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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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寧.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 또는 암산(巖山)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9년 10월 6일 충청도 목천현 읍내면(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병옥(李炳鋈)이고, 어머니는 광주 안씨이다. 그는 5살 때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수학했고, 10살 때 조부 이석구의 집에 기거하면서 사서삼경을 읽었다. 2002년 이연희 교수가 출간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이동녕과 그 시대>에 따르면, 이동녕은 어렸을 때 자신의 집과 조부의 집을 왕래하면서 고향산천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조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키웠다고 한다.

부친 이병옥이 영해군수로 부임했을 때, 그는 부친을 따라가서 행정을 보조하면서 뛰어난 식견을 피력해 주변으로부터 '작은 군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후 부친이 평양으로 전근가게 되었지만 가족을 대동할 수 없었기에, 그는 한양으로 갔다. 이리하여 1885년 17살의 나이로 한양 봉소동에서 정착한 그는 자신의 자를 마을 이름에서 따 '봉소(鳳所)'라고 지었다. 그 후 1892년 24세의 나이로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1896년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평소 개화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적극 가담했다. 그는 만민공동회 운영위원을 맡았으며, 간사부에서 활동하며 외세배격과 비정쇄신 등을 요구했고 민권운동과 개화운동을 함께 추진했다. 그러다 이준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7개월만에 풀려났다. 유영익 교수의 저서 <젊은 날의 이승만>에 따르면, 이때 그는 옥중에서 신홍우, 박용만, 이승만 등과 교분을 맺고 구국운동의 의지를 끝까지 이어가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1898년 8월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서 운영하던 이종일과 친분을 맺었다. 이종일이 집필한 <묵암비망록> 1899년 1월 17일자 기록에 따르면, 이동녕은 이종일을 찾아가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한다.

작금의 내외정세로 보건대 지금은 매우 격분하고 개혁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시국을 응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도 협회를 통한다든가 저도 관여하는 대한제국민력회를 통해 과감히 개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에 우리도 구질서를 깨고 신질서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동녕은 자신의 개혁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어 사설 등 시국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그는 '민족자강의 방도'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각종 이권이 외국에 양여되고 정부의 고위관리가 무능부패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자강을 도모하기 않기 때문이다, 대저 자강을 급히 서둘러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강대국에게 침략당할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것을 면하려면 먼저 세계사 발전에 발맞추어 개화를 힘써 실시해야 한다. 다음은 세계의 과학기술을 올바르게 받아들여 소화시키는 방도가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철도부설론이나 위국의 방도론 등의 수십편의 사설을 집필하여 그의 민족의식을 보다 선명하고 투철하게 나타내었다. 특히 그는 1898년 10월 28일자 논설인 ‘위국의 방도’에서 국민참정권을 극력 주장하기도 했다. 1900년경 전덕기 목사의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된 이동녕은 상동교회에 다니는 동시에 기독청년회 총무를 맡아 목회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를 강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시키자, 그는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양기탁, 신채호, 정순만, 최재학, 신상민, 김구, 조성환, 김진호, 이광 등과 함께 상동청년회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상동청년회는 국학에 관한 내용의 교과를 가르쳤고, 한글보급운동을 강력히 추진해 주시경이 1906년 <대한국어문법>을 발간하는 데 기여했다. 그 외에도 한국사, 세계지식, 법률, 경제대의, 수신 등의 과목은 청년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주체의식 자립의지를 심어주려 노력했다. 또한 이동녕은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던 강천명이 보내준 자금 5원을 기반으로 청년학원을 직접 설립해 교사를 맡았으며, 청년학우회도 설립해 총무로 활동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을사조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인 덕수궁의 대한문 앞으로 달려가 혈서로 '사수독립'이라는 글자를 쓰고 대궐 문앞에서 복합 상소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과 헌병이 달려들어 시비가 벌어졌는데, 이때 주변에서 참관하고 있던 시민들이 동참해 맞섰다. 그러자 일본군은 중대 병력을 투입해 칼을 휘두르며 진압했고, 이동녕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2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풀려났다.

