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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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贊翊. 이명은 박정일(濮精一)·박창익(朴昌益)·박순(濮純). 호는 남파(南坡).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4년 1월 2일 경기도 파주목 백석면 파주리 마산동(현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 마산마을)에서 반남 박씨 박봉서(朴鳳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정조 때 우의정을 지낸 충헌공 박종악(朴宗岳)의 6대손으로, 그의 집안은 명문 양반 가문이었지만 1880년대에는 쇠락하여 생계가 어려웠다. 그는 이런 생황에서 귀천을 따지지 말고 생업에 종사해야겠다고 판단하고, 1901년 부친의 허락을 받고 상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상공학교에서는 영어, 일본어와 기하, 대수학, 제도, 공작, 기계실습 등을 가르쳤다. 교사는 모두 일본인이었는데, 그는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우등상을 받기도 했다. 2학년 가을 상공학교 학생 전원이 '수학여행'이라는 구실로 경부선 철도 준설 공사에 동원되었는데, 이때 박찬익은 일본인 교사를 구타하는 바람에 퇴학당했다. 후일 그 교사가 파면된 후 복학하였지만, 다른 일본인 교사와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다시 퇴학당했다.

'남파 박찬익 전기 간행위원회'의 <남파 박찬익 실기>에는 박찬익이 퇴학 후 보안회에 가입하여 격문을 짓는 등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는 1907년 5월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원으로서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박찬익 전기에 따르면, 그는 노비를 풀어준 후 관서, 관북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민회 계열의 학교 설립 현황과 교육활동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여러 사람을 소개받아 한 장소에서 얼마씩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특별한 활동이 없었던 것을 볼 때, 서북 지방의 신민회 활동과 관련하여 정보교환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문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한성부로 돌아온 뒤 안창호의 추천을 받고 공업전습소에 입교하였고, 그해 8월 신민회 소속으로 창립된 청년학우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출되어 청년운동에 참여했다. 그해 9월 학생 127명을 회원으로 하고 신규식, 양기탁, 남궁억, 안창호, 김규식, 오세창 등 당시 유명인사 147명을 찬성원(후원자)으로 하는 공업연구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공업연구의 성과의 의견을 서로 교환하면서, 백성의 부와 국가의 부강을 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는 학회지 <공업계>에 '색채의 이(理)와 염료의 혼합법'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10년 3월 31일 공업전습소 염직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방직공작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 하였으나 설립 허가가 보류된 상황에서 한일병합을 목도했다. 이후 1910년 12월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안명근 등 신민회 활동 관련인물 160여 명을 검거하고, 그중 105명을 재판에 회부하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자행했다. 이때 박찬익은 파주에 내려가 있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민회가 해체되고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자, 그는 방직공장 설립을 단념하고 1911년 2월 만주 용정으로 망명했다. 망명 후 중국관립학교 교원으로 취직하였고, 이동춘, 이봉우 등과 함께 간민교육회 설립에 참여했다.

간민교육회는 본부를 국자가에 두고, 북간도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여 한인사회를 조직화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모범농촌활동을 전개하여 한인사회의 경제력 향상을 도모했다. 동명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학생 등을 동원하여 도로를 닦고, 깨끗한 우물을 파 위생시설을 갖추고,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운동도 전개했다. 또한 농촌에 식산회를 조직하여 생산, 판매, 소비조합 등을 운영하게 함으로써 농촌 경제의 향상을 도모했다. 그리고 1천여 호 이상의 한인이 거주하는 나자구에는 무관양성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건립하여 독립군 양성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간민교육회는 이동휘, 박찬익, 정재면, 이동춘 등 대표 4인을 베이징의 위안스카이 대총통에게 보내 혁명의 성공을 경축하는 동시에 지지와 원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한중 친선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북간도 한인사회에 간민자치회를 결성하겠다고 제의했다. 위안스카이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였지만, '자치'라는 단어는 삭제할 것을 요구했고, 간민교육회는 이를 따라 '간민회'를 결성하였다. 간민회는 북간도 한인사회의 헙법적인 결사로서 정부조직의 형태를 갖춘 자치기관 역할을 했다.

