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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최씨]]'''(慶州 崔氏) 시조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돌산고허촌의 촌장인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세손으로, 신라 후기의 6두품 출신 학자다. 최씨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본관이지만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가문이 퇴조하여 상신이나 대제학은 배출하지 못하였다.<ref>[http://www.rootsinfo.co.kr/ 뿌리를 찾아서]</ref> 2000년 인구는 976,820명이다.
* '''[[경주 최씨]]'''(慶州 崔氏) 시조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돌산고허촌의 촌장인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세손으로, 신라 후기의 6두품 출신 학자다. 최씨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본관이지만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가문이 퇴조하여 상신이나 대제학은 배출하지 못하였다.<ref>[http://www.rootsinfo.co.kr/ 뿌리를 찾아서]</ref> 2000년 인구는 976,820명이다.
* '''[[동주 최씨]]'''(東州 崔氏) 시조 '''최준옹'''(崔俊邕)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철원 최씨]]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우왕]]의 장인인 '''[[최영]]'''(崔瑩) 장군이 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225_175_0540|동주 최씨}}</ref> 2000년 인구는 11,699명이다.
* '''[[동주 최씨]]'''(東州 崔氏) 시조 '''최준옹'''(崔俊邕)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철원 최씨]]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우왕]]의 장인인 '''[[최영]]'''(崔瑩) 장군이 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225_175_0540|동주 최씨}}</ref> 2000년 인구는 11,699명이다.

2021년 7월 7일 (수) 05:53 판

(崔)씨는 한국의 성씨이다. 최(崔)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169,704명으로 조사되어, 한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성씨이다.

기원

최(崔)씨의 기원은 신라 계통과 고구려 계통 등 다양한 계통이 존재한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는 최(崔)씨는 1세기 평양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최씨 낙랑’이 거론된다. 고구려 기록에 낙랑최리(崔理)가 옥저에서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好童)을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신라 계통의 최씨의 기원은 신라 6부족의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계통으로 고구려 계통의 최(崔)씨가 있다. 최치원의 금석문으로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비에 ‘진감선사’의 속명이 최씨임을 밝히며, 고향은 금마(金馬, 현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로 적고 있다. 진감선사의 선조에 대해선 수나라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포로가 되어 고구려에 눌러 살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금마로 내려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1]

본관별 시조

최(崔)씨의 본관은 문헌에 387본까지 기록되어 있지만, 현존하는 본관은 경주(慶州)·전주(全州)·해주(海州)·강릉(江陵)·탐진(耽津:강진)·수성(隋城)·삭녕(朔寧)·화순(和順)·강화(江華)·낭주(朗州)·동주(東州:철원)·우봉(牛峰)·)·완산(完山)·영흥(永興)·상원(祥原)·수원(水原) 등 159본이고, 이 중 시조와 계대가 확인되는 본관은 43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