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유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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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기마궁수.

이름이 선비라고 도포와 갓을 갖춰쓴 사람들이 말을 타고 몰려온다는 상상을 해서는 안 된다.
선비(鮮卑)는 흉노의 뒤를 이어 기원전 1세기경부터 기원후 6세기경까지 몽골 초원에서 세력을 떨쳤던 유목민이다. 동호의 후예라고 전해진다. 이들이 몽골 초원의 지배자로 있었던 기간은 매우 짧았지만, 탁발부, 모용부 등의 부족들이 화북 지방으로 유입되어 실질적인 오호십육국 시대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거란, 실위, 유연 등이 선비의 후손이라고 한다. 보통 몽골계의 유목민이라고 여겨지지만, 여러 계통의 유목민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선비의 약화 이후에는 고차고자와는 다르다! 고자와는!, 유연이 초원에서 세력을 겨루게 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첫 등장[편집 | 원본 편집]

동호묵특에게 정복당한 유목민 가운데 하나였다. 동호의 잔당이 흉노에게 패한 후 선비산과 오환산에서 살게 되었고, 여기에서 선비와 오환이 유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 오환은 아무르 강 유역에 분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선비는 눈 강 상류 지역에 분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

이후 오환은 서서히 남하하여 랴오허강에 이르렀다. 한나라무제는 이들을 정벌하여 상곡, 어양, 우북평, 요동, 요서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다. 그리고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라는 관리를 두어 오환을 감시케 하고, 매년 오환 대인들이 한에 입조하는 것을 허용했다. 오환은 당시만 해도 한과 흉노 양쪽에 입조하고 있는 상태였던 듯하다.[3]

한편 선비는 흉노의 1차 분열기에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주로 흥안령 남부에서 서랍목륜(西拉木倫 시라무렌)강 유역에 분포했다.[4] 그러나 아직 선비는 오환에게 밀리는 작은 집단이었다.

이런 세력 판도가 급격히 흔들린 것이 흉노의 2차 대분열기, 1세기 중반이었다. 오환은 한의 영역 안으로 이주하여 남흉노와 함께 북흉노와 선비로부터 한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5] 북흉노는 몽골 초원 북방으로 이주해갔다. 오환, 남,북흉노가 이주하면서 초원에는 힘의 공백이 생겼다. 선비는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질서의 지배자로 나서기 시작한다. 북흉노가 북상, 서진하는 가운데 선비는 서쪽으로 진출하여 흉노 세력 10만락(천막이라는 뜻)을 흡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6]

단석괴의 활약[편집 | 원본 편집]

선비는 초원이 지배적인 세력으로 대두되었지만, 부족끼리 분열되어 유목국가로 보기는 어려웠다. 2세기 중반, 단석괴(檀石槐)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선비를 하나로 모아 강력한 유목 제국을 건설하였다. 단석괴는 "아버지가 3년 동안 흉노를 따라 종군하는 사이 어머니가 천둥과 함께 떨어진 우박을 삼키고 임신하여 나은 자식이라고" 전해진다.[7] 이미 열네 살 무렵에 용맹하고 지략과 지혜가 뛰어났다고 하며, 부족민들은 그의 무용과 공평한 처사 등에 감복하여 스스로 그를 따랐다고 한다. 부족민들은 그를 "대인(大人)"으로 추대했다. 이 기록에는 전설적 요소가 혼합되었지만, 단석괴는 혈통적 조건이 아니라 스스로의 실력만으로 유목 군주의 자리까지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의 최대 세력판도.

단석괴가 이끄는 선비는 전성기의 흉노를 연상시키는 넓은 세력 판도를 마련했다. 선비는 서쪽의 오손을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부여를 물리치는 한편 북방의 정령의 공격을 막아내며 거대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156년에는 북흉노를 대파하고 초원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남쪽의 동네북 한나라 북방을 약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후 단석괴는 흉노와 유사한 분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영역을 동부, 중부, 서부로 나누어 그 아래에는 각각 20개, 10개, 20개의 읍을 두고, 동부와 서부에는 4명, 중부에는 3명의 대인(태수라고도 한다)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8]

