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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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載冕. 본명은 정병태(鄭秉泰), 호는 벽거(碧居)·일광(一光)·우산(雨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2년 2월 14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부친 정학전(鄭學篆)과 모친 김성약(金聖約)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개신교 신자였고, 그 역시 부모의 뒤를 따라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900년에 평남 순안의 측량기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고 1903년에 상경하여 한국 민족운동의 요람인 상동교회에서 최병헌 목사와 전덕기 전도사를 만났다. 정재면은 독립을 위해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최병헌 목사의 설교에 공감했고, 전덕기로부터 민족운동을 목회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1903년 상동교회 내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에서 주시경, 남궁억, 현순, 전덕기 등에게 수학하며 기독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근대학문을 익혔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상동교회의 전덕기, 정순만은 전국 각지 청년회 대표들과 함께 구국기도회를 개최했다. 이때 정재면은 이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진남포 감리교회 청년회 총무 김구,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준, 신민회 주동인물 조성환, 이동녕 등과 교제했다.

1907년 신민회가 결성되자, 정재면은 자연스럽게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해 12월 정재면은 신민회 파송으로 원산 보광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복음에 기초한 교육구국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1908년 봄, 신민회 함경지방 책임자 이동휘이동녕의 제안으로 북간도 용정의 서전서숙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북간도 교육단을 조직하여 용정에 도착했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매각한 상태였다.

이에 정재면은 용정 기독교서회를 중심으로 전도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서전서숙의 정신을 계승한 김약연의 명동학교의 교사로 초빙 받았다. 정재면은 명동학교로 부임하면서 김약연에게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때 정재면이 김약연에게 전한 복음은 예수운동이 곧 독립운동이며 교회가 독립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내용이었다.

정재면이 전한 복음과 그가 제시한 조건을 명동촌 지도자들과 며칠을 두고 심사숙고한 끝에 받아들인 김약연은 1909년 5~6월경 명동촌에 명동교회를 세웠고 명동학교에 성경과를 설치하였다. 정재면의 부임으로 명동학교의 교장은 김약연, 교감은 정재면, 재정은 문치정이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명동학교는 '신(信)', '망(望)', '애(愛)'의 기독정신을 토대로 민족교육을 시행하게 되었다.

1910년 명동학교에는 3년제 중학부가 증설되었고, 1911년 3월에는 이동휘가 명동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개최하면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여학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에 정신태, 이의순(이동휘의 차녀), 우봉순 등 여교원이 초빙되었고 여성을 위한 근대식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명동학교의 여학부는 한인의 중국 이주 역사에 첫 여성 교육터가 되었다. 또한 본래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김약연은 정재면의 포교에 설복되어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김약연과 함께 명동학교 학생, 명동교회 교인, 명동촌의 주민들 중심으로 기독전도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과 교육운동을 전개했으며, 기독교계 학교를 위한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교과서를 편수하여 항일구국의 민족교육운동을 실시했다. 정재면은 1911년부터 1914년까지 3년간 70여 처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그 중 학교와 교회가 병합하여 설립된 곳은 36처였다. 그는 전도와 사회교육을 함께 실시하여 교회조직을 기반으로 한인 사회의 안정적 통합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1912년 김약연, 이동휘, 계봉우 등 북간도 교회대표 16명 명의로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 간도지역의 의료기관, 중등교육기관, 교회 설립과 전도사업 확장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2년에 제출했고 이에 따라 용정에 캐나다장로교 선교부가 설립되었다. 신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캐나다 선교부 파송 선교사들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이로 인해 명신여학교와 제창병원이 설립되었다. 특히 제창병원은 독립군의 피난처가 되었다.

1913년 정재면은 용정교회 장로로 장립한 후 주일학교와 학무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15년 4월에 간도지방 전도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용정교회 전도사로서 정재면은 독립운동을 위해 북간도에 소재한 모든 교회를 조직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18년 11월 13일 그는 김약연, 강봉우, 김영학 등과 함께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에 참여하여 12월 전 간도 한인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해 12월. 용정교회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 연합기도회를 개최하였는데, 전도사 정재면은 제국주의의 영토침략전쟁이 종식되고 자유평등의 기독교적 가치가 세계에 구현됨을 감사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하자고 했다. 이어 1919년 1월 북간도 독립운동가 정안립(鄭安立)의 추천으로 여운형의 신한청년단에 가입하고, '전로한족중앙총회' 동만대표로 김약연과 함께 선출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정재면은 용정교회 전도사로서 북간도 전 교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용정교회를 중심으로 동만기독교청년회장을 역임하면서 정재면은 1919년 3월 13일 교회가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우선 정재면은 북간도 청년회 민족지도자들과 명동촌에 모여 김약연의 지도로 북간도의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간민회(墾民會) 회원을 기반으로 준비했다.

