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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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尙奎. 호는 백민(白民), 이명은 허각(許鈺), 허탁(許鐸).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1890년 4월 19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내면 노하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노하마을)에서 아버지 황문옥(黃文玉)과 허경순(許敬順)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경성지방법원이 1921년 6월 21일에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 관련 피검자들에에게 내린 <곽재기 외 14인 판결문>(이하 <판결문>)에 따르면, 황상규의 직업은 '농업'이었다. 이에 따른다면 그의 집안은 농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그의 집안 배경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학업 이력 또한 명확하지 않으나, 1906년 밀양 향교 안에 설립된 진성학교를 졸업했으며 1908년에 동화학교에 입학했고, 뒤이어 고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이라는 역사 교재를 저술하여 가르쳤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황성신문> 1909년 10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1908년 7월에 밀양 성내에 노동야학이 개설되었는데 생도가 200여 명에 달했지만 교비 조달이 어려워 운영이 잘 되지 않자 이를 딱하게 여긴 관청이 교사들을 명예교수로 추대했는데 그 중 체조교수가 황성규였다고 한다. 황상규는 이 경력을 디딤돌로 삼아 군내 상동면의 고명학교 교사로 일할 수 있었으며, 1910년부터 동화학교 교사가 되어 약 1년간 재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상규를 아는 이들은 그를 삼국지연의관우를 본따 '관운장(關雲長)'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는 그가 관우처럼 무게 있고 믿음직스러운 언행, 굳센 의지, 강직한 성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후에 그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그가 "한없이 강직하며 용감하여 기대를 많이 받았다."고 평가했다.

황상규의 오랜 동지였던 윤치형(尹致衡)이 1962년 6월 26일 <국제신보>에 게재한 '의열단 밀양폭탄사건 회고'에 따르면, 황상규와 윤치형을 비롯한 몇몇 젊은이들이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을 목표로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했다고 한다. '일합'이란 조국 독립을 위해 청춘의 일편단심을 합한다는 뜻이었으며, 동지들은 주로 밀양 사람들이었고 대구와 마산 등지의 동지들과도 서로 연락했다고 한다. 윤치형은 "이때 우리들의 나이는 20세 전후였다."고 기술했는데, 이에 따른다면 일합사의 결성 시점은 1913년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일합사는 형식상 친목단체였고 항일투쟁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1918~1919년 평안남도 경무부 수사기록에 따르면, 1891년 경남 동래군 가장면 태생이고 16세 때 외가가 있는 밀양으로 이주한 구영필(具榮佖)은 1913년 4월 경 서간도로 건너가 여러 곳을 둘러보고 1915년 9월 귀국한 뒤 1916년 12월경 밀양에서 김대지, 황상규와 협의하여 국내외 동지를 규합하여 결사를 형성하기로 뜻을 모으고 결사체의 이름을 합사(合社)로 내정했다고 한다. 또한 구영필은 김대지에게 활동계획서인 <합사 진행책>을 기초하게 했고, 그것을 마산의 안확과 명도석에게 보여주고 가담할 것을 권유해 승낙을 얻어냈다고 한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합사는 실업, 군사, 외교 부문의 광범위한 준비와 실력행사로 국권회복을 꾀하는 거대조직으로 구상되었고, 국외 독립운동자들과 연계해 상당한 조직망을 형성하려 했다고 한다. 이와 별도로, 황상규와 김대지, 이각이 1913년 말에서 1914년 초 즈음에 비밀결사 광복단에 가입하여 정식단원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광복단은 1913년경 경상북도 풍기에서 의병운동 경력자인 채기중, 한훈 등 10여 인의 발기로 결성되었는데, 조직망을 넓히고 회원을 늘려가는 과정에서 일합단을 구성하고 있던 밀양 젊은이들과 연계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의 주도로 대한광복회가 결성되었을 때 광복단원들도 대부분 참여해 새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구영필이 1918년 2월경 조선국민회 사건을 수사 중이던 평남경찰부에 의해 봉천에서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합사 조직은 이로 인해 드러났다. 결국 김대지, 안확, 명도석이 체포되어 감옥에 수개월간 복역해야 했다. 광복회 역시 1917년 11월 일제에게 협력하던 관원 장승원(張承遠)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이래 주축인물 다수가 계속 검거되었다. 황상규는 합사와 광복회 모두에 가담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수배 대상이었고, 1918년 말 무렵 만주로 망명해야 했다.

