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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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6월 25일 ~ 현재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김일성
마오쩌둥
이오시프 스탈린
이승만
더글라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
마크 웨인 클라크

개요

틀:날짜/출력, 북괴 북한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틀:날짜/출력 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즉,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냉전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무기를 들고 맞붙은 전쟁으로,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참전국 보면 세계대전이 맞는 것 같은데 세계사, 특히 냉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근데 한국에는 냉전사 연구하는 교수가 거의 없다. 그래서 정작 기억하는 수는 적다.

배경

한반도의 분할

발발 원인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함께 연구된다. 대체적으로 소련 및 북한괴뢰패당 짓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주의와 미국이나 기타 요인 탓이라고 주장하는 수정주의로 나눠져 있다. 물론 한국의 경우 전통주의 시각이 우세한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 의견을 차용하고 있다.[1]

참고적으로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 말하는데 이는 학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된 것에 반해 일반대중들은 잘모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한국전쟁 연구 및 냉전사 연구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우드로 윌슨 센터냉전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다.

전통주의적 입장

달린은 한국전쟁이 스탈린에 의해 기획되고, 준비되고, 발발되었다고 단언하였다. 그 이유로 그는 스탈린의 개인성을 제시하였다. 달린이 보기에 스탈린은 공격적이고, 기만적이며, 동시에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 [2] 라고 보았다. 달린은 스탈린의 이러한 개인성에 때문에 소련의 팽창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 동시에 소련은 전쟁피해나 군사적 위협을 경험하지 않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스탈린은 소련군이 개입하지 않는 팽창전쟁이 필요했다. 달린은 스탈린이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북한군만으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서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달린은 이 한국전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다른 분단국가들, 인도차이나, 오스트리아, 독일에서도 적용되었을 것이라 보았다. [3]

국내에는 서울대 김영호 교수[4]가 대표적으로 있다. 이분은 스탈린의 롤백이론을 주창하고 계시다. 그분의 주장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이 졸라서 전쟁이 났어도, 아무튼 전쟁을 승인한 사람이 누구냐? 스탈린 아니냐? 그러니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최종결정권자가 스탈린이니 당연히 스탈린 책임이다는 것

수정주의적 입장

수정주의 시각의 시작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윌리엄 A. 윌리엄스의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가 출간되면서부터였다. 윌리엄스는 냉전은 미국의 잘못된멍청한외교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를 기점으로 다양한 수정주의자들이 등장하는데 한국전쟁관련 대표적인 인물은 브루스 커밍스다.[5] 커밍스의 등장 이후 학계에서는 수정주의자들이 득세했다. 본격 수정주의자들의 시대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일제강점기때 등장한 계급간 격차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해방 후 미소 분할점령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게되었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근데 커밍스 주장의 문제점은 한국전쟁의 간접적인 원인(계급간 갈등 등)은 설득력이 있으나 직접적인 원인[6]에 대한 설명이 미흡한 것이 문제이며 간간히 틀린 정보도 많다는 것이다.[7]

시몬스의 경우 김일성이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고, 한반도 내에 기반이 있는 세력에 비해 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계열이 대거 북한에 들어오는데 애들의 규모가 엄청난 양이었다. 그로 인해서 김일성의 권한은 더 불안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괴롭히고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던 박헌영이 이러게 된 이상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남침을 건의했고, 영토야욕이 있던 김일성이 이를 수용해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달려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전쟁하게 해주세요. 김일성의 부탁에 스탈린이 승인했고 이로 인해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다고 말한다.

둘을 조합한 현재 학계 정설

그런거 없다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학계의 정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에서는 존재한다. 안그러면 빨갱이 되니까 아무튼 한국전쟁 원인을 주도하는 것이 미국이고 미국의 경우 엄청난 논쟁 속에 있다.

