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구약성경 예언서의 한 권으로, 총 52장으로 되어 있다. 아나돗 지방에 거주하던 제사장 가문 출신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기록하였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예레미야는 아나돗 지방에 거주하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나돗은 제사장 아비아달의 고향인데, 그는 솔로몬 즉위시에 반대파를 지지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축출되었다. 즉 예레미야는 중심부 인물이 아니라, 주변부에 존재했던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던 것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요시야 13년)부터 기원전 587년(제데키야 11년)에 예루살렘에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함락될 때까지 신의 계시를 받아 전하였다. 요시야는 신의 뜻에 따라서 정의와 평화를 행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좋은 평가를 받는 왕이었기에, 예레미야는 그가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을 변호하며 공평과 정의를 행하였음을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서로 섬기고 사랑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며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야훼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를 완성하려는 욕망에 빠져서 타자를 억압하고 무시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기원전 609년 요시야가 이집트 네코 2세에게 살해당한 이후, 남유다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요시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여호아하스[1]는 왕에 오른 지 석 달만에 이집트에 포로로 끌려가고, 여호아하스의 형 여호야킴이 왕위에 오른다. [2] 여호야킴은 이 무렵에 이집트와 (신)바빌로니아가 서로 이스라엘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겨루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기원전 605년에 바빌로니아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팔레스타인 전역의 패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여호와킴은 당대에 지배층들이 백성들을 착취하고, 야훼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고 이방 신들을 숭배하는 죄를 범하는 상황에서 사태를 수습하지는 않고, 오히려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여 그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다. [3] 또한 이집트가 남유다에게 벌금을 매겨서 남유다를 착취하는 와중에도 남은 돈으로 자신의 왕궁을 커다랗게 짓는 일에 심취해 있었다.[4] 당연히 그의 치세에서는 사회 전반에 걸쳐 계급 갈등이 증폭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고통이 더욱 심화되었다.

기원전 597년 여호야킴이 죽은 뒤 그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르는데,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불안정함을 제압하려고 이 지역에 진군한 결과 여호야긴은 포로로 붙잡혀 바빌론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인 제데키야(시드기야)가 바지사장으로 왕위에 오른다. 제데키야는 주변 국가들과 연합하여 바빌론으로부터 독립하기를 꿈꾸지만, 네부카드네자르가 다시 진격하여 1년 6개월간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한 끝에 마침내 함락을 시킨다. 제데키야는 맹인이 된 채 포로로 잡혀가고, 아들들은 모두 제데키야 눈 앞에서 처형당하고, 성전과 왕궁은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다.

이런 시대 현실 속에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신의 심판과 멸망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내용[편집 | 원본 편집]

예레미야서의 전체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 1-25장: 예레미야에게 임한 신의 말씀과 계시. 예레미야의 설교들과 그의 고백이 실려 있다.
  • 26-45장: 여호야김으로부터 시드기야에 이르는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그 속에서 예레미야의 활동. 구체적인 역사와 시대 현실 속에서 예레미야가 선포한 내용과 그 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
  • 46-51장: 주변 국가들을 향해 예레미야가 선포한 신의 계시
  • 52장: 에필로그. 예루살렘 멸망과 다윗 왕국의 몰락 및 성전 파괴,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의 숫자, 여호야긴의 석방

주석[편집 | 원본 편집]

참고문헌: 김근주, 구약의 숲, 대장간, 2014, pp. 337-350.

각주

  1. 예레미아서에서는 살룸이라고도 부른다.
  2. 열왕기하 23:33~34 참조
  3. 열왕기하 25:4 참조
  4. 예레미아서 22:13~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