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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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震. 본명은 홍면희(洪冕憙), 호는 만오(晩悟) 또는 만호(晩湖).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1877년 8월 27일 홍재식(洪在植)과 청주 한씨(淸州韓氏) 사이 3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 서울 서소문이라는 설과 충청도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라는 설이 병립하는데, 이는 홍진의 본적이 충북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로 그의 부모와 형제들이 그곳에 살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홍진의 가문은 조선 후기의 명문 양반 가문 중 하나인 풍산 홍씨였지만, 정작 그의 집안은 가난에 쪄들었고 그나마도 부친이 일찍 사망했기에 어머니로부터 홀로 길려졌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은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으며, 평소 새로운 학문을 익히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홍진은 1898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뒤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를 거쳐 1899년 평리원 판사가 되었다. 이후 1905년부터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보내졌지만 1908년 5월에 사직했다. 그가 사직한 이유는 법부로부터 죄수 석방에 착오가 많다는 견책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그가 폭도로 낙인 찍히고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된 의병장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음을 암시한다는 설이 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후 그는 1909년 7월부터 평양에서 형사소송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한반도 전역에 확산되고 있을 무렵, 홍진은 충북 청주군에서 민족 지사들 사이에서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1919년 11월 26일 한남수(韓南洙)가 공판 심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홍진은 한남수에게 "손병희가 조선의 독립선언을 한 이래로 각처에서 시위운동이 있으나 모두 통일이 없고 각자 생각대로였으니 유지자를 모아서 국민대회를 열고 각개의 독립운동단을 망라하여 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계통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홍진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고 각별한 사이이기도 한 이규갑과 함께 3월 초부터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홍진은 주로 법조계 인사들을 접촉해 현직검사로 있던 한성오(韓聖五), 법관양성소 4회 졸업자이자 변호사인 권림송(權林宋) 등을 끌여들었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매매중개인으로 근무한 바 있고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한남수를 포섭해 임시정부 결성에 필요한 자금을 대게 했으며, 유교계 인사들과도 접촉해 구한말 충청도와 강원도의 의병장이었고 1910년대에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동한 김규(金奎)를 포섭하고 그로 하여금 여러 유림들을 섭외하게 했다. 한편 이규갑은 주로 기독교 인사들과 접촉해 장로교의 장붕, 박용희 등을 포섭했으며, 일부 천도교 인사와 김사국(金思國) 등 학생들 역시 끌여들었다.

훗날 이규갑은 비밀독립운동본부에서 한남수, 홍진, 김사국 등과 함께 의논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고 회고했다. 그 비밀독립운동본부가 어디서 열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3월 17일 내수동 64번지에 있는 한성오의 집에서 이뤄졌다. 이날 한성오의 집에 모인 사람은 이교현, 윤이병, 윤용주, 최전구, 이용규, 김규, 한남수, 이규갑, 김사국, 이민태, 민강, 홍진 등이었다.

이규갑의 회고에 따르면, 정부의 이름을 "한성정부(漢城政府)"로 하는데엔 모두가 동의했지만 정부 체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공화제를 도입하고 대통령을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한반면, 어떤 이들은 "제국식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러한 논란 끝에, 절충안으로 집정관총재 제도를 체택하기로 결의했고 내각은 7부 1국제로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선임된 각원들은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총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 참모부 총장 유동열, 노동국 총판 안창호였는데 모두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는 한성정부를 해외 망명정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들은 한성정부를 공포하기 위해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거기서 이들이 조직한 한성정부 조직안을 통과시키기로 했다. 또한 국민대회취지서 및 임시정부선포문을 작성, 발표해 한성정부의 수립을 공포하기로 했다. 이윽고 4월 2일 인천만국공원에서 13도대표자 대회가 소집되었다. 이 대회는 홍진, 이규갑, 김규, 민강 등이 각 지역대표들의 참여를 권유하여 준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장소를 인천으로 정한 것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홍진의 선영이 인천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홍진은 동지끼리만 알아볼 수 있도록 손가락에 흰 종이나 헝겊을 감도록 하고 일체 필요없는 말은 하지 말도록 일러뒀다.

