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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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학술 관련 정보 틀:넘겨주기 있음 Korean War

1950년 6월 25일, 북한괴뢰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틀:날짜/출력 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즉,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그리고 냉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개요

발발 원인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함께 연구된다. 대체적으로 소련 및 북한괴뢰패당 짓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주의와 미국이나 기타 요인 탓이라고 주장하는 수정주의로 나눠져 있다. 물론 한국의 경우 전통주의 시각이 우세한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 의견을 차용하고 있다.[1]

참고적으로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 말하는데 이는 학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된 것에 반해 일반대중들은 잘모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한국전쟁 연구 및 냉전사 연구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우드로 윌슨 센터가 냉전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다.

전통주의적 입장

대표적으로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2]이 있는데 이 사람이 보기에 한국전쟁은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이다. 왜냐면 그는 한국인은 독립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항이후 한국역사가 친러, 친미, 친일, 친청 등 파벌로 나뉘어 싸웠던 사실과, 이승만의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을 한 사실을 가지고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독립심이 없는 존재라 주장했다. 미국판 식민사관 그래서 한국전쟁도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계획된 전쟁이라 본다.[3]

간단히 말해서 한국놈들 멍청해요. 그래서 전쟁 결정 못해요. 그러니 한국전쟁 소련이 일으킨 거에요.

국내에는 서울대 김영호 교수[4]가 대표적으로 있다. 이분은 스탈린의 롤백이론을 주창하고 계시다. 그분의 주장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이 졸라서 전쟁이 났어도, 아무튼 전쟁을 승인한 사람이 누구냐? 스탈린 아니냐? 그러니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최종결정권자가 스탈린이니 당연히 스탈린 책임이다는 것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동안 한국에선 스탈린의 사주와 마오쩌둥의 동의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당장 자유총연맹이나 재향군인화 한국전 관련 자료를 보시라), 냉전후엔 후르쇼프 회고록 발간과 소련 비공개 문서 해금이후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회의적이었고, 김일성의 적극적인 설득과 생떼로 인하여 마지못해 스탈린이 승인하여 전쟁이 이루어졌다고들 한다.

여기서 당시 스탈린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냉전초기에 막 위성국화하거나 위성국화중인 동유럽을 안정화 시켜 소련의 대 서구권 완충지대를 다지기 위해서 미국과 서방세력이 동유럽에 신경쓸 여력을 극동으로 관심을 돌리게하면서 더불어 장차전을 대비하여 극동에서 다시금 과거의 국력과 위상을 회복하여 소련에 대적할것이 뻔한 중국과 일본, 더불어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도 미리 힘을 좀 빼놓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스탈린의 구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정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탈린은 신중하고 우유부단하기 까지 하여 귀가 얇아 김일성에게 휘둘리거나 김일성의 생떼에 질려서 넘어간 인물이 되나 그의 의중이 위의 추정대로였다면 대단히 유능한 백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지략가요 전략가라고 할수 있다.그리고 중국이랑 북한이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제발 휴전하게 해주세요 라고 징징 거려도 죽을때까지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본은 한국전 때문에 되려 살아난다. 지못미

수정주의적 입장

수정주의 시각의 시작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윌리엄 A. 윌리엄스의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가 출간되면서부터였다. 윌리엄스는 냉전은 미국의 잘못된멍청한외교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를 기점으로 다양한 수정주의자들이 등장하는데 한국전쟁관련 대표적인 인물은 브루스 커밍스다.[5] 커밍스의 등장 이후 학계에서는 수정주의자들이 득세했다. 본격 수정주의자들의 시대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일제강점기때 등장한 계급간 격차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해방 후 미소 분할점령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게되었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근데 커밍스 주장의 문제점은 한국전쟁의 간접적인 원인(계급간 갈등 등)은 설득력이 있으나 직접적인 원인[6]에 대한 설명이 미흡한 것이 문제이며 간간히 틀린 정보도 많다는 것이다.[7]

시몬스의 경우 김일성이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고, 한반도 내에 기반이 있는 세력에 비해 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계열이 대거 북한에 들어오는데 애들의 규모가 엄청난 양이었다. 그로 인해서 김일성의 권한은 더 불안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괴롭히고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던 박헌영이 이러게 된 이상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남침을 건의했고, 영토야욕이 있던 김일성이 이를 수용해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달려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전쟁하게 해주세요. 김일성의 부탁에 스탈린이 승인했고 이로 인해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다고 말한다.

둘을 조합한 현재 학계 정설

그런거 없다

한국전쟁의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냉전의 원인이 바뀐다. 예를 들어서 만약 스탈린이 전쟁을 주도했다고 본다면 냉전은 스탈린 탓이다. 그런데 만약 김일성이 주도한 것이 된다면 냉전은 스탈린 탓이라기 보다는 미국의 탓 또는 미국과 소련의 서로 간의 잘못된 오해로 인한 것이 된다. 즉 한국전쟁을 누가 주도했느냐에 따라 냉전의 책임이 결정되는 것이다.[8]그렇기에 한국전쟁 원인이 명확히 나오는 순간은 냉전의 원인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중도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의 입지는 아직도 강하다.

다만 한국 학계에서는 김일성 주도 스탈린 동조설이 중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김일성개새끼가 전쟁을 원해서 스탈린에 가서 빼애애애액!!!!전쟁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요청을 스탈린이 받아들여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전쟁하게 해주세요 현기증난단 말이에요!

