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정당/대한민국

국민의힘
현재 대한민국의 보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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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정보

원외 보수 정당

대한민국보수 정당에 대해 다루는 문서.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보수 정당의 역사[편집 | 원본 편집]

한국민주당(한민당)[편집 | 원본 편집]

지주, 친일파, 우익 성향 독립운동가들이 반공의 기치 아래에서 뭉친 정당이다. 이승만을 도와주어서 그가 미군정 아래에서 영향력을 넓히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미군정의 비호 아래에서 덩치를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한민당의 도움을 받았지 딱히 소속된 적은 없었다. 이승만은 여전히 무소속이었으며, 내각은 여러 당의 인사들을 등용한 탕평(...) 인사였다. 한민당 소속 인사는 2명밖에 없었을 정도. 이에 불만을 가진 한민당은 점차 반 이승만으로 돌아선다. 미군정 부역세력인 한민당은 민주국민당으로 당 이름을 바꾸면서 분위기 쇄신에 나섰다.

자유당[편집 | 원본 편집]

1951년에 이승만이 지지세력들을 모아서 창당한 정당이다. 이 정당이 명목상 국민의힘의, 더 나아가 보수 정당들의 스타트 지점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말 그대로 온 국민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4.19혁명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또한 민주국민당은 1955년에 민주당이라 이름을 바꾸면서 자유당 탈당파들을 모아 확대개편하는데, 어찌되었든간에 이승만 정부 시기 유일한 야당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민주당은 4.19 이후 내부분열로 공멸한다. 참고로 더불어민주당이 이 1955년 민주당을 시초로 삼고 있는데, 보았다시피 반 이승만 빼고는 내세울 것도 없는 한민당의 후예다. 김대중도 55년 민주당을 거쳐서 신민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민주당도 본래는 보수정당이었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민주공화당[편집 | 원본 편집]

1963년에 박정희가 지지세력들을 모아서 창당한 정당이다. 여기에는 자유당 및 민주당에서 정치활동을 했던 기존 인사들도 우르르 들어갔다. 민주공화당은 박정희가 암살당한 이후 와해되었는데, 대부분의 인사들은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으로 옮겨가고 일부 인사들은 관제야당 및 신민당으로 가기도 했다.

민주정의당[편집 | 원본 편집]

1981년 전두환 및 신군부가 지지세력들을 모아서 창당한 정당이다. 6월 민주항쟁 이후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배출하며 명맥을 잇다가, 각자의 이득을 위한 삼당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의 일부로 남게된다.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편집 | 원본 편집]

1990년 삼당합당을 통해 만들어진 정당으로, 지금과 같은 보수정당의 체제가 완성된 시기다. 이 정당이 실질적인 국민의힘의 스타트 지점이라 볼 수 있다. 합당에 참여한 세 정당은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 그리고 통일민주당이다. 민주정의당은 전두환 및 노태우 중심의 군정 후예였으며, 신민주공화당은 박정희 시대 2인자인 김종필 중심의 박정희 후예 세력이었고, 통일민주당은 김영삼 중심의 민주화 운동 세력이었다. 처음에는 당내 다수인 민정 계열이 우세했지만, 김영삼이 차세대 대권을 등에 업고 민정 및 공화계를 짓누르는데 성공한다. 이후에는 김영삼 주도로 운동권에서 전향한 자유주의 인사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김문수, 이재오, 김성식, 박형준 등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 이후 기존 민정당계, 공화당계가 이탈, 상도동계의 유입으로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이승만의 자유당을 현재 국민의힘의 뿌리로 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박정희의 사진이 국민의힘 건물에 걸려있어 정신적으로는 계승하는 듯 하다.

김영삼 집권 이후 YS와 JP가 사사건건 부딪치자 JP는 공화계를 이끌고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만들고, 민주자유당은 전두환/노태우 구속 이후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러나 민주계에서 민 후계자 이회창이 대선에서 지는 등 타격을 입자, 신한국당은 평민당의 후예로 껍데기만 남아있던 민주당과 합당하며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한나라당 / 새누리당[편집 | 원본 편집]

김영삼IMF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입은 채 지리절멸해갔고, 이회창이 당 총재에까지 오르면서 당을 주무른다. 하지만 이회창 총재의 리더십은 차떼기를 계기로 엄청난 타격을 입고, 이후 한나라당은 천막당사까지 차리는 등 초라한 시절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일개 얼굴마담이었던 박근혜노무현 탄핵 시도 직후 이뤄진 총선에서, 정동영노인비하 발언 등에 힘입어 엄청난 선방을 거둔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으로 떠오르며, 그때까지 남아있던 민정 및 일부 공화계가 뭉치는 중심 인물로 떠오른다. 구 민주자유당이 다시 우경화가 시작되었다.

