해서 스툭의 의견은 한국 놈들 멍청해요. 그래서 전쟁 결정 못해요. 그러니 한국전쟁 소련이 일으킨거에요!!![31][32]
정병준의 경우, 한국전쟁은 1948-1949년까지 지속되는 38선의 국지전의 연장이라 보았다는 의견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본 것이지 연장이라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38선 충돌이 심하기 전부터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요청했으며 이 때 스탈린의 개시에 따라 북한의 유도나 화전양면전술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리고 스탈린 개입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오히려 스탈린의 개입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보는 사람이며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예상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스탈린의 치밀한 위장을 지적했을정도다. 정병준이 말하는 것은 38선의 국지전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배경이 "형성"됐다는 것이지, 그것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정병준은 전쟁의 "기원"이란 개념을 거부했고, 발발할 수 있는 배경이 "형성"할 수 는 있다고 봤다. 전쟁의 발발 자체는 분명하게 김일성과 스탈린의 탓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 책에서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만 그 전쟁이 가능한 배경형성이 좌우남북미소 대립에서 형성됐다는 것이지, 이게 곧 전쟁의 발발니란 것이 아니다. 책에선 이것을 "빅뱅"이라 비유한다.[33]
정병준이 말하는 바는 한국전쟁은 내부적요인과 외부적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라 본다. 정병준은 한국전쟁은 38선의 충돌의 연장이며, 이 38선의 충돌과정에서 북한이 병력과 무장을 강화하고 핵심적인 전쟁 계획과 전쟁관을 수립하였다. 정병준은 개전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강조하는 1990년대 이래 신전통주의적 입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상호 간에 적대적이었던 남북한 간의 내전적 충동 상황을 중시하는 입장을 복합적으로 견지하고 있다.[34]
정병준의 입장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한국전쟁의 기원이 38선의 충돌로 인해 기인했다고 보는 입장이고, 이러한 입장에서 기원이라는 표현을 서술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국외적 요인에 대한 영향도 고려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의견[편집 | 원본 편집]
앞서 말했듯이 한국 학계나 미국 학계나 중론이 없는 상황이지만 국내에서는 거의 중론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다.
바로 김일성 주도 스탈린 지원설이다.
먼저 북한,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통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무력통일을 위해서는 잘 훈련된 병력, 뛰어난 무기, 그리고 후원자와 군비지원이 필수적 요건이었으나 북한이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북한은 현대적 무기생산이 불가능한데다 사단급 이상의 작전계획 수립과 전투수행 경험도 전무한 상태였다. 소련군이 남겨놓은 무기와 군사고문단의 지원이 있었지만 한반도를 통일하기엔 불충분한 상태였다.[35]
이때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공)은 내전 중이라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동의와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과 회담을 가진 스탈린은 남한의 군사력과 주한미군의 현황, 북한의 전투능력과 경제에 대한 질문을 던졌으며 다방면의 지원을 원하는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남침에 대한 승낙은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 내전의 결말이 불투명했고 얄타조약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으며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킬 환경이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으며 북한 단독으로 남한을 압도하리라 판단하지 않았다.[35] 즉 시기상조라고 생각한 것이지 절대 야욕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36]
시간이 흘러 1949년 8월 소련은 핵개발에 성공하였고, 그해 9월 종공이 국공내전에 승리하였다. 거기에 북한의 전쟁준비가 어느 정도 갖춰졌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1950년 1월 김일성과 만나 남침계획을 구체화했다. 소련은 중국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중소동맹을 체결한 상태였기에 중국을 대신할 새로운 전략지역의 획득이 필요했다. 3월에 다시 만난 인간백정 두 마리 두 지도자는 북한의 남침계획에 동의하였으나 스탈린은 최종결정을 또 다른 인간백정 마오쩌둥에게 받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5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설득해 동의를 얻어내었으나 중국으로선 타이완을 '해방'하기도 전에 남의 전쟁을 돕는다는 것이 내키지많은 않았다. 그래도 전쟁을 결정한 이상 미군이 참전하더라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35]
중소동맹은 여러 정치적 이유를 띠고 있었지만 일본의 재침략 또는 미일 양국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침략의 대비와 전세계 공산화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36] 민주국가의 최전방이던 대한민국이란 눈엣가시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탈린은 신중하고 우유부단하기 까지 하여 귀가 얇아 김일성에게 휘둘리거나 김일성의 생떼에 질려서 넘어간 인물이 되나 대단히 유능한 백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지략가요 전략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이랑 북한이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제발 휴전하게 해주세요 라고 징징 거려도 죽을때까지 안 된다고 한다. 일타 쓰리피! 그리고 그들의 공공의 적 일본은 한국전 때문에 되려 살아난다. 지못미.