그 후 그는 일제에게 요시찰 대상으로 낙인찍혔고 더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에 그는 해외로 망명하기로 결정하고 북간도 용정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자를 길러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3만원을 장만한 뒤 정순만, 황공달, 박무림 등과 함께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용정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후 이상설, 여준, 왕창동 등 동지들과 프랑스 신부 퀴리의 도움으로 단층 한옥의 학교 건물을 건설했다. 그는 이 건물에 '서전서숙'이라는 간판을 달고 태극기를 내걸었다. 학교의 숙장은 이상설이었고, 교사로는 이동녕, 여준, 정순만, 황공달, 박무림 등이 맡았다. 교과목으로는 한국의 언어, 역사, 지리, 풍속, 국제공법, 수신 등을 주안점으로 두었다. 수업료와 침식은 모두 무상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지원하는 이가 적자, 이동녕은 두만강 연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자녀 교육의 사명과 구국의지 심화를 위해 협조해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김약연이 자신에게 한문을 배운 제자를 보내 서전서숙에 입학시키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노고로 학교의 학생은 10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갑, 을 두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시켰다. 갑반은 고등반, 을반은 초등반으로 했으며, 뒤에는 병반까지 확대 운영했다. 이동녕은 동지들과 분담하여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가 맡은 교과목은 수신과 한국사, 한문이었다.

그러나 통감부가 간도파출소를 설치한 뒤 감시 및 미행을 가한데다 친일단체 일진회가 방해하는 바람에, 서전서숙은 운영에 차질을 빛었다. 여기에 고종이 서전서숙을 운영하고 있던 이상설에게 헤이그 특사에 가담할 것을 지시했고, 이상설은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서전서숙의 운영자금을 끌어써야 했다. 그 바람에 서전서숙은 운영에 차질을 빚다가 건립된 지 1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이에 이동녕은 여준, 황공달 등과 함께 변장을 한 채 국내로 귀국했다.

1907년 초 안창호, 양기탁 등과 비밀결사 문제를 협의한 뒤 이동휘, 이갑, 유동열, 김구, 전덕기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신민회는 비밀결사여서 회원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회원 상호간의 접촉이나 사업 추진은 금하였다. 연락을 취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YMCA출입사진사가 담당하였다고 하며 1910년 전후에는 전후에는 비밀회원수가 대략 8백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신민회의 공식 대표는 양기탁이었고, 총무에는 이동녕, 재무에는 전덕기, 조직 선전에는 안창호가 맡았다. 이동녕은 신민회가 설립한 오산학교 등 학교와 학회를 후원해 청년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전국의 애국계몽강연에 나서 애국주의, 민권의식 고취, 공화의식의 제고, 새로운 사조, 지식산업의 실시, 안습타파, 교육입국의 필요성, 민력의 양성 활용방안, 실력육성의 비결 등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며 강연했다.

그리고 청년층에게 민족의식을 확대 보급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효과적이라는 판단 하에 청년학우회와 청년동지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그는 신민회의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던 청년학우회의 회원을 두 가지[1]로 분류하여 강한 훈련에 임하게 하였고, 1910년 3월 청년학우회의 한성연회의 총무원이 되어 청년육성의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신민회는 3가지의 항일투쟁의 방침을 세웠는데, 첫째는 민족교육, 둘째는 민족기업의 육성, 세 번째는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널리 선양, 국민정신의 개조를 이끌어내는 미래지향적인 국민정신교육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전개될 움직임이 보이자 일제의 감시, 경계, 감독, 구금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신민회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이동녕은 1908년 주진수, 이시영, 장유순 등과 함께 북간도 명동촌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김약연이 건립, 운영하고 있던 사립학교 명동서숙을 찾아갔다.

