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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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秉祚. 호는 신암(新巖).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7년 12월 23일 평안도 용천도호부 양하면 신창동(현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에서 송재홍(宋再弘)의 3남 3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드넓은 토지를 보유한 부농이었지만, 송병조가 장가를 들기 전에 사망했고 큰 형이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두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그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집안의 남성으로서 두 형의 가솔들을 책임져야 했고, 이 때문에 일찍부터 상업에 종사했다. 송병조의 아들 송성찬의 저서 <흔적>에 따르면, 송병조는 무역중개업에 관여하여 샌프란시스코까지 다녀왔지만 눈병으로 상륙할 수 없어 커다란 낭패에 처했다가 베트남에 들러 물건을 위탁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송병조는 상업에 종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은 일찍이 기독교가 들어와 확산되었고, 그의 고향인 평북 용천은 중국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여타 지역에 비해 개방적이었고 교회의 수가 수십 곳에 이를 정도로 장로교의 위세가 대단했다. 송병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기독교에 입문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후일에 그가 상하이에서 흥사단에 입단하면서 작성한 <흥사단 단우 이력서>에는 1905년 신창동교회에서 조사(助事) 활동을 했다고 기록한 것을 볼 때 1900년 전후로 기독교에 입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송병조는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5년간 재학하면서 이승훈, 함태영, 유여대, 강규찬, 김병조, 조상섭, 이원익, 장덕로 등과 교제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송병조는 이후 용천군 신창동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활동을 시작했고 신창동 교회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는 동상동 교회와 신서동 교회까지 돌봤다.

송병조는 1919년 3.1 운동을 추진하던 이들로부터 민족대표로 거론되었다고 한다. 한국국민당에서 발행한 기관지 <한민> 1937년 3월 1일자 기사에 따르면, 송병조는 평안북도를 대표하는 민족대표로 이승훈, 양전백, 유여대와 함께 거론되었지만 서명을 받으러 다니던 인사가 용천에 오지 못하는 사정이 생겼고 김병조 목사가 대신 서명했다고 한다. 송병조는 용천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에 가담해 3월 4일 양시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그날 시위 참가자는 5천 명이었고, 시위는 밤에도 계속되다가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20여 명을 체포되자 해산되었다.

이후 평얀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기독교 장로회 인사들을 모아 대한국민회를 결성한 그는 대한국민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총무 박승명, 서기 김흥건 등과 함께 다수의 군중을 인솔해 거리로 나가 망국의 설움과 식민치하의 억압에 대한 항거를 목적으로 통곡식을 거행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통곡식을 거행하는 취지문으로 <경고(警告)>를 작성하고 이를 평양 시내 및 각처에 배포했으며, 거사일을 1919년 11월 7일 정오로 잠았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사전에 탐지해 감시를 삼엄하게 하자, 결국 그는 계획을 중단했다.

송병조는 또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했다. 이 조직은 임시정부의 연통제, 교통국과 연계하여 국내 국민들에 대한 선전 및 독립운동 자금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신의주에서 압록강 건너 맞은 편에 있는 도시인 중국 안동으로 건너간 그는 임시정부 재무부로부터 재무부 참사로 선임되었고 안동의 교통사무국에서 근무했다. 그는 그곳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상당량의 금액을 확보해 임시정부로 발송했다.

송병조는 재정 업무와 더불어 정보 활동도 전개했다. 1920년 3월 연통제, 교통국, 조사원, 특파원 등의 활동을 총괄하는 정보기구인 지방선전부가 발족되었을 때, 그는 중간 거점의 총책임자 격인 선전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인물 소개와 선전대원 간의 접촉 연계, 선전물의 관리 등을 담당했다. 그러나 1920년 4월 국내에서 선전물을 배포하던 이종욱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안동을 거점으로 삼아 국내에 전개하던 임시정부의 활동이 일제에게 발각되었고, 일제는 교통사무국이 위치한 이륭양행을 감시했다. 이에 송병조는 1920년 7월경 안동을 떠나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로 망명한 송병조는 여러 단체에 관여하며 활동했다. 그가 처음으로 참여한 단체는 상해교민단이었다. 상해교민단은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단결과 친선을 도모하는 단체이자 자치기관으로, 교육기관으로 인성학교를 운영했고 지방의회의 역할을 대신해 임시의정원의 의원을 선출했다. 송병조는 상해교민단 내에서 의사회 의사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으며, 인성학교유지회의 회장을 담당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등 인성학교의 유지, 운영에도 관여했다.

또한 그는 상해교회에서 목사로 사역했다. 그는 사역 초기 처리위원으로서 시무하며 담임목사인 김병조와 함께 교회의 체계를 완비하고 대내외적인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일조했다. 1923년 김병조가 만주로 떠나자 담임 목사직을 이어받아 1933년 상하이를 떠나기 전까지 운영을 맡았다. 그는 이같은 활동을 전개하면서 차츰 상하이의 한인 사회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송병조는 자신의 직책을 활용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1921년 3월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가 결성되어 기독교 조직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송병조는 진정회에서 평양신학교 동문이기도 한 김인전, 조상섭 등과 함께 서기로 선임되었다. 이어 진정회는 1922년 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송병조, 김병조, 조상섭, 손정도, 김인전 등을 '조선예수교대표회'의 명의로서 파견해 한민족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기로 했다.

사실 진정회가 극동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한 것은 임시정부 내부의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파벌은 1921년에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서북파는 소련에 대한 연계를 고려하고 진정회를 설득해 극동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하지만 소련은 일제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에 대표단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와야 했다.

