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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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6월 25일 ~ 현재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김일성
마오쩌둥
이오시프 스탈린
이승만
더글라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
마크 웨인 클라크

개요

틀:날짜/출력, 북괴 북한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틀:날짜/출력 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즉,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냉전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무기를 들고 맞붙은 전쟁으로,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참전국 보면 세계대전이 맞는 것 같은데 세계사, 특히 냉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근데 한국에는 냉전사 연구하는 교수가 거의 없다. 그래서 정작 기억하는 수는 적다.

배경

한반도의 분단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 후에도 일본 제국은 끝까지 저항을 하였으며, 이에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얻어내기 위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한편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체결한 결의에 근거해 8월 8일 일본 제국에 막타 보너스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 157만명의 대군을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시켰다.[1]

한반도 문제에 소련의 참여를 인정했던 미국이었지만,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에 이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소련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의 군사작전 한계선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해군부는 39도선 분할을 제시했지만 국무부와 육군부는 이미 소련이 한반도에 주둔한 시점에서 미군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의 한계점이 38도선이라고 판단,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38도선 분할안을 결재하게 되었다.[1]

미국으로부터 38도선 분할 안건을 받은 소련정부는 즉각적인 회답에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로서 38도선을 경계로 일반명령 제1호를 통해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에게, 이남의 일본군은 미국에게 항복을 받는다는 방침이 확정되었다. 이 분할점령에 의해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서로 다른 정치권력이 들어섰다.[1]

군정과 신탁통치

1945년 9월, 미국은 남한의 군정 포고문을 발표했지만 구체적 게획이 전무한 상황인데다 정치경험이 풍부한 한인 지도자들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후 미군 장교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이 고문으로 활약하였으며 이는 해방을 갈망했던 한국인들의 반발을 사기 시작했다.[2]

산업경제가 붕괴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남한의 행정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한 미군은 10월부터 일본인 고문들을 퇴임시키고 그 자리를 한국인으로 대체해 일제의 악법들을 폐지했으며, 최종적으로 남한을 군정과 신탁통치를 거쳐 자유 민주주의 독립국가로 형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해왔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앙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모든 정파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결과 남한은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2] 겉만 보면 건강하고 올바른 정치 체재인데 북괴 때문에 안 될거야 아마.

한편 소련은 1945년 8월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38도선 일대에 초소를 건설해 남북을 왕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을 강화하고 남북을 잇는 철도, 도로, 통신을 차단했다. 초기에는 민족주의자들의 명망과 조직을 이용해 안정화를 꾀했으며 한국인 정치인을 기용했다. 그러나 고문관에는 소련군 장교가, 실권은 소련계 한인들이 쥐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민족주의자들을 내치고 토사구팽 친소련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10월 14일 소련군 대위 혹부리우스 김일성을 앞에 내세워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만들었다.[2]

소련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포퓰리즘을 이용해 공산주의를 신봉하게 만들고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비협조자들이 숙청당하거나 남한으로 도망갔으며, 김일성은 빠른 시일에 북한의 권력을 쥐게 되었다.[2]

남북을 분할점령하던 미국과 소련은 1943년 카이로 선언을 구체화하기 위해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무장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인에 의한 한반도 정부 수립을 위해 최대 5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임을 결의했다. 신탁통치 결정이 알려지자 남북한 모두 거센 반발을 보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남북한 좌익세력은 입장을 바꿔 신탁통치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반탁운동을 전개하던 우익세력과 충돌을 일으켰다.[3]

1946년 3월, 신탁통치의 결정을 위해 미국가 소련의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으나 양측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좌익을 협의대상으로 삼길 바랬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모두에게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의 의사표명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한 단체만 받아들임으로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1947년 5월에도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한 두 국가간의 협조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소련과의 협조를 통해 한반도 통일정부수립을 원했던 미국은 방침을 철회하고 국제 연합으로 문제를 넘겨버렸다.[3]