먼저 최근 한국전쟁에 관한 의견을 제시한 미국의 학자로는 웨더스비, 개디스, 앞서말한 스툭이 있다. 이 셋 다 냉전사 관련 유명한 학자이며 냉전사 특히, 냉전의 원인의 측면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

먼저 수정주의자인 웨더스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로 김일성이 소련을 설득한 결과라 주장했다. 웨더스비는 김일성은 1949년 이후로 끈질기게 스탈린을 설득했고, 그 설득에 스탈린은 마지못해 한국전쟁을 승인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한국전쟁은 소련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미국이 이 지역에 관심이 없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은 소련에게 책임이 없고, 당연히 냉전의 책임에서 소련의 역할은 적다고 주장한다.[8]

한편 같은 수정주의자인 개디스(John Lewis Gaddis)는 미국과 소련, 남북한 모두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개디스는 김일성이나 이승만 모두 통일을 원하는 상황이었고, 군사분계선인 38선 사이에서 남북한 간의 분쟁이 지속되면서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의 통일이 필요함을 느꼈으며, 이를 위해 남북한 모두 미국과 소련에게 전쟁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개디스는 전쟁의 책임이 미국과 소련 그리고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있다고 본다.[9]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10]의 경우, 한국전쟁은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이다. 왜냐면 그는 한국인은 독립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항이후 한국역사가 친러, 친미, 친일, 친청 등 파벌로 나뉘어 싸웠던 사실과, 이승만의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을 한 사실을 가지고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독립심이 없는 존재라 주장했다. 미국판 식민사관 그래서 한국전쟁도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계획된 전쟁이라 본다.[11]

간단히 말해서 스툭은 한국놈들 멍청해요. 그래서 전쟁 결정 못해요. 그러니 한국전쟁 소련이 일으킨 거에요.

이 세 주장 모두 비판을 받는데, 웨더스비의 경우 소련군이 북한에게 단순한 지원만 했다고 하였지만, 한국전쟁 초기 소련군 장교가 작전계획까지 개입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소련군이 북한에게 지원한 정도는 거의 전쟁을 대부분을 기획했다고 할 정도로 정교하고 세세한 부분까지였다. 그러므로 김일성의 땡깡에 손을 들어주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개디스의 경우, 당시 남북한 모두 전쟁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지적하였지만, 세세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냥 전쟁 날 상황이니까 전쟁 난거야하는 수준이라...이건 초딩도 할 수 있는 거다


스툭의 경우, 앞에서 언급했지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논점을 전개하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한국전쟁 문제는 냉전의 원인과도 연관되어 있어 어떤것이 정답이라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일성이 주도하고 스탈린은 아무 잘못 없어용이 대안으로 보이지만 이게 딱히 그런게 아닌게, 만약 이것이 맞다고 해버리면 당시 1950년대 소련은 위성국가 하나도 통제못하는 국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맞다 할 수 없고, 저것이 맞다 할 수 없는 상황. 이것이 우드로 윌슨 센터의 가장 큰 고민이자. 냉전사 연구 학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한국에서의 정설

물론 한국은 예외다.

한국에선 스탈린의 사주와 마오쩌둥의 동의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당장 자유총연맹이나 재향군인화 한국전 관련 자료를 보시라), 냉전후엔 후르쇼프 회고록 발간과 소련 비공개 문서 해금이후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회의적이었고, 김일성의 적극적인 설득과 생떼로 인하여 마지못해 스탈린이 승인하여 전쟁이 이루어졌다고들 한다.

여기서 당시 스탈린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냉전초기에 막 위성국화하거나 위성국화중인 동유럽을 안정화 시켜 소련의 대 서구권 완충지대를 다지기 위해서 미국과 서방세력이 동유럽에 신경쓸 여력을 극동으로 관심을 돌리게하면서 더불어 장차전을 대비하여 극동에서 다시금 과거의 국력과 위상을 회복하여 소련에 대적할것이 뻔한 중국과 일본, 더불어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도 미리 힘을 좀 빼놓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스탈린의 구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정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탈린은 신중하고 우유부단하기 까지 하여 귀가 얇아 김일성에게 휘둘리거나 김일성의 생떼에 질려서 넘어간 인물이 되나 그의 의중이 위의 추정대로였다면 대단히 유능한 백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지략가요 전략가라고 할수 있다.그리고 중국이랑 북한이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제발 휴전하게 해주세요 라고 징징 거려도 죽을때까지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본은 한국전 때문에 되려 살아난다. 지못미