그러나 인천만국공원에는 겨우 20명 내외만 왔고 그나마 지방대표는 거의 나오지 않고 단지 천도교 대표, 기독교 대표, 유림 대표만 참석했다. 일단 홍진 등은 이들을 한성오의 집에 데려가서 한성정부의 조직안, 국민대회취지서 등을 심의해 동의하게 한 뒤 국민대회를 개최해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남수가 "현재로서는 파리 강화회의의 상황은 물론, 상해의 사정도 알아본 뒤에 해야 할 것"이라는 신중론을 제기했다. 이에 홍진과 이규갑은 받아들이고 상하이로 사람을 보내 그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홍진은 한남수를 상하이에 파견할 이로 선정했고, 한남수는 4월 8일 상하이로 출발했다. 홍진은 한남수에게 "파리회의의 상황이 좋고 임시정부가 서 있지 않으면 '인삼시세가 좋으니 사라'는 전보를 보내고, 반대인 경우에는 '인삼시세가 나쁘니 사지 말라'는 전보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는 전자의 전보가 온다면, 한성정부 수립을 계획되로 추진할 것이지만 후자의 전보가 오면 계획을 중지하기로 했다. 그러던 4월 3일, 상하이에서 홍진의(洪鎭儀)가 찾아와서 자신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알렸다. 이후 홍진은 홍진의와 함께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부 체제와 정부 수립 선포 일자를 놓고 의견이 달랐다. 게다가 그는 상하이에서 온 사람도 아니었고, 국내에서 천도교 측과 연계되어 독자적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결국 양측의 통합은 실현되지 못했다.

홍진은 상하이에서 한남수가 전보를 보내기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전보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한남수가 4월 16일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미 수립되었지만, 임정 요인들은 한남수를 일제의 밀정으로 오해하고 만나주지 않았고 경찰의 단속이 엄중해 충분히 왕래할 수 있는 상황도 못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남수는 시간을 한참 소비한 뒤에야 뒤늦게 임정 수립을 알게 되었고 4월 21일에야 '인삼시세가 나쁘니 사지 말라'는 전보를 칠 수 있었다. 그러나 홍진은 전보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한성정부 조직안을 가지고 이규갑과 함께 4월 중순 상하이를 향해 떠났다.

그런데 홍진이 상하이로 향하는 배에 탑승하기 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미 국내에서 조직한 '임시정부안'을 접수했다. 4월 8일 강대현(姜大鉉)이란 인물이 '경성독립단본부'의 임시정부 각원명단과 헌법초안을 가지고 상하이에 도착한 것이다. 이는 한성정부와는 다른 임시정부가 국내에서 조직되었으며 그것이 먼저 상하이에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4월 17일 평북의 철산, 의주 등지에서 '신한민국정부' 명단이 전단으로 살포되었는데, 이것은 강대현이 가지고 온 명단과 거의 일치했다. 신한민국정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조직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강대현이란 인물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지만, 국내에서 홍진 등의 한성정부와 별도로 임시정부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신한민국정부'는 기호지역에 편중된 한성정부의 각료 인선에 불만을 품은 홍진의, 이춘숙, 이봉수, 강대현 등이 추진한 임시정부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아무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일로 논란에 휩싸였다. 그들은 강대현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조직을 완성하고 이동녕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런 마당에 또다른 임시정부 조직안이 국내에서 발송되었으니 이대로는 임시정부가 양립되어 독립운동이 분열될 위험이 컸다. 이에 임시정부 각료들은 4월 10일 임시의정원회의를 열고 국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했다. 국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를 부인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묵살되었고, 강대현이 가지고 온 각원들의 상당수를 거의 그대로 임시정부 각원으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던 4월 하순, 홍진이 이규갑과 함께 상하이에 도착하여 한성정부 각료 명단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미 강대현이 가지고 온 '신한민국' 각료들을 수용한 임시정부는 이들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한성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국내에 남아있던 김사국이 학생들을 끌여들어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해 한성정부 선포식을 거행하고 임시정부선포문과 국민대회취지서를 배포하면서 일이 더 꼬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한성정부가 자신들의 정통성에 대해 정면에서 도전하고 있다고 의심했고, 홍진과 이규갑을 일제의 밀정으로 의심하고 5월 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조사받게 했다. 다행히 조사 결과 밀정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고, "우리끼리 쓸데없는 일로 갈등을 빛어서는 곤란하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그를 비롯한 한성정부 각료들도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것으로 봉합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 홍진은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법조계에서 경력이 풍부했기 때문에 1919년 7월부터 임시의정원의 법제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초기의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과 미비한 법률의 제정 등 근대적 법치의 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정부,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노령에서 수립된 국민의회정부를 통합하여 단일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때 그는 13도 대표자 회의에서 정부 수립안이 통과되었고 국민대회를 통해 그 수립이 공포된 한성정부가 국민적 기반을 지니고 있음을 내세워 한성정부를 정통 정부로 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와 노령 국민의회정부가 통합하는 형식을 취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상하이의 임정 각료들 중 일부는 반발했지만,[1] 안창호 등의 중재를 통해 9월 6일 임시의정원에서 임시헌법 개정한과 정부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임하고 한성정부를 그대로 승인함으로서 홍진의 주장이 관철되었고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뤄졌다.