1911년 겨울, 박찬익은 중국 관헌의 허가를 얻어 화룡현 삼도구 청파동에 한인학교인 청일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펼쳤다. 또한 대종교에서도 정교라는 직책을 맡아, 중광단을 중심으로 종교활동을 펼쳤다. 일제는 대종교 세력이 만주에서 갈수록 커지는 걸 주목하고 중국 길림성 당국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길림성 당국은 1915년 11월 대종교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자 박찬익은 지기인 중국인 교육감의 소개로 길림성장 장쭤샹을 만나 대종교운동은 곧 한국의 독립운동임을 설득하여, 북간도 지역에서의 대종교 탄압을 중지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결국 만주를 떠나 상하이로 이동했다. 이휴 신규식, 조성환, 이동녕 등과 함께 대종교 상해서도본부를 주관하면서, 대종교의 민족정신을 한인 교포들에게 포교했다.

한편 신규식의 권유를 받아들어 중국 혁명가들과 교류를 위해 조직된 동제사에 가입했다. 두 사람은 국내에도 동제사 지부를 설치하기로 계획하였고, 1917년 신규식의 뜻을 받들어 국내에 잠입했다. 그는 국내에서 동제사에 호응할 국내 조직을 건설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으며, 일가 친척인 박영효에게 망명을 권유하였지만 실패했다. 1918년 신규식과 함께 쑨원을 만났고, 중국동맹회의 지도인물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중국 여러 무관학교에 한인 청년들을 입교시켜 후일 독립군 간부로 육성되게 하였다. 1919년 음력 1월 24일 길림에 있는 여준의 집에서 황상규, 김좌진, 손일민, 신규식 등과 독립운동 진로에 대해 토론하던 중, 독립의군부의 설립과 독립선언서 작성을 제안했다. 그 결과 음력 1월 27일 여준을 총재로 하여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고, 그는 총무 겸 외무로서 중국 측을 상대로 무기 구입 등 외교관계를 담당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독립의군부는 다음과 같은 5가지의 활동방향을 설정했다.

1. 상해에 길림대표를 파견하여 연락을 취할 것.


2. 마필과 무기를 구입할 것.

3. 내지 각처와 구미 각처에 선언서를 발송할 것.

4. 서북간도와 연해주에 긴밀한 연락을 취할 것.

5. 자금보집을 위하여 비밀리 국내에 인원을 파견할 것.

이후 이들은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지린, 상하이, 북간도, 서간도, 미주, 노령, 베이징 등지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사 39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선언서 발기인 명단에는 박찬익 역시 포함되었다. 이후 신규식의 비밀지령을 받아 서북간도, 노령 등지에 선언서를 배포하였고, 파리 강화 회의에도 "한국 민족은 한국의 독립을 원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국독립에 대한 지지를 청원했다. 대한독립의군부는 선언서 선포 이후 구성원 모두 각지로 흩어지면서 해소되었고, 박찬익은 조소앙, 정원택 등 핵심간부진과 함께 상하이로 향했다.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하였지만, 박찬익은 임시정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그 대신 중국 구국단과 연결하여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했으며, 1921년 3월 연설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후원회를 설립하여 자금조달을 돕는 등 임시정부를 간접적으로 도왔다. 그러다 1921년 4월 6일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에 선출되면서, 임시정부 멤버로 들어갔다.