보론

국내 한국전쟁 원인 연구에 대해서

없다고 보면 된다

국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소수에 지나지 않고 학계 그룹을 형성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분단의 상황과 지난 과거시간 아니 현재까지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에 기인한 것이다.

국내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논의가 시작은 1980년대 말 김학준[12][13]이 미국의 연구사례를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연구는 이미 결론이 나와있는 연구였다.[14]

그렇기에 전쟁에 대한 연구는 폭넓고 다양하게 접근하지 못하고 상당히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연구에 큰 장애를 주었다.

1990년대 초 러시아의 옐친이 소련 문서고에서 한국전쟁관련 문서를 남한에 수교 기념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 자료를 10년간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옐친과 하였고, 그래서 이 자료는 한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료가 공개되기 시작한 2000년대를 중심으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으나 연구는 대부분 남한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김일성이 개새끼이지 우리 남한 정부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원인 연구의 선도, 미국

미국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높은 이유는 앞서말했듯이 한국전쟁의 원인에 따라 냉전의 책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국 사회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은 당연히 소련의 책임이었고 이는 진리이자 진실이었다. 1950년대 학계는 이런 의식에 따라 책을 서술 판단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로른 달린과 리스가 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1960년대 극적인 사회변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변화 속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이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의견이 등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수정주의이다. 이 수정주의의 등장은 커다란 논쟁을 일으켰다. 초기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음모론이나 잘못된 정보에 국한되었지만 점차 전통주의와 논쟁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세련화되어갔다.

동시에 전통주의도 수정주의와의 논쟁을 통해서 자신들의 논지를 강화해나갔다. 이 수정주의와 전통주의 간의 논쟁은 끝이 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조지 워싱턴 대학교 우드로 윌슨 센터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끝없는 논쟁이 오가고 있다.

참고적으로 국내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영어의 압박이 있지만미국 자료를 참고하거나 미국 연구 결과를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말한 박명림, 정병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국의 연구 자료을 차용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원인 연구에 대한 평가

틀:독자연구


주의!!! 본 내용은 독자연구이므로 위키러분들의 비판적인 독해가 필요합니다.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이념과 신념 그리고 생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요구를 49번이나 거부하였고, 전쟁 승인때 마오쩌둥의 의견을 들었다는 사실이다.[15]

전통주의자는 이를 소련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눈치없이 와서 한다고 하니 반려시킨 것이고, 이후 기회를 포착하자 김일성을 불러 전쟁을 승인하고 중국조차 끌어들인 것이라 보았다.

수정주의자는 이를 소련은 전쟁의 의도가 없었는데 김일성이 땡깡 부려서 전쟁을 승인해 준 것이라 보았다.[16]

둘 중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왜냐 기록이 없다. 그냥 김일성이 왔는데 거부했다. 이런 정도이지 무슨 회담의 내용이 없다. 특히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회담 내용은 공개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탈린이 처음에는 생각이 없다가 그래 한 번 해볼까? 이거일 수도 있고(전통주의 의견), 아니면 정말로 김일성이 땡깡부려서 스탈린이 귀찮아서 아 그래 전쟁 해!!! 라 한 거일 수도 있다. (수정주의 의견)

결국 한국전쟁의 원인은 해석의 문제이고, 누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Junius001 (토론)

전개 상황

전쟁의 영향(부정적인 부분)

수많은 인명피해

당장 전투로만 유엔군과 한국군에서 18만명이 전사하였으며,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전사하였다. 이런 전투 외에 각종 학살과 폭격 등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가 100만 단위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것. 이로 인한 전쟁과부와 고아의 발생은 덤이다.

