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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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學秀.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 이명은 이국현(李國賢).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9년 6월 10일 한성부 화동에서 부친 황두연(黃斗淵)과 모친 홍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고 자신이 남긴 회고록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상업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상당한 재력가였던 것 같다. 그가 태어날 무렵엔 개항 이후로 한성의 정세가 매우 어수선했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발발하기도 했다. 이에 부친은 부인과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키고자 했다. 황학수는 이러한 부친의 의도에 따라 6살 때인 1884년 어머니 홍씨와 함께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 삼화동으로 내려왔다. 이후 황학수는 한성으로 복귀할 때까지 이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황학수가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모친 홍씨는 매일 녹음메[1]을 지어 기도하기를 작고하는 순간까지 했으며, 아들에게 무척이나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는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으며, 부친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모친은 단양군에서 유명한 유학자였던 허선생을 찾아가 황학수의 교육을 맡겼다. 황학수는 허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한성으로 이사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또한 그는 16살 되던 해인 1894년 정월에 정희섭(丁喜燮)의 19살 된 딸과 결혼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제천에서 활동하자, 황학수는 동학에 가담했다. 그는 후에 회고록에서 자신은 혈기의 왕성함으로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입당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곧 동학을 탈당했다. 그의 부친과 서울에 있던 장인 정희섭이 앞다퉈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후 양 부모가 모두 사망한 1895년경 서울로 상경한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응시했다. 당시 무관학교에 응시하려면 우선 군부의 장군 또는 장교의 추천이나 칙임관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그가 누구의 추천을 받았는지, 또 어떤 경로로 응시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역시 생도 선발규정에 따라 추천되었겠지만, 그 배경이 든든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회고록에서 무관학교에 입학하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관학교를 신설하고 처음으로 생도를 모집하는데, 그 응모자가 다수였으므로 나역시 지원은 하였으나 자신이 적더니 요행으로 합격하였다.

과연 무관학교의 경쟁률은 대단했다. 당시 200명을 모집하는 시험에 1,700명이나 응시한 것이다. 이렇듯 지원자가 많은 것은 대한제국 선포 후 신설된 최초의 무관학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무관의 품계가 다른 직종에 비해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황학수는 치열한 경쟁끝에 당당히 합격하여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그는 1년 6개월간 공부한 후 1900년 1월 19일 졸업하고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졸업식엔 고종이 참석해 이들에게 직접 졸업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황학수 역시 고종에게 졸업장을 수여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황학수는 친위군 제1연대 제1대대에 견습생으로 명령받았다가 1900년 9월 21일 시위대 제1연대 제3대대로 부임했다. 당시 그는 강직하고 충성스런 군인으로 평가받았다. 시위대대장을 겸직하고 있던 이용익이 배척운동을 받고 있을 때, 그는 단독으로 5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종로에 나아가 이용익을 배척하는 이들을 막았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군대 내에서 커다란 신임을 얻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학수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명령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기 때문에 군법에 의거해 처벌받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의외로 '쾌활한 남자'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대한제국 군대의 여러 곳으로 발령받아 근무했다. 그러던 1904년 12월 일제는 고종에게 '한국군제 개정에 관한 의견'을 건의했다. 이를 계기로 대한제국 군대에 감원 바람이 불었다. 황학수는 자신이 이용익과 관련이 깊은 만큼 감원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1905년 육군연성학교 교관으로 발령되었다. 육군연성학교는 육군의 교육을 통일, 개량하기 위해 1904년 9월에 설립한 곳으로, 내면적으로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군사력을 장악하려는 일제가 그동안 대한제국군에게 실시된 러시아식 군대교육을 일본식 군대교육으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갖고 구식 장교들을 재훈련하기 위해 설치했다.

황학수는 연성학교 교관으로 임명된 지 얼마 안되어 다시 안동진위대 대장으로 부임했다. 군부협판 이희두는 그에게 경북 일대의 '토비'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황학수는 이들이 도적떼가 아니라 '의병'이라는 소문을 듣고 안동진위대 대장을 사퇴하려 했지만 이희두가 받아들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안동진위대에 부임했다. 그는 나름대로 두 가지 방침을 세웠다. 하나는 자신의 관할지역 내의 의병을 자진해산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의병들을 사살하기보다는 생포하여 석방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하사들이 상부에서 이 사실을 알면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황학수는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그대들은 마음쓰지 말고 안심들 하라."면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황학수는 2년 동안 안동진위대 대장으로 복무한 뒤 다시 한성으로 올라와 육군유년학교 교관이 되었다. 육군유년학교는 15~18세의 학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곳으로, 일종의 무관학교 예비과정에 해당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정미7조약에 의거하여 해산되었다. 황학수는 일제로부터 일본 유학 제의를 받았으나 거부하고 낙향을 택했다.