보론

한국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이승만 정부,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약 37년간 독재정권 하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은 북한이 침공한 것이었고, 이에 대해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면 빨갱이가 되는 시대였다. 당연히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자체가 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 말 민주화로 인한 사회분위기가 개선되면서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자는 김학준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단지 미국의 사례를 대충 정리해서 국내에 제시하였고, 그가 직접 한국전쟁에 대한 원인을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김학준을 필두로 하여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가 국내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1년 소련이 붕괴로 인해 빤짝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다. 이는 소련의 문서고 개방과, 옐친이 남한에 수교의 기념물로 한국전쟁 관련 자료를 넘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옐친과 이상한 약속을 체결하는데 넘겨받은 소련 극비문서를 10년 간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결국 10년간 공개되지 않으니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가 한국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열기는 식어버렸다.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였고, 주로 다른 방향 피난민의 삶, 병사들의 삶과 같은 미시적 관점의 연구가 주로 진행되었다.

물론 이러한 척박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전쟁 원인을 연구한 학자가 있다. 하지만 그 인원이 매우 적다. 정병준과 박명림이 거의 유일하게 한국전쟁 원인을 연구한 학자이다.

국내의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척박하는 걸 넘어 거의 사장된 상태이다. "한국전쟁 원인"을 KISS나 RISS, 국회도서관에 쳐보면 겨우 20개 정도 나올까 말까 한다.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국내 연구는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누가 한국전쟁 원인에 대해서 요즘 학계는 그렇게 본다라고 말하면 쌩까면 된다. 왜냐면 한국 학계에서 한국전쟁 원인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학계라면 말이 좀 달라진다.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미국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미국도 195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논의는 금기시 되었다. 정부에서 말한대로 북한의 침공이었고, 공산패뢰당의 음모였다.

경직된 미국 사회는 1960년대를 거치면서 극적으로 변화한다. 최근 미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헌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의 사회변화적 요인에 기인한다.

아무튼 이런 변화 속에서 미국 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새로운 의견이 제시되었고, 그것이 앞에서 말한 수정주의이다. 이 수정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미국 학계는 전통주의자와 수정주의자로 경쟁하였고, 서로 자신들의 의견이 맞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박터지듯이 싸웠다. 그 결과 다양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런 논의로 인해 미국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매우 촘촘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관련 연구소가 존재한다. 앞서 말한 우드로 윌슨 센터이다. 여기서 수백억 규모의 자금을 이 한국전쟁 연구에 배치하였을 정도로 미국 학계는 이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러므로 국내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영어의 압박이 있지만미국 자료를 참고하거나 미국 연구 결과를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말한 박명림, 정병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국의 연구 자료을 차용한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의 차이는 경쟁의 유무이다. 한국은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면 죽이거나 사장시키거나 했다. 왜냐 어차피 새로운 의견이라는 것 자체가 빨갱이로 몰렸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미국은 그러지 않았고 빨갱이와 같은 주장들을 했다. 예를 들어 남한이 북침하여 북한군이 몰려왔다든지 벌집을 쑤셔서 벌들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계략이었다든지 말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조리 분쇄되었지만 그러면서 수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세련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의 원인은 이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요구를 49번이나 거부하였고, 전쟁 승인때 마오쩌둥의 의견을 들었다는 사실이다.[9]

전통주의자는 이를 소련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눈치없이 와서 한다고 하니 반려시킨 것이고, 이후 기회를 포착하자 김일성을 불러 전쟁을 승인하고 중국조차 끌어들인 것이라 보았다.

수정주의자는 이를 소련은 전쟁의 의도가 없었는데 김일성이 땡깡 부려서 전쟁을 승인해 준 것이라 보았다.

즉 둘 중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왜냐 기록이 없다. 그냥 김일성이 왔는데 거부했다. 이런 정도이지 무슨 회담의 내용이 없다. 특히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회담 내용은 공개되지도 않았다. 즉 스탈린이 처음에는 생각이 없다가 그래 한 번 해볼까? 이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김일성이 땡깡부려서 스탈린이 승인한 것 일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스탈린의 지원 없이 북한은 전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초기 국군의 패배의 가장 큰 요인은 군 지휘부의 무능이다. 채병덕의 삽질도 있었지만 각 전투를 살펴보면 온갖 병크를 찾아볼 수 있는데, 7사단의 경우 연대를 축차투입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한군, 국군 지휘관을 통틀어서 사단급 이상 제대를 수년간 운용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국군 김홍일소장밖에 없었다. 이청천이나 군원로도 기껏해야 중대급을 운용하였다. 북한군의 경우 남일이 소련 중대를 통솔한 경험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북한군은 전쟁초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랬는데도 패한 국군은.....

소련의 지원은 단순히 물자뿐 아니라 군사지휘, 작전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니 거의 이 전쟁은 스탈린이 기획한 것이라 봐도 된다.

하지만 이 사실이 스탈린 주도설과 김일성 주도 스탈린 지원설 중 어디를 지원하는 것인지를 해석의 문제이다.

즉 한국전쟁의 원인은 해석의 문제이고, 누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개 상황

미국의 참전과 한강선 방어작전

미국의 참전

미국은 주한미국대사 무초(John J. Muccio)의 전문을 통해 한국전쟁이 시작됨을 인지한다. 미국은 개전한지 7시간 26분이 지난 후에야 전쟁 상황을 공식을 접수하였다. 이때 신성모와 채병덕은 국군 반격!, 북진! 북진! 외치고 있을 때다......미 국무부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비상연락계통을 이용해 전 미국 지도부에게 연락을 취한다. 당시 미국은 토요일이었고 대부분의 지도층은 휴가 중이었다. 대통령 트루먼도 미주리 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으로 인해 미국 지도부는 신속히 집결한다.