남북한 독립정부 수립

두 차례에 걸친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북한과 남한의 좌익세력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남한의 우익세력간의 대립이 극심해지자 미 군정은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1948년 5월 10일 소련의 반대로 UN 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갈 수 없는 북한을 제외한 남한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했다. 만 21세에 달하는 모든 남녀에게 선거권이 주어졌고, 선거반대가 극심했던 제주도를 뺀 남한 전역에서 후보들이 출마했으며,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개개인의 손으로 대표를 뽑는 주권을 행사했다.[4]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을 중심으로 제헌의회가 구성되었고 7월 12일 헌법을 제정, 20일에 이승만과 이시영을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내각을 출범시킨 대한민국은 8월 15일 건국을 선포함으로서 한반도 최초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UN은 48대 6으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으며, 미국은 외교승인과 동시 미군정을 폐지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모든 것을 이관하였다.[4]

처음부터 한반도 통일정부를 원치 않았던 소련은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해 공동위원회가 한창 열리고 있을 무렵 김일성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권력을 장악, 1946년 11월에 인민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1947년 2월, 임시가 아닌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북한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만들었으며, UN에서 남한정부 수립 결의안을 채택하자마자 인민헌법을 만들고 한반도의 합법정부로 내세웠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같은 날 김일성이 내각수상으로 선출되었다.[4]

주한미군 철수

미국은 한반도 통일정부가 물건너가고 안보전략의 조정에 따라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재정의 압박으로 군축을 실시했는데 전시동원으로 1,200만명에 달하던 병력 중 수백만이 본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대규모의 군대를 보유한 소련이라는 존재가 있었음에도 막강한 공군! 공군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원자폭탄이라면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소련의 주력이 동유럽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는 비교적 위협수치가 낮았다.[5]

미국은 동맹국인 중화민국이 내전에서 패배할 것을 대비해 1947년부터 일본을 새로운 방파제로 삼으려는 계획을 검토하였다. 소련이 미국을 겨냥, 태평양 방면으로 침공해올 것을 상정해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방어전략을 마련했다. 소련과 전면전이 발생하면 이 지역의 해공군기지를 활용해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최종적으로 본격 아포칼립스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1950년 1월에 발표된 이 전략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있는 애치슨 라인으로 한국과 중화민국은 제외되었다.[5]

한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이유는 당시 한반도가 전략적인 위치라고 생각되지 않았을뿐더러 군사적 부담이 큰 요인이었다. 어짜피 한반도로 소련이 진격하게 되면 전면전을 피할 수 없었거니와 지상군 작전보다 한반도를 우회한 해공군으로 적의 본거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다.[5] 천조국스러운 소련 평탄화작전. 그런데 적이 한반도만 노리면 어떡하지?

참고로 미국은 애치슨 선언에서 한국을 배제한 게 아니라고 해명한 공식문서가 있다. 일본과 필리핀을 잇는 전략적 방어라인은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미국을—당시 일본은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었던 미국의 해외 영토인 반면 대한민국은 어엿한 주권국가다—지키는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지, 마치 미국이 한국을 무방비상태로 두었다는 식으로 해석한 기자들을 질타했다. 실제로 미국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한국을 지키기 위해 매우 빠른 속도로 파병되었다.[6]

아무튼 애치슨 선언은 국내에 불안을 야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특히, 이승만의 땡깡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이에 미국은 한국과 1948년 8월 24일 군사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군사협정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이 주한미군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49년 6월 30일 철수가 완료된 시점에도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이 남아 한국군의 군사원조를 지원했다.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북한의 군사침공의 대비보단 내부 치안과 경제원조에 원점을 두었다. 심지어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각종 항공기와 중화기의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미국 정부에서 거절하였다.[5] 북한에 4,300명의 군사고문단과 10개 이상의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각종 장비와 중화기를 제공한 소련과는 대조적인 상황이 벌어졌다.[7]

발발 원인

한국전쟁은 왜 발생했는가? 이는 냉전사 최대의 난제이다. 왜냐면 한국전쟁의 원인을 누구에게 있는지 규정하는 순간 그 대상이 냉전의 원인제공자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래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미국의 냉전원인 연구와 그 맥을 같이했다.