한국전쟁 연구의 배경과 역사[편집 | 원본 편집]
한국전쟁 원인 연구의 선도, 미국[편집 | 원본 편집]
미국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높은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한국전쟁의 원인에 따라 냉전의 책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냉전의 책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변화하였다.
1950년대의 경우 이념의 대립이 정말 한국저리가라 할정도로 하드코어 했다. 괜히 메카시즘이라는 말이 등장한게 아니다. 그래서 당시의 학자 또는 한국전쟁 관련 서적에서는 90%가 소련탓을 한다.[37] 그래서 이 시기의 학자들을 통틀어서 전통주의자 들이라고 한다.
196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천지개벽했다.[38] 이런 변화는 미국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냉전의 책임이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의 결과라 보는 관점이다. 이 들을 수정주의자라고 부른다.
수정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미국학계에서는 한국전쟁 논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자료의 부족[39] 으로 전통주의자들에게 얻어터지기만 했다. 뭐 병신같은 주장도 있어서기도 했지만[40]
미국 학계는 수정주의자가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면 전통주의자가 까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주의자들이 우세하였다. 그러다가 브루스 커밍스가 등장하면서 대세가 기울어지는데, 왜냐면 여기서 커밍스는 전쟁의 원인은 미국 탓도 소련 탓도 아닌 한국 탓!!!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학자들이 수정주의 노선을 타게되어, 전통주의자들의 위세가 꺽였지만 그래도 그냥 살짝 꺽인거다.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7:3이었던 것이 한 5:5가 되었던 것이다.
이 논쟁은 냉전이 끝났어도 이어지고 있고, 심지어 냉전이 끝난지 25년이 지난 지금(2015년)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를 하려고 한다면 영어의 압박이 있지만미국 자료를 참고해야한다. 그것도 필수적으로 해야된다. 위키러가 한국어로 발간된 논문으로만 참고문헌 작성했다가 교수한테 신나게 털려서 그런거 아니다.
국내 한국전쟁 원인 연구에 대해서[편집 | 원본 편집]
국내의 한국전쟁 원인 연구는 매우 상당히 늦게 시작되었다. 이는 분단의 상황이라는 환경에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 이전에 학계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국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의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 말 김학준[41][42] 이 미국에서 연구된 “한국전쟁 원인”을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사회는 1950년대 미국사회와 같이 이념의 대립이 하드코어해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또 자료의 부족, 특히 북한의 문서고나 소련의 문서고가 봉쇄된 상태에서 도대체 왜 일어났는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1993년 옐친이 김영삼에게 한국전쟁 관련 구소련 문서를 넘겨준 것이다.[43]
당연히 한국 학계에서는 이제서야 저놈의 빨갱이(소련)의 음모가 속 시원하게 들어나겠구만이라 장담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옐친이 준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맺어아 이 뭐병 국내에서는 원자료를 보기 어려웠고, 오로지 국방부 발간 해석본을 참고해야하는 문제가 발생했다.[44][45]
그러나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하는 등불같은 존재들이 계신다.
