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세디 Ghanaian Cedi 가니언 시디/세이디en[1] |
|||
---|---|---|---|
![]() |
|||
화폐 정보 | |||
사용국 |
![]() |
||
ISO | GHS (GHC) | ||
기호 | ₵, GH₵[2] | ||
보조단위 |
|
||
지폐 | ₵1, ₵2, ₵5, ₵10, ₵20, ₵50, ₵100, ₵200 | ||
동전 | 1p, 5p, 10p, 20p, 50p, ₵1, ₵2 | ||
중앙은행 | 가나은행 (Bank of Ghana) | ||
환율 | 120원/₵ (2023.01.09 기준) | ||
이전 화폐
가나 파운드 (1958 ~ 1965)
영국령 서아프리카 파운드 (~1958) |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가나에서 사용하는 통화. 단위명 "세디"는 토착어인 아칸어로 소라조개를 뜻하는데, 옛날 가나 지방에서 '세디'라 불리는 패화(貝貨)를 화폐로 썼던 것에서 유래한다. 1990년 이전에는 고정환율제, 그 이후에 변동환율제를 도입하였다.
환전 및 사용[편집 | 원본 편집]
한국에서는 가나 세디를 취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지에서 환전하여 사용해야 하는데, 달러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미국 달러를 들고가 환전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고 편리하다. ATM인출의 경우도, 기계가 있다는 한에선 이용하기 좋은 편.
문제는 그 반대인데, 세디를 달러로 교환하는 조건이 많이 까다롭기 때문에 남기게 되면 난감해진다. 일반적으로 가나를 포함한 서아프리카 지역에 단기여행을 떠나는 (혹은 단순 여행으로 방문하는) 한국인은 드물기에 별다른 이야기거리가 되지는 않으나, 장기 체류일지라도 가급적 나눠서 환전하거나 필요한 만큼을 ATM등으로 인출하여 사용할 것이 권장된다.
현지에서는 과거 최고액권이던 ₵50[3] 지폐가 상대적으로 보기 어려운 점만 제외하면 안 쓰이는 단위가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나, 2019년 현 시점에서는 전 권종이 고루 쓰이고, ₵5단위 미만은 푼돈 취급을 하고 있다. 10페세와 이하(약 25원 이하 가량)는 거의 유통되지 않는다.
가나는 서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그나마 치안이 좋은 쪽이나 무작정 안전하다고는 못할 환경이고[4], 외국인에게 바가지 요금을 강제로 씌우는 일이 잦으므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현지인을 필히 끼고 다니는 것이 좋다.
명목상 최소 거래액은 ₵0.01(1페세와)지만, 실질적으론 ₵1(1세디) 단위로 거래한다. 아무리 1세디 미만의 물건이라도 여러개 모아 1세디 묶음으로 만들어 내놓아 최대한 동전 거래를 회피하려 한다. (몰론 대형마트 같은 곳은 예외.) 정말로 1세디를 채울 수 없다면 보조단위를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개 0.1(=10페세와)까지만 쓰이지, 1페세와까지 세세하게 거래하려 하진 않는다.
환율 추이[편집 | 원본 편집]
2007년 개혁 이후 달러보다 높은 값($1.08/₵)을 자랑하던 세디는 2008년 미국발 쇼크로 1차 하락($0.60/₵), 2011년 유럽발 쇼크로 2차 하락($0.50/₵), 2013년 말부터 이어진 유가 및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아예 가나의 산업구조 자체가 직격탄을 맞아 외화를 탈탈 털리는 바람에, 그 반동으로 세디는 폭주($0.20~0.30/₵, 2017년 기준 $0.23/₵ = ₵4.3/US$)하고 만다. 가나 정부가 2012년 5월부터 개정 시행시킨 '세디화 우선 정책'(※시중은행에 외화예금/예치를 전면금지) 및 외화에 관한 관리가 까다로워진 것도 위 같은 배경상 줄줄 새는 외화를 막기 위함에서 비롯한다.