지독한 사상 컴플렉스

본디 이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남한과 북한 모두 이념에 대해 그렇게 하드코어하지 않아 자유로운 이념과 종교 활동이 가능하였다. 남한에도 공산당이 있었고 북한에도 자유주의자가 있는 등 양국 다 제법 균형잡힌 안정된 모습을 취하고 있었고, 만약 이 상태가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양국은 동독과 서독 같이 지금보다는 좀 더 원만한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 이후 양국의 이념 활동은 극도로 경직되게 되었다.

우선 한국사회는 공산당이나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회가 되었다. 이후 독재정권에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반대파를 찍어누르는 구실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게 되는 원인이 된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우리가 공산당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 국가인데 뭔 소리냐! 우리를 전복시키려는거 보니 넌 빨갱이가 분명하다!'(...)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무고한 시민과 학생들을 셀 수도 없이 때려잡았다. 이는 이제 민주화, 자유화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산주의의 공 자만 꺼내도 바로 민족의 반역자로 여기는 여론의 가혹한 반응 등으로 아직까지도 남한 내에서 공산주의를 향한 강한 적개심이 유효함을 선보이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라 전후 김일성은 자신의 파벌을 제외한 다른 파벌들에게 패전의 누명을 뒤집어씌워 죄다 숙청시켜 오직 자기 추종자들만을 남기는 절대적인 독재 체제와 여기서 비롯된 세습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곧 김일성 스스로가 교주이자 신으로 군림하는 주체사상이라는 세계 최악의 막장 사이비 종교를 창시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한 북한 사회/경제/문화/교육/지리/생활의 막장화를 불러오게 된다.

전쟁의 영향(긍정적인 부분)

끔찍하기 이루말할 수 없는 전쟁으로 기왕이면 안일어나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전쟁이 몰고온 긍정적인 여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당시 여러 호전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상술한 박헌영도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서로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국지전이 빈번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러한 호전론자들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전쟁은 나쁜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강력하게 퍼지게 되어 남은 힘 조차 잃게 되었다. 덕분에 비록 '휴전' 관계임에도 오늘날까지 양국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유지되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과시하는 식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 이후 양국이 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손실도 매우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그것을 잘 이어나갔지만 북한은 중간에 침몰하여 아직까지 밑바닥을 떠도는 중이다(...).

완전한 계급제 철폐

사실 한반도는 상술했듯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을 거두었기에 사회 구조가 그대로였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즉 일단 법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했지만, 앞집 김씨는 양반 출신 뒷집 정씨는 노비 출신 등 어디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평등'이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피난을 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어디의 누구였는지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 와중엔 죽어서 아예 잊혀진 사람도 있고, 살아는 남았으나 기반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는 등 민족이 제대로 뒤엉켜버렸다.

게다가 이후 사회기반의 리셋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 하기도 모자랄 판국이 되어버린 탓에 먹을것을 잘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고 이런 판국에 양반이니 노비이니 하는 출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출신성분은 서서히 잊혀졌고 결국 비참하게나마 온 국민의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전쟁 덕분에 평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근대 와서 심각한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누구는 화족 출신이네, 누구는 부라쿠민 출신이네 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까지도 민족차별이 빈번한 국가로 남아 있다.

물론 그 이후에 평등화 된 사회를 지켜낸 것은 대한민국의 몫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신분제가 다시 등장했으니까.

미국과의 유대감 강화

전쟁을 통해 미군과 국군이 함께 싸우면서 양국의 유대감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국군은 미군과 함께 싸움으로서 미군의 최신식 장비와 그에 걸맞는 교리들을 다수 습득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근 백여년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전 경험을 갖게 되어 실력 또한 향상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여파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 종전의 '일본을 처리하면서 떠안은 부산물'이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벗어나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정신적 유대감에 더불어 실제로 미국식 사회제도나 경제제도가 잘 도입되어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유대감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이다.