양영조의 『남북한 군사정책과 한국전쟁,1945-1950』(2007), 정병준의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2006), 박명림의 『한국 1950: 전쟁과 평화』(2002)이 대표적인 한국전쟁 원인을 연구한 학문서적이다.
그러나 한국 학계 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을 다루는 학자가 부족하여 자료나 신뢰성이 살짝 떨어진다. 예를 들어 본 "한국전쟁"에 대한 글도 수많은 위키러들 토론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토론을 하다보면 부족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상대편이 시정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다보니 글의 수준이 점차 성장하는 것이다.이러다가 논문쓸 거 같다.
한국전쟁의 원인 연구에 대한 평가[편집 | 원본 편집]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이념과 신념 그리고 생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요구를 49번이나 거부하였고, 전쟁 승인 때 마오쩌둥의 의견을 들었다는 사실이다.[46]
전통주의자는 이를 소련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눈치없이 와서 한다고 하니 반려시킨 것이고, 이후 기회를 포착하자 김일성을 불러 전쟁을 승인하고 중국조차 끌어들인 것이라 보았다.[47]
수정주의자는 이를 소련은 전쟁의 의도가 없었는데 김일성이 땡깡 부려서 전쟁을 승인해 준 것이라 보았다.[48]
둘 중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왜냐 기록이 없다. 그냥 김일성이 왔는데 거부했다. 이런 정도이지 무슨 회담의 내용이 없다. 특히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회담 내용은 공개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탈린이 처음에는 생각이 없다가 그래 한 번 해볼까? 이거일 수도 있고(전통주의 의견), 아니면 정말로 김일성이 땡깡부려서 스탈린이 귀찮아서 아 그래 전쟁 해!!! 라 한 거일 수도 있다. (수정주의 의견)
결국 한국전쟁의 원인은 해석의 문제이고, 누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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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상황[편집 | 원본 편집]
북한의 기습남침 | |
---|---|
한강선 방어작전 | |
국군의 지연작전 | |
인천상륙작전과 반격 | |
중공군의 참전과 1.4 후퇴 | |
지지부진한 휴전협상 | |
휴전협상과 그 이후 |
전쟁의 영향[편집 | 원본 편집]
전쟁이 으레 그렇듯이 6·25 전쟁 또한 한국 사회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수많은 영향을 남겼다.
UN군[편집 | 원본 편집]
국제연합(UN)이 정식창설 된 지 2년여만에 전쟁을 겪었고,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UN 회원국의 뜻을 모아 UN군을 창설, 한국에 파병했다. UN 평화유지군이 아닌 UN군으로서 침략자와 교전을 목적으로 한, 즉 UN이 두명의 전쟁 당사자들 중 어느 한 쪽의 편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경우는 2015년 현재까지도 이 때가 유일하다.
이는 국제연맹(LN)이 무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지 못하고 침략자에 의한 주변국 정복이 거듭된 3~40년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교훈이 가져온 결과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이나 일본의 중국 침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국제연맹과 국제사회 모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치뤘던 만큼, 침략자는 일찌감치 응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었던 것이다.
당장 에티오피아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침략때 국제연맹을 통해 호소했지만 무시당하고 정복당한 역사가 있고, 독립을 회복한 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프리카의 빈국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강자에 의한 침략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같은 이유로 유럽권 국가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나 터키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내전을 끝내고 국가재건 및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기에 참전한 경우이다. 태국은 아예 2차대전당시 일본의 동맹국, 즉 추축국이었다. 워낙 듣보잡이라 미국이 신경도 쓰지 않은 상대였고 태국도 필사의 외교전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취소하는 식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했지만 미국 및 영국, 프랑스로부터 추축국 낙인이 찍힌건 똑같았고 이를 타개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되겠다는 제스처로서 참전한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모두들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도와주러 온 나라들이다. 설사 정치적 이유든 금전적 이유였든 경제적 이유였든 어떤 이유에 따른 파병이더라도 그건 그 국가 정부의 입장이지, 파병된 사람들은 이역만리 타향땅에서 아무런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감사히 여기자.