1919년 1월 25일, 대한국민의회 지역위원 20명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간도 각 지역위원을 선정했다. 이때 정재면은 강봉우, 정석함, 김정 등과 함께 용정촌 및 두도구 지역을 책임졌다. 또한 1919년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문창범 등이 3월 17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한 첫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에 간도 대표로 김약연과 정재면, 이중집, 정기영이 수행하여 참여하게 되는데, 떠나기 전인 2월 18일 지역위원 민족지도자들과 구체적인 북간도 3.1독립운동 거사 계획을 수립했다.

김약연과 정재면이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가 주관하여 독립선언 축하식을 개최했다, 이때 북간도 독립기성회 대표 17명의 서명으로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정재면은 명동촌 대표로 이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렸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해 7월 정재면과 김약연은 상해에 가서 임정 조직에 참여하였고, 정재면, 계봉우는 내무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임명받았다. 이들은 조선독립기성총회를 북간도 대한국민회로 개칭하고, 정재면은 국민회의 의사부원(議事部員)으로 국민회군의 무장, 군자금 모집, 군관학교 설립의 책임을 맡았다.

이듬해 1월 상해에서 독립운동 대표자들이 모여 항일투쟁방법을 논의하는 중한노공동맹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가 개최되었는데, 정재면은 기독교계 대표로 참석했다. 1920년 5월 국민회는 명월구 동북지역 이정배(二井背)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정재면은 행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일제가 간도참변을 단행한 이후 항일운동이 어렵게 되자, 정재면은 1923년 용정 캐나다선교부 소속 은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여 다시 교육활동, 전도활동, 한인사회 자치운동에 전념하며 민족운동을 이어갔다.

정재면은 은진중학교 교감으로서 많은 민족운동 인사들을 교사로 초빙했고,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석권하여 만주국을 세울 때까지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1925년 김약연의 명동중학교가 폐쇄되자, 그는 명동중학교 재학생 전부를 받아들여 민족교육을 이어가도록 했다. 또한 김약연을 명동에서 용정으로 이주하도록 권유했고, 김약연은 은진중학 이사장에 취임했다. 또한 정재면은 학생, 청년을 중심으로 동만주청년체육대회를 수차례 개최하여 체육을 통한 청년, 학생들의 민족단결을 촉구했고, 구제사업을 통해 이준 열사의 가족을 형제처럼 돌보는 등 순국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보살폈다.

한편, 정재면은 함북노회에 신학생청원서를 제출한지 8년만인 1925년 41세의 나이로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 신학부에 유학하여 1927년까지 수학했다. 금릉대학에서 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정재면은 이듬해 1928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 후 1929년 제24회로 졸업했다. 이는 해외에서 신학을 공부한 학생은 1년 과정으로 졸업하도록 한 장로교총회 규정에 의한 것이었다. 재학 때 그는 학생회장으로 활약했으며, 레이놀즈(W. D. Reynolds, 이눌서(李訥瑞)) 교수와 함께 중국인 치아유밍(賈玉銘)이 한문으로 번안한 찰스 하지(charles Hodge)의 '조직신학'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이는 평양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재로 사용되었다.

정재면은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29년 은진학교 교목으로 봉직했다. 이때 정재면은 민족의 독립과 평화를 뜻하는 잡지 '비닭기'를 간행하여 학생, 청년, 주민, 교인들을 계몽해 나갔다. 정재면에게 민족주의 잡지, 신문은 북간도 민족운동을 진행하는데 주요한 도구였는데 이를 통해 교인, 학생, 주민들에게 세계 정세를 읽히고 독립운동 상황을 알리는 등 민족계몽운동을 이어갔다.

1930년 2월에 간도에 광주학생항일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북간도 일대에 학생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가 대두되자, 북간도 민족독립운동을 이끌고 있던 김약연과 정재면은 러시아, 일본, 중국의 공산당의 사회혁명이 자국의 이익과 관계없이 한민족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사고관을 비판하며, 민족운동은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으로 이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한 뒤 1932년 만주국을 수립하자, 정재면은 더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함경북도로 이동했다. 이후 그는 목회활동에 전념했다. 1931~1935년까지 청진의 모교회 신암동 교회에서 활동했고, 1935년에 원산의 광석동 교회로 옮겼다. 그러나 일제는 정재면 목사가 광석동교회를 중심으로 음악과 문화 활동을 통해 민족운동을 펼치자 노회에 압력을 가하여 그의 사임을 요구했고, 결국 그는 1943년 안변의 작은 교회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1944년 12월에 '조선전시종교보국회(朝鮮戰時宗敎報國會)'를 결성하고 모든 교회들에게 신사참배를 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이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목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정재면 목사도 연루되어 이규용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영흥경찰서, 고흥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미결수 신분으로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석방되었다.

광복 후, 정재면은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에 참여했으나 협의회가 개인을 옹호하는 정파로 전락했다고 판단하고 탈퇴한 뒤 현실정치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1947년 토마스목사기념전도사업회 편집부장으로 시무하다가 곧이어 해방 후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언론이었던 '기독교공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에 뛰어들었다. 한편 '북간도독립운동사'를 집필했으나 불행히 분실되어 현재 남아있는 것은 없다.

이후 송파중앙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시무하다가 1962년 5월 28일 사망했다. 향년 79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재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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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