다만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우방국이라는 거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이 우리 편일거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도 결국 이익을 생각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국가이며, 이는 한국군이 하푼을 도입하려고 했을때 일본측의 로비를 받은 미국에서 하푼의 판매를 거절했었던 사실이나 M60 패튼을 대체하는 신형 전차의 도입 시도를 영 꺼림직하게 봤던 일 등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의 우방국인 것은 맞지만, 국제 정세에 따라서는 태도가 달라지지 말라는 법이 없으므로 맹신이 아닌 적절한 외교를 통해 우방국으로서의 관계를 튼튼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몇몇 국가들의 부흥

남의 전쟁을 통해 배를 불렸다는 점이 당사자로서 심히 아니꼽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냉정하게 말해 한국전쟁으로 분명히 득을 본 국가들도 있긴 했다.

일례로 이웃국가 일본의 경우는 한국전쟁으로 대박이 터졌다. 일본은 당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관리 하에 놓여져있는 입장이다보니 한국땅에서 싸우는 UN군을 원조할 중간기지 역할을 담당(UN군용 군수물자 생산 및 납품 등)하게 되면서 이로 인해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긴 했다. 더군다나 일본은 전후 평화헌법에 의해 군대가 없던 실정[17]이라 한국에 병력을 파견할 일도 없었다. 즉 말 그대로 피 한방울 안보고 돈만 실컷 벌었다.

한편 중화민국도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죽다 살아났다. 이쪽의 경우 원래대로라면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1년 내로 무력으로 접수될 운명이였으나, 한국 전쟁이 북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는 수 없이 북한을 원조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군사력을 한반도로 투입시켜야 했기 때문에 전후 중화민국을 접수할 힘이 남지 않아 살아남게 된 것이다. 만약 한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조기에 정리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입할 여지 자체가 없어졌다면 중화민국도 지금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몇몇 참전국들도 분명하게 대외적인 플러스 이미지를 얻었고 경제적인 이득도 일부 얻었다. 미국이 대표적으로 미국은 본 전쟁에서 '정의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얻어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 보탬이 되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에서 다 말아먹었지만)

기타

UN군

국제연합(UN)이 정식창설된지 2년여만에 전쟁을 겪었고,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UN 회원국의 뜻을 모아 UN군을 창설, 한국에 파병했다. UN 평화유지군이 아닌 UN군으로서 침략자와 교전을 목적으로 한, 즉 UN이 두명의 전쟁 당사자들 중 어느 한 쪽의 편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경우는 2015년 현재까지도 이 때가 유일하다.

이는 국제연맹(LN)이 무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지 못하고 침략자에 의한 주변국 정복이 거듭된 3~40년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교훈이 가져온 결과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이나 일본의 중국 침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국제연맹과 국제사회 모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치뤘던 만큼, 침략자는 일찌감치 응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었던 것이다.

당장 에티오피아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침략때 국제연맹을 통해 호소했지만 무시당하고 정복당한 역사가 있고, 독립을 회복한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프리카의 빈국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강자에 의한 침략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같은 이유로 유럽권 국가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터키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내전을 끝내고 국가재건 및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기에 참전한 경우이다. 태국은 아예 2차대전당시 일본의 동맹국, 즉 추축국이었다. 워낙 듣보잡이라 미국이 신경도 쓰지 않은 상대였고 태국도 필사의 외교전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취소하는 식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했지만 미국 및 영국, 프랑스로부터 추축국 낙인이 찍힌건 똑같았고 이를 타개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되겠다는 제스처로서 참전한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모두들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도와주러 온 나라들이다. 설사 정치적 이유든 금전적 이유였든 경제적 이유였든 어떤 이유에 따른 파병이더라도 그건 그 국가 정부의 입장이지, 파병된 사람들은 이역만리 타향땅에서 아무런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감사히 여기자.

