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탁

양기탁.jpg

梁起鐸.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1년 4월 2일 평안남도 평양부 소천동에서 부친 양시영(梁時英)과 모친 인동 장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평안남도 강서군 용연면 신경리이다. 아명(兒名)은 의종(宜鍾)이었다가 후에 기탁으로 개명(起鐸)했다. 자는 만초(萬初), 호는 우강(雩岡)이며, 이명은 소화분(蘇化芬)이다.

<남원 양씨 족보>에 따르면, 그의 집안은 평민으로, 부친은 일찍이 평양에서 서양의 문물을 접한 뒤 그들을 알고 이기려면 영어를 익혀야겠다고 생각해 아들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15살 때 부친과 함께 상경한 양기탁은 선교사 J.S 게일이 영어자전을 편찬 간행하기 위해 보조원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친과 함께 이에 지원하였고, 6년간 영어 자전 편찬사업에 관여하면서 게일로부터 영어를 학습받았다.

동생 양인탁(梁寅鐸) 역시 13살 이래로 영어를 익혀서 영어 실력이 대단히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양인탁은 형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시기 황해도 재령 재판소 서기로 근무했고, 형이 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든 것과는 달리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면서 유복하게 살았다. 후에 양기탁이 만주로 망명할 때 동생에게는 이 사실을 비밀로 했다.

양기탁은 서울로 상경하기 전 고향에서 서당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한자를 배우면 열자를 미루어 익힐 정도로 한문 실력이 높았다고 하며, 여러 편의 시문과 휘호를 남겨 동리에서 신동이라고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동학 신도이며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유학자 나현태(羅鉉泰)와 만나 그로부터 통감 류의 한국사와 세계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다.[1]

1886년, 양기탁은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의 의사이자 장로교 선교사 알렌을 만났다. 그는 알렌이 설립한 외국어학교에서 신식교육을 받다가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영어 자전을 찾아가면서 영어를 독학으로 연마했다. 1892년 원산에서 선교에 주력하던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제임스 S. 게일이 편찬한 <한영자전>의 사업을 부친과 함께 도왔다. 게일 선교사는 서문에 자신이 이 자전을 간행할 때 양시영, 양기탁 부자 등 한국인 8명이 수고하였다고 기술했다.

1895년 봄, 양기탁은 일본으로 가서 나가사키 상업학교에서 일본 학생을 상대로 약 2년간 한국어를 가르쳤다. 신용하 교사의 1980년 논문 <독립협회연구>에는 양기탁이 1896년 7월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조직할 때 참여했다고 기술되었지만, <독립신문>에는 양기탁의 성함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아서 그가 어느 정도 위치에서 독립협회 설립에 얼만큼 기여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1898년 귀국한 그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해 간부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양기탁은 게일 선교사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901년 동전을 위조한 혐의로 기소되어 태형 100대, 징역 종신형의 징계를 선고받았지만, 별다른 증거가 확인되지 않아 곧 석방되었다. 1902년 천러파의 탄압정치에 항거하고 국정을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국민의 힘을 한곳으로 집중하자는 취지로 이상재, 민영환, 이준,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개혁당 조직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 개혁당은 곧 무고를 받아 해산당했다.

1903년, 양기탁은 한성전기주식회사의 사무원 또는 검찰관이 되었다. 이때 그는 덴마크인 기술자이자 고문인 H. J. 뮐렌스테드와 친하게 지내다가 1904년경 그의 소개로 러일전쟁 취재차 한국에 온 특파원 어니스트 베델을 알게 되었다. 베델은 서울에서 취재를 하는 한편 자신이 독자적으로 신문을 발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기탁은 그런 그와 뜻을 함께 하여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총무를 맡았다.

양기탁은 1904년 3월 궁내부 예식원의 번역관보로 근무했고 1905년 3월 25일 주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2월에 예식원을 그만두고 대한매일신보에 온 힘을 기울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당시 6면을 간행했는데, 4면은 영문, 2면은 한글이었다. 1905년 8월부터는 한글과 영문판을 별도로 발간했는데, 국한문 혼용 신문으로 간행하다가 1907년 5월부터는 한글판을 추가로 창간해 총 3개 버전의 신문을 발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고 국내 의병 항쟁을 긍정적으로 부각시켰다.