미국 현지시간 6월 25일 19:40분 백악관 블레어하우스에서 회의가 진행된다. 이 회의에서 북한의 남한 침공은 “소련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거나, 남한을 정복해서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을 유도하기 위한 것”[10][11]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5개의 사항을 결정하였다.

  1.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도록 할 것
  2.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이 제안한 군수물자를 보내게 할 것
  3. 이미 지시된 제7함대를 일본으로 파견할 것
  4. 미 공군은 극동지역에 있는 소련 공군기지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할 것
  5. 소련의 다음 행동 지역이 어디인지 파악할 것

미국 현지시간 6월 26일이 되자 한국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제2차 블레어하우스 회의가 개최되지만 회의 내용은 제1차랑 대동소이 하였다.

전쟁 초기 미군의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주로 탄약 지원을 주로 하였는데, 105mm 곡사포 90문, 60mm 박격포 700문, 카빈소총 40,000정 화기와 함께 105mm 포탄 105,000발, 81mm 박격포탄 265,000발, 60mm 박격포탄 89,000발, 소총탄 2,480,000발이 주산으로 긴급 지원하였다.[12]

한편 한국 정부로 부터 올라온 전투기 지원 요청에 대해서는 나름 빠른 처리가 진행되었는데, '한국 공군에 전투기를 지원하고, 한국 공군이 전투기를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를 목적으로 하는 바우트 원 계획이 수립되어 한국 공군과의 협의하에 10기의 F-51 무스탕을 지원하기로 결정되었다. 6월 27일에 10명의 조종사가 훈련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으며, 이들은 7월 초부터 한국 전쟁에 투입되었다. 다만 이렇게 진행된 뒷사정이 좀 구릿한데, 바우트 원문서를 참고하자.문서가 없다면 좀 기다려보자.[13]

6월 29일 맥아더장군이 한국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수원공항에 도착하였다. 수원학교에 있는 육군본부 임시거처에서 전선에 대한 상황을 브리핑 받는 중 맥아더 장군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이 사태에 대한 건의사항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채병덕 총참모장은 “2백만 남한 장정을 징집하여 침략을 격퇴하겠다.”고 말했다.[14] [15][16]

한강남안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미군의 참전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뉴욕 해럴드 트리뷴지의 히긴스 양에게 “나에게 미군 2개 사단만 준다면 나는 한국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17]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말해놓고 필리핀을 날려먹은 적이 있었지

맥아더 장군이 시찰보고서가 도착하자 미군은 미국 현지시간 6월 30일 새벽 4:57 2개 사단을 추가로 파병하고 그날 오전에 미군의 대규모적인 파병이 결정되었다. 또한 안보리를 통해 UN군 파병이 결정되었다.

한강선 및 김포지구 방어작전

국군 지도부는 서울 철수의 필요성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했다. 당연히 철수과정은 극도로 혼란했고 피난민에 의해서 교통은 거의 마비되었다. 거기에 서울 시민들도 피난길에 오르면서 국군의 철수는 혼란이었다. 거기에 한강교를 미리 폭파시켜 야포, 차량, 박격포 등 중장비를 이동시키지 못하고 소총만 휴대하거나 또는 맨몸으로 철수하였다. 거기에 국군에게 지급하기 위해 보급품을 실고 있었던 1,318대의 차량들이 한강북쪽에 갇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국군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국군은 병력을 수습해야하는 것과 동시에 한강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막아야 하는 두 가지 임무를 모두 수행해야 했었다. 그러나 한강선은 전차를 앞세우는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을 쉽게 내준다면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는 곳은 딱히 없었다.[18] 특히 미국의 참전이 확실시되던 시점에서 국군이 이곳에서 시간을 벌어야만 했었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에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방어를 위해 육군참모학교장인 김홍일 소장[19]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20]

시흥사령관이 된 김홍일 소장은 시흥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유재흥 준장, 이종찬 대령, 임선하 대령을 각각 혼성 7사단장, 혼성수도사단장, 혼성제2사단장에 임명하였다. 혼성이라는 명칭을 쓴 이유는 수도, 7사단, 2사단 모두 병력이 분산되어 제대로된 편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에 남하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편제나 소속 상관없이 500명이 채워지면 혼성ㅇㅇ대대라 칭하고 바로 한강선에 투입했다. 당연히 사단편제가 기존편제와 달랐으니 혼성이라는 명칭을 썼다. 이 말은 즉 국군그 편제조차 유지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당연히 혼성사단은 말만 사단이었지 실제병력이나 화력은 일개 연대수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혼성사단 연대별 소유하고 있던 중화기는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 정도로 일개 소총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흥사는 한강방어를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다. 승마장에 있던 말들을 군용으로 수용하였고, 각 지역에 남아 있던 화기를 전부다 전방으로 보냈다. 또한 혼성 사단장을 임명하여 한강선을 따라 남하하는 국군을 수습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를 통해서 국군은 어느 정도 편제를 갖출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

시흥사가 한강지역의 방어선을 재편하는 동안 6월 29일 맥아더 장군이 시찰을 오게 되었다. 여기서 김홍일은 맥아더에게 “지금 국군이 장비와 탄약의 절대량이 부족함을 알리고 이에 대한 시급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수도사단 방어진지로 안내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가 나왔다.[21]

