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2차 세계대전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
'Nan White' Beach, JUNO Area at Bernieres-sur-Mer.jpg
오버로드 작전 중 주노해변에 상륙하는 연합군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39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
위치 아프로-유라시아 대륙, 혼슈, 웨이크 등 몇몇 섬 지역
결과 연합국의 승리
교전단체
연합국 

진주만 공습 이후:

당시 전쟁 상황을 요약한 그림

제2차 세계 대전(第二次世界大戰, 영어: World War II)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에 걸쳐 범세계적으로 전개된 전쟁이다.

사상 두 번째의 세계 대전이자 인류 역사상 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사실상 현대 국제사회를 만든 직접적 기원이며 21세기까지도 국제사회에게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국제 연합(UN)은 이 전쟁에서 승전한 연합국 간의 모임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재산적인 피해는 도저히 산출이 불가능할 수준이며, 인명피해는 사망자만 따져서 약 5~7천만 명, 소련,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기아로 사망한 간접 피해까지 추산하면 거의 1억에 근접하는 피해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인명피해 역시 정확한 통계나 집계가 불가능한, 추정 수치이다. 전투가 격렬했을 적에는 하루에 사상자가 몇만 명 단위로 발생했던 말 그대로 미친 전쟁이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 비하면 2차 대전의 발발 원인은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진짜 발발 원인이 간단한 게 아니라 1차 대전이 그만큼 발발 배경과 원인 분석이 기괴할 정도로 복잡하다는 것이지만, 상대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은 간략화하기 쉬운 편이다. 그러나 간략화한다고 해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2차 대전의 배경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자들 간의 토론과 연구가 진행 중이다.

가장 고전적인 설명은 선발 제국주의 국가(영국, 프랑스)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이는 1차 대전의 배경 설명에서도 나오는 것인데, 충분한 식민지를 확보하지 못한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를 원했고, 1차 대전으로 식민지를 모두 상실한 독일, 1차 대전 승전국임에도 식민지 분배를 거의 받지 못한 일본과 이탈리아가 경제 대공황으로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 블록이 형성되면서 이를 타개코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이탈리아는 대규모 식민지를 요구할 만큼 국내의 산업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태였다는 반론이 있다.

이념적으로는 민족주의에 파시즘이 결합되면서 3국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 정권이 등장했다. 이는 당시 서구 국가(미국, 영국, 프랑스)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서구 국가들은 경제적 위기 속에서도 민주주의 정권이 정상적으로 작동된 반면, 이탈리아는 1923년에 일찌감치 민주 정권이 붕괴되었고, 독일은 경제 대공황의 위기 속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되어 민주 정치가 종말을 맞이했으며, 일본은 군부와 민간 정부의 힘겨루기 속에 최종적으로 민간 정부가 패하고 군부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독일에 한정해서는, 패전국에 대한 가혹한 징벌이 독일의 민족 감정을 들끓게 했다는 설명도 있다. 독일은 1차대전 패배로 모든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고 동부 영토 상당수와 알자스-로렌을 상실하였으며, 군비를 제한당하고 라인란트 지역의 비무장지대화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강요받았다. 여기에 독일 내부에서 유대인 및 사회주의자 때문에 전쟁에셔 졌다는 억지 주장까지 강력히 대두되면서 잃어버린 정당한 권리를 되찾자는 목소리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자스-로렌은 병합 40년이 지나도록 독일인들은 본국 취급조차 하지 않은 곳이며, 독일의 해외 식민지는 그다지 중요한 곳도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 전쟁 배상금은 분명 천문학적인 수치였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탕감되었다.

종합하자면 독일의 민족적, 국가적 자긍심이 크게 상처받은 상황에서 하필이면 타이밍 안 좋게 세계 대공황이 터졌고, 이로 인한 경제적 타격으로 민주주의 정부가 무너지고 극단적 민족주의가 크게 세를 떨치며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 이들의 대외 팽창 시도가 끝내 세계 대전으로 발발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 하필이면 독일 파시스트 세력의 지도자가 하필이면 아돌프 히틀러였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인데, 아돌프 히틀러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면 전쟁은 막지 못했어도 적어도 세계 대전으로 번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 외에 1935년에서 1939년에 걸치 구 연합국들의 외교적인 독일 압박이 모조리 실패한 외교 정책의 실패도 한 요소로 들어갈 수 있는데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공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소련과의 공동 협력에 실패해 독소 불가침조약이라는 최악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진행 과정[편집 | 원본 편집]

1939년: 전쟁 발발[편집 | 원본 편집]

1939년 9월 1일, 단치히 회랑 문제로 독일군이 전면적으로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면서 사상 최악의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정작 히틀러와 독일 수뇌부는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였지만, 계속되는 독일의 침략 행위에 더 이상 참지 못한 영국, 프랑스는 공동으로 9월 3일, 대 독일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동원준비를 하느냐 초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고, 덕분에 서부 전선에서는 총성 한 번 없는 이른바 가짜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독일은 소련과 함께 1달만에 폴란드 전토를 정복한 후 분할했다. 이후 40년 3월까지는 대규모 충돌은 없고 상호간의 소규모 해전이나 통상파괴전만 치러졌다.