이 학원에는 황의돈 등 유수한 인사가 교사로 봉직하면서 제2세 한인동포에게 애국사상,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었다. 이동녕은 명동서숙을 키우기 위하여 낯선 북간도에 정착하면서 정열을 쏟고자 하였으나 여건이 매우 열악하였다. 더욱이 그해 8월 일제 통감부가 이곳에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한인독립지사들을 감시함으로 효과적인 활동을 하기가 어려워 다시 귀국하여 새로운 민족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했다.

이 시기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고 전국 각지에 빚을 갚기 위한 의연금 모금 조직이 창설되었다. 이동녕은 이러한 조직을 항일투쟁으로 전환시키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서울 등지에서 신문을 이용해 모금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10년 끝내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그해 12월, 그는 원산의 부모님에게 하직서를 보내고 가산을 정리한 뒤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했다.

서간도에 도착한 그는 봉천군벌 장쭤린을 찾아가 한인 동포들이 편히 살 수 있는 근거지를 마련하는데 방해하지 말 것을 호소해 승낙을 얻어냈다. 이후 그는 유하현에 경학사를 조직해 한인 동포들의 생활, 교육 등 자치기관으로서 활동하게 했다. 경학사는 주경야독하는 한국동포들의 자활기관이었는데 뒤에 서로군정서로 발전하였다.

또한 그는 서전서숙 등의 경험을 토대 교육기관의 설치를 구상하였다. 젊은 역군을 양성하는 것이 곧 민족의 광복을 앞당기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윽고 빈창고를 빌어 신흥강습소를 개교시켰다. 경학사의 사장은 이철영을 추대했고, 운영은 이동녕 본인과 이광, 김달, 윤기섭, 김창환, 이관직, 이갑수, 장도순, 이규룡 등이 맡았다. 그리고 신흥강습소의 교사로는 박찬익 등이 한국의 말과 역사, 지리, 풍속, 제도 등을 가르쳤다.

신흥강습소 교육 과정은 본과와 특별과로 나뉘어 있었는데 전자는 중학과정이며 후자는 사관양성의 속성과라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양성된 인재는 8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첫 번째 특기생으로 배출된 애국청년들은 김련, 이규봉, 변영태, 성주식 등으로 이들은 초대소장인 석오로부터 초급장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삼원보에서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고, 이동녕은 사관생도였던 맏아들이 병마에 시달리다 사망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1912년 가을, 경학사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부민단이 새롭게 조직되었다. 소재지는 통화현의 합니하로 옮겨졌고, 신흥강습소도 함께 이전하여 제2의 새로운 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1913년,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승격되었고 교장에는 여준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신흥강습소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신흥학우단도 조직되었다.

그러던 1913년 봄, 수원에 거주한다는 맹보순이라는 인물로부터 일제 경찰이 이동녕을 비롯해 이회영, 이시영, 장도순, 김형선 등을 체포하러 만주로 떠났으니 피신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이동녕은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그 행선지를 이상설이 살고 있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정하였다. 이동녕은 러시아로 떠나면서 부인과 자식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1913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동녕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거처를 동년 10월 하바롭스크로 옮기고 독립운동의 거점 확보를 꾀했다. 1914년 초, 민충식 등이 이동녕을 찾아왔다. 그를 맞이한 이동녕은 권업회를 조직한 이상설과 대종교 신자 백순, 권대동, 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을 자주 만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할 것에 합의를 봤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려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극동 총독 보스타빈의 양해와 협조를 얻어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정부와의 대일연합작전을 계획하며 군사의 모집은 물론 훈련할 수 있는 사관학교 설립 등을 계획했다. 그러나 중간에 러시아 당국이 불법 군사조직이라며 이동녕을 체포해 3개월간 옥고를 겪게 하기도 했다. . 1915년 석방되어 나온 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민족의식의 선양이라고 믿고 이를 고취하기 위하여 각종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야 하며, 그렇게 된 뒤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새로운 민족사관을 정립시킴으로써 민족적 긍지와 사명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재러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는 신문을 통한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 부호 최봉준의 자금을 통해 <해조신문>을 발행, 배포하였다.