- UN군 참전 16개국
- 북아메리카 (2)
- 남아메리카 (1)
- 유럽 (7)
- 아프리카 (2)
- 아시아 (2)
- 오세아니아 (2)
직접적으로 전투병을 참가시킨 국가만 위 16개국이고, 의료진을 보내거나 구호물자 등으로 지원한 나라는 더 많다. 놀랍게도 일본도 구호물자를 보내주었던 국가 중 하나에 속해있다. 물론 이는 당시 미국의 지시로 중간기지 역할을 할당받아 의무로 지원해준 케이스에 더 가깝지만.[49]
대중문화 속의 6·25 전쟁[편집 | 원본 편집]
그 미국이 패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의외로 미국이 분명하게 패한 소말리아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는 매우 적다. 애초에 미국 내에서 이 전쟁을 일컫는 별칭 중 하나가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50] 이다. 사실 이는 확실히 이겼거나 졌다는 식으로 딱 끝을 본 게 아니라 '휴전'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수준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도 있고, 또 이 전쟁으로 미국이 딱히 사회적으로 가지게 된 변화 또한 없기 때문이다. 가령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린 반면, 베트남 전쟁이나 소말리아 전쟁 등으로 인해 미국은 반정부, 자유주의 성향이 지독히 강해지는 등 괄목할만한 변화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거 없었다.
더불어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리로 자신감이 팽배해있던 상황이였으며 한국전쟁은 바로 그 후에 치룬 전쟁이니 당시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당연히 이기는 전쟁을 당연히 이긴 것이다'라는 정도의 감상밖에 안 드는게 사실이다. 한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얻은 선수가 다시 금메달을 얻으면 그 때 부터는 오히려 금메달을 따는게 당연해서 감흥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중심소재로 한 대중문화 작품으로는 희대의 괴작 《오! 인천》 뿐인데, 이조차 제작을 통일교에서 한거다.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다루는 매체가 매우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락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참전자들을 인터뷰해거나 초빙하여 행사를 갖는 등 여러 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 외의 지역에서는 글쎄올시다 라고 생각하는데 한국 전쟁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다큐멘터리가 매년 만들어지고 있다.
정확히는 한국인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적을 뿐이다. 슬프지만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국가는 북한이지 남한이 아니다. 어딜 가나 북한, 김정일은 알지만 남한이라고 이야기하면 "그게 어디에 있는 나라?"라는 답이 돌아오기 일수다. 한류로 인해서 영미권의 남한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지만 그래도 매일 뉴스에 나오는 북한에 비하면야……. 당연히 전세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지닌 북한에 대해서 다양한 다큐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영미권이나 서구권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구소련권이야 같은 소련권이니 당연한 것이지만 인도나 아랍에서도 남한은 모르지만 북한은 아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한국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이렇게나 많이 있다. 당연히 단순히 유투브에서만 검색한 것이 이정도이다.[51]
6·25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편집 | 원본 편집]
소설[편집 | 원본 편집]
만화[편집 | 원본 편집]
영상물[편집 | 원본 편집]
- 고지전
- 로드 넘버 원 : MBC 한국 드라마다. 소지섭 주연으로 최수종 전우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 여명의 눈동자
- 오! 인천
영화사 사상 가장 부끄러운 작품 - 인천상륙작전 (영화)
- 장진호
- 전송가
- 태극기 휘날리며
- 포화 속으로
- 원한의 도곡리 다리 : 미국에서 만든 영화로 정전 직후인 1954년에 개봉된 영화이다.
- 국제시장 (영화) : 한국 전쟁 중에 일어난 흥남 철수가 초반 중요 장면으로 나오며, 부산으로 이주한 실향민 가족 영화이다.
- 전우 : KBS 한국 드라마다. 총 3편이 있다.