선비는 다른 유목제국들에 비하여 빠르게 중국 문화에 익숙해졌다. 당시 한은 후한 말의 혼란기였는데, 경제적,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접경지대에서의 밀무역도 성행했다. 선비가 한을 공격하여 납치해 오는 인원 역시 무시할 수 없을만큼 많았다. 후한의 학자 채옹은 "장성의 경비가 느슨해 선비가 무기로 쓰일 양질의 쇠(鐵)을 다량 보유하고, 한인 도망자 가운데 선비의 고문이 된 사람도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9] 그러나 단석괴는 흉노와 같은 안정적인 지배 체제를 완성시키지 못했다. 단석괴 사망 이후 그의 후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선비는 빠르게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가비능의 활약[편집 | 원본 편집]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 가비능(軻比能)이라는 새로운 군사지도자가 등장한다. 가비능은 선비 영역의 서부를 통제 하에 두었다. 동부에서는 여전히 단석괴의 후손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다.[10] 가비능의 선비에도 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후한 말의 혼란이 심화되면서 차라리 가비능이 지배하는 선비의 영역이 더 안정적이었기 때문. 위지 선비전에 의하면 선비로 유입된 한족들은 무기와 갑주 제작법, 심지어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229년 가비능은 위나라 자객에게 살해당하고, 그가 이룬 제국은 다시 분열된다. 가비능 역시 견고한 정체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던 것이다.

오호십육국 시대[편집 | 원본 편집]

후한 말의 혼란기는 삼국시대로 이어졌고, 삼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사마(司馬)씨 정권인 진(晉)이었다. 그러나 진의 각 번왕들이 벌인 내전인 팔왕의 난은 진을 말아먹고 선비와 흉노 등의 유목민족이 중원으로 대량으로 유입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흉노 유연이 일으킨 영가의 난을 계기로 진은 멸망하고, 황족 중 일부가 남쪽으로 내려가 동진을 세운다. 중원을 한족이 아닌 이민족들이 점유하는 시대, 오호십육국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선비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모용부, 탁발부 등 선비 부족들은 여러 왕조를 세웠다. 주요 선비족 왕조로는 모용부가 건국한 전연, 모용수의 후연, 모용부 세력이 집권하며 오호십육국 시대의 분열에 일차적인 마침표를 찍은 북위 등이 있다. 북위는 효문제 등의 군주의 치세 동안 적극적인 한화 정책을 펼치고, 균전제를 실시하여 제민 장악을 시작하면서 가장 성공적인 정복 왕조로 기록되었다. 북위는 우문씨의 북주와 고씨의 북제로 갈라졌으나 결국 북주로 통일되었다. 중국 남북조를 통일한 의 성립은 북주 내의 정권교체의 성격이 강했다.

선비족은 수나라당나라에서도 한족과 결합하여 관롱 집단을 형성하여 지배층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후 선비는 서서히 중국에 동화되었다.

문화[편집 | 원본 편집]

선비 머리 장식

선비의 예술은 스키타이 이후 이어져 온 유목민의 예술 양식이 집대성, 발전된 것이었다. 기술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이전 시대에 비해 높은 품질의 공예품들이 제작되었다. 동물 문양, 나무모양 머리 장식, 독특한 양식의 인형 등이 특징적이다.

선비의 "나무 모양" 머리 장식은 사슴의 뿔과 신목의 가지를 동시에 상징한다고 한다. 선비족의 머리 장식은 주로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화수(花樹)"는 쓰면 이마 근처에서 큰 줄기가 올라오는 구조로, 나뭇잎이 물방울 혹은 타원형이다. "정화(頂花)"는 한자 그대로 정수리 근처에서 줄기가 뻗어나오는 구조이다. 정화를 쓴 사람은 나무, 혹은 뿔난 동물의 형상과 닮았을 것이다. 사진은 "화수" 형태의 머리 장식이다.

Xianbei buckle.jpg

선비의 동물 문양은 보통 금속 공예품에서 나타나는데, 도형화, 추상화, 단순화된 웅크린 동물의 문양을 반복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초식 동물이 잡아먹히는 광경이나, 같은 종의 동물끼리 싸우는 장면을 나타낸 작품들이 유난히 많다. 양, 말, 사슴 등이 주로 나타나는 문양이다.[11] 사진은 천마가 새겨진 허리띠 장식인데, 천마, 즉 날개 달린 말 역시 선비 예술에 자주 나타나는 동물 중 하나였다. 말이 유목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말에 대한 묘사가 잦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종[편집 | 원본 편집]

대부분의 학자들은 선비는 동호계(즉 원시 몽골계)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선비의 후손으로 알려진 실위, 유연, 거란 등이 몽골계 인종의 조상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를 퉁구스 계열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며, 선비가 퉁구스와 몽골계의 공통조상이 아니냐는 추정 역시 존재한다.

각주

  1.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2.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3.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4.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이평래 역, 소나무.
  5.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6.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이평래 역, 소나무.
  7.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이평래 역, 소나무.
  8.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이평래 역, 소나무.
  9.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이평래 역, 소나무.
  10.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이평래 역, 소나무.
  11. 영어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