맥아더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에게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는지 묻자, 김홍일 장군은 “적의 탱크가 도하 오는 것을 어떻게 저지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를 위해서 미 공군이 한강철교를 완전히 파괴시켜주기를 요청했다. 한강철교가 파괴되어 적 탱크의 도하에 시일이 걸린다면 한강선에 있는 국군 2만 5천명으로 적 5만명을 10일 동안 이곳에 묶어둘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채병덕과 비교된다. 이에 맥아더도 김홍일 장군의 말에 동의했다고 한다. 시흥사의 가장 큰 역할은 흩어진 장병들을 수습했다는 것에 있다. 만약 시흥사가 병력을 수습하여 혼성사단이라도 만들지 않았다면 이후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할 병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흥사가 병력을 수습하면서도 동시에 북한군을 일주일간 한강선에 묶어두면서 한국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한편 시흥사가 한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할 쯤, 김포지역에도 북한군이 등장하였다. 제6사단은 한강 하류에서 도하하여 김포읍을 석권하고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육군 지도부는 이미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한강선 방어에만 총력을 기하는데 힘든 시점이었기에 김포지역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김포읍을 빼앗기고 겨우겨우 부천으로 퇴각한 김포전투사령부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대오를 정렬하고 있는 중에 사령관 계인주 대령이 행방불명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참모장인 최복수 중령이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6월 28일 야간 김포사부대가 소사로 집결하자 시흥사는 현지의 제3사단 참모장인 우병옥 중령을 새로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김포비행장 탈환을 명령했다. 이는 북한군 저지 목적도 있었지만 행주에서 도하 중인 국군 제1사단의 철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6월 29일 새벽 김포비행장에 접근한 김포사는 북한군 기습을 위해 병력을 점검하던 중 총소리를 듣게되었다. 이 총소리는 행주나루터에 도하한 국군 제1사단 제18연대와 북한군의 접전 소리였다. 이 소리에 김포사는 즉각적으로 김포비행장을 공격했다. 그러나 화기의 차이로 인해서 김포사의 공격은 성공치 못했고, 전황이 안 좋아지자 최복수 중령[22] 이 기관총을 장착한 짚차를 몰고 활주로 돌진하여 옥쇄하였다.

결국 김포사는 공격을 멈추고 소사로 후퇴하였다. 김포사가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국군 제1사단 제18연대는 차례대로 행주나루터로 도하하였다. 제18연대는 다른 연대와 다르게 건제를 유지하면서 철수하였다. 특히 도하도 제1대대, 제2대대, 제 3대대 건제 순으로 도하하면서 최대한 건제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도하 직후 행주나루터에서 적을 마주쳤음에도 적을 물리치면서 퇴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포사 사령관인 우병옥 중령이 원미산에 올라가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지휘관의 부재로 김포사가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시흥사 김홍일 소장은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에게 그 지역부대를 통합 지휘토록 하였다. 임 중령은 제18연대를 중심으로 김포사 산하 부대를 장악해 나갔다. 임충식 중령은 김포비행장 이남에서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세를 김포사 병력만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6월 30일 김홍일 소장은 김포사를 지원하기 위해서 제5사단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신임 김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5사단 병력을 수습하여 김포지역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새로 투입된 병력만으로 김포를 방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김포비행장 탈환작전은 실패하였다.

김포방면 방어작전은 매우 어려운 작전이었다. 한강선과 달리 전차를 막을 장애물이 없었고, 국군은 지휘체계나 건제가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북한군을 저지한 김포사의 공헌은 매우 중요하다. 김포사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이 지역을 방어했기에 한강선 방어막도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김포사는 시흥사 산하로 편입되었다.

시흥사는 한강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다음 7월 3일 철수하기 시작했다. 7월1일에 일본에 있던 미 스미스특무부대가 부산에 상륙했고, 이에 국군은 스미스부대가 대전에서 전개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수원이북에서 방어를 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수원북방에서 북한군을 지연시키기 위해 축차 방어진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방어선을 지탱하기 어려웠고, 결국 7월 4일 하루만에 수원이남으로 후퇴해야 했다. 육군본부는 차량으로 수원에서 철수해 평택에 집결하였고, 시흥사는 서해안과 국도로 분산 남하해 오산에 집결하였다. 시흥사는 오산에 미 스미스특무부대를 만나 용기를 가졌고 물품을 보급받았다. 이렇게 오산에서 방어선을 형성하려고 준비하던 중에 미군 공군기가 국군의 철수차량에 폭격하여 귀중한 보급품을 상실하였다.[23]

한강선 방어작전의 중요한 성과는 첫째, 앞에서 말했든 병력을 수습 재편했다는 것이다. 국군은 한강이북에서 대부분의 부대가 와해되어 분산 철수하였다. 이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다시 재편은 국군이 제1군단을 편성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둘째, 이 작전을 통해 미군이 투입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이로인해 미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과 공산을 확보하였다. 셋째. 국군이 북한군의 작전목표를 분쇄시켰다. 북한군은 서울에서 국군을 전멸시켜 이후 쉽게 전과확대[24]하려는 계획을 무마시켰다.

시흥사가 한강선 방어작전이 성공했던 요인으로 총 4가지가 꼽힌다.