또한 그는 러일전쟁 기간에 일제가 조선에게 삼림·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保安會) 운동에 참가했다. 보안회가 일제의 압력으로 해산되자,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고 지방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양기탁을 체포할 구실을 찾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읽은 그는 신문사 외에는 출입을 삼가고 그 안에서 기거했다. 그러나 1908년 7월 12일, 일제 경찰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회계를 맡았던 양기탁이 의연금 1,300만원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하지만 별다른 증거가 없었기에, 양기탁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1909년 5월 1일 대한매일신보 사주 베델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양기탁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항일 논설을 지속적으로 집필했다. 그러나 1910년 5월 통감부가 베델의 뒤를 이어 사주가 된 알프레드 위클리 만함에게 7천 파운드 상당의 금액을 주고 신문사를 인수해 버렸다. 통감부는 양기탁에게 신문사를 계속 운영해달라고 권유했지만, 양기탁은 6월 14일 퇴사하는 것으로 답했다.

1907년 4월, 양기탁은 안창호, 전덕기, 이회영, 이동휘, 이동녕, 이갑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했다. 1909년 봄, 그는 자신의 집에서 여러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방략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만주에 독립군 기지와 군관학교를 건설하고 무관을 양성하는 안건이 체택되었다.

1910년 8월 만주를 직접 들러서 독립군 기지를 세울만한 후보지를 물색한 그는 그해 11월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주진수 등 60여 명을 서간도 삼원보로 보내 그곳에 정착하게 했다. 이후 김구, 안명근 등과 함께 2진을 이끌고 뒤따라 만주로 이동하려 했으나, 안명근이 황해도 안악군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던 것이 발각되면서 일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일제는 안명근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을 모살하려고 했다고 날조하고 양기탁을 비롯한 신민회원 600여 명을 총독 모살 음모 혐의로 구속했다. 이중 105인이 최종 선별되어 공판에 회부되니, 이 사건이 바로 105인 사건이다. 양기탁은 주동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었고, 1심에서 지역 10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대구복심법원에서 6년형으로 감형되어 복역했다.

1915년 2월 가출옥으로 석방된 그는 주거제한 조치를 받았지만 일제 형사의 감시를 피해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길림으로 망명했다. 그는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정안립(鄭安立), 맹동전(孟東田) 등 수십 명을 모아 '고려국'이란 독립국을 수립, 선포할 것을 계획했다. 여기에 중국인 주사형(朱士衡)과 일본 후쿠오카현 출신의 마쓰나가까지 포섭해 동참시키기로 했는데, 이는 중일간의 외교적 효과를 노린 것으로 여겨진다.

1년여 간 정부 수립을 준비한 그는 1917년 9월 고려임시정부를 비밀리에 수립하고 주사형을 상하이로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톈진에 소재한 일본 총영사관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양기탁은 1918년 12월 11일에 체포되어 재류금지 처분을 받고 전라도 고흥군 거금도로 유배되어 거주제한 처분을 받았다. 양기탁이 거금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동아일보사 기자 장덕준김성수의 권유에 따라 거금도에 방문하기도 했다.

1919년 12월 1년여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서울 계동 이교담(李交淡)의 자택에 머물렀다. 이교담은 과거 대한매일신보사의 사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양기탁은 1920년 4월 1일 이교담의 집에서 멀지 않은 돈의동의 중화요리집인 장춘관에서 회합을 주선했다. 그는 감시를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조선고사(古史) 연구회'를 창립한다고 알렸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50여 명은 실제로는 독립운동 방략을 극비리에 모색했다. 양기탁은 서울에서 '대동민국(大東民國)'을 수립하고 지지자들을 물색하고 군자금을 모집해 장차 만주에서 기반을 닦고자 했다.

양기탁 등은 자신들의 의도를 숨긴 채 총독부에 길림 시내에 단군 연구 기관을 설치하고자 하니 양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일제는 중일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것을 염려했고, 경기도지사는 서울 동대문 경찰서장으로 하여금 명의상 회장인 이상규와 총무 김병수(金秉洙)를 동행 형식으로 불러 해산을 강요하게 했다. 이로 인해 대동민국은 활동 3개월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이때 양기탁은 표면적으로 대동민국 회장이 아닐 뿐더러 직접적인 관련 혐의가 포착되지 않아서 일제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지 않았다.

1920년 동아일보 편집고문을 맡은 양기탁은 5월 22일 동학 계열의 민족 종교 통천교(統天敎)를 설립하고 종교를 통해 민족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해 무위로 그쳤다. 그해 8월 24일 미국 의원단 47명이 서울에 이르자, 그는 의원단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이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그는 이를 무릅쓰고 선전문을 뿌리고 독립청원서를 낭독했다. 이로 인해 또다시 체포, 투옥되었다가 모친 인동 장씨가 별세하자 8월 29일 동지 한남수 등 5명과 함께 그 처리를 위해 가석방되었다.