한편 1919년 8월 7일 왕청현에서 정의단 단장 서일현천묵, 김좌진과 함께 대한군정부를 조직하여 교민들의 자치, 행정을 관할하며 무장활동을 전개했다. 박찬익은 상하이에 있으면서 대한군정부의 외교처장 직을 담당했닥. 그해 12월 대한군정부는 임시정부의 산하단체로 흡수되었어 대한군정서로 개칭되었다. 이는 임시정부의 '정부'와 대한군정부의 '정부가 중첩되어 2개의 정부가 존재한다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이 당시 서간도에는 서로군정서가 있었기에, 북간도의 대한군정서는 '북로군정서'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후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와 외무총장 박용만이 사직하자, 신규식이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을 맡았고 박찬익은 외무차장대리 겸 외사국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실무외교를 담당했다. 신규식은 쑨원 등 중국 국민당 요인들과 친교관계를 맺었지만, 중국어에 능통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중국어에 능통한 박찬익이 그를 보좌했다.

1921년 10월 3일, 박찬익은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제5회 간사회에서 서무간사로 선임되었다. 이후 11월 초 외교사절로서 광둥으로 떠나기 전까지 태평양회의, 만국교육대회, 세계신문대표자회의를 대상으로 한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외교활동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북양군벌을 중심으로 한 베이징 정부와 쑨원을 중심으로 한 광둥정부에 의해 둘로 갈려 심한 갈등을 빛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둥정부와 임시정부는 정치노선이 유사했기에 연대 가능성이 높았지만, 만주에 100만 이상의 한국 동포가 거주하고 있어서 베이징 정부 및 만주 군벌 장쭤린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광둥정부가 베이징 정부에 대항하여 쑨원을 대총통에 추대하였을 때, 신규식은 박찬익을 대동하여 총통취임식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임시정부는 의정원의 정식의결을 거쳐 신규식을 전권사절 특사로, 박찬익을 부사로, 민필호를 수행원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1921년 11월 대총통에 취임한 쑨원을 만나 5개조의 외교국서를 전달했다.

첫째, 한국임정은 중국호법정부를 중화민국 정통정부로 승인하며, 아울러 그 원수 및 국권을 존중한다.


둘째, 중국 호법정부는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한다.

셋째, 중국은 한국학생을 중화민국 각 군사학교에 수용할 것을 요청한다.

넷째, 500만원의 차관을 요청한다.

다섯째, 중국은 지서를 조차하여 한국독립군을 양성하는 수단으로 삼는데 동의할 것을 요청한다.

이때 광둥정부의 의회는 한국독립을 승인하였지만, 임시정부 승인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임시정부가 정식 승인받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이를 승인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중국 국민정부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다. 쑨원은 한인청년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키는 데 동의했으며,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중국대표에게 임정에서 파견한 대표와 긴밀한 연락을 갖고 한국독립문제에 대한 선전과 호소를 강화하도록 지시할 것도 약속했다. 또 임정 대표가 광둥에 상주하며 외교업무를 수행키로 합의하고, 이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은 중국 정부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박찬익은 임정의 '광둥주재대표'가 되었고, 1922년 2월 7일부터 특파교섭원의 자격으로 대중외교를 담당했다.

박찬익은 광둥주재대표로서 광둥정부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간 차원의 한중 우호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무렵 중국에서는 3.1 운동에 큰 감명을 받고 한인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대체로 광둥정부의 주요 지지기반이었기에, 박찬익은 이들과 친교를 맺고 한국독립을 위한 선전,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쑨원이 의탁하고 있던 광둥군벌 천중밍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1년도 안되어 중단되었다. 쑨원과 장제스 등 주요 인물들은 군벌군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거나 외국 조계로 피신했다. 이로 인해 광둥주재대표였던 박찬익 역시 1922년 5월 광둥을 떠나 상하이로 돌아가야 했다.

1925년 김좌진의 요청으로 다시 만주로 이동한 박찬익은 신민부 결성에 참여하여 외교부 대중전임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런데 1925년 6월 11일 장쭤린의 만주군벌과 일본군 사이에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일본에 넘기고, 독립군 활동을 금지하는" 내용의 삼시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로 인해 북만주 지역의 한국독립운동에 심각한 탄압이 가해졌다. 특히 1926년 장쭤샹의 명의로 대종교 포교 금지령이 또다시 내려졌다. 당시 베이징에 있던 박찬익은 길림으로 가 조성환 등과 함께 만주 군벌을 상대로 해금교섭을 진행했다. 그러나 1년여의 교섭에도 성과가 없자, 그는 난징으로 가서 중국 국민정부를 향해 삼시협정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마침 북벌을 추진하고 있던 중국 국민정부는 장쭤린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신민부에 연합을 제의했다. 이에 박찬익은 중국 국민당 만주지역 책임자인 공페이청을 만나, 반 장쭤린 투쟁에 관해 협의하고, 중국구국군의 제13군 총사령관인 양위이 부대와 제휴하는 데 성공했다.