  1. 방어작전에서 하천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한강 철교 북안에 대해 위협사격을 실시한다든지, 적의 도하예상지점에 병력을 배치하는 등 하천의 이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2. 미군 공중 전력의 효과적인 활용이었다. 미 공군기가 한강 이북에서 실시한 대규모 폭격은 북한군 전력에 큰 타격을 주었고, 한강 도하작전에 큰 시간이 걸리게 만들었다. 특히 미 공군은 북한군의 주간 도하 및 기동작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3. 김포사의 성공적인 측면 방어이다. 김포사 병력은 열세한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도 북한군 제6사단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만약 이를 저지하지 못해 북한군 6사단이 영등포일대로 진출했으면 한강선의 국군은 고립된 채 분쇄당했을 것이다.
  4. 김홍일 소장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시흥사 예하 장병들의 투절한 애국심이다. 김홍일 소장은 사령관에 임명됨과 동시에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병력을 조기에 수습하여 부대를 재편성하였고, 또 신속하고 적절하게 지휘관을 임명하여 전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 동시에 국군 장병들의 희생정신은 가히 경의적이라고 평가된다.[25] 국군장병들은 탄약과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을 저지하기 위해서 목숨바쳐 싸웠다. 제8연대의 경우 하루에도 수차례씩 여의도를 통해 영등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제4사단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물리쳤으며 노량진철교를 통해 적 전차가 도하하기 전까지 한번도 방어선이 돌파되지 않았다.

국군의 재편성과 초기 지연작전

한강방어선이 붕괴한 이후 한국정부는 국군을 전면 재편하였다. 먼저 이승만은 6월 30일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을 해임하고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시키고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에 육군총참모장이 육군과 동시에 해군과 공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7월 8일 대전에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제외한설마 여기까지 밀리겠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정일권은 계엄사령관까지 겸하게 되었다.

이후 정일권은 전선부대를 재편성하였다. 먼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1군단으로 재편하였다. 동시에 기존의 8개 사단을 편제를 5개 사단으로 재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편제가 건재한 제6사단과 8사단은 기존의 체제를 유지했고 나머지 혼성사단을 전면 재편하였다. 이를 통해 국군은 전쟁 직전 8개 사단 2개 직할연대에서 1개 군단 5개 사단 3개 독립연대로 편성되었다.

부대 지휘관 편성부대
제1군단 김홍일 소장 수도 • 제1 • 제2 사단
수도사단 이준식 준장->김석원 준장(7.7) 제1 • 제8 • 제18연대
제1사단 백선엽 대령 제 11 • 제12 • 제13연대
제2사단 이한림 대령 제5 • 제16 • 제19 연대
제6사단 김종오 대령 제2 • 제7 • 제19연대
제8사단 이성가 대령 제10 • 제 21연대
기갑연대 유흥수 대령 제1 • 제2 • 제3대대
제23연대 김종원 중령 제1 • 제2 • 제3대대
제17연대 김희준 중령 제1 • 제2 • 제3대대

[26]

이와 같은 육군본부의 사단재편성 명령은 7월 5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 떨어졌다. 이에 시흥사는 평택으로 철수 및 방어진지 편성과 동시에 사단 재편을 이루었다. 사단을 재편하는 동안 김홍일 군단장은 작전참모에게 오산 북쪽 스미스부대가 있는 곳으로 파견 미군들이 2.36‘’ 로켓포로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지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미군의 2.36‘’인치 로켓포로도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다.[27]

한국이 지연작전을 펼치는 동안 유엔은 유엔군 창설을 결의한다.(7월 7일) 이에 최초의 유엔군이 창설된 것이다. 유엔군은 먼저 미국 대통령에게 유엔군사령관 임명에 대한 권한과 통제권을 부여하였다. 이에 미국은 당시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으로 선임한다. 이러한 조치 속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장군에게 이양하는 조치를 직접 취했다. 이승만은 7월 15일 맥아더에게 보낸 개인 서신에서 ‘’‘전쟁 기간 동안 맥아더에게 한국의 육⦁해⦁공군에 대한 지휘권을 이양한다고 밝혔다.’‘’[28]

이로써 육군은 초기 지연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군사조직을 확보했고, 미국 및 유엔군의 지원이 확실화 되면서 국군의 목표도 명확히 설립되었다. 이후 국군은 미군과 협조하면서 최대한 북한군의 진군속도를 늦추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국군의 초기 지연작전은 경의적이었다고만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서울이 함락된 이후 흩어진 병력을 수습한 것도 기적이며, 동시에 철수와 계속되는 전투, 부족한 식량 속, 수면 부족 등 전투 피로도가 누적된 상황에 심지어 화기조차 부족한 상황에서도 북한군을 4일 이상 저지하는데 성공했다.[29] 특히 시흥사 전면은 한강이라는 천혜의 장애물이 있었으나 김포사는 평지에서 북한군 6사단과 맞서 죽음을 각오하면서 전투를 벌어야 했으며, 그 전투에서 적의 진출을 최대한 저지하여 한강선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물론 국군의 이러한 방어전은 미군의 공군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미 공군은 국군의 부족한 화력을 메워주었다. 미 공군은 화포와 중장비를 서울에서 상실한 국군에게 단비나 마찬가지였다.[30]

낙동강 전선

한국군은 있는 병력 없는 병력 쥐어짜내며 닥치는 대로 전선으로 보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소련군의 처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후방에서 학도의용병들까지 모집해서 어린 학생들에게 몇 시간동안 기초훈련만 시키고 최소한의 무장만 준 채 전선에 투입했다.[31] 미국도 일본에서 병력을 긁어내어 바로바로 투입했고, 본토의 예비병력을 투입시키기 시작하면서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다.

