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 폭발

이리역 폭발 사고 38주기 추모영상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라북도 이리시 이리역 장내에서 대기중이던 화차에 실린 다이너마이트, 뇌관 등이 폭발하면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야기한 대형 참사이자 안전불감증이 빚은 인재이다.

사고 원인[편집 | 원본 편집]

사고 열차는 사고 이틀전인 11월 9일, 인천한국화약주식회사 1공장에서 다이너마이트, 전기식 뇌관 등 화약류 30톤 가량 적재하고 오후 9시 43분, 광주를 향해 출발했다. 화약을 적재한 화차는 당일 오후 11시 31분, 15량의 다른 화차와 함께 이리역에 도착하였고, 다른 화물열차에 중개되는 시간동안 이리역 4번 입환대기선에 유치되어 있었다.

당시 철도 수송규정에서는 화약약품의 수송은 가급적 목적지까지 직통하는 열차를 통해 정차를 최소화하여 수송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으나 당시 사고 화차는 목적지인 광주까지 연계를 위해 무려 22시간 가량을 이리역 장내에 유치되어 있었다. 당시 사고 화차의 호송직원은 규정이 무시된체 수송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역무원에게 항의하였으나 묵살당했고, 홧김에 이리역 주변 식당에서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곁들인 식사를 한 후, 2차로 주점에 들러 막걸리를 마신 후, 호송임무를 위해 장내에 유치중인 화차로 돌아갔다.

화차로 돌아간 호송원은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화차 안이 어두워서 논산역에서 구입한 양초를 켜 주변을 밝혔다. 문제는 다른 곳도 아닌 폭발물로 가득한 화차 내에서 불을 지핀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불을 붙인 양초를 화약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후 한기를 느낀 호송원은 촛불을 끄는 것도 잊은체 침낭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결국 촛불이 침낭에 떨어져 화재가 발생하였고, 자던 중 몸이 뜨거워진 것에 놀라 잠이 깬 호송원은 황급히 화차를 탈출하였고, 역무실로 들이닥쳐 불이야를 외친 후 도주했다. 역무원들이 미쳐 손을 쓰기도 전에 강력한 섬광과 함께 폭발이 발생하였고, 이 폭발의 여파로 사고 현장에는 깊이 10m, 직경 30m의 웅덩이가 생겼다.

피해[편집 | 원본 편집]

  • 인명피해
    • 사망 : 59명
    • 중상 : 185명
    • 경상 : 1,158명
  • 재산피해
    • 가옥파괴 : 7,866동, 3억 5천만원
    • 각종 재물 피해[1] 추정금액 : 40억원 이상
    • 이재민 : 1,674 세대 7,873명
  • 이리역 피해
    • 역사 완파
    • 역 구내에 유치되었던 객차, 화차 117량 파손
    • 선로 1,650m 이상 파손

이 사고의 여파는 이리역과 그 주변을 초토화시켰으며, 폭음이 전주시 일대에서도 들리는 등 폭발의 위력과 규모가 엄청난 수준이었다. 폭발이 발생한 이리역 반경 500m 이내의 건축물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으며, 1km 이내의 가옥은 반파, 4km 거리의 가옥도 유리창이 너덜거리는 등의 파손을 입었다. 폭발의 여파로 흩어진 파편 일부는 700m 이상을 날아가 가옥을 덮쳤다.

당시 인구 밀집지역이던 이리역 부근 창인동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폭발의 여파로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쑥대밭으로 변모했으며 거주인구의 절반 가량인 3,385명이 이재민 신세가 되었다.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모현동 역시 60가구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파괴당했으며 2,448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인해 당시 이리시의 72%가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사고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처벌[편집 | 원본 편집]

사고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공한 호송원 신무일(당시 36세)은 사고 직후 도주하였으나 다음 날 검거되었다. 수사과정에서 신무일은 인천을 출발해 이리까지 오는데 무려 22시간이나 걸렸고, 이리역에 도착해서도 화차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동안 역 구내에 대기하고 있어 홧김에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잠자던 중 화재가 발생한 것을 인지하고 초동 진화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고, 황급히 역무원에게 불이난 것을 외치고는 그대로 도주했다고 한다.

