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鳳羽.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개신교 장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892년 2월 5일 함경남도 함흥군 주서면 풍호리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계열 학교인 함흥영생학교에 입학해 민족의식과 기독교 정신을 교육받았다. 그는 함흥영생학교 초등과, 중등과 과정을 마친 후 신민회에 가입했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지만, 1913년 3월 20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출옥했다.[1] 이후 국내에 거주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그는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로 망명한 강봉우는 용정 장로교회에서 활동하다가 1912년 12월 장석함(張錫咸), 윤명희(尹命熙) 등과 함께 연길현 용지사 육도구에 영신학교(永信學校)를 설립하고 조희림(曺喜林)을 교장으로 초빙해 학생들에게 기독교 및 민족의식을 배양하게 했으며, 본인은 직접 조선 역사를 가르쳤다. 그 후 북간도 일대의 국민회(國民會) 조직에 참여한 그는 1919년 1월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될 간도 거주 한국인 대표자 선정과 기부금 모집을 위한 위원회의 용정 지방 책임자를 맡았다.
이후 일본 동경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인 2.8 독립선언에 대한 소식을 접한 그는 서울로 내려가서 조선 동포들의 민심을 살펴본 뒤 2.8 독립 선언서를 몰래 입수해 2월 26일 함흥으로 가서 교회 계통 인사들에게 전달하고 만세 운동에 가담할 것을 권고했다. 그 후 용정으로 돌아가다가 회령에서 캐나다 선교사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를 만나 항일운동에 지원해줄 것을 부탁했고, 용정으로 돌아온 뒤 명동 중학교에서 비밀 회의를 갖고 국내 소식을 전하면서 고종의 인산일에 독립선언식이 있을 테니 그때 같이 만세 시위를 벌이자고 설득했다.
1919년 3월 13일, 강봉우는 구춘선(具春先), 이봉내(李鳳內) 등과 함께 간도 국자가(局子街)에서 독립선언 축하회를 벌였다. 이때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 및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 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가담했고, 용정의 여러 교회 신자들도 가세했다. 이후 그는 일제의 수사를 피해 명동에 숨었다가 4월 5일 체포되어 8월 6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강봉우는 상고했지만, 경성 고등법원은 이를 기각하고 형을 확정지었다.[2]
피고인 강봉우 상고취의는 다음과 같다.
"금년(1919년) 3월 1일 비로소 조선 각지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침은 삼척동자라도 이에 찬동하여 따르지 않는 자가 없음은 그 주의와 실행이 틀림없이 인도(人道)에 기인하고 또 조선민족인 자가 솔선해야 할 의무로써 누구의 선동, 혹은 교사를 받을 이유 없다. 이번 본인을 함흥에서 독립운동을 선동한 자라고 단정하고 제1심, 제2심에서 본인이 진술한 확실한 증거와 상세한 변명은 전부 각하하고 단지 유죄 판결을 내림은 심히 부당하고 위법이니 이에 상고하고 다시 밝혀 살기기를 구한다."그러나 원심은 증거에 의해 피고가 함흥군 중하리 야소교(耶蘇敎) 예배당에서 조영신 외 약 40명에게 원판시와 같은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사로써 선동하고 치안을 방해한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피고가 선동한 사실을 부정하고 원심에서 피고 이익의 증거 및 피고의 변명을 채용하지 않는 것을 공격하는 본 논지는 원심의 전권에 속하는 증거의 취사판단 및 사실인정을 비난하는 것에 불과하며 상고 이유 없다.
- 경성 고등법원 1919년 10월 16일 판결문.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강봉우는 출옥 후 1921년 10월에 일본에 건너가 동경고등사범학교 역사과에 진학해 그곳에서 세계역사를 배웠고 한국인 유학생 중심의 기독교 청년회 간부를 맡았다. 그 후 1925년에 귀국하여 배재학교, 숭실학교, 영생중학교 등의 교사로 재직하며 후세 교육에 전념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했지만,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소련군은 강봉우를 함흥영생고등 보통학교를 인수한 '부르주아'라며 학교에서 축출했다. 결국 그는 월남하여 광주서중학교 역사 교사로 일했고 광주 중앙교회 장로를 역임했다. 이후 광주서중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광주서중학교를 광주제일고등학교로 개편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광주 숭일고등학교 교장을 맡으며 학교의 발전에 공헌했다.
광주 숭일고등학교 교장 시절, 숭일고등학교 축구 팀은 광주나 전남 축구대회가 있을 때마다 탁월한 활약을 해 항상 우승권 팀으로 손꼽혔다고 한다. 그러나 결승전은 언제나 일요일에 열렸기 때문에, 강봉우는 예수를 믿는 학교 선수들을 주일을 범하게 하면서까지 결승전에 내보낼 수 없다며 결승전에 출전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강봉우의 신앙이 대단했음을 암시하는 일화라 하겠다.
1958년 광주 숭일고등학교 교장직을 은퇴한 강봉우는 여생을 보내다가 1970년 11월 5일 광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 사후 광주 중앙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강봉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