낙동강 전선에 있어 위기는 크게 세 차례 있었다. 첫번째는 다부동 전투로 1사단과 미군의 격렬한 저항, 그리고 왜관 일대에 대한 B-29의 융단폭격이 가해지면서 막아내었다. 두번째는 9월 초의 영천 전투유재흥 장군이 격전 끝에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또다른 위기로 통영 함락이 있었는데, 한국 해병대에 의한 통영 상륙작전으로 통영을 탈환하고 거제도로 가해지는 북한군의 위협을 차단하였다.

북한군도 한미연합군을 바다 속으로 밀어버리기만 하면 전쟁이 끝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더 이상 방어선으로 삼을 만한 지형도 없었다. 때문에 북한군도 후방의 모든 병력에 남한에서 징집한 병력까지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모조리 총투입하여 공세를 강화했으나 결국 돌파구 형성에 실패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군의 전력은 약화되었고, 반면 미군은 병력과 물자가 빠르게 증강되어 갔다. 아울러 후방의 거점도시들과 보급거점이 맹폭격을 받으면서 전선지원이 원활하지 않아 공세한계점에 도달했고, 전선 부대도 맹공습으로 대부분의 중장비를 상실했다.[32]

인천 상륙 작전

중국의 참전 그리고 1·4 후퇴

지리한 휴전협상

마침내 휴전 그리고

휴전 이후

전쟁의 영향

부정적 영향

수많은 인명피해

당장 전투로만 유엔군과 한국군에서 18만명이 전사하였으며,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전사하였다. 이런 전투 외에 각종 학살과 폭격 등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가 100만 단위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것. 이로 인한 전쟁과부와 고아의 발생은 덤이다.

지독한 사상 컴플렉스

본디 이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남한과 북한 모두 이념에 대해 그렇게 하드코어하지 않아 자유로운 이념과 종교 활동이 가능하였다. 남한에도 공산당이 있었고 북한에도 자유주의자가 있는 등 양국 다 제법 균형잡힌 안정된 모습을 취하고 있었고, 만약 이 상태가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양국은 동독과 서독 같이 지금보다는 좀 더 원만한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 이후 양국의 이념 활동은 극도로 경직되게 되었다.

우선 한국사회는 공산당이나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회가 되었다. 이후 독재정권에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반대파를 찍어누르는 구실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게 되는 원인이 된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우리가 공산당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 국가인데 뭔 소리냐! 우리를 전복시키려는거 보니 넌 빨갱이가 분명하다!'(...)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무고한 시민과 학생들을 셀 수도 없이 때려잡았다. 이는 이제 민주화, 자유화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산주의의 공 자만 꺼내도 바로 민족의 반역자로 여기는 여론의 가혹한 반응 등으로 아직까지도 남한 내에서 공산주의를 향한 강한 적개심이 유효함을 선보이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라 전후 김일성은 자신의 파벌을 제외한 다른 파벌들에게 패전의 누명을 뒤집어씌워 죄다 숙청시켜 오직 자기 추종자들만을 남기는 절대적인 독재 체제와 여기서 비롯된 세습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곧 김일성 스스로가 교주이자 신으로 군림하는 주체사상이라는 세계 최악의 막장 사이비 종교를 창시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한 북한 사회/경제/문화/교육/지리/생활의 막장화를 불러오게 된다.

긍정적 영향

끔찍하기 이루말할 수 없는 전쟁으로 기왕이면 안일어나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전쟁이 몰고온 긍정적인 여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당시 여러 호전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상술한 박헌영도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서로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국지전이 빈번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러한 호전론자들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전쟁은 나쁜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강력하게 퍼지게 되어 남은 힘 조차 잃게 되었다. 덕분에 비록 '휴전' 관계임에도 오늘날까지 양국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유지되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과시하는 식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 이후 양국이 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손실도 매우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그것을 잘 이어나갔지만 북한은 중간에 침몰하여 아직까지 밑바닥을 떠도는 중이다(...).

완전한 계급제 철폐

사실 한반도는 상술했듯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을 거두었기에 사회 구조가 그대로였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즉 일단 법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했지만, 앞집 김씨는 양반 출신 뒷집 정씨는 노비 출신 등 어디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평등'이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피난을 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어디의 누구였는지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 와중엔 죽어서 아예 잊혀진 사람도 있고, 살아는 남았으나 기반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는 등 민족이 제대로 뒤엉켜버렸다.

게다가 이후 사회기반의 리셋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 하기도 모자랄 판국이 되어버린 탓에 먹을것을 잘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고 이런 판국에 양반이니 노비이니 하는 출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출신성분은 서서히 잊혀졌고 결국 비참하게나마 온 국민의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전쟁 덕분에 평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근대 와서 심각한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누구는 화족 출신이네, 누구는 부라쿠민 출신이네 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까지도 민족차별이 빈번한 국가로 남아 있다.

물론 그 이후에 평등화 된 사회를 지켜낸 것은 대한민국의 몫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신분제가 다시 등장했으니까.

미국과의 유대감 강화

전쟁을 통해 미군과 국군이 함께 싸우면서 양국의 유대감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국군은 미군과 함께 싸움으로서 미군의 최신식 장비와 그에 걸맞는 교리들을 다수 습득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근 백여년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전 경험을 갖게 되어 실력 또한 향상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여파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 종전의 '일본을 처리하면서 떠안은 부산물'이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벗어나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정신적 유대감에 더불어 실제로 미국식 사회제도나 경제제도가 잘 도입되어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유대감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이다.