현재 냉전사에 대한 의견은 전적으로 소련 탓이라 주장하는 전통주의소련 탓이 아니야라 주장하는 수정주의로 나눠져 있다.

참고적으로 한국전쟁 연구 및 냉전사 연구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우드로 윌슨 센터냉전사 프로젝트로 선도하고 있다.

전통주의적 입장

대표적으로 달린과 김영호가 있는데, 달린은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작전이라 주장했다. 왜냐하면 스탈린의 성격이 개차반이라 남을 기만질하는데 능통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8] 그래서 스탈린은 공산권을 팽창은 시키고 싶은데, 2차 세계대전으로 피해가 극심하니 직접 전쟁은 못 일으키는 상황이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고, 위성국의 군대로만 전쟁을 일으키는 계획을 세운다. 역시 난 천재!!!!

그래서 스탈린은 말단 김일성을 불러서 "야 남침해라"지시했고, 이에 김일성이 "네, 형님"하고 승인했다는 것이다. [9][10]

서울대 김영호 교수[11]는 롤백이론을 제시했는데 김영호의 말을 요약하자면

김일성이 졸라서 전쟁이 났어도, 아무튼 전쟁을 승인한 사람이 누구냐? 스탈린 아니냐? 그러니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최종결정권자가 스탈린이니 당연히 스탈린 책임이다는 것

전통주의자들의 입장은 전쟁의 책임이 소련에게 있다고 보았고, 거기에 김일성이나 북한의 역할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수정주의적 입장

냉전은 전적으로 미국 탓이라 주장하는 수정주의는 윌리엄 A. 윌리엄스의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가 출간되면서부터 형성되었다. 특히 윌리엄스는 냉전은 미국의 잘못된멍청한외교 덕분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의 위세는 전통주의자들에 비해서 그 입지가 적었다.

이 입지를 뒤집어 엎은 것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이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출간하여 한국전쟁이 소련이나 미국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한국내부의 문제였다는 소위 내인론을 제시하였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일제강점기 때 등장한 계급간 격차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해방 후 미소 분할점령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게되었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근데 커밍스 주장의 문제점은 한국전쟁의 간접적인 원인(계급간 갈등 등)은 설득력이 있으나 직접적인 원인[12]에 대한 설명이 미흡한 것이 문제이며 간간히 틀린 정보도 많다는 것이다.[13]

시몬스의 경우 김일성이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고, 한반도 내에 기반이 있는 세력에 비해 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계열이 대거 북한에 들어오는데 애들의 규모가 엄청난 양이었다. 그로 인해서 김일성의 권한은 더 불안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괴롭히고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던 박헌영이 이러게 된 이상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남침을 건의했고, 영토야욕이 있던 김일성이 이를 수용해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달려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전쟁하게 해주세요. 김일성의 부탁에 스탈린이 승인했고 이로 인해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다고 말한다.

수정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의 원인이 스탈린이나 소련의 음모가 아니라,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나 국내적요인 뭐 김일성이 주도했다든지, 또는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분쟁이라든지 등 그러니까 한국전쟁의 원인은 소련 이외에서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둘을 조합한 현재 학계 정설

그런거 없다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학계의 정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에서는 존재한다. 안그러면 빨갱이 되니까 아무튼 한국전쟁 원인을 주도하는 것이 미국이고 미국의 경우 엄청난 논쟁 속에 있다.

먼저 최근 한국전쟁에 관한 의견을 제시한 미국의 학자로는 웨더스비, 개디스, 앞서말한 스툭이 있다. 이 셋 다 냉전사 관련 유명한 학자이며 냉전사 특히, 냉전의 원인의 측면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

먼저 수정주의자인 웨더스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로 김일성이 소련을 설득한 결과라 주장했다. 웨더스비는 김일성은 1949년 이후로 끈질기게 스탈린을 설득했고, 그 설득에 스탈린은 마지못해 한국전쟁을 승인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한국전쟁은 소련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미국이 이 지역에 관심이 없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은 소련에게 책임이 없고, 당연히 냉전의 책임에서 소련의 역할은 적다고 주장한다.[14]

