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현충원

국립서울현충원.png

영어: Seoul National Cemetery.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현충로 210번지에 소재한 국립현충원. 대한민국 국방부 산하 기관으로, 2021년 기준 179,096명이 안장되어 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군이 창설되어 38선 방위를 담당하였다. 이후 조선인민군의 무력 도발로 인해 크고 작은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여수·순천 사건 등 공비들의 무장 봉기도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전사한 국군 장병들은 서울 장충사에 안치되었으나, 전사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국립묘지를 별도로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이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는 1949년 말부터 서울 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되었다.

6.25 전쟁 기간 각 전선에서 전사한 장병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부산의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헌 안치소'를 설치해 육군병참단 묘지등록충대에서 관리했다. 하지만 전사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육군묘지 설치 문제가 눈의되었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주관하에 묘지후보지 답사반을 구성하여 제1차로 대구지방, 제2차로 경주지구 일대를 답사했다. 그 결과 경주시 형산강 지류인 천북 대안 일대가 육군묘지 후보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추가 조사 결과 지역적으로 편재되어 있고, 침수의 우려가 많을 것을 고려해 타 지역으로 후보지를 재선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1952년 5월 6일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묘지 설치문제를 논의한 결과, 육군묘지만 설치하면 해군, 공군에서도 각기 군묘지를 만들어 관리상 많은 예산과 인원이 소요되는 폐단이 있으므로, 3군 종합묘지를 추진하되 묘지 명칭을 국군묘지로 칭할 것을 결의했다. 1952년 5월 26일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3군 합동답사반을 편성하고, 1952년 11월 3일 군묘지설치위원회를 구성한 후 1952년 11월부터 1953년 9월까지 11개월 동안 7차에 걸쳐 10개 지역을 답사했다. 1953년 1월 9일 신태영 국방부장관은 국무회의장에게 〈국군묘지 설치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건의서에서 서울특별시외 우이동 부근 일대를 국군묘지로 선정하자고 주장했다. 건의서에는 후보지 정보, 국군묘지시공계획, 후보지 위치도, 묘표규격에 대한 건의내용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으나 1월 13일자 국무회의 상정안건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후 국방부는 지속적인 답사 끝에 서울시 동작동을 국군묘지 후보지로 최종 확정했다. 1953년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가 내려졌고, 1954년 3월 1일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957년 238.017㎡의 묘역을 조성하였으며 1968년에 광장, 공원행정지역 등의 정비를 완료하였다. 또한 1955년 7월 15일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되고, 이어서 1956년 4월 13일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군묘지 운영 및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었다. 국군묘지의 묘역 조성이 마무리된 1956년 4월, 정부는 〈현충 기념일에 관한 건〉을 국방부령으로 제정, 공포하고 '현충 기념일'을 지정했다. 같은 해 6월 6일 제1회 현충일 기념식을 동작동 국군묘지에서 거행하였고, 1965년 연 1회 현충식을 거행하는 게 공식화되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국군묘지에는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었다. 그러다 1965년 〈군묘지령〉이 발표되어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국가유공자 역시 안장하게 되었다. 국가유공자는 ‘국장으로 장의된 자,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경찰관, 국가 또는 사회에 공헌한 공로가 현저하여 주무부장관의 제청에 의하여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한 자’가 포함되었다. 1955년 묘지관리를 위해 설치된 국군묘지관리소도 1965년 국립묘지관리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67년 9월 30일 현충탑이 건립되었고, 1969년 4월 30일 현충문이 건립되어 1956년 10월 3일에 건립되었던 무명용사문을 대체했다. 1970년 6월 22일, 2명의 무장 공비가 6.25 전쟁 기념식에 참가할 정부 요인을 암살할 목적으로 현충문에 폭탄을 장치하던 중 조작 미숙으로 폭발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건물 일부가 파손되었고, 폭탄을 설치하던 공비 1명은 시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폭사했고, 나머지 1명은 도주했다. 이후 국립묘지 경비가 대폭 늘어났고,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1971년 11월 17일 애국지사묘역 충열대 제막식이 개최되었고, 1975년 1월 27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어 현충기념일이 현충일로 변경되었고, 1982년 5월 15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서 정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2006년 1월 대통령령 제19286호에 의거해 국립묘지에서 현충원으로 변경되었고,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안장자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순직공무원(화재진압, 인명구조, 산불진화, 교정업무 등), 의사상자, 독도의용수비대 등’이 추가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 신설 이후 묘 안장이 중단되었지만, 실내 봉안시설인 충혼당이 2006년 3월에 개원하면서 유족의 의사에 따라 서울 현충원 충혼당에 유해를 봉안할 수도 있다. 충혼당이 만석에 가까워지면서 2022년 1월부터 제2충혼당이 준공하여 2024년에 개원할 예정이다.

시설[편집 | 원본 편집]

  • 국가원수 묘역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안장.
  • 임시정부요인 묘역
    박은식, 오영선, 홍진, 박찬익, 이상룡, 이유필, 양기탁, 황학수, 신규식, 지청천, 노백린, 조경한, 김인전, 손정도, 김동삼, 이강, 윤세용, 김성숙 등 18인과 배우자 애국지사 3인 안장.
  • 독립유공자 묘역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항일 운동을 벌인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213위와 배우자 애국지사 9위를 포함하여 총 222위가 안장되어 있다. 중앙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및 임시정부 요인, 무후 순국선열을 통틀어 추모하는 충열대가 있다.
  • 무후선열제단
    독립유공자 중 유해를 찾지 못하고 후손이 없는 선열 134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국가유공자 묘역
    정치, 경제, 외교, 안보, 과학 분야에서 국가 발전과 민족 번영을 위해 힘쓴 국가유공자 총 70 위가 안장되어 있다. 국가유공자 제 1묘역, 제 2묘역, 제 3묘역으로 구성된다.
  • 장군묘역
    8.15 광복 후 국군 창설과 발전에 기여하고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북한의 도발에 맞선 장군들의 유해가 안장된 묘역. 육군 265위, 해군 51위, 공군 39위 등 총 355위가 모셔져 있다.
  • 장병묘역
    국군 창설 이래 여러 전쟁에서 전사한 장병이 안장된 묘역. 국립서울현충원의 묘역 대부분을 차지하며, 총 5만 2,936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 경찰묘역
    전시에 전장에서 전사하거나 무장공비와 맞서다 순직한 경찰관 안장. 국립서울현충원 5, 8, 9번 묘역과 7번 묘역 일부에 조성되었으며, 839명이 안장되어 있다.
  • 외국인 묘역
    한민족을 위해 도움을 준 외국인들의 유해 안장을 위해 조성된 묘역. 제암리 학살 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중국 화교 출신으로 6.25 전쟁 시기 국군 1사단 15연대에 종군하여 중국 병사 포로 심문, 적정 수색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한 장후이린, 역시 중국 화교로서 보병 1사단 수색대에 편입되어 적정 수색과 첩보 활동을 수행하고, 전후 한의사로서 극빈환자 무료 진료, 장학 사업 등을 했던 웨이쉬팡 등이 안장되어 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