다만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우방국이라는 거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이 우리 편일거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도 결국 이익을 생각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국가이며, 이는 한국군이 하푼을 도입하려고 했을때 일본측의 로비를 받은 미국에서 하푼의 판매를 거절했었던 사실이나 M60 패튼을 대체하는 신형 전차의 도입 시도를 영 꺼림직하게 봤던 일 등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의 우방국인 것은 맞지만, 국제 정세에 따라서는 태도가 달라지지 말라는 법이 없으므로 맹신이 아닌 적절한 외교를 통해 우방국으로서의 관계를 튼튼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몇몇 국가들의 부흥

남의 전쟁을 통해 배를 불렸다는 점이 당사자로서 심히 아니꼽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냉정하게 말해 한국전쟁으로 분명히 득을 본 국가들도 있긴 했다.

일례로 이웃국가 일본의 경우는 한국전쟁으로 대박이 터졌다. 일본은 당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관리 하에 놓여져있는 입장이다보니 한국땅에서 싸우는 UN군을 원조할 중간기지 역할을 담당(UN군용 군수물자 생산 및 납품 등)하게 되면서 이로 인해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긴 했다. 더군다나 일본은 전후 평화헌법에 의해 군대가 없던 실정[33]이라 한국에 병력을 파견할 일도 없었다. 즉 말 그대로 피 한방울 안보고 돈만 실컷 벌었다.

한편 중화민국도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죽다 살아났다. 이쪽의 경우 원래대로라면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1년 내로 무력으로 접수될 운명이였으나, 한국 전쟁이 북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는 수 없이 북한을 원조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군사력을 한반도로 투입시켜야 했기 때문에 전후 중화민국을 접수할 힘이 남지 않아 살아남게 된 것이다. 만약 한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조기에 정리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입할 여지 자체가 없어졌다면 중화민국도 지금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몇몇 참전국들도 분명하게 대외적인 플러스 이미지를 얻었고 경제적인 이득도 일부 얻었다. 미국이 대표적으로 미국은 본 전쟁에서 '정의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얻어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 보탬이 되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에서 다 말아먹었지만)

기타

UN군

국제연합(UN)이 정식창설된지 2년여만에 전쟁을 겪었고,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UN 회원국의 뜻을 모아 UN군을 창설, 한국에 파병했다. UN 평화유지군이 아닌 UN군으로서 침략자와 교전을 목적으로 한, 즉 UN이 두명의 전쟁 당사자들 중 어느 한 쪽의 편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경우는 2015년 현재까지도 이 때가 유일하다.

이는 국제연맹(LN)이 무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지 못하고 침략자에 의한 주변국 정복이 거듭된 3~40년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교훈이 가져온 결과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이나 일본의 중국 침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국제연맹과 국제사회 모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치뤘던 만큼, 침략자는 일찌감치 응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었던 것이다.

당장 에티오피아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침략때 국제연맹을 통해 호소했지만 무시당하고 정복당한 역사가 있고, 독립을 회복한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프리카의 빈국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강자에 의한 침략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같은 이유로 유럽권 국가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터키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내전을 끝내고 국가재건 및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기에 참전한 경우이다. 태국은 아예 2차대전당시 일본의 동맹국, 즉 추축국이었다. 워낙 듣보잡이라 미국이 신경도 쓰지 않은 상대였고 태국도 필사의 외교전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취소하는 식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했지만 미국 및 영국, 프랑스로부터 추축국 낙인이 찍힌건 똑같았고 이를 타개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되겠다는 제스처로서 참전한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모두들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도와주러 온 나라들이다. 설사 정치적 이유든 금전적 이유였든 경제적 이유였든 어떤 이유에 따른 파병이더라도 그건 그 국가 정부의 입장이지, 파병된 사람들은 이역만리 타향땅에서 아무런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감사히 여기자.

직접적으로 전투병을 참가시킨 국가만 위 16개국이고, 의료진을 보내거나 구호물자 등으로 지원한 나라는 더 많다. 놀랍게도 일본도 구호물자를 보내주었던 국가 중 하나에 속해있다. [34]

관련 작품

같이 보기

센추리언(전차)

대중매체

미국이 패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의외로 미국이 분명하게 패한 소말리아전이나 베트남전과는 달리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는 매우 적다. 애초에 미국 내에서 이 전쟁을 일컫는 별칭 중 하나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35] 이다. 사실 이는 '휴전'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수준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도 있고 또 이 전쟁으로 미국이 딱히 사회적으로 가지게 된 변화 또한 없기 때문이다. 가령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린 반면, 베트남전이나 소말리아전 등으로 인해 미국은 반정부, 자유주의 성향이 지독히 강해지는 등 괄목할만한 변화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거 없었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중심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으로는 희대의 괴작 오! 인천뿐인데, 이조차 제작을 통일교에서 한거다.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다루는 매체가 매우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락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참전자들을 인터뷰해거나 초빙하여 행사를 갖는 등 여러 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 외의 지역에서는 글쎄올시다...[36]

기타

대부분의 큰 사건이 그러하듯 여러 음모론이 끼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남침(남쪽이 침공 당함)이 아니라 북침(북쪽이 침공 당함)했다는 주장,[37]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대부분의 주장들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착하게 가만히 있었는데 이용당한 것이라는 종북적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음모론은 많다. 대표적으로 처음 제시한 사람은 미국 언론인 스톤[38]이다. 1952년에 스톤은 한국전쟁이 리승만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려고 전쟁을 유도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콜코니 브루스 커밍스니 모두 남한이 먼저 침공했다고 주장했다.

