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익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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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益哲. 호는 묵관(默觀).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1890년경 평안북도 박천군 동면 상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1년에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해 동지를 규합하려 했지만 호응이 저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 지폐를 위조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1912년에 평안남도 안주경찰서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보안법 위반과 통화위조 혐의로 반년간 투옥되었고, 출소 후 1918년에 다시 압록강을 건너 중국 봉천성 흥경현으로 망명했다. 그는 흥경현에서 흥등학교(興東學校)의 교사로 한인교포 자제들을 가르쳤고, 한인공회(韓人公會), 대한독립의용단(大韓獨立義勇團)에 가담하여 간부로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발발 후 만주에서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자, 현익철은 북간도로 옮겨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그는 그곳에서 군사학을 교육받기로 결심하고 통화현 합니하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분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이수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분교에서 6개월간 숙성과정을 거쳤는데, 그 과정에서 또다른 독립운동가인 김학규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현익철은 남만주 지역의 한인동포 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했고, 서간도 일대 독립운동의 핵심기구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서로군정서가 만주 군벌 및 일제 영사관의 압력으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자, 그는 청장년 한인들을 규합하여 1920년 2월 중국 봉천성 관전현 향로구에서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했다. 광한단은 현익철과 같은 집안 친척인 현정경을 비롯해서 이호원(李浩源), 김석선(金錫善), 홍원경(洪元京) 등 40여 명이 참가했다. 현익철은 이들과 함께 식민지 기관을 습격하고 친일 부역배를 처단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

1920년경, 현익철은 관전현 묘자구에 광한단을 옮긴 뒤 김준경(金俊京) 등 9명의 단원을 국내로 파견하여 평안북도 정주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작전을 전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그는 일제의 수배를 받고 여러 차례 피신했지만 결국 1921년 초순 체포되어 1921년 2월 19일 대구지검 안동지청에서 대정8년 제령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1]이에 불복해 공소했으나 1921년 4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2]1924년 출옥 후 다시 압록강을 건너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남만주의 독립운동 통합조직인 통의부(統義府)에 가담하여 외무위원장을 맡아서 중국 관헌들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그러던 1925년 1월 남만주 지방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정의부(正義府)로 통합되자, 그는 다시 정의부에 가담해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을 맡았다. 그는 정의부 관할지역의 아동과 청소년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여 백두산 기슭의 군소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고 백두산 일대의 한인 동포들을 정의부에 귀속시켰다. 이후 그는 아동 교육용 교과서를 제작, 보급하여 백두산 지역 한인 동포 자제 교육을 지원하는 등 교육사업에 노력했다.

현익철은 친일파 숙청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6년 무렵, 통화현 쾌대무자에서 한의사로서 활동하고 있던 신한철(申漢喆)은 독립운동가들이 성공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백성의 돈만 빼앗아간다며 친일조직인 '상조계'를 조직하고 쾌대무자 일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선동해 정의부에 충성을 바치지 않게 했다. 또한 신한철은 독립군을 보는 대로 자기 집 바로 앞에 있는 중국 경찰에 신고해 통화일본영사관에 넘겨주게 했다. 이에 현익철은 그에게 여러번 경고했지만, 신한철은 콧방귀만 뀌었다. 현익철은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1926년 9월 정의부 의용군의 김창림 소위 등 5명의 대원을 파견해 신한철과 가족 전원을 사살했다. 이후 통화일본영사관 경찰은 김창림을 끈질기게 추적해 결국 체포했고, 김창림은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현익철은 1926년 양기탁, 이동구(李東求), 최소수(崔素水)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중앙위원으로서 정의부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1928년 9월, 정의부 주류파와 신민부 민정위원회, 참의부 심용준 계열 인사들은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을 결성하고 통일된 자치정부를 구축해 일제에 대항하려 했다. 이때 현익철은 김이대(金履大)와 함께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또한 1929년 3월에는 정의부 대표로서 이동림(李東林), 고이허, 고활신(高豁信), 최동욱(崔東旭), 이탁(李鐸) 등과 함께 남만주 지방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인 국민부(國民府)의 조직에 참여했다.

1928년 5월 28일 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자, 현익철은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대어 김이대, 장승언(張承彦), 이웅(李雄) 등과 함께 한인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민족 교육, 독립운동 지휘, 친일파 및 일제 지배기구 습격 등에 전념했다. 또한 그는 1929년 5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 대표로 선임되었으며, 그해 말에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겸했고, 1930년에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을 겸했다.

1931년 7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겸 조선혁명군 총사령을 맡은 현익철은 요녕성의 중심지인 심양에 가서 만주 군벌에게 <동성한교정세일반(東省韓僑情勢一般)>과 <한중민족합작의견서(中韓民族合作意見書)>를 제출하고 한중연합 투쟁을 제의했다. 그러나 몇 차례의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그는 한일 밀정의 밀고를 받은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간 뒤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6년 신의주 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출옥한 현익철은 일제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 1936년 말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고 있던 난징으로 이동한 그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부인 방순희와 어린 아들 현종화(玄鐘華)를 데리고 창사에 도착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중국 절강성 항저우로 옮겨졌지만 자금 부족으로 조직 운영은커녕 식량 마련 마저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이에 임시정부는 식량 값이 저렴하고 그리 멀지 않은 홍콩을 통해 해외와 연락할 수 있는 창사로 옮겼다.

현익철은 창사에서 만주 조선혁명당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934년 난징 지역으로 옮겨온 친구 김학규와 연계를 맺고 중국 관내지역에서 재건된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새로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조선혁명당의 대표로서 9개 독립운동단체가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할 때 운영간부가 되어 동지들과 함께 잡지, 전단, 표어 등을 발행, 배포했으며,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봄, 조선혁명당과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3당이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현익철은 조선혁명당 대표로서 1938년 5월 7일 남목청(楠木廳)에 김구, 지청천, 유동열 등과 함께 모여 연회를 개최했다. 이때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이 갑자기 난입하여 권총을 난사했다. 첫 탄환은 김구를 맞췄고, 두번째 총탄은 현익철의 가슴을 꿰뚫었다. 또한 유동열은 중상을 입었으며,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현익철은 총탄을 맞은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했다. 향년 48세. 현익철의 유해는 창사의 악록산(岳麓山)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 국내로 옮겨져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현익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