한편 같은 수정주의자인 개디스(John Lewis Gaddis)는 미국과 소련, 남북한 모두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개디스는 김일성이나 이승만 모두 통일을 원하는 상황이었고, 군사분계선인 38선 사이에서 남북한 간의 분쟁이 지속되면서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의 통일이 필요함을 느꼈으며, 이를 위해 남북한 모두 미국과 소련에게 전쟁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개디스는 전쟁의 책임이 미국과 소련 그리고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있다고 본다.[15]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16]의 경우, 한국전쟁은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이다. 왜냐면 그는 한국인은 독립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항이후 한국역사가 친러, 친미, 친일, 친청 등 파벌로 나뉘어 싸웠던 사실과, 이승만의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을 한 사실을 가지고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독립심이 없는 존재라 주장했다. 미국판 식민사관 그래서 한국전쟁도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계획된 전쟁이라 본다.[17]

간단히 말해서 스툭은 한국놈들 멍청해요. 그래서 전쟁 결정 못해요. 그러니 한국전쟁 소련이 일으킨 거에요라 말한것이다.

이 세 주장 모두 비판을 받는데, 웨더스비의 경우 소련군이 북한에게 단순한 지원만 했다고 하였지만, 한국전쟁 초기 소련군 장교가 작전계획까지 개입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소련군이 북한에게 지원한 정도는 거의 전쟁을 대부분을 기획했다고 할 정도로 정교하고 세세한 부분까지였다. 그러므로 김일성의 땡깡에 손을 들어주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개디스의 경우, 당시 남북한 모두 전쟁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지적하였지만, 세세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냥 전쟁 날 상황이니까 전쟁 난거야하는 수준이라...이건 뭐 초딩도 아니고

스툭의 경우, 앞에서 언급했지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논점을 전개하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한국전쟁 문제는 냉전의 원인과도 연관되어 있어 어떤것이 정답이라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일성이 주도하고 스탈린은 아무 잘못 없어용이 대안으로 보이지만 이게 딱히 그런게 아닌게, 만약 이것이 맞다고 해버리면 당시 1950년대 소련은 위성국가 하나도 통제 못하는 국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맞다 할 수 없고, 저것이 맞다 할 수 없는 상황. 이것이 우드로 윌슨 센터의 가장 큰 고민이자. 냉전사 연구 학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한국에서의 정설

한국에서는 독특하게 정설이 있다.

한국에선 스탈린의 사주와 마오쩌둥의 동의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당장 자유총연맹이나 재향군인화 한국전 관련 자료를 보시라), 냉전후엔 후르쇼프 회고록 발간과 소련 비공개 문서 해금이후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회의적이었고, 김일성의 적극적인 설득과 생떼로 인하여 마지못해 스탈린이 승인하여 전쟁이 이루어졌다고들 한다.

여기서 당시 스탈린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냉전초기에 막 위성국화하거나 위성국화중인 동유럽을 안정화 시켜 소련의 대 서구권 완충지대를 다지기 위해서 미국과 서방세력이 동유럽에 신경쓸 여력을 극동으로 관심을 돌리게하면서 더불어 장차전을 대비하여 극동에서 다시금 과거의 국력과 위상을 회복하여 소련에 대적할 것이 뻔한 중국과 일본, 더불어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도 미리 힘을 좀 빼놓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스탈린의 구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정한다.[18]

겉으로 보기에는 스탈린은 신중하고 우유부단하기 까지 하여 귀가 얇아 김일성에게 휘둘리거나 김일성의 생떼에 질려서 넘어간 인물이 되나 그의 의중이 위의 추정대로였다면 대단히 유능한 백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지략가요 전략가라고 할수 있다.그리고 중국이랑 북한이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제발 휴전하게 해주세요 라고 징징 거려도 죽을때까지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본은 한국전 때문에 되려 살아난다. 지못미

참고적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간 『6.25 전쟁사』에 의하면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새로운 의견이 제시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무엇때문에 발발되었는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보론

이 부분은 보론이므로 그냥 넘어가도 무관합니다. 굳이 읽기를 원하신다면야.....