각주

  1. 그러나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논의의 중심은 미국이다. 한국전쟁이라 해서 한국이 중심이 아니다
  2.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
  3.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이다. 독립청원이나 외교독립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만주나 간도, 연해주로 피신하여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 전을 펼치기도 했다.
  4.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5. 커밍스는 지금은 유명하지 않지만 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대학생 필독서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었다.
  6.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남한과 미국이 남침한 결과라 설명한다든지, 미국의 음모였다든지 등
  7.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든지 등
  8. Weathersby, Kathryn.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1] (Accessed 2015. 6. 9.) p.7.
  9. 참고로 이것만 있지 회담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1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87
  11. 참고로 이는 한국전쟁 원인의 전통주의적 입장의 시초가 된다.
  1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p.95-96
  13. http://airwarfare.cafe24.com
  1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103
  15. 이 논평은 들은 맥아더는 국군이 망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참모에게 이야기했다 카더라
  16. 총참모장의 전쟁 구상이 너무 막연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김홍일 소장은 아군의 숫자와 적군의 숫자를 파악하고 이에 따라 시급한 것이 무엇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고하였다.
  17.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104
  18. 낙동강 전선도 한강선에 비해서 그렇게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19. 김홍일 소장은 1918년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 강무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한국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1925년 중국 국민당 군에 가담하여 사단장 및 군단장 대리로 중일전쟁에 참여하여 지연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후 광복군 참모장 겸하였다. 당시 국군에서 유일하게 사단급 이상 대부대를 지휘 경험이 있었고, 지연작전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참고로 백범일지에 나오는 윤봉길 의사에게 도시락 폭탄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국인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사실은 중국인이 아니라 김홍일 장군이다. 또한 국군 역사상 유일하게 소장으로 임관한 분이다. 후임이 왔는데 별이 두 개다.
  20. 채병덕 최고의 선택
  21. 맥아더가 혼성8연대 진지에 있는 일등중사를 보자 ‘너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거냐?"라고 물으니 중사왈 "너나 나나 군인이고 군인은 명령에 죽는거 아니겠냐? 그러니 나는 철수명령이 내려지면 철수하고 아니면 여기서 죽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니 맥아더가 감동을 먹었다는 이야기
  22. 최복수 중령은 구일본군 육군사관학교 58기로 33부대를 거친 경험이 있어 정보학교인 남산학교 건립과 발전 그리고 정보장교 육성에 큰 열정이 있었다. 또한 북한군과 맞서 죽음으로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때 나이 겨우 28살이었다. 묵념
  23. 현재와 달리 과거는 폭격은 조종사의 육안으로 통해 이루어졌다. 해전과 달리 육전의 경우 비슷해고 당연히 오폭이 많았다.
  24. 군사용어로 적의 주력을 격퇴하고 후방의 빈 공백지를 점령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땅따먹기다.
  2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228
  2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257
  27. 먼저 한국에 도착한 스미스특무부대는 북한군의 전력을 얕보았다. 자신들이 보유한 로켓포로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T-34전차에 대한 악명이 높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투입된 T-34는 개량형이었고,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찍어내던 질 나쁜 탱크가 아니었다. 그러니 로켓포가 안 먹히는 건 당연했다. 무슨 일본군 치하땅인 줄 아나 결국 스미스특무부대는 경부국도방면으로 퇴각하여 국군과 함께 미24사단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버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2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284
  29. 7일이나 북한군이 서울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3일을 제외한 수치이다.
  30. 물론 오인 폭격으로 인해서 국군의 군수물자를 날려버린다든가, 국군 지휘소를 폭격한다든지 등의 일이 있었지만 이 일로 미 공군의 역할과 공헌을 깎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초기 한국전에서 미 공군의 역할은 컸다.
  31. 국방부의 공식 입장은 학도병 등의 모집에 있어 강압적 징병은 없고 모두 자원 입대이다. 공식 입장일 뿐이지만.
  32. 대표적인 것이 T-34 전차다. T-34를 상대하기 위해 미군은 본토에서 重전차 M26 퍼싱을 급히 공수해왔으나 정작 전차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북한군의 전차 대부분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습으로 파괴된다. 그리고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추가적인 전차 지원을 하지 않았다.
  33. 참고로 이 때 일본은 군대가 사라지고 미군이 대신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들이 대량으로 한반도로 투입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방위에 공백이 생겼고 이 때문에 미군을 대신하기 위한 자위대가 설립되었다.
  34. 일본에 대해서 카더라성 일화로, 일본이 '병력 지원해줄까?'라고 하니 이승만이 필요없으니 꺼져쯤 되는 반응을 보였다는 소리도 있다.
  35. 미국에서 Korean War가 Forgotten War인 이유는 학계에서 특히 냉전분야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엄청난 이슈인데 비해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없다는 의미가 더 크다.
  36. 사실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임팩트가 강한 것도 아니다. 뭐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참전용사들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고, 6.25 참전용사라는 명칭자체가 박정희정권이던 1961년에서야 등장했으니....지금의 한국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도 1961년 이후 교육의 힘이었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37. 참고로 이건 단어의 뜻을 헷갈려서 오해하는 경우도 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남침을 '남쪽이 침공함', 북침을 '북쪽이 침공함'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참고로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자 방송에서는 이걸 똥침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정리하자면 '내 손이 너의 똥꼬를 침공하면 그게 손침이냐 똥침이냐'는 내용이다(...).
  38.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