이후 홍진은 1921년 4월 상하이 한인교민단(韓人僑民團) 단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면서 한인동포들의 지위 향상과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때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열강들이 군비 축소 문제와 극동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1921년 11월 11일부터 워싱턴에서 태평양 회의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임시정부는 이 태평양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켜 파리 평화 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독립을 다시 한 번 관철시키고자 이승만을 전권대사, 서재필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해 독립 외교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이에 홍진은 임시정부의 독립 외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21년 8월 대(對) 태평양 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해 간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대표단의 외교 활동을 후원하는 선전과 모금 운동을 전개했고,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의원 25명의 서명을 받아 태평양 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그는 이 독립청원서에서 세계의 평화, 동아시아의 행복과 정의 인도를 위해 한국의 독립 및 자주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했다.그러나 이 모든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각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적 독립운동방식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으며,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최고기관으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이에 임시정부 개조파, 임시정부 해체파, 임시정부 사수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홍진은 1922년 7월 안창호, 신익희, 조소앙, 이시영, 김구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이를 타개하고자 했다. 그는 시사책진회에서 세 정파의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키고 국민대표회를 조기 개최해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사책진회 마저 상호간의 의견 대립이 표출되면서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오랜 지체 끝에 1923년 1월부터 9월까지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최고 기관으로 삼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의 대립이 격렬해진 끝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임시정부 각료들이 대거 이탈하고 임시정부의 역량이 크게 상실되자, 홍진은 매우 상심하여 1924년 4월 임시정부 법무총장직을 사임하고 한동안 강소성 진강에 은거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5년 3월 30일 국무령제 개헌안을 의결해 무력화된 조직을 재건하려고 노력했지만 좀처럼 수습이 되지 않자 1926년 7월 홍진을 국무령에 추대하여 정국 수습과 정부 정상화의 책임을 맡겼다. 이에 제4대 국무령에 취임한 그는 최창식(崔昌植)·조소앙·김응섭(金應燮)·조상섭(趙商燮) 등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하여 정부 조각을 마치고 국무령 취임 다음날인 7월 9일 <독립신문> 기자에게 전민족이 대단결한 민족대당의 결성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한일병합 17주년인 1926년 8월 29일에 국무령의 자격으로 연설을 하면서 민족이 대단결하여 유일당을 결성해 힘을 모아 독립운동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9월 27일, 홍진은 <시정 방침 3대 강령>을 발표했다.

1. 비타협적 자주 독립운동을 진작한다.


2. 전민족 대당체를 건립한다.

3. 각 피압박 민족과 대연맹을 체결하고 기타 우의(友誼)의 국교를 증진한다.