다큐멘터리 영상[편집 | 원본 편집]
전쟁범죄[편집 | 원본 편집]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6·25전쟁기간에도 무수히 많은 전쟁범죄가 저질러졌다.
UN군(한국군 포함)에 의한 전쟁범죄[편집 | 원본 편집]
이 경우는 아무래도 가해자가 한국(국군, 경찰, 반공 단체 등) 경우가 제일 많고 가장 대규모 전력을 투입한 미국에 의한 피해도 제법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 초창기 한국군의 질적인 문제로 인하여 그 정도가 심각했는데[52]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력을 투입한 영국이 한국측의 전쟁범죄 문제에 대해서 ‘이들의 잔혹함은 공산주의자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한국측이 학살을 하려는 것을 다른 UN군이 제지하여 목숨을 건진 운좋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 이런 학살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명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학살 대상자와 우익 단체를 마구 징집해서 전선으로 보내면서 끝나게 되었다는 웃픈 이야기가 있다.
- 강화 양민 학살사건
- 거창 양민 학살사건
-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 국민방위군사건
- 노근리 학살사건(충북 영동군 황간면)
- 보도연맹 학살사건
- 섯알오름 학살사건(제주 예비검속자 학살사건)
- 한강 인도교 폭파
북한과 공산군에 의한 전쟁범죄[편집 | 원본 편집]
초창기 전쟁범죄는 당연히 북한군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중반 이후로는 북한군 전력 자체가 소멸하다시피 해서 거의 사라지고 중공군에 의한 범죄가 많아지게 된다. 중공군의 경우 북한군에 비하면 덜 악랄했지만 포로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된 식량 배급 없이 장거리 행군을 시킨다거나, 심심하다는 이유로 쏴 죽인다거나, 부상당한 포로를 태워죽이는 등 북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악랄했을 뿐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나마 자정작용이라도 했던 UN군에 비해서 이쪽은 그런것도 없었다. 북한군의 경우 개전 초기 24사단 미군 24사단 병력[53] 들을 포로로 잡았는데 자기들보다 덩치가 커서 관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손을 뒤로 묶고 총살 시켰다.#
- 이 전쟁 그 자체. 기습적 남침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 자체가 평화에 관한 죄에 해당하며 당연히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가 그 죄를 저지른 전범이 된다.
- 인민재판
-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사건
- 함흥 학살사건
음모론[편집 | 원본 편집]
대부분의 큰 사건이 그러하듯 여러 음모론이 끼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남침(남쪽이 침공 당함)이 아니라 북침(북쪽이 침공 당함)했다는 주장,[54]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대부분의 주장들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착하게 가만히 있었는데 이용당한 것이라는 종북적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음모론은 많다. 대표적으로 미국 언론인 스톤[55] 이 있다. 1952년에 스톤은 한국전쟁이 이승만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려고 전쟁을 유도했다고 말한다. 사실 옆 나라에서 쇼군이였던 적은 있긴 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북한식으로 해설하면 '우리 민족의 남측 영토에 미제놈이 쳐들어와 일제놈들처럼 정복해버리고, 추종세력을 키워나가는 꼴을 도저히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그런 남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김일성 동지가 해방전쟁을 일으켰다.'라는 논리이다. 뭐야, 그럼 남침 맞잖아. 그리고 1953년 정전협정을 '미제놈들의 야망을 굴복시키어 승리했다'고 정신승리를 하고 자위자부하고 있다.
중국 내에서도 미 패권주의의 확대로부터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한국전쟁에 파병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공교롭게도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가면서 대한민국을 침공하던 그 시각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이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을 4-0으로 이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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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eathersby, Kathryn.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6] (Accessed 2015. 6. 9.)
- Wolfe, Thomas W. Soviet Power and Europe, 1945-1970. Baltimore: John Hopkis University Press, 1970.
- William A. William.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 W. W. Norton & Company. 2009.