1927년 8월 왕청현 석두하자에서 한중 합작회의가 개최되었다. 한국 측에서는 박찬익, 김좌진 등이 참여했고, 중국 측에서는 공페이청, 양위이, 그리고 3천여 명의 기병과 2만명의 군인을 거느린 악유진 등이 참여했다. 회의 결과 한중연합군이 조직되었고, 명칭은 중앙군 제8로군으로 정해졌다. 공페이청은 군자금과 무기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기밀이 누설되어 장쭤린 군대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박찬익의 노력은 무산되었다. 그래도 그의 노력이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어서, 1929년 대종교 포교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하지만 장쭤린의 뒤를 이어 만주군벌의 수장이 된 장쉐량 역시 1930년 토지조례와 입국조례를 공포하여 한인사회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독립운동과 일상생활 모두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에 1930년 10월, 임시정부는 '동삼성한교문제'라는 책자를 만들어 재만한인의 처지와 한국 독립운동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여 중국 국민당정부와 만주 군벌 및 중국 정계요인들에게 배포했다.

1930년 11월 난징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4차 집행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장쉐량이 난징에 왔을 때, 박찬익은 조소앙과함께 그를 찾아가 만주 한인들에 대한 억압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장쉐량은 적당한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회답했다. 그러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정부는 비공개적으로나마 한국독립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홍커우 공원 의거를 단행하자, 일본에 반감을 품고 있던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사건에 보복하기 위해 상하이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을 체포하려 했다. 이때 박찬익은 김구의 피신처를 물색하는 등 후속조치를 취했다. 이후 1933년 5월 난징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중국국민당 조직부장인 천궈푸와 박찬익의 주선으로 장제스와 김구의 회담이 이뤄졌다. 임시정부는 이 회담에서 중국 정부로부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중국 교육기관에서의 한인청년 교육,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가 지원 및 한인교포 보호 등을 확약받았다.

이에 따라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국인 간부 교육중대가 설치되어, 한인청년 100여 명이 교육받게 되었다. 교육비용 일체는 중국 측이 부담하였고, 교육을 담당할 책임교관은 한국 측이 맡기로 하였다. 또 중국 측에서는 임시정부에 매월 5,000원의 자금을 제공했는데, 초기에는 박찬익이 수령했고, 나중에는 안공근이 담당했다. 1933년 11월 박찬익이 일본군을 피해 아오먼에 피신했을 때, 당시 상하이 동북의용군 후원회장 왕바오전이 광둥으로 가는 도중 박찬익을 방문했다. 이때 박찬익의 주선으로 김구, 안공근과 함께 한중협회의 설립을 결의했다. 이리하여 종전의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한중조합동화의용군대회'라고 고쳐, 한중 합작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광둥에 본거지를 두고 김구, 왕바오전, 황밍탕이 위원으로서 동북의용군 후원기금을 모으는 데 힘썼다.