그러나 독립운동 단체 사이의 분규가 지속되었고 국무령으로서 유일당 운동 추진에 차진을 빛자, 결국 그는 1926년 12월 9일 국무령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후 그는 1927년 4월 11일 좌우익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에 이동녕, 조상섭, 조완구, 조봉암 등 24인의 집행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했고, 11월 9일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가 결성되자 진덕삼(陳德三), 김두봉, 배천택(裵天澤), 장건상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27년 12월에 만주로 파견되어 유일당 운동을 전개했고, 1928년 5월 12일 화전현에서 18개 독립운동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전민족 유일당조직 촉성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참가단체간 주도권 다툼과 향후 만들어질 유일당의 성격, 통합방식을 놓고 이견이 심해 결국 실패했다. 이로 인해 참가단체는 정의부 중심의 '전민족 유일당 협의회'와 7개 좌익단체가 주축이 된 '전민족 유일당 촉성회'로 분열되었다. 홍진은 1928년 12월에 '촉성회파' 인사들과 함께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선출되었고, 1929년 4월 1일 '협의회'파가 이에 맞서 국민부를 결성했다. 이로서 유일당 운동은 또다른 분열만 낳은 채 실패했다.

1929년 봄, 홍진은 지청천, 황학수, 김좌진 등과 함께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해 농장을 경영하면서 한인들의 기반을 닦아 독립군을 양성하려 했다. 그러던 1930년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하자, 홍진은 민족주의자들을 집결시켜 1930년 7월 지린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한국독립당은 민본정치의 실현, 노본(勞本) 경제의 조직, 인본(人本) 문화의 건설 등을 강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해 만주를 석권하자, 홍진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은 군사조직을 강화하여 군구(軍區) 제도를 실시하고 지청천으로 하여금 한국독립군을 지휘하여 중국 항일구국군과 연합해 일본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한국독립군은 1932년 9월 쌍성보 전투, 1933년 7월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9월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그러나 일제는 1932년 만주국을 세워 만주 지역을 식민지화한 뒤 만주 일대의 한국독립군과 중국 항일구국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결국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한국독립당은 1933년 11월 본부를 난징으로 이전해야 했다. 홍진은 당원들과 함께 난징으로 이동한 뒤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의 통합을 이루어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4년 2월, 홍진은 난징에서 윤기섭, 신익희 등이 주도하던 한국혁명당과 자신이 이끌고 있는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하고 중앙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935년 7월 난징 금릉대학에서 김원봉의열단, 최동오(崔東旿)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김규식의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등 5당 통합에 참여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 내에서 의열단계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에 실망하고 1935년 9월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항저우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한 뒤 뜻을 함께하는 조소앙과 함께 정당을 주도했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단행하자, 홍진은 그해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민족주의 계열이 연합한 한국 광복운동단체 연합회에 가담하고 대표로 선임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침략으로 난징이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임시정부와 함께 1937년 11월 난징을 떠나 한커우, 창사, 광동, 유주 등을 거쳐 1939년 5월 사천성 기강에 도착했다. 그는 기강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에 재선되었다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내무장으로 선임되자 의장직을 사임하고 국무위원으로서 임시정부 강화에 노력했다.

1940년 5월, 홍진은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9개 단체가 합동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했을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어 중앙감찰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42년 10월, 홍진은 좌익 진영이 참여한 제34차 임시의정원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의장으로서 임정의 확대 강화, 광복군의 전력 강화, 임정의 국제적 승인 획득, 재중한인의 권익 옹호 등을 위해 노력했다.

8.15 광복 후, 홍진은 1945년 12월 2일 조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46년 1월 20일 임시정부 진영을 중심으로 비상정치회의주비회가 개최되었을 때 참여했으며,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가 발족되었을 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심장천식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몸져누운 그는 1946년 9월 9일 서울에서 병사했다. 향년 69세. 그의 장례식은 9월 13일 명동성당에서 김구의 집례하에 치러졌고, 유해는 인천시 관교동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12월 15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홍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각주

  1. 특히 이승만이 한성정부에서 자신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한 것을 해외에서는 '대통령'으로 바꿔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