2022년은 가나 정부로선 대재앙의 해로, 그렇찮아도 기존 달러 빚이 막대한 상황에 뜬금없는 전쟁으로 세계가 들썩인 유래없는 강달러 현상이 나타나자 세금 원기옥을 통째로 던져도 이자조차 막기 버거워지면서 자연스레 세디화의 안정성이 붕괴하여 인플레이션이 50%대 마저 뚫어버렸다. 2018년 당시 ₵4.5(/US$), 2019년 ₵5.0~5.5, 2020~2021년 ₵5.5~6.1, 그리고 2022년 연초 ₵6.2로 시작한 것이 2월 사태를 기점으로 폭주하여 ₵7.5 ▶ ₵8.0(8월 초)으로, 8월 말에는 단숨에 ₵10를 돌파, 11월에는 ₵14도 단번에 뚫어버려,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2월에 오로지 빚만 갚으려는 목적으로 IMF 구제금융(30억 달러)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IMF가 그런 대출을 승인해줬기에 세디화의 무한 폭락 사태만은 막을 수 있었으나(▶ ₵9.0), 이듬해 2023년 연초에 다시 ₵10대를 넘기면서, 앞으로의 전망은 여전히 매우 어두움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행권 : 3기 세디 (GHS)[편집 | 원본 편집]
Ghana 3rd Cedi Series (2008~) | ||
---|---|---|
![]() |
![]() |
![]() |
₵1 아코솜보 댐 | ₵2 국회의사당 | ₵5 국립가나대학교 |
![]() |
![]() |
![]() |
₵10 가나은행 | ₵20 대법원 | ₵50 오수 성 |
![]() |
![]() |
![]() |
₵100 | ₵200 | 앞면 공통 |
- 2022년부로 두 저액권(₵1, ₵2)이 동전으로 대체되었다. 사유는 가치 저하로 인해 유통 수명이 빠르게 짧아져 교체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
구권 (유통중단)[편집 | 원본 편집]
구권의 통용 및 교환은 (마지막 권종 기준으로) 6개월의 교환 기간을 거친 후인 2008년에 최종 폐지되었다.
가나 파운드 & 1기 세디 (제 1 공화국)[편집 | 원본 편집]
1957년 3월 6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가나 정부는 우선 1958년에 은행용 수표 ₤1,000[5] 초두로 하여 기존 영국령 서아프리카 파운드의 교체를 목적으로 한 통용화를 발행하였다. 이후 1965년 7월 19일에 기존 영국식 비십진법 체계에서 10진법 체계로 변경시킨 세디화를 출범시켰고, 동시에 첫 자국 화폐 시리즈를 발행하여 2.4₵/₤[6] 교환비로 배포하였다.
- 동전은 4종(5p, 10p, 25p, 50p) 구성으로 발행하였다.
2기 세디[편집 | 원본 편집]
제 2 공화국 (1966~1979)[편집 | 원본 편집]
1966년 2월 24일에 콰메 은크루마가 잠시 중국을 방문하던 사이, 이매뉴얼 콰시 코토카(당시 대령)가 쿠데타(콜드촙 작전)를 일으켜 은크루마 정부를 전복시켰고, 쿠데타 의혹으로 쫓겨났던 조지프 아서 안크라(구 중장)를 군부 정권(안크라 군부)의 수장으로 앉혔다. 이후 안크라는 명분을 위해 1969년 콰메 은크루마의 라이벌이던 코피 아브레파 부시아를 총리직에[7], 1970년 (은크루마에게 찍혔었던 구 대법원장) 에드워드 아쿠포아도를 대통령직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당초부터 (독재 의혹 + 공산화 의혹을 사유로 한) 은크루마를 전면 부정하면서 세워진 정권이었던 까닭에, 일찍이 1967년 안크라 군부는 은행에도 강하게 입김을 넣어 은크루마가 들어간 화폐를 강제로 폐기시켰다. 그렇게 대체하여 나온 신 화폐는 마치 12진법→10진법 개혁을 다시 일으키는 듯한 괴이한 교환비(1.2세디 = 신 1세디, 당시 환율 (신권)₵0.98/USD)로 바꾸어 주었는데, 이 또한 은크루마의 정책을 정면 부인하기 위한 작업이 아닌가로 추정하고 있다. 그 부차적 부작용으로 세디화의 가치 또한 거의 동률로 하락(= 20%p 물가 상승)하게 된다.