====국내 한국전쟁 원인 연구에 대해서====

없다고 보면 된다

국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소수에 지나지 않고 학계 그룹을 형성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분단의 상황과 지난 과거시간 아니 현재까지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에 기인한 것이다.

국내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논의가 시작은 1980년대 말 김학준[19][20]이 미국의 연구사례를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연구는 이미 결론이 나와있는 연구였다.[21]

그렇기에 전쟁에 대한 연구는 폭넓고 다양하게 접근하지 못하고 상당히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연구에 큰 장애를 주었다.

1990년대 초 러시아의 옐친이 소련 문서고에서 한국전쟁관련 문서를 남한에 수교 기념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 자료를 10년간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옐친과 하였고, 그래서 이 자료는 한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료가 공개되기 시작한 2000년대를 중심으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으나 연구는 대부분 남한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김일성이 개새끼이지 우리 남한 정부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원인 연구의 선도, 미국

미국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높은 이유는 앞서말했듯이 한국전쟁의 원인에 따라 냉전의 책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국 사회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은 당연히 소련의 책임이었고 이는 진리이자 진실이었다. 1950년대 학계는 이런 의식에 따라 책을 서술 판단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로른 달린과 리스가 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1960년대 극적인 사회변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변화 속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이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의견이 등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수정주의이다. 이 수정주의의 등장은 커다란 논쟁을 일으켰다. 초기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음모론이나 잘못된 정보에 국한되었지만 점차 전통주의와 논쟁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세련화되어갔다.

동시에 전통주의도 수정주의와의 논쟁을 통해서 자신들의 논지를 강화해나갔다. 이 수정주의와 전통주의 간의 논쟁은 끝이 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조지 워싱턴 대학교 우드로 윌슨 센터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끝없는 논쟁이 오가고 있다.

참고적으로 국내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영어의 압박이 있지만미국 자료를 참고하거나 미국 연구 결과를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말한 박명림, 정병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국의 연구 자료을 차용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원인 연구에 대한 평가

틀:독자연구


주의!!! 본 내용은 독자연구이므로 위키러분들의 비판적인 독해가 필요합니다.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이념과 신념 그리고 생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요구를 49번이나 거부하였고, 전쟁 승인때 마오쩌둥의 의견을 들었다는 사실이다.[22]

전통주의자는 이를 소련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눈치없이 와서 한다고 하니 반려시킨 것이고, 이후 기회를 포착하자 김일성을 불러 전쟁을 승인하고 중국조차 끌어들인 것이라 보았다.

수정주의자는 이를 소련은 전쟁의 의도가 없었는데 김일성이 땡깡 부려서 전쟁을 승인해 준 것이라 보았다.[23]

둘 중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왜냐 기록이 없다. 그냥 김일성이 왔는데 거부했다. 이런 정도이지 무슨 회담의 내용이 없다. 특히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회담 내용은 공개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탈린이 처음에는 생각이 없다가 그래 한 번 해볼까? 이거일 수도 있고(전통주의 의견), 아니면 정말로 김일성이 땡깡부려서 스탈린이 귀찮아서 아 그래 전쟁 해!!! 라 한 거일 수도 있다. (수정주의 의견)

결국 한국전쟁의 원인은 해석의 문제이고, 누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Junius001 (토론)

참고문헌

3장 참고문헌입니다. 참고문헌을 확인하려면 오른쪽 버튼을 눌러주세요

  • 강석승. “‘6.25전쟁’의 발발원인에 관한 소고.” 『남북문화예술연구』 8호. 2011.
  • 김진웅. “한국전쟁의 국내적 요인: 학설사적 접근.” 『환태평양연구』 vol. 3. 1990.
  • 김진웅.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최근의 해석.” 『역사교육논집』 26집.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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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상황

전쟁의 영향(부정적인 부분)

수많은 인명피해

당장 전투로만 유엔군과 한국군에서 18만명이 전사하였으며,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전사하였다. 이런 전투 외에 각종 학살과 폭격 등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가 100만 단위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것. 이로 인한 전쟁과부와 고아의 발생은 덤이다.