지산 정원택의 <지산 외유일기>에 따르면, 1919년 2월 27일 길림성 북문밖의 여준의 집에서 여준, 박찬익, 황상규, 김좌진, 정원택, 정운해 등이 모여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고 한다. 이후 여준이 대한독립의군부의 총재로 추대되었고, 황상규는 재무국 회계과장을 맡았다. 또한 황상규는 조소앙과 아우 조용주(趙鏞周)가 함께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 중 한 사람이었다. 선언서는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라는 문구로 끝나는데, 이는 독립군 조직에 의한 무장투쟁을 벌이겠다는 것임을 의미했다.

황상규는 재무 책임자로서 둔전을 물색하기 위해 길림을 방문했던 김약수가 조선으로 돌아가며 내놓고 간 일화 1만엔, 황무지 개간을 위해 길림을 찾았던 평양인 김모(金某)가 희사한 일화 6천엔, 충남인 정명선(鄭明善)이 제공한 1천엔 등을 관리했다. 이 돈은 독립선언서 인쇄비와 발송비, 각처 파견자의 여비, 마필, 무기 구입비 등으로 쓰였다.

그러나 대한독립의군부는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침체되었다가 1919년 5월 서일의 대한정의단으로부터 제휴 제의를 받자 이를 승낙하고 그해 10월 여준, 박찬익, 황상규 등이 서대파로 가서 대한정의단 간부 김좌진, 현천묵, 계화(桂和), 정신과 만나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대한독립의군부는 대한독립단과 연합해 대한군정부를 새로 조직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년 12월에 군정부는 성립 사실을 임시정부에 보고하면서 국무원 포고 제205조에 의해 대한군정서(속칭 북로군정서)로 개명했다.

북로군정서 본부는 총재부 예하의 다수 집행부서들과 군사 부문을 전관하는 사령부로 구분되는 조직체계를 갖추고 길림에 분서를 두었다. 이것이 바로 '길림군정서'로, 황상규는 이 곳에 몸을 두고 재무부장으로서 길림 일대의 독립운동자금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1919년 3월, 난징 금릉대학에 재학 중이던 김원봉이 북행길에 올라서 3월에 길림에 들어섰다. 이후 그는 6월경에 유하현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생도들을 포섭한 뒤 길림으로 돌아왔다. 이는 길림에 거주하던 고모부 황상규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김대지가 1919년 5월 경 비서 고인덕을 대동해 길림군정서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황상규와 광복회를 조직해 활약하고 있던 손일민을 만났다. 세 사람은 군대조직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의열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후 세 사람은 김원봉이 포섭하여 길림으로 데려온 이성우,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신철휴, 서상락, 권준, 김상윤 등과 함께 비밀결사조직 결성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또한 김대지는 1919년 7월 김원봉, 이종암과 함께 길림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김원봉, 이종암은 상하이에서 폭탄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히면서 임시정부의 부속기관인 구국모험단 단원들과 교제했다. 이후 김원봉은 다시 길림으로 돌아가 곽재기를 상하이로 보내 폭탄 제조 기술자 김성근을 길림으로 초빙해 길림에 있는 동지들도 폭탄 제조와 사용법을 익히게 했다.

1919년 10월 말경, 김대지는 임시정부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잠입하기 전 길림으로 가서 황상규를 만났다. 1924년도 일제 경찰, 검사국 신문조서에 따르면, 김대지는 비밀결사 단체의 이름을 정의(正義)의 義와 맹렬(猛烈)의 烈을 따라 의열단(義烈團)이라고 명명하는 등 의열단의 결성과 관련된 최종적인 합의를 보왔고 의열단의 인장도 고안했다고 한다.

