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성씨)

(睦)씨는 경상남도 사천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 8,191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16위이다. 본관은 사천 목씨 단본이다. 오늘 날에는 희성이 되었으나 고려 말 이후 특히 조선 중엽에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기원[편집 | 원본 편집]

목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양설이 존재한다.

  • 최초 목씨의 기록은 삼국시대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扶餘氏)를 비롯 백제의 8대 귀족 성씨로 목씨(木氏), 사씨(沙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연씨(燕氏), 묘씨(苗氏), 협씨(協氏)가 '남제서'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나당 연합군으로 백제가 멸망한 후 고구려, 백제 성씨가 소멸되거나 변성되었다. 백제의 왕족인 부여(扶餘)씨는 소멸되고 부여 서씨(扶餘徐氏), 여씨(余氏)등으로 변성되고 8대 성씨중 목씨(木氏)는 목씨(睦氏)로 변성되었다고 한다. 이후 항렬과 세계가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분명하지 않아 고려시대 다시 정계에 등장한 목효기(睦孝基)를 시조로 한다. 가족 형제의 우애가 화목하여 화목을 뜻하는 한자인 목(睦)으로 득성으로 했다는 문헌도 있다.
  • 641년 고구려 (영류왕 22년)요청에 의해 당(唐)나라의 8학사(八學士)인 목충(睦沖)·홍천하(洪天河)·은세통(殷世通)·위령(魏齡)·방비(房丕)·기모(奇牟)·길령(吉寧)·봉수현(奉守賢)의 여덟명의 학자가 유학과 문화 교류를 위해 고구려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이후 연개소문의 난으로 인해 신라로 피신하여 사천 지역에 세거(世居)하였다고 한다.

사천 목씨[편집 | 원본 편집]

사천 목씨(泗川 睦氏)의 시조 목효기(睦孝基)는 고려 고종 때 낭장동정(郞將同正)을 지냈다. 목효기의 아들 목덕창(睦德昌)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면서 서북방면의 반란을 평정하다 영주성(靈州城: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였으며, 사후에는 영주군(靈州君)에 봉(封)해졌다. 아들 목준평(睦俊平)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다.

목씨는 고려시대에는 무반으로 기반을 굳히고 조선 중종때 학자 11세손 목세칭(睦世秤)과 그 자손들이 목씨를 문반으로 다시 중흥시켰다. 특히 조선 중엽에 이르러서는 상신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문과 급제자 34명을 배출하여 성씨별 문과 급제자를 현재 인구 천명 당 급제자 수로 환산했을 때 1위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충(睦忠), 목인길(睦仁吉), 목자안(睦子安) 등의 이름이 <고려사>에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무신으로서 정삼품 이상의 관직에 오른 인물들이다. 목충공민왕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우왕조에 조전병마사, 밀직부사가 되어 여러 차례 남해안에 침범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동지밀직사사에 이르렀다.

충의 종제 목인길은 공민왕때 역신들을 멸하여 1등공신이 되고, 홍건적의 난 때는 병부상서로 왕의 남행에 호종, 홍건적을 물리쳐 다시 공신이 되어 지밀직사사에 올랐으며, 우왕 조에 문하찬성사로 전라도에 침범하는 왜구를 무찔렀다. 목자안 역시 우왕조에 밀직부사로 전라도 부원수가 되어 왜구를 막았고, 평해부에 침범한 왜구 역시 격퇴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인 목세칭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로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화를 입자 청운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아들 목첨(睦詹)은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간·이조참판·도승지등을 지내고 뒤에 선조 때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다. 목첨(睦詹)의 아들인 목서흠(睦敍欽), 목장흠(睦長欽,) 목대흠(睦大欽) 삼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하여 중시조 이후 사천 목씨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첨의 아들 3형제 중 맏이인 매계(梅溪) 목서흠광해군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 초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둘째 목장흠은 형보다 앞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좌부승지. 청풍군수등을 지낸 후 사직했다가 인조반정 후 재기용되어 호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으며, 막내 목대흠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광주 목사가 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의, 강릉부사 등을 지냈다.

이 밖의 인물로는 목씨의 유일한 상신인 목내선(睦來善)이 있다. 그는 서흠의 아들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효종 때 문과에 급제, 숙종남인의 중진으로서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 ~ 1701)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많은 파란을 겪었으며 현종 때 이른바 <제2차 예송>이후 서인이 실세한 데 이어 숙종 초 남인이 득세하면서 형조 호조 예조의 각 판서를 역임하다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삭직되었다. 그 뒤 다시 형조판서에 기용, 좌참찬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차 집권하면서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 5년 뒤에 일어난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실각당하면서 유배되었다.

목장흠의 아들로 숙부 대흠에게 입양한 목행선(睦行善)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목창명(睦昌明)은 숙종 때 남인으로서 병조판사를 지냈다.

목씨는 희빈 장씨(禧嬪 張氏)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되었던 민씨를 복원시켜 왕비에 앉히는 갑술옥사를 고비로 남인의 몰락과 함께 세력을 잃었다. 서인들은 득세를 하게 되었다. 다른 파계의 목호룡(睦虎龍)이 신임사화(辛任士禍)의 고변자가 됨으로써 같은 준소인 김일경(金一鏡)과 함께 조정에 피바람과 함께 큰 파장을 몰고 오기도 하였다. 이후 순조 초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뒤에 형조판서를 지낸 목만중(睦萬中)이 있고, 일제 탄압에 대항한 독립운동가 목치숙(睦致淑), 목자상(睦子商) 등이 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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