1924년 5월, 송병조는 이유필, 조상섭, 선우혁 등과 함께 흥사단에 입단하고 그해 7월 미국으로 향하는 안창호를 대신해 흥사단 원동위원부 지도부로 활동했다. 그는 1926년 12월 위원장 직을 대신했고, 1932년 4월 안창호가 일제에게 체포되자 단원 연석회의를 소집해 단원들의 일층 단결을 호소하고 의무를 소홀히하지 않고 사업을 지속해 나갈 것을 결의했다.

1925년 2월, 송병조는 미주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 결의에 참여했고, 헌법이 개정되어 국무령 체제로 전환된 뒤 1926년 2월 19일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무령 선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925년 7월 이상룡을 선임했지만 1926년 2월 18일에 사임해 버렸고, 뒤이어 양기탁과 안창호가 국무령에 추대되었지만 그들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자진 사퇴했다. 이렇듯 국무령이 유명무실한 상황에서, 의장 최창식이 국무령 대리를 맡다가 1926년 6월 송병조가 의장 대리와 국무령 대리직을 담당했고, 8월에 홍진이 국무령에 취임하자 정식으로 의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송병조는 1926년 11월 정기의회에서 의장직을 사퇴했다. 그가 의장에서 물러난 까닭은 임시헌법을 개헌해야 하는 부담감이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독립운동전선에서는 유일당 운동에 대한 기대가 컸고, 임시정부는 이에 맞춰 헌법과 정부체제를 개정해야 했다. 여기에 홍진이 국무령에 부임한 지 4개월 만에 사임하면서 송병조에게 가해지는 부담감이 컸다. 이에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후임으로 이동녕을 추천했다.

그 후 송병조는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기로 하고 의원직까지 사퇴하고 상하이에서 유일당의 실제적 결성을 위한 연설회나 단체결성 활동을 전개하는 등 임시정부 외곽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던 1932년 4월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를 벌이자, 일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와 난징으로 피신했고, 송병조 역시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떠났다.

송병조는 중일전쟁을 단행한 일본군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임시정부와 함께 항저우(1932), 진강(1935), 창사(1937), 광둥(1938), 류저우(1938), 기강(1939), 충칭(1940)으로 연이어 옮겨다니면서 풍찬노숙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3년 3월 6일,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뒤이어 21일에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재무부 주무원으로 호선되었으며, 6월 21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주석에 선출되어 회의를 주재했다. 당시 중국국민당으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아 임시정부를 운영하던 김구가 1933년 이후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송병조가 대신에 재무부를 담당해 재정마련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혼란을 겪자, 대한인국민회에서는 “임시정부가 현재와 같이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는 것을 유감이라 하여 재미한인동포로부터 모집한 의무금은 확실한 단체가 조직되기까지 송금하지 않겠다”는 통신을 보내왔다. 송병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지에 재무행서를 두어 직원을 임명하고 그에게 임시정부로 수입될 재정에 관한 업무를 위탁하는 제도인 재무부행서(財務部行署) 제도를 수립했고, 미주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의 정상화를 약속하며 기부금을 보내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그는 1935년 11월 하와이 동지회를 이끌고 있던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재정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에 동지회는 임시정부에게 인구세를 보냈고, 이는 임시정부가 살림을 유지,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반 임시정부 성향을 보이던 동지회는 1936년 6월경부터 임시정부를 적극 도우겠다는 지지선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에게 상당량의 재정지원금을 보냈다.

1934년 1월, 진강에서 제26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다. 송병조는 이 회의에서 미주대표의원으로 참가했고, 같은 날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폐지 논란이 불거지고 있던 임시정부를 사수하고자 평소 사이가 매우 좋지 않던[1] 김구와 협의했다. 이 협의는 1935년 10월 항저우에서 개최된 제2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구체화되었다. 송병조는 김구,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여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임시정부를 뒷받침하기로 했고, 이동녕, 조완구, 차이석, 김붕준, 안공근, 엄항섭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송병조는 한국국민당을 창당한 이후 우익진영의 연합을 모색하였다. 1937년 7월 초 반 민족혁명당 세력의 대표자들과 협의를 시작하였다. 재건한국독립당의 홍진, 조선혁명당의 지청천과 함께 3당 합당 및 임시정부 옹호 문제를 논의하고 큰 틀에서 합의를 이루었다. 그 후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3당과 미주의 6개 단체 연하체로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민족혁명당에 대항했다.[2]

1939년 10월, 송병조는 1934년 1월 이래 6년간 재임했던 임시의원 의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같은 달 23일 기강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김구, 차이석, 이동녕, 홍진, 조완구, 조소앙, 지청천 등과 함께 재선임되었다. 이후 중국 정부와의 외교 교섭에 참여했고 1940년 9월 충칭에서 대한광복군을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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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충칭에서 거행된 송병조의 장례식.

그 후 1941년 10월 15일 김붕준의 후임으로 다시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했고,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고문, 회계검사원장등으로 재직하다가 1942년 2월 25일 신병을 이기지 못하고 서거했다. 향년 64세. 그의 유해는 충칭에 안장되었다가 해방 후 국내로 이송되었고 1971년 10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송병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

  1. 송병조는 김구아나키스트들을 사주하여 일제에 대한 공격 뿐만 아니라 같은 독립운동가까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격한다고 여겨 매우 불신했다. 이러한 불신은 옥관빈 피살사건 이후 굳어졌다.
  2. 좌익세력은 이에 맞서 1937년 11월에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을 중심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