황학수는 제천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1909년 6월 지방 유지들과 함께 부명학교(溥明學校)를 설립했다. 이후 육군무관학교 동기생이었던 김학소(金學韶)를 만난 그는 김학소로부터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는 상황에 대해 전해듣고 만주가 지리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적합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는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심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군자금을 마련한 후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그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원도 오대산에서 금광을 시작했다. 그러나 금광사업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가산마저 탕진했다. 이에 그는 혈혈단신이라도 만주에 가서 활동하기로 했지만 막상 실천을 못하고 주저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발발하고 있는 것을 목도한 그는 해외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온양 온천에 다녀온다는 소문을 내고 서울로 상경해 차남 황길성(黃吉性)을 만났다. 그는 아들로부터 국외 독립운동에 대하여 상세한 소식을 접한 뒤 국경을 넘어 만주로 향했다. 이후 김학소를 찾아가려 한 그는 만주에서 옛 고구려의 유적지를 구경하면서 김학소의 소재처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김학소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자, 그는 우선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로 하고 안동현에서 외국기선을 타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때 김학소는 김혁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단의 부단장을 지내고 있었다. 이름을 바꾸고 활동했다. 이 때문에 황학수가 김학소의 소재처를 알수 없었던 것이다.

1919년 11월 3일 이전에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11월 3일 임시정부 각원들의 취임식에서 내빈으로 참석했다. 그는 곧바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에서 군사활동과 관계된 일을 맡았다. 1919년 11월 17일 군무부 참사에 임명된 그는 1년여 동안 군무부에서 활동했다. 당시 군무부는 두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나는 군무총장 노백린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미주동포 김종림(金宗林)의 후원을 토대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차장 김희선 주도하에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초급장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황학수는 이 중 김희선과 함께 육군무관학교에 관여해 임시정부의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책임을 맡았다.

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은 군무부 차장인 김희선이었고, 황학수는 교관으로서 무관학교 학도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담당했다. 그러나 교장인 김희선이 변절하여 일제에 투항한 후, 그는 대신 무관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무관학교는 1921년 5월 제3기생 17명이 입교한 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폐교되었다. 한편, 황학수는 임시정부의 국내조사원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충청북도 제천군의 조사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의정원에서 충청도 의원을 맡아 군사 관계를 담당했다. 하지만 그는 1920년 3월 8일 의원직을 사면했는데,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관학교 폐교 후, 그는 만주로 가기로 결심했다. 사실 그는 상하이에 있으면서도 만주 지역에 대한 정보를 탐문하며 김학소의 소재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학소가 북로군정서에 가담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임시정부의 모든 직책을 사퇴하고 곧바로 만주로 향했다.

임시정부를 떠나 만주로 향하던 그는 베이징에서 각 지역의 독립군단이 모여 통일을 모색하기 위핸 군사통일회가 베이징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여기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군사통일회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반대하던 세력들이 주도한 것으로, 자유시 참변 이후 분산되고 약화된 무장투쟁단체들을 통일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었다. 1921년 4월 17일 국내외 10개 단체의 대표 17명이 참석한 가운데 군사통일주비회가 소집되었고, 이어 회의의 명칭이 군사통일회로 결정되었다.

황학수가 구체적으로 군사통일회에 참여하게 된 과정이나 경위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그는 군사통일회가 개최된 4월 17일부터 참석했고, 신숙 등과 함께 통일당 대표로 참석했다. 통일당은 신숙이 상하이에서 천도교 교인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단체였다. 그는 군사통일회에서 신숙을 의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박용만과 함께 군사위원에 선임되었다. 군사통일회는 이후로 연일 회의를 개최하며 여러 사항들을 결정했지만 핵심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사 위주의 노선과 방략을 채택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부정하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4월 19일 국제연맹에 한국의 위임통치 청원을 제출한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성토하는 결의문을 작성해 54명의 공동명의로 발표했다.

