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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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Regno d'Italia
1861~1946
Flag of Italy (1861–1946).svg
국기
Coat of arms of the Kingdom of Italy (1890).svg
국장
나라 정보
수도 토리노(1861년~1865년)
피렌체(1865년~1871년)
로마(1871년~1946년)
공용어 이탈리아어
정부유형 입헌군주제(1861-1946)
다당제, 의원내각제(1861-1922, 1943-1946)
일당독재, 과두정(1922-1943)
군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초대)
움베르토 2세(마지막)
수상 카밀로 벤소(초대)
알치데 데 가스페리(마지막)
기타 정보
화폐 이탈리아 리라

이탈리아 왕국은 사르데냐 왕국이 양시칠리아 왕국 등을 병합하면서 설립된 통일왕국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이탈리아에서도 민족 통일 운동이 발흥했다. 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와의 통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중북부를 국민투표로 병합했다. 이후 가리발디가 양시칠리아 왕국을 점령하고 사르데냐 왕에 바치면서 이탈리아가 통일됐다. 이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인해 교황령 주둔 프랑스군이 떠난 틈을 타 로마의 교황령 대부분을 흡수하고 교황청을 폐지했다. 이후 급격한 공업화를 거쳤고 아프리카 쟁탈전 때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탈리아는 바로 아래에 있던 튀니지를 노리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이를 점령해버리자 악감정을 품고 프랑스의 적이었던 독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이탈리아는 소말리아 동부, 에리트레아를 점령하고 에티오피아도 정복하려했으나 참패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이겨 튀니지 바로 옆에 있던 리비아와 도데카니사 제도를 점령했다. 이러한 오스만 제국의 몰락은 제1·2차 발칸전쟁에 큰 영향을 줬다.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한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이후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 전역이 전쟁판이 되어버렸다. 이탈리아는 처음에 동맹관계를 무시하고 중립을 지켰으나 오스트리아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협상국이 이탈리아에 오스트리아 영토를 주겠다고 약속하자 이탈리아는 결국 오스트리아를 배신하고 협상국 측에 가담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큰 피해를 입었으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영토만을 얻었고 협상국 측에 악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후 혼란을 틈타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을 하게 됐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가톨릭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교황청을 되살렸고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이탈리아는 아예 독일과 밀착하기 시작하면서 양국간 관계가 악화되었다. 한편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고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다. 이탈리아는 전쟁 초기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될 처지에 놓이자 기회를 틈타 마침내 독일 편에 서서 참전했다. 이후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정복하고, 리비아를 통해 이집트를, 알바니아를 통해 그리스를 침공하는 등 전선을 막무가내로 넓혔으나 제대로 된 성공은 이루지 못했고 독일에 크게 의존해야했다. 이탈리아가 영국과 북아프리카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을 사이 연합군은 (비시)프랑스령 서아프리카를 해방시키고 이탈리아를 북아프리카에서 아예 몰아냈다. 연합군은 이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했고, 전쟁의 피해를 직접 느끼기 시작한 국민들은 반전주의로 급변해 베니토 무솔리니는 결국 사임해야했고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다. 연합군이 항복한 이탈리아를 통해 독일 남부를 공격할 것을 우려한 독일은 바로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해 로마를 점령하고는 이탈리아사회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하지만 독일의 몰락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고, 결국 이탈리아사회공화국은 멸망했고 독일은 항복했다. 국민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왕을 불신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왕이 들어섰지만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아서 결국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됐고 현재의 이탈리아 공화국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