이후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모씨의 집에서 창단되었다. 최초의 조직 구성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재기,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등 13인으로, 신흥학교 졸업생이거나 밀향 동향인이었다. 창립단원들은 피를 나눈 형제처럼 굳은 의리로 뭉치고자 했고, 서로 의형제를 맺고 그 중 맞이라는 뜻의 '의백(義伯)'을 정하고자 했다.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에 따르면, 김원봉이 선거에 의해 의백, 곧 단장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황상규가 '초대 단장', '제1세 단장'이었다는 표현과 '창단 당시 의백, 즉 단장'이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조선일보 1931년 9월 4일자 기사는 황상규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그가 의열단 초대 단장이었음을 명시했다. 또한 이종범의 <의열단 부장 이종암전>에 따르면, 황상규가 초대 단장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수택 신문조서>에 따르면, 의열단이 막 창단했을 때는 곽재기가 임시단장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단장 선임을 놓고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까닭은 창단 당시에 단장 선임이 간단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러 정황 증거 및 증언을 토대로 짐작하건대, 의열단 건립에 관계했던 청년지사들 중 정식 단원이 되지 않기로 결정한 윤치형, 이일몽, 배중세와 의열단 초대 단원이 된 청년들과의 의견 충돌이 있었던 듯하다. 윤치형 등은 이력상으로나 연륜상으로나 황상규가 의백, 즉 단장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으나 청년들은 자신들과 함께 무관학교에서 의기투합했고 의열단 창립에 막대한 지원을 해준 김대지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김원봉이 의백이 되는 게 맞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양측의 의견이 대립하던 중에 열린 창단회합 때, 황상규는 '부득이한 사유'로 불참했다. 하지만 윤치형 등은 황상규를 일방적으로 단장으로 선임했고, 이에 대해 반발이 일자 황상규 본인의 의사를 물어 확정짓거나 다음번 회합에서 최종 결정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곽재기를 임시 단장으로 선임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황상규는 의백을 맡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고, 그 대신 김원봉을 천거하는 의사를 표해 결국 김원봉이 선출되고 곽재기는 부단장으로 지명되었던 것 같다. 이후 황상규는 의열단의 고문 역할을 자임했으며, 의열단이 곧바로 국내 일제기관 폭탄 의거 계획을 세울 때 깊이 관여했다.

의열단은 창립 직후 경성을 직공하기로 결정하고 남산 왜성대의 조선총독부, 황금정 2번가의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 경성일보사 세 곳을 표적으로 정했다. 단장 김원봉은 상하이에 남아 총사령관 역할과 함께 사후 선전을 맡았고, 부단장 곽재기는 전선사령관 격으로 국내 현지 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거사용 무기를 수득하는 데 힘을 기울인 의열단은 1920년 3월 대, 중, 소형 폭탄 1개씩을 구입하는 데 성공했고, 뒤이어 4월 초순에 점화식 폭탄 7개와 투척식 폭탄 6개, 제조용 폭약과 탄피, 권총 2정, 탄환 1백발을 중국인으로부터 추가로 구입했다.

무기 수득 성공 소식을 접한 황상규는 김상윤, 윤세주와 함께 자금조달을 위한 선발대로 1919년 12월 중순경에 조선으로 잠입했다. 뒤이어 밀입국한 단원들도 밀양, 부산, 마산, 서울 등 각자의 연고지로 분산해 잠복했다. 이후 무기를 성공적으로 반입시킨 의열단 부단장 곽재기는 3월 하순에 조선으로 들어가 거사 준비 상황을 점검했고, 한봉근, 신철휴, 김상윤, 윤세주 4인을 투탄요원으로 우선 지명했고, 나중에 곽재기 본인과 이성우, 김기득 3인이 추가되었다. 곽재기는 다시 상해를 다녀오고는 서울 공평동의 한 여관에 지휘소를 차려놓고 수차 지방순회 점검도 해가면서 거사준비를 독려했다.

상하이에 있던 김원봉은 3주 내에 결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일몽이 곽재기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준비 미흡", "재산가에게 출금받아서 거사 때 뿌릴 격문을 인쇄해야 한다."라는 등의 이유를 대며 실행을 미루거나 못하게 했다. 또한 "조급행동은 불찬성"이라며 거기에 동조하는 단원들도 있었다. 이때문에 의열단의 거사는 차일파일 지연되었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김원봉은 6월 중순에 안동현의 이낙준에게 지령서신을 보내 "20일 내로 결행하고 결행자와 일시를 즉시 통지하라"고 지시했다. 이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들어온 이낙준은 곽재기, 김기득에게 연락해 숙소인 서대문역 정태준(鄭泰駿)의 집으로 오게 했다. 황상규 역시 그 연락을 받고 가서 6월 21일 밤에 지령 내용을 전해들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일본 경찰이 낌새를 눈치채고 수사에 들어간 뒤였다. 6월 16일 이성우와 윤세주가 은신처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챈 황상규는 6월 24일 동지들과 함께 정태준의 집에 다시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김기득이 부산으로 가서 이일몽에게 독촉 내용을 전하고 폭탄을 받아오기로 결정했다. 이후 25일경 부산으로 간 김기득이 이일몽을 만나 두 동지가 체포되었으니 당장 결행해야겠다며 폭탄 16개를 모두 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일몽은 수일 후에 자기가 직접 갖고 상경하겠다면서 내주지 않았다. 결국 빈손으로 귀경하던 김기득은 남대문역에서 체포되었다.