이처럼 <해조신문>의 발행을 통해 민족의식을 선양하고 구국투쟁의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이동녕은 1918년 초 백순과 함께 동만주 영안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대종교의 교주 김교헌이 이끄는 총본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기독교인이면서도 대종교에 입교한 이동녕은 단군의 국조사상을 이어 민족의 유구한 문화적 긍지를 높이 선양하여 동지와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의도에서 이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는 신규식과 함께 대종교 서도본사 포교책을 맡아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1918년 12월, 이동녕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명을 받아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표명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김교헌 교주를 필두로 조소앙, 구덕상, 김천식, 민충식, 백순, 안기선, 윤일병, 조완구, 이종일, 이승복, 이만복, 이규풍 등과 협의한 뒤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 날인했다. 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사는 이동녕을 비롯하여 김교헌, 김동삼, 조소앙, 신규식, 정재관, 여준, 이범윤, 박은식, 박찬익, 이시영, 이상룡, 윤세복, 문창범, 신채호, 허겸, 이세영, 유동열, 이광, 안정근, 김좌진, 김학만, 이대위, 손일민, 최병학, 박용만, 임방, 김규식, 이승만, 조성환, 김약연, 이종탁, 이동휘, 한흥, 이탁, 황상규, 이봉우, 박성태, 안창호 등 39명이었다.

동삼성 길림성에서 제작, 배포된 대한독립선언서는 국내외에서 활약하던 독립지사가 거의 다 망라되었고, 이 시기에는 가장 앞섰던 독립선언서였다. 이후 이동녕은 는 대한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블라디보스톡에 있었는데, 이때 블라디미르 레닌을 면담하고 돌아오던 여운형을 만났다. 그는 여운형과 국제정세 및 이에 대처하는 한인의 입장을 교환하면서 이러한 시기일수록 민간지도자가 나서서 우리도 민주정부를 세우고 그것을 구심점으로 하여 새로운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이동녕은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로 가서 민주공화정을 전제로 한 정부 구성을 추진했다.

1919년 3월 10일 상하이에 도착한 이동녕은 베이징에 가서 이회영, 이시영, 이광 등과 만나 민주공화정부 수립에 관한 문제를 논의했다. 그리고 3월 20일경 이회영의 집에서 조성환, 박용만 등과 함께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계획을 의논했다. 그 결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론이 내려졌고, 이동녕은 상하이로 돌아와 30여 명의 민족지사들과 논의했다.

이후 이동녕은 동지들과 함께 연락사무소를 프랑스조계내 보창로 329번지에 정하고 구체적인 문안작성에 착수했다. 이때 이동녕은 먼저 입법기관인 의회를 구성해 헌법, 헌장, 서고문, 강령, 정강 등을 정하고 나서 정부의 부서 각료를 내정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조계 김신부로 22호에서 국내 8도 국민대표와 노령, 미주 중국 등지까지의 국민대표를 모두 망라하여 구성된 임시의정원이 개최되었다.

정부조직을 위한 임시사무소에는 현순이 총무로 있었는데, 그는 조직을 위한 선언서를 각국에 발송하였고, 4월 8일에는 한성 임시정부로부터 각료 명단과 임시헌법 초안을 가져옴으로써 보다 구체적인 임시정부 수립을 진행시켜 나갔다. 다음날 손정도 등의 제의로 각 지방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의정원 의원 29명을 선출하였다. 그 명단은 이동녕을 비롯하여 현순, 손정도, 이광수, 최근우, 신익희, 조성환, 이회영, 이시영, 조소앙, 이광, 남형우, 조완구, 신채호, 김철, 선우혁, 김동삼, 백남칠, 한진교, 진희창, 신철, 이영근, 신석우, 조동진, 조동호, 현창운, 김대지 등이었다.

