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택 (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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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元澤. 자는 윤장(允長), 호는 지산(志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0년 9월 27일 충청도 연풍현 수회면 주막동(현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수회리)에서 아버지 정운한(鄭雲漢)과 어머니 광산 김씨 김규현(金奎鉉)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0년경 대종교에 입교했고, 1912년 베이징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고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신규식이 운영하던 박달학원에 입학하여 반년 만에 수료했다. 또한 그는 안중근 의사의 추도식에 참여해 다음과 같은 시를 바쳤다.

하얼빈역의 소소히 부는 새풍,


눈 부릅뜨고 현량에 이르니 더 늦는구나.

번갯불 세번 번뜩하여 적을 거꾸려뜨리니

이때가 바로 장부의 의기를 펼칠 때로구나.

1914년 10월, 정원택은 홍명희, 김진용, 김덕진과 의논한 뒤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산타항을 거쳐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3년간 말레이시아, 태국 등을 오가며 고무농장을 경영하면서 자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1917년 고무농장을 팔고 홍콩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 뒤 부산으로 가려 했다가 검문에 걸려 소장품을 탈취당하고 부산에 도착한 뒤 고향에 돌아와 쉬던 중 김덕진과 만주 개척 사업에 대해 토론하고 만주로 가서 만주인 종지근이 지주로 있는 개척사업을 계약했다.

1918년 만주로 가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할 김규식 등 한국 대표 사절단의 자금을 간도, 노령에서 인수하여 전달했으며, 봉천성에서 경찰에 감금된 조소앙을 구했다. 1918년 6월 신규식으로부터 밀서를 받은 뒤 지린성으로 가서 박찬익을 찾아가 밀지를 전했다.

이후 지린성의 동문밖 외딴곳의 도관(道館·도교 사원)에 머물고 있던 조소앙을 찾아가 신규식의 밀서를 전달하며 독립운동을 함께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당시 만주에서 독립운동세력 간의 분열과 갈등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조소앙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서간도로부터 여기 올 때에 결의한 바가 있었소. 앞으로는 도관에 잠적하여 세상사에 간섭하지 않으며 사람과 논쟁하지 않고, 다만 홀로 수양하기를 결심하였으니 나를 내버려두시오.

이에 정원택이 설득했다.

나나 선생이나 그 밖의 여러 동지들이 국치(國恥) 후에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만리절역(萬里絶域)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달게 받고 있음은 모두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말에 따라 시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었소. 이제 서방의 전우(戰雨)가 처음 개고 파리에서 평화가 열리게 되어 약소민족이 자결을 고창(高唱)하니, 일은 비록 미비하나 때는 왔소. 일의 성패를 계산하지 말고 한 번 궐기하여 대호(大呼)할 기회라. 이 기회를 놓치고 어느 때를 기다리리까. 잠적 수도는 늙어서도 늦지 않소.

그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조소앙은 그와 함께 박찬익이 머물고 있는 객잔에서 함께 만난 뒤 지린성 북문 바깥에 머물고 있던 여준을 찾아가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했다. 이후 이들은 동지를 규합한 뒤 1919년 2월 27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여준이 총재에 추대되었고, 총무 겸 외무에 박찬익, 재무에 황상규, 군무에 김좌진, 서무에 정원택, 그리고 선전 겸 연락에 정운해 등이 피선되었다. 또한 상하이에 파견할 지린 대표로는 조소앙이 선정되었다.

이후 무오독립선언서 인쇄 및 발송 작업을 맡은 그는 4천부를 석판으로 인쇄하여 북간도와 러시아령 구미 각국 및 북경, 상해와 국내에 발송하고 76자 전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원조를 소청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상하이로 가서 이동녕과 함께 지린성의 상황을 전하고 국내에서 새로 온 청년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가르쳤다. 1919년 4월 제1차 의정원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로서 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신규식의 밀서를 지니고 국내로 잠입해 서울에 거주하던 정두화(鄭斗和)를 찾아 자금 조달을 원조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귀국 도중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2월 출옥한 그는 고향으로 내려간 뒤 일제의 감시에 시달려 독립운동을 더이상 꾀하지 못하고 거처를 불정면 지장리로 옮겨 후학을 양성하다 8.15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임정환영위원회 고문을 맡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감찰위원장을 제의받았지만 사양하고 정인보를 추천했다. 이후 광복회원 및 대종교 총전교로 활동하다 1971년 11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원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사후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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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