지독한 사상 컴플렉스

본디 이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남한과 북한 모두 이념에 대해 그렇게 하드코어하지 않아 자유로운 이념과 종교 활동이 가능하였다. 남한에도 공산당이 있었고 북한에도 자유주의자가 있는 등 양국 다 제법 균형잡힌 안정된 모습을 취하고 있었고, 만약 이 상태가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양국은 동독과 서독 같이 지금보다는 좀 더 원만한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 이후 양국의 이념 활동은 극도로 경직되게 되었다.

우선 한국사회는 공산당이나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회가 되었다. 이후 독재정권에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반대파를 찍어누르는 구실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게 되는 원인이 된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우리가 공산당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 국가인데 뭔 소리냐! 우리를 전복시키려는거 보니 넌 빨갱이가 분명하다!'(...)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무고한 시민과 학생들을 셀 수도 없이 때려잡았다. 이는 이제 민주화, 자유화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산주의의 공 자만 꺼내도 바로 민족의 반역자로 여기는 여론의 가혹한 반응 등으로 아직까지도 남한 내에서 공산주의를 향한 강한 적개심이 유효함을 선보이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라 전후 김일성은 자신의 파벌을 제외한 다른 파벌들에게 패전의 누명을 뒤집어씌워 죄다 숙청시켜 오직 자기 추종자들만을 남기는 절대적인 독재 체제와 여기서 비롯된 세습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곧 김일성 스스로가 교주이자 신으로 군림하는 주체사상이라는 세계 최악의 막장 사이비 종교를 창시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한 북한 사회/경제/문화/교육/지리/생활의 막장화를 불러오게 된다.

전쟁의 영향(긍정적인 부분)

끔찍하기 이루말할 수 없는 전쟁으로 기왕이면 안일어나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전쟁이 몰고온 긍정적인 여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당시 여러 호전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상술한 박헌영도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서로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국지전이 빈번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러한 호전론자들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전쟁은 나쁜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강력하게 퍼지게 되어 남은 힘 조차 잃게 되었다. 덕분에 비록 '휴전' 관계임에도 오늘날까지 양국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유지되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과시하는 식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 이후 양국이 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손실도 매우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그것을 잘 이어나갔지만 북한은 중간에 침몰하여 아직까지 밑바닥을 떠도는 중이다(...).

완전한 계급제 철폐

사실 한반도는 상술했듯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을 거두었기에 사회 구조가 그대로였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즉 일단 법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했지만, 앞집 김씨는 양반 출신 뒷집 정씨는 노비 출신 등 어디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평등'이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피난을 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어디의 누구였는지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 와중엔 죽어서 아예 잊혀진 사람도 있고, 살아는 남았으나 기반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는 등 민족이 제대로 뒤엉켜버렸다.

게다가 이후 사회기반의 리셋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 하기도 모자랄 판국이 되어버린 탓에 먹을것을 잘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고 이런 판국에 양반이니 노비이니 하는 출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출신성분은 서서히 잊혀졌고 결국 비참하게나마 온 국민의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전쟁 덕분에 평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근대 와서 심각한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누구는 화족 출신이네, 누구는 부라쿠민 출신이네 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까지도 민족차별이 빈번한 국가로 남아 있다.

물론 그 이후에 평등화 된 사회를 지켜낸 것은 대한민국의 몫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신분제가 다시 등장했으니까.

미국과의 유대감 강화

전쟁을 통해 미군과 국군이 함께 싸우면서 양국의 유대감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국군은 미군과 함께 싸움으로서 미군의 최신식 장비와 그에 걸맞는 교리들을 다수 습득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근 백여년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전 경험을 갖게 되어 실력 또한 향상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여파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 종전의 '일본을 처리하면서 떠안은 부산물'이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벗어나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정신적 유대감에 더불어 실제로 미국식 사회제도나 경제제도가 잘 도입되어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유대감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이다.