김구는 지청천 등 독립군 간부들을 뤄양군관학교 교관으로 초빙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박찬익은 1933년 5월 난징에서 한국독립군의 총무위원장인 이규채와 교섭했다. 훗날 일본경찰에 체포된 이규채가 일본 형사에게 진술한 내용에 다르면, 그는 박찬익에게 중국 정부나 김구에게 말하지 말고 군대 이동비용으로서 '개인 재산'을 달라고 요청했고, 박찬익은 그 돈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600원을 이규채에게 주었다고 한다. 박찬익의 이러한 노고로, 한국독립군 간부들은 중국군관학교 한인특별반 교관으로 부임하여 한인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935년 4월 9일 제1기생을 졸업시킨 뒤, 뤄양분관학교는 활동를 중단했다. 이에 대해 이규채는 모든 게 김구의 독단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구를 "윤봉길을 먹이로 삼아 큰 건방진 사람"이라 표현하며, 김구가 중국 측으로부터 신용을 얻은 것과 지청천 일파를 뤄양군관학교 교관으로 초빙한 것도 박찬익의 역량에 의한 것이었으나, 김구는 박찬익을 부하처럼 대우하고 뤄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을 자신이 설립했다고하는 등 혼자 모든 공적을 세운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이에 분개한 박찬익은 김구와 결별하였고, 지청천도 곧 김구에게 불만을 품고 교관직을 사임한 후 신한독립당을 창설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박찬익이 임시정부와 갈라선 데엔 김구와의 갈등 외에 다른 문제도 있었다. 1932년 5월 15일과 16일 양일에 걸쳐, 윤봉길 의거 후의 첫번째 국무회의가 항저우의 임시정부 임시판공처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외부로부터 받은 후원금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었다. 즉, 중국 조야로부터 임정에 보내진 성금의 행방, 대한교민단 정부위원장이 교민단에 보낸 돈의 행방, 상하이 시 상회로부터 윤봉길, 안창호 가족에게 보낸 생활보조비의 행방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 임시판공처 습격사건이 발발했다. 일의 발단은 중국 신문 <시사신보>에 일경에 체포된 안창호가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라는 내용의 투고가 올라온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투고를 한 사람이 한인청년단의 이사장이자 김철의 조카 김석으로 알려지자, 김구 측은 김철 일파가 7,000달러를 횡령했다는 소문을 듣고 있던 차에 더욱 분개하여 난징에 있던 박찬익을 통해 교민단의 이유필과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이후 5월 29일 박창세, 이동우, 안공근, 문일민 등이 항저우로 가서 김철, 조소앙, 김석을 힐난, 구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지금을 몰수했다.

이 사건이 대내외에 알려지면 중국의 임정에 대한 신용이 실추될 염려가 있었기에, 쟈씽에서 두 차례의 국무회의를 열어 박찬익, 엄항섭, 김두봉을 조사위원으로 선출했다. 일본 정보기록에 따르면, 김철, 조소앙 등은 윤봉길, 안창호 가족들의 생계비로 중국 측이 모금하여 준 7,000달러를 가지고 항저우로 가서 초호화 1류 호텔에서 먹고 마시면서 며칠 만에 거의 다 써버렸다고 한다. 박찬익이 직접 항저우에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뒤늦게 사람을 보내 뒤늦게 남은 돈을 압수했고, 이후 조사위원으로 선출되어 진상을 조사하기로 했는데, 그 결과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사건은 금전문제로 인해 임시정부 내부 분규가 심각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후 임정 운영은 파행을 거듭했으며, 대외교섭과 재정조달의 일을 맡아왔던 박찬익도 의혹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33년 1월 15일 한국독립당 간부직을 면직당했으며, 얼마 후 만주의 가족들을 장쑤성 봉현 석림진으로 이주시켜 2년간 생활비를 대준 것이 독립운동자금을 유용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한국독립당 간부들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결국 그는 1934년 김구 계열에서 이탈했다.