임시정부는 이에 대해 군사통일회를 규탄하고 각 단체의 경계를 촉구하는 내무부령 제121호를 발표했다. 그리고 천진 지역의 한인 동포들은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군사통일회의 주동자들을 '국적'으로 규정해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이들을 토벌하자고 나섰다. 이렇듯 반발이 거세지자 군사통일회의 주장과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시기 황학수는 처음부터 군사통일회에 관여하고 있었지만 회의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나 주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볼 때 임시정부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단순히 참여하기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군사통일회가 별다른 결말을 내지 못하고 유야무야되자, 그는 발길을 만주로 향했다.

베이징을 떠나 만주로 향한 그는 지린성 화전현에 거주하고 있던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을 만났다. 황학수는 이상룡으로부터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독립군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상세하게 전해듣고 김학소를 찾아가는 걸 단념했다. 이상룡은 화전현에서 서로군정서를 재건하고 있었고, 황학수에게 함께 할 것을 요청했다. 황학수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1921년 5월 서로군정서가 재정비될 때 참모장 겸 군부부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그는 서로군정서의 군사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애썼지만 서로군정서 내부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지자 싫증을 느끼고 은둔했다.

그러다가 1923년에 다시 서로군정서의 군사부장에 취임한 그는 다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당초에 서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추천한 적이 있었던 박용만이 '일제에 항복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서로군정서는 이를 근거로 박용만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 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 그는 박용만과의 내응 여부 문제를 두고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황학수는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고 한다.

박용만의 사정을 확실히 알지도 못하고 사형선고까지 하니, 만약에 이것이 일본군의 모략이라면 어찌하느냐, 아무리 보고가 있더라도 좀더 신중히 조사한 후 처리할 필요가 있지 아니하냐.

그러나 그는 이 일로 군사부장의 직을 사면하고 서로군정서를 떠났다. 그후 정처 없이 북만주로 향하던 중 마적단에게 체포되어 위험에 처했다가 서로군정서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마적단 중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본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렇게 떠돌던 그는 무치하에서 농지를 개척하며 살아가던 최남표(崔南表)로부터 무치하의 청년들에 대한 군사훈련을 부탁받고 한동안 무치하에 머물면서 군사강습을 실시했다. 그러던 중 김학소가 1925년 3월에 설립한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1925년 말, 김학소의 서신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는 곧바로 무치하를 떠났지만 황지령자에서 서로군정서 부독판을 지냈던 여준으로부터 군사강습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몇달간 머물며 청년들을 가르쳐야 했다.

1926년, 황학수는 마침내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김학소와 재회했다. 이후 황학수는 신민부의 참모부 위원으로 암명되었다. 그는 신민부 관할구역 각지를 돌아다니며 군구를 개척, 확대해가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이를 위해 때로는 군사강연도 하고 노동야학을 설치하여 교육도 실시했다. 그리고 별동대를 조직해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게 함으로서 각 지방이 점차 정돈되었다. 이러한 활동 중 돈화 지역을 개척한 것은 가장 큰 성과였다. 동만주의 돈화 지역은 일본의 세력 범위에 있어서 신민부의 지방자치조직이나 군사조직이 설치되지 못하고 있었다. 황학수는 안전지대에서만 활동해서야 혁명의 본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1927년 별동대원 30여 명과 함께 돈화로 향했다.

돈화에는 자유시 참변 후 이곳에 내려온 독립군들이 흩어져 농사를 짓고 있었고, 황학수는 이들을 중심으로 군구제를 실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관헌에 발각될 경우 곧바로 일본영사관에 넘어가게 된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그는 중국측 책임자와 교섭하기로 하고 중국 관헌 왕삼덕에게 서신을 보내 군사시설의 묵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삼덕은 관할구역에 일본경찰서가 많고 일본 관병도 주둔해 있어서 독립군이 보이면 일본군은 물론이고 중국군도 할 수 없이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아학수는 왕삼덕을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짓기로 하고, 부하 한 명만 대동한 채 중국 관리로 변장하고 왕삼덕을 찾아갔다. 그는 왕삼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인은 망국의 백성으로 해외에서 방랑하면서 오로지 조국광복에만 전력하여 왔거니와 우리는 무장 주닙를 하여 입국투쟁할 준비만 하고 귀국에 해를 끼치지 않을 터이니 우리의 독립운동을 묵인하여 주시오.

왕삼덕은 이러한 황학수의 태도에 감복하여 협조를 약속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신민부의 관할구역이 동만의 돈화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1927년 2월 김학소를 비롯한 간부 12명이 일제에게 붙잡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황학수는 급히 본부로 귀환했지만, 이 일로 큰 타격을 입은 신민부는 간부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하여 민정파와 군정파로 갈렸다.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 김좌진은 이러한 희생을 계기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민사부위원장 최호(崔灝) 등은 우선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두 의견의 대립은 상호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신민부는 1927년 12월에 개최된 총회를 끝으로 김좌진을 중심으로 하는 군정파와 최호를 중심으로 하는 민정파로 갈라졌다.