각주
- ↑ 명색이 휴전협정이니까 지금도 전쟁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그 휴전협정의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더불어 7월 27일 협정 이후에 일어나는 교전을 '한국전쟁'혹은 그 일부라고 지칭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de facto) 전쟁 중(=전시)이라 하지 않는다.
- ↑ 당시 국제적으로 공인 된 국가가 아니므로 중공으로 표기.
- ↑ 참전을 안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군인들이 참전하였다. 미군도 적군의 비행기에서 러시아어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었지만 제3차 세계대전 우려로 묵인하였다.
- ↑ 일반적으로 휴전은 전쟁 재정비를 위해 잠시 쉬는 것으로, 정전은 주로 합의가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외부세력의 개입(중개)으로 이루어진다.
- ↑ 5.0 5.1 5.2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편
- ↑ 6.0 6.1 6.2 6.3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2편
- ↑ 7.0 7.1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3편
- ↑ 8.0 8.1 8.2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4편
- ↑ 9.0 9.1 9.2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5편
- ↑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6편
- ↑ Press Club Speech on the Far East 1950-01-12
- ↑ Secretary Acheson and the Defense of Korea
- ↑ 이것도 미국 기자인 스톤이 주장한 것. 자세한 것은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 참조
- ↑ 직역하자면 "방어적 주위"이다.
- ↑ Some scholars have relied on the released Soviet documents to revive traditional interpretations of the Korean War. For example, Soh Jin-chull writes in a recent paper that "clearly ... the Korean War was 'initiated' and 'realized' by Stalin with the cooperation of Communist China." As part of a "collective conspiracy," he concludes, "it was the North Korean Communist counterpart who loyally obeyed and executed this War."81 Similarly, writers have attempted to attribute Stalin's decision to support an invasion of South Korea to Acheson's Press Club speech. Kim Hakjoon claims that when Stalin referred during his April meeting with Kim Il Sung to favorable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he "probably had in mind the speech given ... by U.S. Secretary of State Dean Acheson three months earlier in January, 1950."82 According to James G. Hershberger, Acheson's speech "may have been seen in Moscow as lending credence to the argument that Washington would not intervene militarily to rescue South Korea from being overrun."83 "The timing of Stalin's approval," Weathersby initially concluded in 1995, "must therefore have been at least in part a response to the new defense policy ... that placed South Korea outside the American defense perimeter in the Pacific."84 But Soviet documents do not sustain this interpretation, not least because just one of them even mentions the Press Club speech.
- ↑ 경향신문 1950년 1월 15일자 신문 1면 기사
- ↑ Memo of Conversation, January 28, 1950. Secretary of State File, Acheson Papers [1]
- ↑ 1950년 6월 10일자 경향신문 여적
- ↑ 1950년 1월 21일 경향신문 사설
- ↑ 정확히 말하자면, 달린은 공산주위 진영에서 하위층에 있는 북한이 정점에 있는 소련의 지시없이 전쟁을 주도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을 했다.
- ↑ Dallin, 'Soviet Foreign Policy After Stalin', p.60.
- ↑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 ↑ 대표적으로 윌리엄 A. 윌리엄스의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
- ↑ D. F. Flem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s, Vol. II, 1950-1960, Garden City: Doubleday, 1961.
- ↑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1권, 서울: 일월서각, 1997.
- ↑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2권, 서울: 일월서각, 1997.
- ↑ 소련자료가 공개되었다는데 그것도 극히 일부고 제일 중요한 문서는 공개 되지 않았다. 이는 웨더스비도 지적한 부분이다.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2] (Accessed 2015. 6. 9.) p. 9.
- ↑ 손경고. “최근 한국전쟁 연구동향: 2005년 이후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56집. 봄호. 2011.
- ↑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3] (Accessed 2015. 6. 9.) pp. 8-9.
- ↑ John Lewis Gadd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71.