노무현 정부레임덕에 빠지면서 열린우리당이 침체에 빠지자, 한나라당정권심판론을 내세우며 다시금 지지를 모았고, 때마침 서울시장을 하면서 주가를 높인 이명박이 민주계의 지지를 받으면서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이에 이명박박근혜가 서로 경쟁하던 그 당시 한나라당 17대 대선 경선은 사실상 대선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정권심판론 및 경제대통령 이미지에 힘입어 이명박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나라당10년만에 다시 여당이 된다. 하지만 한미FTA 당시 미국산 소고기 수입으로 인한 광우병 논란 때문에 이명박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그 이후 2008 세계금융위기에서 선방을 하는 등의 업적을 세우기도 하지만 본인 및 측근들의 비리가 끊임없이 나오는 탓에 이명박 정부 말기엔 어김없이 레임덕에 빠졌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다름 아닌 박근혜(...)였다. 친이는 그 옛날 친노가 그랬듯이 폐족이 되었으며, 비박에 섞인 채로 명맥을 유지한다.

박근혜비대위를 통해 당권을 먹은 이후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며 어김없이 쇄신 행보에 들어갔다. 이렇게 이명박과 적극적으로 선을 그은 행보 덕택에 18대 대선에서 당선된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최순실에게 휘둘리는 행보를 보인 탓에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음은 물론, 박정희의 후광 덕분에 팬덤도 많아 콘크리트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새누리당에서도 진박공천(...)이 나오는 우스운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새민련이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분열된 20대 총선에서도 참패하면서 박근혜 정부에도 어김없이 레임덕이 찾아왔고, 새누리당도 위태로워졌다. 최순실에 의한 국정농단이 발각된 이후에는 새누리당은 말 그대로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갔다. 탄핵 시국에서 새누리당은 말 그대로 소멸 직전까지 굴러떨어졌으며, 유승민김무성 등의 비박 주류 세력들은 아예 바른정당을 구성하고 탄기국[1]/박사모 세력은 자유한국당에서 탈당하여 새누리당을 구성하였다. 조원진은 자유한국당을 탈당하여 새누리당에 입당하는데 입당하자마자 대통령 후보가 되어 당의 대표격 인물이 되었다. 자유한국당의 홍문종파도 탈당하여 새누리당과 통합하여 대한애국당(현 우리공화당)을 창당하였다.

박근혜 탄핵 이후 대한민국의 제1보수정당은 이렇게 분열되게 되었다.

자유한국당[편집 | 원본 편집]

홍준표 지도부 2017년 11월 3일 박근혜 축출, 그러나 2019년 황교안 당대표 선출되면서 친박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새누리당은 쇄신 차원에서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꾸지만 박근혜를 지지하는 친박의 세력은 여전했고 박근혜 발 콘크리트 지지층도 가지고 있었다.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홍준표가 19대 대선 후보가 된다. 홍준표는 대놓고 색깔론을 내세우면서 어떻게든 펑크난 지지율을 올리려고 애썼지만, 탄핵 이후에 보수층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말았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안희정에 모였으며, 문재인이 경선에서 이기자 국민의당의 안철수에게 결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철수가 토론에서 아마추어같은 모습을 보이자, 보수표들은 결국 홍준표로 많이 모이기 시작한다. 대선 결과 홍준표가 안철수를 살짝 제치고 2위를 차지하면서, 향후 보수 진영의 주도권은 자유한국당이 가져오게 된다. 대선 이후 대통령 후보로서 선방한 홍준표가 당권을 잡게 되면서 친박의 영향력은 약간이나마 축소되게 된다. 대선 패배 이후 본격적으로 홍준표가 친박계를 배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2] 홍준표는 문재인 정부 때리기에 나서는 등 강경한 대여 공세를 취한다. 하지만 그 당시엔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하던 때일 뿐더러, 자유한국당에서 배출한 박근혜가 국정농단 사건의 원인이 되어 이미지가 크게 나빠진 자유한국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만다. 홍준표 지도부는 지방선거 참패 이후 전원 사퇴하게 되었다.

지도부 전원 사퇴 이후 황교안이 당권을 잡는데, 황교안은 아예 태극기 집회에 연이어 나가는 등 계속해서 지지자 끌어모으기에 바빴다. 때마침 조국 사태가 터지며 문재인 및 민주당의 철옹성 같은 지지율에도 균열이 난 터라,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황교안의 지지자 모으기는 친박계에서 효과적이었으나 중진 보수파들에게는 부정적인 효과를 보였다.