황학수는 김좌진의 편에 섰고, 김좌진이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위원장을 맡을 때 자신은 참모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김좌진과 함께 활동하며 군정파의 주요 인물로 거듭났다. 그는 먼저 중국 마적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두기로 하고 마적단 대표 인사들과 회합을 가진 끝에 그들의 관할구역에서 '신분 증명서를 제시하는 한인의 통과', '교포의 재산 약탈 금지' 등에 대한 협력을 얻어냈다. 또한 국내 진공을 위한 준비도 진행했다. 장교 중에서 자원자를 선발하여 국내 진입을 위해 필요한 지리 및 작전 지도 작성, 일본군 주둔지 등을 조사하게 했다. 이를 위해 3개조가 편성되었다. 제1조는 압록강을 건너 강계를 거쳐 평양까지를 맡았고, 제2조는 백두산으로부터 함경, 강원, 경상도의 산맥을 따라 전라도 지리산까지를 맡았으며, 제3조는 두만강을 건너 북청까지로 정했다. 조사원들은 반 년에서 1년 만에 목적을 달성하고 무사히 귀환했다.

이 무렵, 만주 지역에서 유일당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황학수는 1928년 신민부 대표의 일원으로 3부통합운동에 참여했다. 1928년 5월 유일당 조직을 협의하기 위한 1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고, 유일당을 조직하는 방법과 절차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결국 결론이 나지 않자, 신민부 군정파는 김동삼, 지청천 등의 정의부 이탈 세력과 연합하여 1928년 12월 신민부와 참의부의 해체를 선언하고 혁신의회를 조직했다. 혁신의회는 신민부 군정파와 참의부, 그리고 정의부의 일부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단체로, 황학수는 여기에 가담해 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황학수는 혁신의회에서 군사위원장을 맡아 신민부가 관할하던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1929년 5월 혁신의회가 해체되자 서란현 노흑정자로 이동하여 생육사(生育社)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생육사는 황학수를 비롯하여 홍진, 지청천, 김좌진 등이 조직하여 한인들의 토지소유를 위한 활동을 전개한 단체였다. 그러다가 1930년 1월 공산주의자 박상실이 김좌진을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민족진영의 위기의식이 팽배해졌고, 북만주 일대의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리하여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가 결합하여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

황학수는 한국독립당의 주요 간부로 활동했으며, 위원장 홍진과 더불어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창당 후 한족자치연합회 등과 같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단체를 조직하며 북만주와 동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 기반을 확대했다. 당원의 모집과 더불어 각 지역에 군구를 설치했는데, 1931년에는 군구의 숫자가 36개에 이르렀다. 그러던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벌어지자, 한국독립당은 긴급 중앙회의를 개최해 각 군구에 있는 청장년들을 소집하기로 결의하고 1931년 11월 한국독립당의 당군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했다. 군사위원장인 지청천이 총사령장관을 맡았고, 황학수는 여기에 가담하여 중국군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1932년 11월, 황학수는 부사령에 선임되었다. 이후 그는 총사령관 지청천과 협의해 길림구국군과의 합작을 추진한 끝에 한중연합군을 편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황학수는 경박호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등 한국독립군의 여러 전투에 참가했으며, 병력 모집 임무도 별도로 수행했다. 그는 1933년 5월 29일 장정을 모집하기 위해 각 군구를 돌아다니며 병력을 모집했다. 그러던 중 사하자에 이르러 신민부군을 모집하고 있던 그는 김구가 낙양군관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을 훈련시킬 계획을 세우고 지청천을 그 책임자로 삼아 한국독립군을 비롯한 만주 지역 한인청년들의 입교를 제의해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때마침 한국독립군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1933년 10월 중국군과 함께 작전을 준비하던 중 중국군의 오의성 부대가 한국독립군 총사령부를 기습 포위하고 총사령 지청천 휘하 330여 명의 한국독립군을 체포, 구금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동안 노획한 무기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대립으로 발생했는데, 나중에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된 오의성이 10월 하순 한국독립군 간부들을 모두 석방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독립군 대부분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한국독립당은 더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한국독립군은 중국 관내로 이동했다.