이후 박찬익은 몸이 쇠약해져 그간 알고 지냈던 중국인 정치가 후한민, 장롄즈, 천궈푸의 도움으로 쑤저우에서 은거했다. 1934년 경 일본측 정탐보고에 따르면, 박찬익은 신한독립당으로 가서 한국독립군 외교부장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한독립당은 당세가 미약했으므로 이름만 올려놓았을 뿐이고, 실질적인 업무는 담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건강을 회복한 후 쑤저우를 떠나 광둥성으로 가서 후한민의 소개로 중국국민당 광둥성의 고문직을 맡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창사로 피신했다. 이때 박찬익도 조소앙의 부탁을 받아들여 창사로 이동했지만, 김구 등 한국국민당 인사들과 만나지 않았다. 그의 전기에서는 "한번 맺힌 노여움이 쉽게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타협을 모르며, 먼저 머리를 숙이지 않는 그의 꼿꼿한 성격 때문"이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사실 김구가 임정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장제스와 회담한 뒤 중국정부의 재정 지원을 얻어냈기 때문이었는데, 그 회담을 주선하고 재정지원 교섭을 담당한 이가 바로 박찬익이었다. 그런데 김구는 문제가 발생하자 박찬익을 끝까지 믿어주지 않았고, 박찬익은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김구와 쉽사리 화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8월 17일, 김구,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의 한국국민당, 조소앙, 홍진 등의 재건한국독립당, 지청천, 유동열, 최동오, 현익철 등의 조선혁명당이 남목청에서 회당하여 3당 통합을 결의하고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했다. 이때 조선혁명당 소속 이운한이 갑자기 난입하여 총을 난사했다. 이로 인해 지청천은 가벼운 부상을 입고, 김구, 유동열은 중상을 입었으며, 현익철이 피살되었다.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임정은 1938년 7월 17일 창사를 떠나 광저우로 이전했다. 이때 박찬익은 이시영, 이동녕의 중재로 김구와 화해하고 다시 임정에 참여했다. 당시 박찬익 대신 대중교섭을 맡았던 안공근은 임정 지원자금을 유용하여 김구의 신임을 잃게 되었고, 박찬익이 그를 대신해 대중외교를 다시 전담하게 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국민정부를 따라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1939년 4월 쓰촨성 치쟝에 도착했다. 김구와 박찬익은 충칭에 숙소를 잡고, 중국정부와의 교섭에 진력했다.

당시 한국독립운동진영의 과제는 독립운동진영의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김원봉 등 좌익계열에서는 중국군사위원회의 후원 아래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라는 독자적인 군사조직을 결성했다. 김원부는 황푸군관학교 4기 졸업생으로, 중국군사위원회의 실무 간부들 중 수많은 동기생과 선후배가 있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어서 협상이 쉽지 않았다. 이외에도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의 여러 당이 중국과 개별적으로 교섭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 당국에서는 한국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을 종용했고, 한국 측 역시 통일, 단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김구, 박찬익, 김원봉은 같은 여관에 기거하며 통일에 대해 의논하여 1939년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광복진영 3당과 민족혁명당, 조선민족방동맹, 조선혁명전위동맹 등 좌익계열 들과 함께 한국혁명운동통일 7단체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의 이탈로 5당 회의로 축소되었고, 그나마도 민족혁명당과의 타협에 실패하여 통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통일회의의 실패는 큰 후유증을 가져왔다. 한인진영 내부의 자율적인 조정 능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엇고, 국민정부는 이에 실망하여 한인 세력에 대한 지원정책을 재검토했다. 즉, 앞으로는 좌익과 우익을 동등하게 지원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 의원의 증보선과 정부를 개조하는 일에 착수했다. 당시 임시의정원 의원 수는 34인에서 15인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에 1939년 10월 5차 내각을 출범시켜 한국국민당의 이동녕, 이시영, 김구, 차이석, 조성환, 송병조, 조완구 등 7인은 유임시키고, 조선혁명당의 지청천, 유동열, 한국독립당의 조소앙, 홍진 등 11인을 신임 국무위원으로 선임했다. 박찬익은 이때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었다. 이후 열린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군사행동을 하기에는 아직 실력이 부족하므로, 실력을 쌓을 때까지는 외교에 힘쓰기로 결정했다.