1919년 4월 10일 프랑스조계내 김신부로 22호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어 이튿날 오전까지 진행되었고, 이 자리에서 의장 등을 선출하였다. 논의 끝에 이동녕이 의장에 선출되었고, 손정도가 부의장에, 서기에는 이광수와 백남칠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된 이동녕은 동지들과 협의 끝에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또한 관제를 의결한 뒤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으로 선포하고 선서문과 정강을 통과시킨 뒤 각료를 선임하여 국무원을 조직했다. 이리하여 1919년 4월 13일, 이동녕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내외에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당시 임시정부 내각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 때 최고 지도자로 추대된 국무총리 이승만이 미국 워싱턴에 체류하면서 상하이로 오지 않자, 이동녕이 4월 30일에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했다. . 또한 당시 상하이에는 안창호, 이동휘 등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며, 신규식은 병석에 누워 있어 행정 기능이 거의 가동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시영 법무총장이 임시정부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그도 얼마 뒤 신병치료차 북경으로 갔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단일 통합된 뒤 재무총장의 임무를 맡아 상해로 다시 부임해 오게 되었다.

이동녕은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4월말 경 임시의정원 의장 자리를 부의장인 손정도에게 위임처리하고, 자신은 국정을 돌보는 데 진력했다. . 그리고 5월 25일 안창호가 내무총장에 취임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가지고 미국으로부터 상하이로 와서 이동녕 등과 만나 임시정부의 임무를 개시하면서 임시정부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안창호가 관장하는 내무부는 1920년 1월 중순부터 연통제를 실시하여 국내외의 업무연락, 기밀문서의 수발, 군자금의 조달 등 국내외를 통제, 통할하였다. 교통부에서도 이에 앞서 교통국을 설치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통신정보의 수집, 검토, 교환, 기밀문서의 수발 등의 업무를 전담하면서 역시 국내외를 활발히 연락하고 통활하였다. 그러나 이 두 조직은 2년 후 일제에게 발각되어 관련인사들이 모두 체포되면서 더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19년 6월 중순, 재무부에서 부령 제1호로 인구세 시행세칙을 공포시행한 뒤 7월에는 정부령 제3호로 임시징수령을 공포하여 4천만원의 독립공채 발행을 계획하였다. 이는 재정타개를 위한 임시조치로, 이러한 자금조달은 인재를 양성할 무관학교를 세우는데 필요한 재정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동녕은 서전서숙의 운영 경험을 살려 중국의 운남 강무당, 보정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 등에 한인 교포청년들을 입소, 훈련케 하였다. 그리고 7월 2일에는 안창호, 이광수 등의 발의로 임시사료편찬소를 두어 <한일관계사료집>4권을 펴냈다.

한편 상하이의 임시정부 인사들은 각지에 설치된 임시정부의 지도자들과 회합을 갖고 단일화를 위해 노력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한성의 임시정부, 기호의 대한민간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평안도의 신한민국정부 등이 각기 수립될 단계에 있었다. 이에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하여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정부와 한성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통합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1919년 9월 2일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따라 임시헌법 개정을 공포했고 9월 11일 국무원의 권한이 강화된 체제의 신내각이 탄생했다.

이때 이동녕은 다시 내무총장에 임명되었고 국무총리 대리는 사임했다. 그리고 국호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확정하고 상해 프랑스 조계내 보창로 329호에 쑨원의 심복인 두월생의 거중조정으로 청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때 성립된 신내각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걸었던 기대도 좌절되자, 이동녕은 경무국장인 김구를 비롯한 이시영, 여운형, 조완구,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이유필, 엄항섭 등과 자주 협의하면서 고국의 동포를 위해 무엇을 할 지 방략을 모색했다. 그는 이때마다 민의를 기반으로 공리를 창명하고 공익을 증진하는 등 민주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강조하였으며, 그 구심점이 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립가치와 행동 방향, 목표가 확고하게 정돈되어 있고, 그것을 위해 모두 신명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대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1921년 12월,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하여 약 6개월간 머물렀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무총리인 이동휘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급기야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퇴하고 러시아로 떠나 버렸고, 김립 피살 사건의 여파로 좌익 세력이 임시정부를 대거 이탈해버렸다. 더욱이 이승만이 미주지역으로부터 보내는 군자금을 전액 송달하지 않고 있는 등 독단적인 일처리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 분란이 일어났다. 결국 1925년 이승만은 강대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 등의 문제까지 지적되어 탄핵을 받고 대통령직을 박탈당하였다.