이 일로 동아일보사를 퇴사하게 된 양기탁은 1922년경 만주로 재차 망명했다. 그는 대한통의부의 고문이 되어 독립운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얼마 후 불상사가 발생했다. 1922년 10월 14일, 전덕원이 이끄는 복벽파 인사들은 관전현에 소재한 이종성의 자택을 기습하여 그곳에 있던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를 격살하고, 양기탁과 법무부장 현정경, 검무감 김관성, 교통국장 황동호, 비서과장 고윤신 등 5명에게 심한 폭행을 가해 중상을 입혔다. 하지만 전덕원은 가장 주요한 목표였던 비서과장 고활산을 잡지 못하자 달아났다.

이후 전덕원은 통의부를 탈퇴하고 의군부를 수립했고, 양기탁은 통의부에 남았다가 1923년 2월 조직된 의성단에 가담해 군무참모총장을 맡았다. 그는 편강렬, 남정과 함께 길림, 장춘 등지에서 수백 명의 단원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적 기관의 파괴와 부역배 토벌 작전에 투입했다. 특히 장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 7시간 동안 교전하여 다수의 인원을 사상시켰으며, 심양에 있는 만철 병원을 습격하기도 했다.

1924년 11월, 양기탁은 오동진·김동삼 등과 함께 의성단·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광정단(匡正團)·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고 고문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많아서 실무직을 맡지 않고 외곽에서 총괄 지도와 감리의 임무를 맡았다. 그해 12월에 손정도와 함께 만주농업사를 조직하고 일제에 자금 문제를 협의한 기록이 있지만, 그 사유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1925년 7월, 그는 정의부의 재무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1926년에 <대동민보>를 발간해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동단결만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거족적 방법이라며 모든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호소했다. 1926년 4월에는 지린성에서 주진수, 고려혁명위원회의 김봉국(金鳳國), 형평사의 이동구(李東求)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12월 7일에는 조선 혁명자 후원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자의 유족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27년에는 고려혁명당의 세포연합대회를 이규풍, 이일심, 주진수 등과 함께 개최하기도 했다.

양기탁은 정의부의 기관지로 <대동민보> 외에도 <동우>도 간행했다. <동우>는 이창범, 박기백 등 5명이 길림에서 발간한 잡지로, 만주의 농촌 계발과 문화운동을 주창했다. 그러나 경영난에 봉착하자 양기탁이 15원을 지원했고, 1925년 1월 25일에 <동우>의 이사 겸 사장이 되었다. 그는 대동민보와 동우에서 악질 부호, 경찰관, 유력한 밀정배 등을 사살하려는 운동에 온 힘을 쏟아야 함을 역설했으며, 결사 모험대를 조직, 훈련하여 일본 대도시에 파견해 방화, 파괴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함을 항일투쟁의 최우선 과제로 삼자고 호소했다.

1925년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령에 양기탁을 유력한 후보로 선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1930년 말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섬으로 수 만명의 한인 동포를 이주시키는 계획을 수립하고 보르네오 총독과 교섭했다. 동아일보 1931년 1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보르네오 섬 총독은 이주민을 우대해줄 것을 약속했으며 양기탁은 사찰단을 파견해 사정을 조사한 뒤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도중에 예산 부족 등의 사유로 중단되었다.

이후 1934년 1월 2일 제26회 의정원회의에서 송병조, 윤기섭, 조소앙, 김규식, 김철, 조성환. 최동오, 성준용 등 9명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4년 4월 동료 국무위원들과 함게 재무부행서규칙과 외무부행서규칙을 공포했다. 1934년 5월 항저우로 이동한 그는 항저우와 진강을 왕래하면서 의정원회의를 지속적으로 개회했다. 또한 상하이 교민단의 정무위원장으로 거명되었으나 노령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고문을 맡았다.

1934년 11월 2일, 그는 자신이 군무장에 부적합하다며 사임했고 유동열이 그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35년 10월 19일 국무위원 사면서를 제출하여 10월 22일에 수리되었다. 이해 7월 의열단·신한독립단(新韓獨立團)·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등의 5당통일회의가 개최되고 이를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되자, 그는 김규식·조소앙·최동오·유동열 등과 함께 가입하여 대일전선통일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 내부에서 의열단계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인사들이 되거 탈당하면서 통합운동이 무산되자, 그는 허무를 느끼고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선도에 뜻을 둔 그는 중국의 도사로부터 선도를 배워 장차 신선이 되고자 했다. 그러다 1938년 4월 19일 장쑤성 담양현 길당암에서 병사했다. 향년 68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양기탁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8년 한국으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임정 묘역에 안장되었다.

2004년부터 서울신문 사옥 1층 로비에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흉상으로 세워져 있다.

각주

  1. 박영랑, <독립혈사>, 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