- ↑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이다. 독립청원이나 외교독립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만주나 간도, 연해주로 피신하여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전을 펼치기도 했다.
- ↑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
- ↑ 정병준.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
- ↑ 김태우, "한국전쟁 연구 동향의 변화와 과제, 1950-2015", 한국사학사학보, 제32권, 2015, 330
- ↑ 35.0 35.1 35.2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8편
- ↑ 36.0 36.1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9편
- ↑ 예외적으로 스톤이 있는데 스톤은 미국기자였다.
- ↑ 농담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인들의 선진화된 모습은 이런 대 변화를 경험했기에 등장한 것이다. 간단한 예로 1950년대에는 노예가 법적으로 존재했고, 흑인에 대한 인체실험도 국가적으로 행해졌었다.
- ↑ 한국전쟁 관련 미국 공문서가 풀리는 1970년대 까지는 미국정부나 소련정부에서 공개한 자료에만 의존해야 했으니 전통주의자들에 비해 자료가 매우 부족했다.
- ↑ 예를 들자면, 굽타의 경우 일명 "해주진공설"을 제시하였고, 콜코 부부는 이게 다 맥아더와 이승만이 전쟁을 야기했기 때문이다라 주장했다. 당연히 전통주의자들은 이것을 신나게 털었다.
- ↑ 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
- ↑ 이 책은 1980년대 낸 논문을 수정 보완 증보판이다.
- ↑ 1993년 6월 25일 경향신문 1면
- ↑ 국내에서 소련 공개 원문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그에 반해 우드로 윌슨센터에 가면 러시아 극비문서가 인터넷에 스캔본으로 잘 올라가져 있다.
- ↑ 이게 학문적 논문의 경우 원문에 의거 자신의 논리를 제기해야하기 때문에 해석본을 인용하는 경우 신뢰성이 떨어진다. 아 물론 이는 석박사 급 논문을 말한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문가가 적은 것일지도....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최소 3개국어는 해야되니.... - ↑ 참고로 이것만 있지 회담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 ↑ 대표적으로 김영호가 있다.
- ↑ 대표적으로 웨더스비가 있다.
- ↑ 일본에 대해서 카더라성 일화로, 일본이 '병력 지원해줄까?'라고 하니 이승만이 필요없으니 꺼져쯤 되는 반응을 보였다는 소리도 있다. 하지만 상술했듯 당시 일본은 평화헌법 때문에 군사병력이 하나도 없었던 상황이니 말 그대로 카더라일 가능성이 높다.
- ↑ 미국에서 Korean War가 Forgotten War인 이유는 학계에서 특히 냉전분야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엄청난 이슈인데 비해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없다는 의미가 더 크다.
- ↑ 사실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임팩트가 강한 것도 아니다. 뭐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참전용사들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고, 6.25 참전용사라는 명칭 자체가 박정희 정권이던 1961년에서야 등장했으니…… 지금의 한국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도 1961년 이후 교육의 힘이었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 ↑ 전쟁 초기에 그나마 훈련된 인원을 싹 날려먹고 마구잡이로 징집해서 제대로 훈련도 안된 인원들을 일단 숫자라도 채우자는 식으로 배치했으니 병력의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 ↑ 사단장: 소장 윌리엄 딘
- ↑ 참고로 이건 '침(侵)'이라는 단어의 뜻을 헷갈려서 오해하는 경우도 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남침을 '남쪽이 침공함', 북침을 '북쪽이 침공함'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참고로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자 방송에서는 이걸 똥침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정리하자면 '내 손이 너의 똥꼬를 침공하면 그게 손침이냐 똥침이냐'는 내용이다(...). 좀 웃기지만 말은 맞긴 맞다. 점잖은 설명으로 하자면 '침범(侵犯, 침을 범하다 = 남의 영역에 멋대로 들어가는 일을 하다)'이나 '침략(侵掠, 침하여 약탈하다)'이라는 단어들로 연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 ↑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