하지만 황학수는 이들과 함께 행동하지 못했다. 모병의 임무를 맡아 관할 군구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청천이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변의 위험을 느껴 모병 활동을 중단하고 이탁과 함께 중국인 집에 은거했다. 그러나 그의 은거지가 노출되었고, 전에 함께 활동했다가 일제에 투항한 청년이 찾아와 황학수와 이탁에게 투항을 종용했다. 황학수와 이탁은 그 청년을 질책하여 쫓아버린 뒤 서둘러 피신했다. 그러다가 관전현에서 이탁과 헤어진 그는 혼자서 임시정부를 찾아 중국 관내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일제의 추적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헤매야 했다.

만주를 떠난 뒤 임시정부에 합류하기까지 4년간의 행적은 황학수의 회고록 외에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농민복으로 변장한 후 여러 도시를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후 베이징 교외의 중국인 집에 머물면서 동지들을 수소문했지만, 그 전에 일본 경찰에 쫓겼다. 그렇게 한동안 쫓기던 그는 포두 방면에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이때 그의 수중에는 달랑 3원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포두에 가까스로 도착했지만 한인 동포들의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그는 그곳에 사는 중국인과 몽고인들에게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당하기까지 하자 절망에 휩싸였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아예 황하에 빠져 죽으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황하로 향하던 길가에서 우연히 의주 출신 한인 동포를 만난 그는 그 동포로부터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조병준이 근방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조병준은 1923년경 80여 명의 한인을 인솔하여 포두에서 20 km 떨어진 곳에 정착하여 이곳에 약 60만 평에 달하는 농지를 개간하여 살아가면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황학수는 여기에 찾아갔고, 그곳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소식과 중국 관내의 실정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임시정부를 찾아 다시 남쪽으로 향한 그는 대동에서 잠시 체류했지만, 일본군이 대동을 점령하자 마점산 부대가 있다고 하는 오원을 향해 떠났다. 그러다가 도중에 중국군에게 붙잡혀 일본군 정탐으로 오해받아 철창에 갇힌 뒤 자칫 총살형에 처해질 뻔했다. 이에 그는 군장에게 서한을 보냈고, 다행히 오해가 풀려 석방될 수 있었다.

오원에 도착한 황학수는 마점산을 찾아갔다. 마점산은 흑룡강성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중국의 군벌로, 이 시기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동북군 총사령에 이명되어 오원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점산은 황학수를 환대하고 자신의 고문을 맡아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마점산 부대에 머물고 있다가 난징에 이동해 있던 옛 동지로부터 속히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에 그는 마점산으로부터 후한 여비와 호송을 받으며 남쪽으로 향했고, 이윽고 1938년 2월 창사에 도착하여 마침내 그곳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합세할 수 있었다.

황학수는 1938년 7월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군사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를 전담하였다. 1939년 5월 임시정부는 일본군을 피해 쓰촨성 치장에 도착하였고,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추진하기 위해 중국과 협상에 나섰다. 이때 중요한 것이 병력의 확보였다. 황학수는 군사특파단의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산시성 시안으로 가서 초모활동에 나섰다. 그 노력으로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광복군은 총사령부를 시안에 두기로 결정하였고, 황학수가 총사령 대리를 맡아 시안총사령부를 통솔하였다.

한국 광복군은 처음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나 김원봉계열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에 편입하며 확대 편성하였다. 전지공작대의 편입은 광복군의 병력을 크게 증강시켰고 이는 황학수의 영향이 컸다. 그는 당시 전지공작대가 운영하고 있던 한국청년훈련반의 교관으로 있었고, 이러한 인연으로 전지공작대의 편입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황학수는 지대 편성 이후 초모활동과 함께 광복군의 기관지 〈광복〉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지속적인 대일항전을 위하여 초모활동을 계속해 나가던 시안총사령부는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아 총사령부를 충칭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황학수는 1942년 10월 충칭으로 이동했고, 시안에는 제2지대만을 남겨두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 내에서 활동하여 국무위원과 생계부장으로 섬임되었고, 1945년 7월 중앙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다가 충칭에서 8.15 광복을 맞이한 그는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제2진으로 환국했다.

황학수는 귀국 후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국민의회에서 정치분과 위원장과 한국독립당의 중앙감찰위원장을 역임했으나 곧 사임하고 서울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향리인 제천군 금성면 중전리로 피난했고, 1953년 3월 12일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75세. 그는 그곳에 매장되었다가 1994년 국립서울현충원 임정 묘역에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황학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

  1. 놋쇠로 만든 세옹이 짓는 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