1940년 : 서부전선의 붕괴와 프랑스의 항복, 영국의 분투[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의 전투는 끝났다. 이제 영국 전투가 시작되었다!
윈스턴 처칠, 대 독일 전쟁의 지속을 결의하며

1940년 4월, 독일은 철광석의 원활한 수급을 목적으로 베제뤼봉 작전을 통해 덴마크노르웨이를 전격적으로 침략, 덴마크로부터 군 주둔권을 얻어내고 노르웨이 및 연합군과의 교전 끝에 노르웨이 전 영토를 장악했다.

이런 북해의 총성과 별개로, 1940년 5월 10일, 황색 작전을 통해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전면적으로 총공세에 돌입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낫질 계획에 따라 독일군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아르덴 산림 지대를 돌파하여 연합군의 주력 부대를 해안가로 포위하는데 성공했고, 이 일련의 돌파 작전으로 프랑스군 주력의 1/3과 영국의 대륙 원정군, 벨기에군, 네덜란드군이 모조리 괴멸당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영국군은 황급히 됭케르크에서의 철수 작전을 강행하여 대륙 원정군을 빼내왔지만, 그러는 동안 독일군은 텅 빈 프랑스 내륙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프랑스의 또 다른 주력 부대 중 1/3은 마지노선에서 독일 C집단군과 대치하여 움직이지 못해 독일군은 압도적인 숫적 우세와 화력, 제공권을 바탕으로 고속 진격을 거듭, 마침내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무저항 도시로 선포하고 후퇴, 6월 13일 파리에 독일군이 입성하였다. 그 직전인 6월 10일, 이탈리아가 독일에 가세하여 프랑스에 선전 포고했고 6월 17일, 프랑스의 새로운 총리로 선출된 앙리 필리프 페탱이 휴전을 제의, 6월 22일 프랑스와 독일간의 정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의 항복으로 고립된 영국은 내부의 소수 강화론을 묵살하고 결전을 천명했다. 노르웨이 패전으로 실각한 네빌 체임벌린을 대신하여 새로 전시 거국 내각의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은 결사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에 독일은 8월부터 대대적으로 영국 본토를 폭격, 사상 최대의 공중전이라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일어났다. 전세는 한때 독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으나, 독일측의 일부 미스와 영국 공군의 필사적인 반격으로 마침내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한편, 새로이 추축국에 가세한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영국령 이집트를 침공했지만 모두 참패하고 패퇴, 자국령까지 밀렸으며 지중해 제해권은 영국군의 타란토 공습으로 완전히 영국에게 넘어가 버렸다. 이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추축국에 가입하고 추축국들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다.

그리고 이 이후로 추축국은 점점 패퇴하기 시작한다.

1941년: 사상 최악의 전쟁, 동부 전선의 독소 전쟁[편집 | 원본 편집]

1941년 초, 영국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승승장구하여 이탈리아령 리비아 대부분을 석권하는 듯했지만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 북아프리카 군단이 참전하면서 다시 패퇴, 원래의 리비아-이집트 국경으로 후퇴했다. 뒤이어 4월에는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침략, 항복을 받아내고 이탈리아군이 고전하고 있던 그리스 전선에 개입, 발칸 전선을 종식시켰다.

1941년 6월 22일, 이 전쟁의 획기적 전환점이라고도 불리는 독소 전쟁이 발발했다. 독일군은 북부 핀란드 영토에서부터 남부 루마니아 국경에 이르는 긴 지역에서 일제히 전면적인 총공세,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했다. 불과 3달여 만에 독일군은 서부 러시아 대부분을 석권했고, 키예프, 스몰렌스크, 민스크 등지에서 대규모 포위 섬멸전을 소련군 수백 개 사단을 섬멸했으며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지속적 소모, 길어진 보급선, 러시아의 겨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진격이 크게 둔화되었고,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모스크바 사수를 선언하며 극동과 후방의 부대를 동원하고 새로운 부대를 신편하는 즉시 전선으로 내보내어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 독소전쟁은 장기화되었다.