1940년 9월 임정은 지샹에서 충칭으로 옮겼다. 김구와 박찬익은 일본군 내의 한국인 사병을 빼내어 한국 광복군을 결성하여 항일전쟁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한국 광복군 창설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위원장 김구를 중심으로 박찬익, 지청천, 이범석, 유동열, 김학규, 조경한 등이 모여 한국 광복군 창설을 준비했다. 박찬익은 중국 문장이 뛰어났기 때문에, 중국 국민정부에 보내는 광복군 창설에 관한 의견서나 계획서, 정부공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이리하여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창설되었지만, 몇 가지 제약이 따랐다. 중국군사위원회는 자국 내에서 외국군이 활동하는 것에 우려가 컸기 때문에,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을 중국군 참모총장에게 위임한다는 내용의 <한국 광복군 9개 행동준승>의 동의를 요구했다. 김구와 박찬익은 중국의 지원이 절실했기에 어쩔 수 없이 요구에 응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임정 내부에 알려지면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아무리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처지라고 해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군대인 광복군을 중국군의 지휘 아래에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1943년 1월 2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임정은 박찬익, 조소앙, 김규식, 유동열, 조성환 등으로 분조회를 조직하게 하고, 9개 준승의 폐지 방안을 마련하게 했다. 그 결과 새로운 '한중호조군사협정' 방안을 마련하여 조소앙 김규식 등은 주로 중국정부를 상대로, 박찬익은 중국국민당 요인들을 상대로 교섭했다. 수십 차례의 교섭 끝에 1944년 9월 8일 9개 준승이 폐지되고, 한중호조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한편 1940년 10월 정기 의정원 회의에서는 전시체제로의 개편을 의결했다. 이때 4차 개헌으로 '주석 중심' 지도체제로 변경하면서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또한 박찬익을 비롯하여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송병조, 차이석 등 7인이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서 열린 국무위원회에서 각 국무위원의 부서를 결정하였는데, 박찬익은 법무부장 직을 맡았다. 외무부장 조소앙은 주로 중국 외교부와의 공식적인 관계 및 충칭 주재 외교사절과의 교섭을 담당했고, 김구가 국민당 요인들과의 교섭을 직접 담당할 때, 박찬익은 외교 실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1943년경 재정조달을 수행하던 그는 또다시 공금횡령 혐의에 휘말렸다. 다행히 중국 측 재정책임자인 주쟈화가 해명해 준 덕분에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러나 '김구 암살 음모 사건' 등 갖가지 분규가 계속되었고, 김구를 선두로 박찬익, 조완구, 이시영, 조성환, 황학수, 차이석 등 국무위원이 민족혁명당 인사들로부터 "완고파", "반통일파"로 지칭되며 한국독립운동진영의 통일과 단결에 반대된다는 공격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한꺼번에 사직서를 제출했다가 민족혁명당의 수습으로 한달 만에 복귀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족혁명당의 박찬익에 대한 공격은 마냥 무고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원봉은 박찬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독립운동을 한 역사가 오래되었고, 조완구와 매우 친하여 탄복할 만하지만, 연령이 이미 높고 혁명운동 방법을 여전히 외교로 기회를 보아 기교를 취하자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구체적 계획은 없어 한인들을 영도하기에 부족하다.

- 추헌수, <자료한국독립운동> 2, p.231~232.

임시정부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김의한의 아들 김자동 씨 역시 오영섭 씨와의 면담에서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박찬익은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라고 부르며 매우 싫어하여,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을 혐오했다.

박찬익의 전기에서는 독립운동진영의 통일에 힘써왔던 박찬익을 공격하는 민족혁명당의 행동이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기술되었지만, 이러한 증언들이 있는 것을 볼 때 박찬익 본인이 민족혁명당과의 타협을 저해한 부분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를 혐오하는 성향은 그 자신이 1940년 8월 25일 <한민> 잡지 제3, 4호에 기고한 <삼당통일흥중한문서>라는 제목의 중문 한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애국계몽운동시기부터 1940년 여름까지의 독립운동 상황을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중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러시아의 한인공산당이 (중략) 마지막에는 주의, 주장이 다른 까닭으로, 어떤 때는 전일(戰一)로, 어떤 때는 조합으로, 소위 '민족주의계'의 혁명동지들은 오로지 전 민족적 대통일의 조기 완성을 위해 피동적 지위에서 그 ㅇ[1]을 맡고, 정신병자의 조리없는 행동에 ㅇ[2]을 발휘하여 분열되지 않고 참고 견딘 것이 10여년이었다.