다만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우방국이라는 거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이 우리 편일거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도 결국 이익을 생각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국가이며, 이는 한국군이 하푼을 도입하려고 했을때 일본측의 로비를 받은 미국에서 하푼의 판매를 거절했었던 사실이나 M60 패튼을 대체하는 신형 전차의 도입 시도를 영 꺼림직하게 봤던 일 등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의 우방국인 것은 맞지만, 국제 정세에 따라서는 태도가 달라지지 말라는 법이 없으므로 맹신이 아닌 적절한 외교를 통해 우방국으로서의 관계를 튼튼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몇몇 국가들의 부흥

남의 전쟁을 통해 배를 불렸다는 점이 당사자로서 심히 아니꼽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냉정하게 말해 한국전쟁으로 분명히 득을 본 국가들도 있긴 했다.

일례로 이웃국가 일본의 경우는 한국전쟁으로 대박이 터졌다. 일본은 당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관리 하에 놓여져있는 입장이다보니 한국땅에서 싸우는 UN군을 원조할 중간기지 역할을 담당(UN군용 군수물자 생산 및 납품 등)하게 되면서 이로 인해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긴 했다. 더군다나 일본은 전후 평화헌법에 의해 군대가 없던 실정[24]이라 한국에 병력을 파견할 일도 없었다. 즉 말 그대로 피 한방울 안보고 돈만 실컷 벌었다.

한편 중화민국도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죽다 살아났다. 이쪽의 경우 원래대로라면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1년 내로 무력으로 접수될 운명이였으나, 한국 전쟁이 북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는 수 없이 북한을 원조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군사력을 한반도로 투입시켜야 했기 때문에 전후 중화민국을 접수할 힘이 남지 않아 살아남게 된 것이다. 만약 한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조기에 정리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입할 여지 자체가 없어졌다면 중화민국도 지금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몇몇 참전국들도 분명하게 대외적인 플러스 이미지를 얻었고 경제적인 이득도 일부 얻었다. 미국이 대표적으로 미국은 본 전쟁에서 '정의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얻어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 보탬이 되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에서 다 말아먹었지만)

기타

UN군

국제연합(UN)이 정식창설된지 2년여만에 전쟁을 겪었고,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UN 회원국의 뜻을 모아 UN군을 창설, 한국에 파병했다. UN 평화유지군이 아닌 UN군으로서 침략자와 교전을 목적으로 한, 즉 UN이 두명의 전쟁 당사자들 중 어느 한 쪽의 편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경우는 2015년 현재까지도 이 때가 유일하다.

이는 국제연맹(LN)이 무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지 못하고 침략자에 의한 주변국 정복이 거듭된 3~40년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교훈이 가져온 결과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이나 일본의 중국 침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국제연맹과 국제사회 모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치뤘던 만큼, 침략자는 일찌감치 응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었던 것이다.

당장 에티오피아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침략때 국제연맹을 통해 호소했지만 무시당하고 정복당한 역사가 있고, 독립을 회복한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프리카의 빈국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강자에 의한 침략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같은 이유로 유럽권 국가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터키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내전을 끝내고 국가재건 및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기에 참전한 경우이다. 태국은 아예 2차대전당시 일본의 동맹국, 즉 추축국이었다. 워낙 듣보잡이라 미국이 신경도 쓰지 않은 상대였고 태국도 필사의 외교전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취소하는 식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했지만 미국 및 영국, 프랑스로부터 추축국 낙인이 찍힌건 똑같았고 이를 타개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되겠다는 제스처로서 참전한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모두들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도와주러 온 나라들이다. 설사 정치적 이유든 금전적 이유였든 경제적 이유였든 어떤 이유에 따른 파병이더라도 그건 그 국가 정부의 입장이지, 파병된 사람들은 이역만리 타향땅에서 아무런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감사히 여기자.