한편, 태평양에서는 ABDA(America-Britain-Dutch-Australia) 포위망이 형성, 중일전쟁 중이던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하고 있었고, 일본은 이에 대한 타개책은 선전포고 없이 미국의 태평양 함대 기지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 태평양 함대를 반신불수로 만들어버리고(진주만 공습), 뒤이어 동남아시아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방 작전에 돌입한다. 이에 독일과 이탈리아와 호응하여 미국에 선전 포고하면서 마침내 미국이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1942년 : 전쟁의 전환점, 반격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동부 전선에서는 동계를 넘긴 독일군이 소련군의 두 반격(브야즈마 포켓 공격 및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완파해낸 뒤, 1942년 하계 공세인 블라우 작전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크림 반도의 소련군을 일소한 후 소련 남부 지역으로 초고속 진격을 단행, 카프카스와 스탈린그라드 양방향으로 공세를 펼쳤고, 독일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 도달하자, 소련군은 남부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을 사수하기 위해 투입 가능한 모든 전력을 긁어모으며 악명 높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소련군을 거의 밀어내며 시가지 대부분을 석권하였으나, 11월 10일 천왕성 작전을 발동하며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했다. 이에 독일군은 만슈타인이 이끄는 돈 집단군으로 포위망 돌파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종막으로 치달았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이 토보록 요새를 함락하고 이집트 깊숙히 위치한 엘 알라메인까지 치고 올라왔다. 영국군은 나일 강까지 후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윈스턴 처칠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현 위치를 사수하라고 강력히 지시했고, 독일군의 공세 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엘 알라메인에서 전선은 교착되었다. 이후 새로이 부임한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섣불리 공세에 나서지 않고 지원 받은 전략을 모아두었다가 일제히 공세를 개시, 10월에서 11월에 걸친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하고 리비아로 몰아냈다. 동시에 미영 연합군은 비시프랑스령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여 북아프리카 서부를 석권하고 아프리카의 추축군을 튀니지로 밀어넣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은 남방 작전으로 동남아시아를 석권하고 실론 해전으로 인도양의 제해권까지 장악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호주를 봉쇄하기 위해 포트 모르즈비를 점령하려던 것이 미국 해군의 반격으로 좌절되고(산호해 해전), 뒤이어 미 해군 항공모함을 모두 격침시킨다는 목적으로 행히진 미드웨이 해전에선 오히려 항공모함 4척을 잃는 대참패를 당했다. 뒤이어 호주에 대한 해상 수송로 봉쇄를 목적으로 진행된 과달카날 전투에서는 미군의 본격적인 반격을 받으며 귀중한 전력만 낭비한 채 패하였고, 미국은 차근차근히 태평양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1943년: 파시스트의 심장부를 향하여[편집 | 원본 편집]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결 직후, 독일군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대승으로 한숨을 돌렸으나 여전히 동부 전선의 균형추는 소련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후 양국은 거의 모든 전력을 쿠르스크 돌출부에 집중시켜, 7월 6일 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라는 쿠르스크 전투가 발발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독일군에게도 만만찮은 피해를 안기며 최종적으로는 독일군의 포위 시도를 저지해냈고, 동부 전선의 균형추를 확실하게 소련으로 가지고 온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미·영 연합군이 튀니지에서 추축군의 항복을 받아내어 전선을 종결시키고, 곧바로 시칠리아에 상륙 후 점령하고 이탈리아는 추축 동맹에서 이탈, 항복한다. 그러나 곧바로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해버리며 북부에 베니토 무솔리니를 수장으로 하는 괴뢰 살로 공화국을 건설했다. 연합군은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후 북진을 시작하며 이탈리아 전선이 새로이 형성된다.

태평양에서는 남양 군도의 각 주요 환초와 섬들을 대상으로 한 공략전이 시작되어 타라와와 같은 요충지들이 속속 미군에게 떨어졌다. 미군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일본 본토와 그 점령지 코앞까지 진공했다.

1944년: 해방과 자유의 해[편집 | 원본 편집]

1944년 6월 6일 새벽,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해안에 수천 여 척의 함정과 비행기가 배와 하늘을 뒤덮었다. 됭케르크 철수 이후 약 4년여 만에 연합군이 유럽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독일군은 국지적으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주력 대부분이 동부전선에 묶여 있어서 연합군의 상륙에 대대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상륙 3달 여 만인 8월 23일 마침내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해방되었다. 파리가 해방된 이후에도 연합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고 동쪽으로 향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독일은 마지막 전력을 긁어모아 아르덴 대공세를 펼쳐 잠시 동안이나마 연합군에 위기를 주었으나 이내 공세는 돈좌되었다.