미래통합당[편집 | 원본 편집]

황교안21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표 대결집을 위해 바른정당의 후예인 새로운보수당을 포함한 보수대통합을 노렸고,결과는 180석 이를 통해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으로 탈바꿈한다. 위에서 서술했듯 당시 미래통합당은 친박집단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벗지 못한 상태였다. 황교안은 대표적인 친박 인사였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친박 의원들이 낮은 지지율로 본선에 진출도 힘들었다. 황교안은 정통적 보수를 주장하고 개혁적 보수를 멀리하였다. 여당(더불어민주당)의 실정을 비판하는 공세를 통해 총선에서 다시금 이기려 했지만, 결과는 앞의 이유로 역대급 참패를 맞이하게 된다.더불어민주당이 싫지만 미래통합당이 더 싫어 이후 미래통합당은 중심축으로 작용할 거물이 없는 무주공산 상태에 빠졌다.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황교안은 자진 사퇴하게 되었고 제16대 대통령 선거 전후로 확대됐던 강성보수세력이 다시 축소되게 되었다.

국민의힘[편집 | 원본 편집]

황교안 사퇴 이후 현재는 민주당에서도 활동했던 김종인에 의해 국민의힘으로 당명이 바뀌는 등 대대적인 수술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문재인 정부 때 조국 사태, 부동산 폭등, LA 투기, 검찰총장-법무부 장관 갈등을 원인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국민의힘의 지지도가 반등하게 되었고 2021년 4.7 재보궐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오세훈 서울시장박형준 부산시장이 당선되고 나서 김종인비대위원장 자리를 그만두었다. 2021년 6월 11일에는 의외의 고연령층의 지지로 이준석 대표가 당선되어 최연소 당대표 기록을 세운다.

2021년 후반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47.8%로 41.5%의 홍준표를 이겼다. 윤석열은 한때 좌우파 끌어안기의 일환으로 페미 인사를 영입했으나 2030세대의 반발로 다시 페미 인사를 방출하게 된다. 페미 인사의 영입을 영향으로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잠깐 올라갔으나 페미 인사 방출로 윤석열의 지지율이 다시 올랐다. 대선 직전이 되자 국민의힘도 더불어민주당도 흑색선전으로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게 되었고 이를 기회삼아 안철수와 심상정은 거대 양당을 비판하면서 지지율 상승을 노렸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석열이 불과 0.8%로 이재명 후보를 상대로 승리했다. 우파의 분열[3], 민주당 내부 계파 분열[4], 흑색선전[5], 사전투표 이후 안철수 후보의 돌연 사퇴[6] 등으로 인해 매우 변수가 많은 선거가 되었다. 거대 양당의 비판거리가 많았던 대선이었지만 거대 양당제가 오히려 확대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오세훈 서울 시장 후보가 2022년 지선에서 서울시장 재선에 성공하고 광역자치단체장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더불어민주당의 두 번째 패배가 찾아왔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내부 분열이 계속되어 20%대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경기도지사에서는 강용석 무소속 후보가 나오면서 김은혜 후보의 표를 뺏는 변수가 발생하였고 김은혜 후보의 허위 재산 신고 의혹이 터지면서 더불어민주당의 김동연 후보의 승리에 기여하게 됐다. 김은혜의 정치 경력이 김동연 후보에 비해 매우 짧아 평소 김동연 후보의 지지율이 높았던 것도 한몫 했다.

인사 문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 급하락 사태를 겪었다. 100일차 지지율이 30프로 내외로 떨어졌다.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정당 지지율도 하락하였는데 한동훈의 검수완박 무력화 이후 8월 17일 국민의힘 정당 지지율은 43%로 상승했고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은 34.6%로 하락했다.[7]

각주

  1. 대통령 탄핵무효 국민저항총궐기 운동본부
  2. 자유한국당, 박근혜 제명…홍준표 “오늘로 당적 정리””, 《한겨레》.
  3. 홍준표 - 윤석열
  4. 친문, 비문. 일부 강성 친문파는 비문을 견제하기 위해 윤석열을 뽑기도 했다.
  5. 선거 운동에서 이용하기 위해 상대의 잘못, 과거사를 들추어내었다.
  6. 이 사건으로 안철수 지지 중도층의 표가 이재명, 윤석열, 심상정으로 흩어졌다.
  7.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20817/1149873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