이 시기 이동녕은 이동휘의 후임으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고 내무총장을 맡았다. 또한 이승만이 도로 미국으로 떠나버린 뒤 사실상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노동국총판이었던 안창호 마저 사퇴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이후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주장과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민족 최고 기구를 창조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인 개조파 인사로는 안창호, 여운형, 김마리아 등이 있었고, 창조파 인사로는 신채호, 박은식, 신숙, 김규식 등이 있었다.

결국 1921년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이 개시되었고, 1923년 1월 120여 지역과 단체에서 120여명의 대표 인사가 상해에 집합하여 약 5개월간 60여회의 회의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성과없이 결렬되었고, 수많은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떠나버렸다. 이동녕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22년 이시영, 조소앙, 차이석, 홍진, 노백린, 도인권, 이유필, 김홍서, 현순, 윤기섭 등 50여 명의 지사들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했다.

1924년 4월, 이동녕은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취임했고 김구가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6월, 이동녕은 군무총장까지 겸임했다. 그리고 9월에는 장기 궐석중이던 대통령을 대행하여 최고 영도자를 맡아서 민족 진영의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이때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홍승균을 시켜 이동녕을 찾아가 일본에 귀화할 것을 권한 일이 있었지만, 이동녕은 홍승균의 뺨을 치고 내쫓아 버렸다. 이로 인해 그의 부친 이병옥이 원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5년, 이동녕은 두번째로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이 탄핵된 뒤 자신이 대통령 대리로 집무하다가 박은식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줬다. 그러나 6개월이 채 못된 1925년 11월 박은식이 병사하면서, 임시정부는 난항을 겪었다. 이후 대통령중심 지도체제에서 국무령 중심 지도체제로 제2차 개헌이 이뤄졌고, 이동녕은 1926년 8월 국무령이 되어 법무장도 겸임하면서 임시정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자 전력을 기울였다.

이동녕은 몇달 후 국무령 직을 이상룡에게 넘겼지만, 이상룡은 얼마 안되어 사퇴했다. 이후 양기탁에게 국무령 직이 넘어갔지만 거부당했고, 뒤이어 국무령 후보로 거론된 안창호도 사절했다. 이후 홍진이 맡았지만 그 역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에 이동녕은 김구를 찾아가 국무령을 맡아줄 것을 호소했다. 김구는 자신의 출신 배경이 미천하니 자신이 수반이 된다면 정부의 위신을 격하시킬 것이라며 거절했다. 이에 이동녕은 임시정부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많은 기여를 한 그가 맡지 않는다면 임시정부는 영영 문을 닫아야 한다며 강력히 호소했고, 결국 김구는 국무령 직을 수락했다.

이렇게 해서 1926년 12월 14일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는 데 성공한 이동녕은 1927년 4월 제3차 개헌에 참가해 일종의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를 채택했다. 제3차 개헌안은 1927년 1월 15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발의되었고, 동년 2월 5일 50개조로 축조 통과되어 3월 5일 공포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국무위원으로 정부내각을 조직하되 주석은 그대로 존치하나 국무회의에 장이 되는 정도이고, 국무위원의 호선에 따라 교대로 집무하는 것을 원칙으로 규정하였다. 어떤 특정인을 어느기간동안 정부의 최고 책임자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진급 인물을 망라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고 정책을 수행케 했다. 이렇게 개편된 임시정부의 각료는 다음과 같다.