황상규는 일이 틀렸다는 걸 깨닫고 곽재기와 함께 마포로 피신했다가 수창정(현 종로구 내수동) 이병기(李炳基)의 집으로 옮겨가 은신했지만, 곧 경기도경 고등과의 경찰들에게 급습당해 체포되었다. 곽재기는 마산과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가서 상하이로 탈출을 꾀했지만 7월 5일 여관에서 체포되었으며, 다른 동지들도 모조리 체포되었다.

황상규는 동지들과 함께 경남경찰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7월 31일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후 7개월 동안의 예심 절차를 거친 후 1921년 3월에 14명의 다른 피고와 함께 경성지법의 재판정에 세워졌다. 이후 1920년 6월 21일 결심공판에서, 황상규는 폭발물체제규칙과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3년 5년 4개월으로 감형되었고, 1926년 4월 24일에 김태희와 함께 마포의 경성 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1920년 4월과 11월의 일제 수사기록에 따르면, 군정사 재무부장이라 칭하는 허택(許鐸)이 여러 현의 한인 농민들로부터 군자금 4만 3연여원을 갈취하여 그 중 태반을 감추고는 몰래 향리로 보내는 식으로 사익을 채웠고, 나머지 돈으로는 주색을 탐해 내홍이 불거졌다고 한다. 그리고 1920년 2월 초순 길림성 내 이도부두(二道碼頭)의 요리점에서 식사하고 귀가하던 그는 10여 명 한인들의 비난을 받게 되자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고, 이 일이 군정사 해산이 한 원이 된 것으로 말해진다고 한다. 또한 의열단 폭탄 사건의 수사책임자였던 김태석은 1949년 반민특위 조사 때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길림군정서 회계과장 허택(황상규)이 총독 이하 요인암살 목적으로 폭탄 다수를 임국시켰는데, 책임자 황상규는 이 거사를 빙자하고 모금하여 주색에 탐하고 행동파인 이성우와 윤세주는 파고다공원 후면 하숙에서 솜옷을 입은 채 너음을 경과하게 됨에, 그 울분을 못 이기어 김진규, 안태익에 밀고하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김진규, 안태익이 우리에게 말하였다.

즉 황상규가 거사를 빙자하고 모금한 돈으로 주색을 탐하며 다른 동지들을 돌보지 않자, 이성우, 윤세주가 울분을 못이기고 밀정에게 자진 제보한 덕분에 일망타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록 및 증언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탄받고 재판에 회부된 김태석이 자신의 죄를 희석시키고 사람들이 독립운동가들에게 환멸을 느끼도록 의도적으로 왜곡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황상규는 출옥 후 1927년 4월에 윤치형, 윤세주와 함께 밀양청년회 신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밀양청년회는 그해 5월에 경상남도 당국이 밀양군청의 위치를 밀양역전으로 옮기려 하자 이는 일본인 지주 몇명을 위해 다수 군민의 이해를 희생시키는 짓이라면서 반대운동을 개시했다. 5월 3일 밤, 군청 앞 광장에서의 진정위원 보고회에서 황상규가 축사를 하고 군청이전 대책위원회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반대운동은 점점 기세를 더하여 연말에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후 2년 여 동안 계속 진행되었다.

1927년 10월, 황상규는 청년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지만 회원 연령을 30세 이내로 제한한다는 규정이 재확인되자 곧 사임했다. 이후 그는 1927년 11월 9일 밀양공립농잠학교 1,2학생 전원이 학교 당국의 강압조치에 항의하여 동맹휴학에 돌입했을 때 학부형 및 유지 모임에 참가해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어 학교 당국을 상대로 활동했다. 또한 같은 달 밀양공립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해 학생 1명이 불타 죽자, 그는 학부형회 부회장으로서 조사위원 대표로 선임되어 조사활동을 벌이고 교장 및 담임교사의 사과와 재발방지 서약서 제출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1928년 3월, 호아상규 등 5인이 교섭위원이 되어 경남도 당국에 교사 개축을 건의했다. 그러나 당국이 외면하자, 학부형회는 스스로 개축 기성회를 조직하고 비용 모금에 착수했다. 또한 황상규는 밀양여자청년회가 운영을 주관하고 있던 여자야학회의 교실 문제 해결을 위해 교섭위원이 되어서 교실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는 농촌문제 대강연회, 경남축구대회, 밀양유학생 간담회 등의 연이은 개최에 앞장서고 매번 사회를 보는 등 지역사회 내의 중요 행사들을 주도했다.