'정신병자의 조리없는 행동'이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봉니다. 박찬익은 혁명역량을 모아 조국을 광복시키는 걸 달성하길 바랬으나, 사회주의자들이 일을 그르치기 일쑤였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자들은 10여년간 참아왔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박찬익은 사회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식민지 상태에 있는 국가에서는 민족모순이 계급모순을 우선한다는 것, 계급혁명이 민족혁명을 파괴한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사회주의자들 역시 박찬익을 김구, 조완구 등과 함께 '민족파시스트'로 매도하고, '반통일파'로 지목하며 이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공격했다. 양측이 이처럼 극렬하게 대립했기에, 한국독립운동 세력은 임정으로의 단결과 통일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박찬익은 광복군 창설에 일익을 담당한 것 외에도 임정의 유지비와 공작금으로서 총 9억원을 중국정부로부터 지원받았으며, 한국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게 나눠줄 배급미인 평가미(平價米)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1944년 4월, 임정은 헌법을 개정하여 김구 중심의 주석, 부조석 체제를 갖추고 좌우가 합작하여 5당 통일에 성공했다. 이때 박찬익은 법무부장 직을 사퇴하고, 무임소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전시내각의 중책을 수행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헀다.

광복 후 임정 요인들이 귀국을 준비하는 동안, 박찬익은 그간의 중국 정부와의 교섭 경험을 토대로 1945년 10월 15일 주화한교선무단(駐華韓僑宣撫團)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다. 주화한교선무단은 화북, 화중, 화남에 선무단을 설치하고 한인들의 귀국을 도왔다. 그는 한국독립당 중국 총지부의 집행위원장을 겸하면서, 1948년 8월 10일까지 약 2년 10개월간 400만에 달하는 한인 교민들의 현황 파악, 보호, 처우개선, 농자금의 임대, 송환, 진학, 재산처리, 범법한인 문제, 그리고 한국 광복군의 훈련 및 귀국문제를 주관했다. 또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대두되자, 그는 국내의 김구, 이승만 등이 주도한 반탁운동에 가담하여 중국 정부에 신탁통치 반대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1946년 가족과 함께 심양으로 이동하였는데, 1947년 만주가 중국 공산군에게 장악될 위기에 몰리자 한인군대를 조직하여 공산군에 맞서기로 하고 국민정부의 승인을 받아낸 뒤 동북행영 장연지구에 보병독립총대를 설치하고 셋째 아들 박영준을 부총대장으로 삼았다. 이후 김구와 이승만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두 사람을 중재하여 서로 화해할 것을 권고했으나 거절당했다. 1948년 1월 김구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한 정권과 협상할 뜻을 밝히자, 박찬익은 극렬 반대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의 평양행을 막기 위해 인천 월미도로 급거 귀국하여 곧장 김구가 있는 경교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김구는 이미 평양으로 떠난 뒤여서 만날 수 없었다. 5월 김구가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오자, 박찬익은 김구에게 잠정 은퇴를 권했다. 잠시 냉각기를 가져서 들끓어오른 여론이 식기를 기다린 뒤, 이승만과 합작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구의 측근들이 거센 반대를 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9년 3월 9일, 박찬익은 서울 창신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끝내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정식 정부로 인정받지 못한 것에 깊은 죄책감을 느꼈고, 이봉창, 윤봉길 등을 모신 효창공원의 독립운공가 묘지에 묻힐 자격도 없다고 여겼다. 그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조용히 매장되길 희망했고, 유족은 유언을 따라 그의 유해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찬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 11월 19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임정요인 묘역으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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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글자 파손
  2. 글자 파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