직접적으로 전투병을 참가시킨 국가만 위 16개국이고, 의료진을 보내거나 구호물자 등으로 지원한 나라는 더 많다. 놀랍게도 일본도 구호물자를 보내주었던 국가 중 하나에 속해있다. [18]

관련 작품

같이 보기

센추리언(전차)

대중매체

미국이 패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의외로 미국이 분명하게 패한 소말리아전이나 베트남전과는 달리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는 매우 적다. 애초에 미국 내에서 이 전쟁을 일컫는 별칭 중 하나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19] 이다. 사실 이는 '휴전'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수준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도 있고 또 이 전쟁으로 미국이 딱히 사회적으로 가지게 된 변화 또한 없기 때문이다. 가령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린 반면, 베트남전이나 소말리아전 등으로 인해 미국은 반정부, 자유주의 성향이 지독히 강해지는 등 괄목할만한 변화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거 없었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중심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으로는 희대의 괴작 오! 인천뿐인데, 이조차 제작을 통일교에서 한거다.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다루는 매체가 매우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락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참전자들을 인터뷰해거나 초빙하여 행사를 갖는 등 여러 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 외의 지역에서는 글쎄올시다...[20]

트리비아

대부분의 큰 사건이 그러하듯 여러 음모론이 끼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남침(남쪽이 침공 당함)이 아니라 북침(북쪽이 침공 당함)했다는 주장,[21]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대부분의 주장들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착하게 가만히 있었는데 이용당한 것이라는 종북적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음모론은 많다. 대표적으로 처음 제시한 사람은 미국 언론인 스톤[22]이다. 1952년에 스톤은 한국전쟁이 리승만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려고 전쟁을 유도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콜코니 브루스 커밍스니 모두 남한이 먼저 침공했다고 주장했다.

각주

  1. 그러나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논의의 중심은 미국이다. 한국전쟁이라 해서 한국이 중심이 아니다
  2. Dallin, 'Soviet Foreign Policy After Stalin', p.60.
  3. Dallin, 'Soviet Foreign Policy After Stalin', p.60.
  4.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5. 커밍스는 지금은 유명하지 않지만 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대학생 필독서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었다.
  6.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남한과 미국이 남침한 결과라 설명한다든지, 미국의 음모였다든지 등
  7.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든지 등
  8.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1] (Accessed 2015. 6. 9.) pp. 8-9.
  9. John Lewis Gadd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71.
  10.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
  11.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이다. 독립청원이나 외교독립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만주나 간도, 연해주로 피신하여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 전을 펼치기도 했다.
  12. 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
  13. 이 책은 1980년대 낸 논문을 수정 보완 증보판이다.
  14.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전쟁의 원인은 당연히 북한 또는 소련의 것이어야 했다.
  15. 참고로 이것만 있지 회담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16. 한국 정설과 유사하다. 앞서말한 웨더스비가 대표적
  17. 참고로 이 때 일본은 군대가 사라지고 미군이 대신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들이 대량으로 한반도로 투입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방위에 공백이 생겼고 이 때문에 미군을 대신하기 위한 자위대가 설립되었다.
  18. 일본에 대해서 카더라성 일화로, 일본이 '병력 지원해줄까?'라고 하니 이승만이 필요없으니 꺼져쯤 되는 반응을 보였다는 소리도 있다.
  19. 미국에서 Korean War가 Forgotten War인 이유는 학계에서 특히 냉전분야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엄청난 이슈인데 비해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없다는 의미가 더 크다.
  20. 사실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임팩트가 강한 것도 아니다. 뭐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참전용사들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고, 6.25 참전용사라는 명칭자체가 박정희정권이던 1961년에서야 등장했으니....지금의 한국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도 1961년 이후 교육의 힘이었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21. 참고로 이건 단어의 뜻을 헷갈려서 오해하는 경우도 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남침을 '남쪽이 침공함', 북침을 '북쪽이 침공함'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참고로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자 방송에서는 이걸 똥침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정리하자면 '내 손이 너의 똥꼬를 침공하면 그게 손침이냐 똥침이냐'는 내용이다(...).
  22.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