이 3차 개정헌법은 1차 개정헌법보다는 소규모의 헌법이지만 2차 개헌때 보다는 현실성이 보완되었으며, 민주공화제적인 민중의식의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개헌은 모든 국무위원의 평등한 권리와 책임이 주어짐을 골격으로 하고 있어 종래의 모든 분란을 일소할 수 있어 보다 민주적인 지도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셈이 되었다. 또한 국무위원이 국무를 총괄하고 임시의정원에 대해 책임을 지며 2개월 이상 집무하지 않았을 때에는 자연 해임된다는 엄격한 규정을 두었다. 훗날 이동녕은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항저우, 가흥 등지로 피신하다가 의정원에 2개월 결석하면서 이 규정에 저촉, 직책을 자동 사면당했다.

제3차 개헌을 통한 지도체제의 개편으로 주석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이동녕은 임시정부가 침체상황을 극복하고 공고한 기반위에 올라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모든 역량을 집결시켰다. 이무렵 민족단일당 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은 임시정부를 지탱할 정당을 구상했다. 그는 1930년 김구, 조완구, 조소앙, 이시영, 안창호, 엄항섭 등과 함께 상하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했다. 그는 이 당을 통해 민족진영의 쇄신을 도모하고 파벌적, 지역적 분열 등을 청산하여 해외독립운동전선의 통합을 기하고자 하였다.

1931년 만보산 사건이 벌어진 후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자, 그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김구와 협의한 뒤 일제 수뇌부와 친일파를 사살하고 침략기관을 파괴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조소앙, 김철, 조완구 등과 함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으로 하여금 천황을 처단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그해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가 성공하면서, 중국 국민들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호의적으로 변했다. 이후 중국 국민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감시, 검거가 강화되면서 임시정부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이동녕은 임정 요인들과 함께 상하이를 떠나 가흥, 항저우 등지로 옮겼다. 그는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요직을 사임한 뒤 3년간 민족진영의 단합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잡고 정당통합운동에 전력투구하였다. 이에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의 이동녕 외에 의열단, 한국혁명당 등 각 단체의 대표가 모여 연합을 통해 대일혈투를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에 합의함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런데 그해 10월 김두봉 일파와 김원봉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 대한독립당 등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시키면서 임시정부의 운영을 위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조소앙 등이 임시정부를 한국국민당과 임시정부를 떠나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하면서 임시정부는 기능이 완전히 정지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1935년 11월 임시정부의 주석이 된 이동녕은 양우조, 엄항섭, 송병조, 이시영, 조소앙, 차이석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한 후 그 당수가 되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공보와 기관지 <한성(韓聲)>등을 발행 배포하여 지속적으로 한국민의 독립사상과 광복의욕을 북돋는데 진력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임시정부는 난징, 가흥, 진강, 장사, 광주, 유주를 거쳐 기강으로 피신했다. 이동녕은 고령의 나이에 피신 생활을 전전하면서 심한 고생을 겪었지만 그 와중에도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을 방안을 모색했다. 1937년 11월 25일, 그는 이시영, 조성환, 김구, 송병조, 조완구, 차이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고문을 작성하여 국내외 동포들에게 민족적 단결과 최후의 일각까지 우리나라의 완전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모든 민족적 힘을 한곳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1939년, 이동녕은 71세의 고령으로 임시정부에 네 번째로 국무위원회의 주석이 되어 김구와 함께 전시내각을 결성하였다. 동년 11월 시안에 조성환을 주임으로 한 대한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무장세력의 양성에 착후하게 했다. 그리고 12월 22일에는 이시영, 조성환, 김구 등 국무위원들과 함께 장문의 임시정부 제2차 포고문을 내외에 발표했다. 그 내용은 1905년 이후 한민족이 일제와 싸워온내력을 설명하고 각 독립투쟁의 영역과 처절하였던 전쟁장면을 재현하면서 새로운 독립운동의 계획을 세웠으니 국내외 동포들이 적극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역에서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임시정부의 존립을 위해 사투를 벌인 여파로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급성 폐렴 증세에 걸렸다. 결국 1940년 3월 13일 쓰촨성 기강에서 사망했다. 향년 72세. 그는 죽기 직전 "광복을 하고자 하면 3당 합당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기강에 매장되었다가 1948년 봉환식이 거행되면서 국내로 이송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동녕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각주

  1. 통상회원과 특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