사고의 직접적 원인은 화약이 가득한 화차 안에서 촛불을 켠 호송원의 실책이었으나, 철도운송 규약에 명시된 화약품 운반에 관련된 목적지 직송원칙을 관행적으로 무시[2]한 역 당국의 귀책도 존재한다. 전형적인 안전불감증의 사례인 것이다.

법원은 이 사고의 책임을 물어 호송원 신무일에게 징역 10년을 선고[3]했으며, 그 외 화약회사, 철도청, 대한통운 관계자 등 관련자들도 법적 책임을 면치 못했다.

이리시 재건[편집 | 원본 편집]

당시 박정희 정부는 사실상 완전히 파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이리시 복구를 위해 50억원 규모의 재정지원을 하였으며, 당장 갈 곳을 잃은 수천명의 이재민들을 위한 천막촌이 건설되었다.

사고 소식 이후 전국 각지에서 5억원 이상의 성금이 모금되었고, 쌀 88톤 가량을 비롯한 각종 성금품이 지원되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천막촌에서 이재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등 온정의 손길이 이어졌다. 이리시 복구를 위해 공병부대, 의무부대 등 군부대의 지원도 이어졌으며 사고후 1개월간 응급복구를 위해 연인원 25만 8천명, 각종 차량 1천388대가 투입되었다. 복구비용은 피해액의 5배 가량인 200억원 정도가 투입되었다.

이런 각계각층의 노력으로 이리시는 과거의 낙후된 모습에서 벗어나 정비된 모습으로 재탄생하였다. 파괴된 이리역 역사는 말끔히 재건축[4] 되었으며, 천막촌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이재민들 가운데 2천여 세대가 새로 건축된 아파트 단지로 입주했으며 이 아파트 단지가 바로 창인주공아파트, 모현주공아파트이다. 이 당시 새롭게 단장한 이리시의 모습을 두고 폭발 사고로 인해 이리시의 발전이 30년 앞당겨 졌다는 평가가 존재할 정도.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 하춘화가 이리역 인근 삼남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중이었다. 이때문에 사고 직후 일부 언론에서는 하춘화가 사고에 휘말려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당시 극장에서 공연 준비중이던 하춘화는 폭발과 함께 극장이 무너져 내리며 생사의 기로에 서있었는데, 마침 사회를 보던 개그맨 이주일이 하춘화를 등에 들쳐업고 건물을 빠져나와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하춘화 본인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으나 이주일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인 하춘화를 구해냈다는 것 하나로 당시 무명이었던 이주일은 일약 전국구 스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 폭발 사고 당시 이리역 장내에는 석유를 가득 적재한 유조화차가 유치되어 있었다. 화재 소식을 접한 화물열차 기관사는 황급히 유조화차를 연결한 기관차를 조작해 인근 황등역으로 대피했고, 2차 폭발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천만다행으로 폭발 사고가 일어난 시각에 이리역을 지나갈 예정이던 상행 여객열차는 김제시 인근 부용역에서 기관사가 통표[5]를 누락한 사실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잠시 열차가 지연되었는데, 이리역 역무원에게 폭발 사고 소식을 접하고 운행을 중지한 덕분에 객차에 탑승한 수백명의 승객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유사 사고[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역사 등 공공시설물 파손, 열차 파손 등
  2. 화물열차 배정시 급행료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암암리에 요구하던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3. 대법원 1978. 9. 26. 선고 78도1996 판결
  4. 당시 이리역 주변의 홍등가와 빈민촌이 이 사고로 쑥대밭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후 도시 재정비를 하며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물론 사고 여파로 홍등가에서 생활하던 윤락여성들의 피해도 제법 컸다고 전해진다.
  5. 당시 호남선은 복선화가 완벽히 이뤄지지 않은 시기로, 1978년에 대전 ~ 익산 구간의 복선화가 완료되었고, 익산 ~ 송정리 구간은 1989년에서야 복선화가 완료되었다. 따라서 사고 당시 해당 구간은 단선으로 통표폐색식을 이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