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 (성씨)

(奉, 鳳)씨는 중국 및 한국의 성씨이다.

받들 봉 奉[편집 | 원본 편집]

봉(奉)씨는 한국의 성씨로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 11,492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05위이다. 본관은 하음(河陰), 강화(江華), 함흥(咸興), 진주 등 9본이 있으나, 단본인 하음 봉씨의 세거지이다.

하음 봉씨(河陰 奉氏)의 시조 봉우(奉佑)는 고려 인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좌복야(左僕射)에 올라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다. 『하음봉씨을축세보(河陰奉氏乙丑世譜)』에는 다음과 같은 출생 설화가 전한다. 1106년(예종 1) 어느 날 강화군(江華郡) 하점면(河岾面) 장정리(長井里) 하음산(河陰山) 기슭의 연못가에 눈부신 광채가 비치더니 이어 석함(石函)이 떠올랐는데 마침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가 이상히 여기며 살펴보니 그 속에 용모가 뛰어난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노파가 이 아이를 왕에게 바쳤더니 임금은 궁중에서 양육하라는 명을 내린 후 노파가 봉헌하였다고 하여 성(姓)을 봉(奉)이라 하고, 국가를 보우(保佑)할 인재라 하여 이름을 우(佑)로 지었다고 한다.[1]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충목왕 때 밀직지사에 오른 봉천우(天祐)가 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 인물로 봉여해(汝諧)가 있다. 병조판서 봉즙(楫)의 아들인 그는 1456년(세조 2) 사육신의 단종 복위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죽음을 당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 봉려(奉礪, 1375년 ~ 1436년)는 음서(蔭敍)로 관직에 등용된 뒤 여러 번 관직을 옮겨 감찰(監察)·창녕현감 등을 지냈다. 1429년 딸 순빈 봉씨를 왕세자에게 출가시켜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으로 초배(超拜)되었고, 다음해 첨지돈녕부사(僉知敦寧府事)로 승진하였다. 1431년 이조참의·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거쳐 이듬해 경창부윤(慶昌府尹)·병조참판을 지낸 뒤 이듬해에는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호조참판·경상도도순검사·호조참판·공조참판을 거쳐, 1435년에는 진헌사(進獻使)로서 명나라를 다녀왔다. 1435년 호조참판이 되고, 다음해 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봉원효(奉元孝, 1426년 ~ ?)는 1474년(조선 성종 5년) 훈도(訓導)로서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문한직(文翰職)을 거쳐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1476년 정회(鄭淮)·성현(成俔) 등과 함께 문과 중시에 병과로 뽑혔다. 1483년 2월에는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를 거쳐 강원도도사로 전직되었다. 이때 황해도에 해마다 기근이 계속되고 여질(癘疾)이 유행되었는데도 이에 대처하는 정책이 적절하지 못하여 백성이 떠돌아 다닌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국문을 받고 파직되었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1487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경연(經筵)에서 가뭄의 재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수개도감(修改都監)·군적청(軍籍廳)·춘관도감(春官都監) 등의 직무를 일시 정지하여 지출경비를 줄일 것을 건의하였다. 왕은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였으나 여러 도감의 임무가 중요하니 그 직무를 정지할 수는 없다고 하여 그 경비의 감소만을 명하였다. 경연에 계속 참여하여 혼인풍속의 폐단, 별시(別試)의 잦은 시행에 따른 폐단 등을 건의하였다. 1488년 사간에 임명되어 권세가문의 불법을 바로잡아 조정의 기강을 확립할 것을 건의하였다.

현대 인물로는 언론인 봉두완, 영화감독 봉준호, 야구선수 봉중근, 배우 봉태규 등이 있다.

봉황새 봉 鳳[편집 | 원본 편집]

봉(鳳)씨는 중국의 성씨로 인구 수가 적은 희귀 성씨이다. 봉(鳳)씨는 중국 고대에 계출된 성씨로, 후대에는 사용이 적어 졌는데, 상나라 탕왕의 조상으로 알려진 제곡 고신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상나라 자성의 방계 성씨 가운데 하나이다.

각주

Wikipedia-ico-48px.png
이 문서는 한국어 위키백과봉 (성씨) 문서 14852794판에서 분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