황상규는 언론운동과 한글운동 등의 전국적 민족문화운동에도 참여하여 힘을 보탰다. 영남 출신 민족자본가들이 일제의 극심한 언론통제에 맞서 새로운 민족지를 육성하기 위해 중외일보를 인수하고 주식회사로 재창립하는 움직임이 나오자 그도 여기에 호응해 중외일보 발기인으로 동참한 것이다. 그는 1928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창립총회에 참석해 이우식, 안희제, 이상협 등 호협지사형 대주주들과 교류했다. 또한 1929년 10월에는 조선교육협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발기해 총회를 개최했다.

1927년 12월 19일 신간회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황상규는 창립준비위원으로서 이 대회의 임시의장이 되어 본부 규약을 낭독하고 지회 규칙을 통과시켰다. 이후의 임원선거에서 황상규는 회장이 되었고 김병환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창립대회 이후로 회원 가입자가 급증하여, 며칠 사이에 70명에서 13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신간회 밀양지회의 창립과 조직구성을 주도한 이들은 3·1운동과 의열단 창건 및 밀양폭탄사건에 직접 참여했거나 지역 청년운동을 이끌어 온 인물들 중심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1928년 2월 신간회 밀양지회가 협동조합을 결성했을 때, 황상규는 협동조합장으로 선임되어 협동조합운동이 경제운동으로 시작하지만 종국의 목적은 정치운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했다. 그 후 밀양협동조합운동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또한 황상규는 군내 선전홍보 및 조직 확충, 인근지역 지회와의 유대증진 활동을 폈고, 본부 대회에도 출석했다. 이후 밀양지회는 2년여 동안 필요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나름의 원칙과 방향을 정해놓은 위에서 다양한 활동을 펴나갔다.

그러던 중 경찰이 전체대회를 금지해 정상적인 활동을 해나가기 힘든 상황에 직면한 신간회 중앙본부가 1929년 4월에 복대표대회 준비에 착수했다. 도내에서 인접한 몇 개 지회가 연결을 지어 소구역회의를 통해 1명의 대표(‘복대표’)를 선출하여 보내면, 그들이 모인 회의로써 전체대회를 대신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929년 6월 28~29일 양일간 서울 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리게 된 전국복대표대회에 황상규가 밀양·양산·울산 3개 지회로 구성된 양산 소구회 대표가 되어 참석했다.

총 27인의 복대표들 중에서 중앙간부진 선출을 위한 도별 1인씩의 11인 전형위원을 뽑게 되었을 때 황상규는 경남 몫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검사위원을 선출함에 있어서 허헌(許憲) 다음으로 많은 횟수의 추천권을 행사했으며 자신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어서 38명 위원이 참석해 열린 7월 4일의 중집위 회의에서 그가 서기장으로 지명 선임되었고, 본부의 각 부장 전형에서도 핵심 중책인 서무부장으로 겸임 피선되었다. 이에 그는 신간회 밀양지회장 직을 내려놓고 김형달에게 그 자리를 넘겼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신간회 본부는 진상조사단을 급파했다. 서무부장 황상규는 허헌 위원장, 김병로 재무부장과 함께 11월 9일 광주로 내려가서, 광주고보 학부형회 위원들을 만나고 유관기관을 방문하면서 사건진상 조사와 구속학생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귀경 후 11월 15일에 열린 중앙상무집행위원회에서 황상규가 진상을 보고했고, 상집위원회와 집행부는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2월 13일에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 대연설회(민중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경찰이 대회 개최를 엄금하고 허헌을 비롯한 신간회 간부 및 회원 외 청년·노동·여성단체 관계자 등까지 모두 91명을 예비검속하여 구금했다. 이로 인해 신간회 본부 기능이 마비되어 버리자, 기소유예로 석방된 김병로가 다른 부장직을 겸임하고 사실상 위원장도 대행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후 1930년 11월에 열린 전체대회대행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황상규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임되었지만 서무부장 직에서는 면임되었다.