동부 전선에선 소련군이 바르바로사 작전 3주년을 맞는 1944년 6월 22일바그라티온 작전을 발동, 동부 전선 전역에서 총공세에 돌입했다. 이 대규모 공세에 동부 전선의 독일군은 휩쓸려 나가 순식간에 무너졌고, 소련군은 삽시간에 벨로루시까지 탈환하고 구 폴란드 영토까지 진격했으며, 독일의 동맹국이던 핀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가 소련에 항복하고 추축국에 이탈하려는 헝가리가 독일에게 점령되었다.

태평양에서 미군은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으로 일본의 남은 해상 전력을 완전히 섬멸하고 태평양에서의 절대적인 제해권을 확보하였으며 뒤이어 괌과 사이판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 공습을 개시했다.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은 레이테 섬을 시작으로 필리핀 탈환전을 개시, 빠른 속도로 일본군을 격퇴했으며, 버마에서는 일본군의 임팔 작전이 대실패로 끝나, 영국군이 역으로 버마 탈환에 나섰다.

1945년: 신들의 황혼[편집 | 원본 편집]

해를 넘겨 계속된 아르덴 대공세는 마침내 연합군의 완승으로 끝났고, 서부전선 붕괴는 가속화되었다. 연합군은 이제 프랑스-독일 국경을 넘어 독일 영토로 진공했고, 이들 앞을 막아서는 독일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동부 전선에서도 소련군은 베를린을 향해 총공세를 펼쳤고, 마침내 4월 하순 베를린이 포위되었다. 전세를 되돌릴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는 4월 30일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권총 자살했고, 얼마 안 가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소련기가 내걸리며 베를린 전투가 종료되었다. 히틀러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해군 원수 및 신임 대통령 카를 되니츠5월 8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유럽의 전쟁이 끝났다.

태평양에서는 미군이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하고, 이오지마, 오키나와, 보르네오 등을 차례차례 점령했다. 계속되는 공습으로 일본 본토의 대도시들은 모두 초토화되었고, 대규모 기뢰 부설과 잠수함 작전으로 일본 본토의 물자난은 가중되었다.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군은 버마를 거의 탈환하고 태국 국경에까지 이르렀으며, 중국 전선에서도 약화된 일본군을 향해 중국군이 덤벼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항복을 거부하던 일본을 향해 미국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인류 최초의 핵공격을 단행했다. 동시에 8월 9일, 소련이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와 사할린에서 일본을 향해 공세를 시작하자 8월 15일 일본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전쟁이 끝났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권위주의의 극단화인 파시즘이라는 절대적 악의 근원을 격멸한 뒤 연합국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 제1세계와 소비에트 연방을 필두로 하는 제2세계로 분열되었다. 전쟁으로 완전히 그 힘을 잃고 식민 제국이 해체된 영국, 프랑스와 달리 그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전쟁 승리를 주도한 서방 진영의 리더 미국, 그리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독일을 격파하고 그 와중에 동유럽 전체를 세력권에 편입한 소련은 각각 자본 진영과 공산 진영의 맹주로 떠오르며 이후 40여년간 지속될 냉전의 주축이 된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는 대전으로 인한 피해와 부담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식민지들을 포기하였으며, 패전국 일본과 이탈리아의 식민지들은 자연적으로 모두 독립하였다. 승전국 측 열강들은 미국의 도움을 받으며 서방 중견국의 위치를 차지했지만,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고, 일본은 정규군 보유를 금지당하며 미국으로부터 엄격한 제약을 받았다. 비록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등의 아픔을 겪기도 했으나 일본 제국의 패망을 불러옴으로써 한국에게 일본 제국 치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결과를 주기도 한 전쟁이다.

한국은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긴 했지만 직후[1] 한반도에 주둔 중인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안정화를 명분 삼아 한반도 중앙을 관통하는 38선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각각 진주(進駐)하게 되었고, 제국주의가 종식되자마자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의 대립이 또다시 한반도에서 벌어지고야 말았다. 같은 추축국이었음에도 독일은 자국의 영토가 동서로 분단되었지만, 일본은 영토 분단이나 정치적 혼란은 거의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히려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했던 피해자인 한국이 오히려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독일 패배하여 유럽 전선이 정리된 이후인 1945년 2월 4일 개최된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의 상호 합의하에 미리 정해진 행동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