하지만 1972년에 이그네이셔스 쿠투 아챔퐁이 안크라의 외부 뇌물수수 혐의(외환(外患))를 사유로 뿌리뽑기식 쿠데타를 일으켜 안크라 군부를 엎은 뒤 다시금 자신의 군부(아챔퐁 군부)를 세웠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새 화폐를 발행하였다. 다만 이 때는 동률(1:1)로 교환하여 모양만 바꾼 수준에 그쳤다. 다만 세디화 자체를 고평가로 유지하여, 환율은 ₵0.78/USD을 기록했다.
너무 잦은 쿠데타로 인해 반대의 반대에 또 반대를 하는 식의 군부 내 상대 파벌의 공격이 당연하듯 이어지자 1975년 아챔퐁은 (자신이 이끄는) 군부와 (허수아비로 세울) 민간정부의 연방형태라는 기묘한 정치형태로 타협하려 하였다. 그 속내를 파악한 시민들이 반발하였으나 무력 진압으로 찍어눌렀고, 내수 시장은 더욱 혼란스러워 지고 만다. 결국 가격 현실화를 위해 세디화 가치를 300% 인하(▶₵2.80/USD)해야만 했고, 이마저도 신용하지 못하는 내수 시장의 분위기가 더해져, 세디화의 실제 가치는 음지에서 조용히 추락하게 된다.
가나 2기 세디 1・2차 시리즈 (제 2 공화국) | ||||
---|---|---|---|---|
1차 ('66~'72) | 카카오 빈 방패와 검 |
(미발행) | 새 모양 나무조각 거북이, 물고기모양 나무조각 |
칼과 투구의 장식 조각상들 |
![]() |
![]() |
![]() | ||
₵1 | ₵2 | ₵5 | ₵10 | |
2차 ('72~'79) | ![]() |
![]() |
![]() |
![]() |
헤드폰을 쓴 소녀 카카오 농부 |
농부 할아버지 어부 아저씨들 |
초대형 모자 쓴 시장아줌마 라라방가 모스크 |
파이프 담배피는 할배 아코솜보 댐 |
제 3 공화국 (1979~1993)[편집 | 원본 편집]
1979년 6월, 공군 출신인 제리 롤링스가 부패한 기존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아챔퐁 군부가 무너졌다. 지금까지의 군부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려 했는지 즉시 수장 자리를 꿰차진 않았고, 정상적으로 국민 선거를 실시해 은크루마 정신 계승을 외치던 힐라 리만이 당선되어, 실질적 가나 역사상 첫 민정(제 3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 사이 롤링스는 군사혁명평의회를 그대로 이끌며, 끌어내려진 정적(政敵)과 암묵적 정적을 싸그리 잡아다 총살시키며 대규모 숙청 작업에 나섰다.