이후 경성지회가 앙본부 일부 간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통의문’을 전국 지회들에 발송하여 본부에 맞서고, 신간회 ‘해소론’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일부 지방지회들에서 나오면서 신간회는 해소 위기에 몰렸다. 당시 중병에 걸려 고향에서 와병 중이던 황상규는 신간회 해소론을 반대하는 입장을 계속 피력했고, 밀양지회도 정기대회 결의 등을 통하여 일관되게 해소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인근의 마산지회와 양산지회도 같은 내용의 결의를 거듭 내고 신간회를 끝까지 지켜내려 했다. 그러나 1931년 5월에 개최된 제2차 전체대회에서 해소 안이 가결되고 경찰이 그 결과를 밀어붙이면서, 신간회는 스스로 해체되고 말았다.

신간회가 해소된 지 4개월 후인 1931년 9월 2일 밤, 황상규는 밀양시 내이동 자택에서 병사했다. 향년 42세. 신간지회 등 밀양의 13개 사회단체 대표자들은 사회단체 연합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협의 결정하고, ‘故 동지 백민 밀양사회단체연합장의위원회’를 결성했다. 밀양경찰서는 관내 전 경찰력을 동원해 3일부터 비상경계에 들어갔고, 연합장은 허락하나 조문ㆍ조전ㆍ만장ㆍ조기ㆍ약력문 등 일체를 검열 받을 것과, ‘조선운동선구자 백민황상규지묘'라는 묘비명을 금지한다고 통보했다. 그리고는 조기ㆍ조문ㆍ만장 등 10여 통을 압수하고 약력보고문도 대부분의 문구를 삭제했다. 결국 장의위원회는 '조선운동선구자'를 뺀 '백민황선생상규지구/묘'로 고치고 약력보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장례일인 9월 6일에는 밀양 읍내가 조문 인파로 길이 막혀 교통이 두절되고, 영결식장인 내이동 광장에 운집한 인파가 만여 명에 달하였다. 마산, 대구, 약수, 부산, 동래, 양산, 진주, 김해 기타 각 군에서 온 사회단체 대표들과 동지 수백 명이 조기와 조문 등을 갖고 줄지어 섰다. 악대의 주악이 울려 퍼졌고, 장의위원장 정웅(鄭雄)의 식사와 영결문 낭독에 참례객들은 통곡했다. 1백여 통의 조문과 조전이 일일이 낭독되었고, 1백여 개의 조기와 만장이 앞세워진 가운데 밀양청년동맹 외 각 단체가 교대로 상여를 운구했다.

경찰 당국은 장례행렬이 어느 순간 대규모의 시위대나 봉기군중으로 바뀔 것을 우려해 수십명의 형사대를 추가로 파견해 요소요소에 잠복시켰고, 장일에도 30여 명의 정사복 경관대가 경계하던 중 돌연히 장의 행렬의 길을 막고 명정을 빼앗아 딴 길로 가기를 강요했다. 행렬 선두가 경찰과 충돌하는 사이에 후미 쪽에서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밀고나갔고, 오후 3시경에야 영구가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용지리 선영하에 가까스로 도착하여 안장되었다. 이튿날인 9월 7일 오후에 서울 경운동의 천도교기념관에서 권동진 외 재경동지 200여 명이 참석한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이종린, 김병로가 애도사를 발표했다.

그의 별세 직후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황상규의 가정은 가난에 가난이 더하여져서, 지금 있는 집도 남의 집과 다름없는 것이었고, 한 뼘 땅도 없는 가정에 70여 세의 노모, 어린 두 아들, 출가한 딸 하나와, 당년 40세의 부인이 남겨졌다고 한다. 그 중 그의 아들 황용암은 927년 이후로 1930년대 초까지 밀양의 소년운동을 주도하고 청년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에도 관여하여 경찰에게 수차례 검거되기도 했다. 그는 1935년 12월부터 3년 이상 동아일보 밀양지국 기자로 일했고, 삼성의원의 조수로 있으면서 김형달에게 배운 의술로 빈민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해방 후인 1947년에 외사촌 김원봉의 비서가 되어 피신을 돕고 김원봉이 월북할 때 동행했다가 후일 남한으로 돌아왔고, 1971년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황상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