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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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晳.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0년 3월 28일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김영곤(金永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렸을 때 부모를 잃어 숙부 김철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이후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영광고보를 다니다가 13살 때인 1924년 영광고보를 중퇴하고 숙부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그의 슬하에서 수학하다가 1926년 상하이 영국계 중학교인 '퍼블리스쿨'을 졸업했다.

김석은 1928년 1월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에 가서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재학 중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동년 4월 귀향하여 전남 나주군 문평면사무소에 들어가 완구용 권총으로 면장 이하를 협박하여 금고를 빼앗아 도주하다가 체포되었다. 동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아 개성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0년 4월 가출옥했으며, 1931년 7월 목포를 경유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후 1931년 9월 상하이 법정대학정치과에 입학한 김석은 학생 신분으로 김구가 조직한 대한교민단의경대(大韓僑民團義警隊)의 간부로 있으면서 김동우(金東宇),이덕주(李德柱),유상근 등과 함께 활동했는데, 특히 만보산 사건 규탄대회에서 일본의 음모를 격렬하게 질타했다.

김석은 1931년 박창세(朴昌世)·이수봉(李秀峰) 등과 상해전기회사에 직장을 둔 동지들을 중심으로 교포들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삼은 '상해한인정위단(上海韓人正衛團)을 조직하고,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와 협력하여 친일 주구들을 숙청했다. 또한 중한민족항일대동맹에 가담해 선전부장을 맡았다. 이후 1932년 1월, 김석은 서재현, 유상근 등과 함께 상해한인청년당을 조직하고 동당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공산주의 단체인 상해한인청년동맹을 배격하고 독립투사의 전위적 임무와 지역적 책임완수를 위해 학국 청년의 단체 훈련을 실시하여 혁명 역량을 집중하고자 조직되었다.

1932년 봄, 김석은 김구의 지시로 독립운동가 김홍일로부터 소개받은 중국군 장교 왕웅으로부터 물병과 도시락형 폭탄 등을 전달받은 뒤 윤봉길에게 직접 전달했다. 윤봉길은 이 폭탄들을 가지고 가 훙커우 공원 의거를 일으켰다. 이후 1932년 11월 22일 중한민족항일대동맹원 황진영으로부터 폭탄제조 의뢰를 받고 이를 준비하다가 황진영의 집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황진영의 집은 프랑스 조계에 있었기 때문에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프랑스 관헌과 일본 경찰과의 갈등이 초래되었고, 김석은 그 덕분에 곧 석방되었다.

이후 1933년 법정대학을 졸업했고 남경에 본부를 둔 동방피압박민족연맹 중앙위원이 된 김석은 1926년에 조직되었다가 해체된 병인의용대를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1933년 11월 22일 다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조선으로 소환되어 1년간 감옥에 수감된 뒤 1934년 광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그는 항소했고, 1934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 판결을 받았다.[1] 1935년 3월 28일 고등법원에서마저 상고가 기각되자[2] 기회를 틈타 도주했으나 다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형이 가중되어 1941년까지 청주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41년에 출옥한 그는 1942년 2월에 예비검속되어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고, 1945년 1월 병보석으로 출감했지만 다시 광주대화숙(光州大和塾)에 연금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전라남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청년대장을 역임했으며, 영광, 함평에서 2회에 걸쳐 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이후 서울에 거주하며 광복회 대의원 이사로 활동하다가 1983년 2월 25일 영면했다.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김석은 죽기 전 3년간 고문 후유증으로 말도 못하고 반신불수 신세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김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