동시기에 경제의 안정화를 꾀한다며 매우 공격적인 화폐개혁을 시행했다. 동전과 계좌 금액 및 환율에 대해서는 일절 건드리지 않되 지폐 한정으로만 구 10세디 = 신 7세디[8]로 교환하는, 누가봐도 명백한 장롱털이가 진행되었다. 그 배경에는 유일한 밥줄이자 표벌이 수단이던 카카오 수출업마저 제1차 석유 파동발 불황과 경쟁자 증가로 인한 공급량 폭주 때문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던 부분에 있는데, 이를 무마하고자 가격 통제 카드[9]까지 꺼내버리자 가나 내수는 암시장으로 범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81년 숙청 과업을 끝낸 제리 롤링스는, 이번엔 힐라 리만이 부패를 일삼는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만든 정부를 향해 쿠데타를 일으켜 엎어버렸고, 이번엔 직접 그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그도 처음엔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하며 그 지주격인 소련에게도 지원을 요청하는 식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당시 국제정세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점차 자본주의식으로 선회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아마도 롤링스의 지시로) 가나 은행이 뜬금없는 ₵50 권종(최고액권, 약 US$1.50 미만)의 취급중단을 발표하였다. 본토에 주소지를 둔 가나 국적 내국인 한정으로 제한적 소액 교환 및 계좌 입금 등을 받아주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취급을 일절 거절하였고, 그 와중에도 대량 취급시에는 재원 출처를 철저히 묻는 등으로, 대놓고 장물업자를 겨냥한 정책이었다. 당시는 가뭄급으로 공급되는 귀금속이나 외화 말고는 별다른 대체통화 시스템이 전무하던 시대였기에 최고액권으로 보관하는 습성(?)을 노린 것으로, 이 정책으로 인해 외국인은 말 그대로 일제히 당했고, 현지 현금부자들과 해외 교민들까지 손해에 말려들었다. 은행은 일단 그런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한답시며 쿠폰을 일방적으로 발급하긴 했으나, 사후 보상을 진행하진 않았다. 결국 상당수의 ₵50 권종은 불쏘시개가 되었다.
가나 2기 세디 3차 시리즈 (제 3 공화국 1979 ~ 1982) | ||
---|---|---|
₵1 아저씨 | ₵2 책을 머리에 인 여학생 | ₵5 할아버지 |
![]() |
![]() |
![]() |
지푸라기로 생필품 만드는 아저씨 | 모내기하는 농부들 | 통나무 톱질하는 나무꾼 |
₵10 아줌마 | ₵20 광부 | ₵50 할아버지 |
![]() |
![]() |
![]() |
어부들 | 베틀로 켄테(Kente)[10]짜는 아저씨 | 카카오 수확하여 가공하는 사람들 |
이 사건으로 인해 결론적으로 현금 발행량이 급격히 쪼그라들었기에, 자연적 인플레이션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효과가 나오기는 하였다. 그러나 다음엔 (푼돈 밖에 안 할 지라도) ₵20 권종(※약 30¢ 정도)이 대상이 되거나 대대적인 물갈이가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으로 인해 현금 고갈 문제와 대내외 통화 신용도 추락은 피할 수 없었으며, 그 영향으로 기존 사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암시장은 물물교환만 통용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으며, 그 규모도 예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롤링스는 마치 극약을 때려부어서 처방하듯 대규모 구조조정과 민영화로 대응하였다. 그 과정에서 민심 악화 및 내부적 협박과 쿠데타 압박을 수도 없이 받았으나, 이게 대략 구제금융 받을 때 간섭받는 내용과 거의 판박이를 넘어 심화시킨 버전에 가까웠는지라, 미국을 비롯한 제 1 세계권으로부터 도리어 긍정적인 인상을 받아 지원을 끌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화폐가 물가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1983년 롤링스 정부는 기존 최고액권의 10배값인 ₵200(※약 US$3 정도)까지를 범위로 하는 신권 시리즈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세디화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80년대 끝자락으로 가서는 공식과 암시장 간 환율차가 40배 이상까지 벌어지면서 물가 폭등→환율 하락의 악순환으로 이어졌고, 이는 1986년 ₵500(※약 US$5 정도), 1991년 ₵1000(※약 US$3 정도), 그리고 1994년 ₵2000 및 ₵5000(※약 US$6 미만 정도)의 고액권 줄발행으로 대응되었다.
제 4 공화국 초기 (1994~2007)[편집 | 원본 편집]
비록 롤링스의 구조조정경제정책은 살을 깎는 고통을 수반하였으나, 그 태도를 무기로 확실하게 대외원조를 받아와 거시적 경제성장에는 보탬이 되었다. 그 지지도를 바탕으로 1992년 다당제 도입 전후로도 안정적인 정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고, 그러한 자신감 때문인지 고정환이던 세디화를 자본주의화의 절정인 변동환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 계기로 과평가된 세디화의 하락이 눈에 띄는 속도로 진행되었다. 1991년 신 ₵5 동전과 함께 저액권 4종(₵10, ₵20, ₵50, ₵100)[11]도 동전으로 전환하였고, 1996년에는 ₵200 및 ₵500을 동전으로 교체함과 동시에 ₵1,000(※약 60¢~70¢ 남짓) 이상의 고액권 3종의 실물크기를 작게 줄였다. 특히 2000년도에는 환율이 거의 100% 가까이(연초 ₵3,550/$ → 연말 ₵6,750/$) 뛰면서 유통시장에서 동전 자체가 사실상 퇴출되었다. 그렇지만 그 사이 내란이나 외환(外患)같은 사건사고가 터지지 않았던 덕에, 초인플레이션으로 분류하지는 않고 단순한 가격정상화 과정 정도로 평가된다.