직접적으로 전투병을 참가시킨 국가만 위 16개국이고, 의료진을 보내거나 구호물자 등으로 지원한 나라는 더 많다. 놀랍게도 일본도 구호물자를 보내주었던 국가 중 하나에 속해있다. [25]

관련 작품

같이 보기

센추리언(전차)

대중매체

미국이 패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의외로 미국이 분명하게 패한 소말리아전이나 베트남전과는 달리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는 매우 적다. 애초에 미국 내에서 이 전쟁을 일컫는 별칭 중 하나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26] 이다. 사실 이는 '휴전'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수준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도 있고 또 이 전쟁으로 미국이 딱히 사회적으로 가지게 된 변화 또한 없기 때문이다. 가령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린 반면, 베트남전이나 소말리아전 등으로 인해 미국은 반정부, 자유주의 성향이 지독히 강해지는 등 괄목할만한 변화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거 없었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중심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으로는 희대의 괴작 오! 인천뿐인데, 이조차 제작을 통일교에서 한거다.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다루는 매체가 매우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락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참전자들을 인터뷰해거나 초빙하여 행사를 갖는 등 여러 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 외의 지역에서는 글쎄올시다...라고 생각하는데 한국 전쟁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다큐멘터리가 매년 만들어지고 있다. 단지 한국인들이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 것 뿐이지 [27]

트리비아

대부분의 큰 사건이 그러하듯 여러 음모론이 끼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남침(남쪽이 침공 당함)이 아니라 북침(북쪽이 침공 당함)했다는 주장,[28]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대부분의 주장들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착하게 가만히 있었는데 이용당한 것이라는 종북적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음모론은 많다. 대표적으로 미국 언론인 스톤[29]이 있다. 1952년에 스톤은 한국전쟁이 리승만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려고 전쟁을 유도했다고 말한다.

  1. 1.0 1.1 1.2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편 [4]
  2. 2.0 2.1 2.2 2.3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2편 [5]
  3. 3.0 3.1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3편 [6]
  4. 4.0 4.1 4.2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4편 [7]
  5. 5.0 5.1 5.2 5.3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5편 [8]
  6. Secretary Acheson and the Defense of Korea [9]
  7.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6편 [10]
  8. Dallin, 'Soviet Foreign Policy After Stalin', p.60.
  9. Dallin, 'Soviet Foreign Policy After Stalin', p.60.
  10. 달린은 북한의 위치는 공산주의 서열에서 말단에 속하는 국가였으니 당연히 정점에 있던 소련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고 주장했다.
  11.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12.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남한과 미국이 남침한 결과라 설명한다든지, 미국의 음모였다든지 등
  13.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든지 등
  14.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11] (Accessed 2015. 6. 9.) pp. 8-9.
  15. John Lewis Gadd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71.
  16.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
  17.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이다. 독립청원이나 외교독립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만주나 간도, 연해주로 피신하여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 전을 펼치기도 했다.
  18. 웨더스비의 의견을 차용한 것이다.
  19. 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
  20. 이 책은 1980년대 낸 논문을 수정 보완 증보판이다.
  21.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전쟁의 원인은 당연히 북한 또는 소련의 것이어야 했다.
  22. 참고로 이것만 있지 회담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23. 한국 정설과 유사하다. 앞서말한 웨더스비가 대표적
  24. 참고로 이 때 일본은 군대가 사라지고 미군이 대신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들이 대량으로 한반도로 투입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방위에 공백이 생겼고 이 때문에 미군을 대신하기 위한 자위대가 설립되었다.
  25. 일본에 대해서 카더라성 일화로, 일본이 '병력 지원해줄까?'라고 하니 이승만이 필요없으니 꺼져쯤 되는 반응을 보였다는 소리도 있다.
  26. 미국에서 Korean War가 Forgotten War인 이유는 학계에서 특히 냉전분야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엄청난 이슈인데 비해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없다는 의미가 더 크다.
  27. 사실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임팩트가 강한 것도 아니다. 뭐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참전용사들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고, 6.25 참전용사라는 명칭자체가 박정희정권이던 1961년에서야 등장했으니....지금의 한국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도 1961년 이후 교육의 힘이었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28. 참고로 이건 단어의 뜻을 헷갈려서 오해하는 경우도 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남침을 '남쪽이 침공함', 북침을 '북쪽이 침공함'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참고로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자 방송에서는 이걸 똥침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정리하자면 '내 손이 너의 똥꼬를 침공하면 그게 손침이냐 똥침이냐'는 내용이다(...).
  29.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