2001년 롤링스는 임기 종료와 함께 순순히 물러났고, 차기 선거에서 당선된 존 쿠푸오르 또한 (비록 당파가 달라서 롤링스와 짧게 불화가 있긴 했지만) 기조를 이어받아, 1980년도 초반부터 모아온 원념의 원기옥이 성과를 이루듯, 가나 경제는 6%대의 고성장 대로를 타게 된다. 2002년에 신 고액권인 ₵10,000 및 ₵20,000(※한화 약 1500원 및 3000원 남짓)를 발행하여 안정적인 유통 범주를 굳혔고, 2007년 1/10000 규모 화폐개혁을 통해 다시금 독립 직후 당시의 통화가치(구₵9600 → 신₵0.96/USD)로 수복하게 된다.
가나 2기 세디 4차 시리즈 - 고액권 (제 4 공화국 시대) | ||
---|---|---|
₵1,000 다이아몬드 | ₵2,000 교각 | |
![]() |
![]() | |
카카오 농사꾼 | 뱃일꾼들 | |
₵5,000 가나의 문장 | ₵10,000 가나의 높으신 여섯명 (Big Six) | ₵20,000 에프라임 코쿠 아무 |
![]() |
![]() |
![]() |
가나 지도, 항구와 배 | 독립문 | 국립 극장 |
각주
- ↑ 미국 및 영국식 발음으로는 '세이디'지만, 가나 현지에서는 '시디(싀디)'에 가깝게 발음한다.
- ↑ 센트기호(¢)와는 기울기 차이밖에 없어서, 혼동하더라도 그려려니 여겨준다. (다만 이를 센트기호로 사용할 때는 구분이 필요하므로 GH¢라 써서 구분하고, 콜론기호(₡, 2줄긋기)나 유로기호(€, 가로긋기)와는 확연하게 구분한다.)
- ↑ 첫 발행 당시 환율가는 약 5만원으로, 가나에서는 제법 큰 돈이었다.
- ↑ 해 떨어지려 하면 아예 밖에 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줄 정도이다. 이는 거의 대부분의 서부, 동부, 중부 아프리카 국가가 다 그렇긴 하다만,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가나마저 이럴 정도.
- ↑ 중앙은행에서는 나중에 발행된 ₵1,000 수표권종과 함께 정식 화폐(Legal Tender)로서 취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홈페이지 내에서는 자료가 누락되어 있긴 하나, 세디화 소개자료의 결번으로 'GH-10'의 자리를 남겨두고 있기도 하다. 참고로 널리 참조되는 WPM카탈로그의 도감번호로는 P-9A.
- ↑ 1페세와 = 1페니(1세디 = 100페세와) → 1파운드 = 20실링 = 240페니(페세와) → 1파운드 = 2.4세디
- ↑ 이때는 총리가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있어서, 2공화국 시기를 '부시아 정권'으로 칭하기도 한다.
- ↑ 개혁의 명분 때문에 교체 당시의 공식 환율(₵2.80/USD)은 건드리지 않았으나, 이후 여러차례 개정 고시하면서 1983년까지 ₵30/USD으로 하락함.
- ↑ 리만도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했었다.
- ↑ 아칸족의 직물
- ↑ 1세디당 약 0.3¢ 정도.
북아프리카 | |
---|---|
세파(CFA) [1]시스템 | |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 |
남아프리카 |
|
동아프리카 | |
외화사용지역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