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2003년 11월 11일부터 2007년 8월 20일까지 존속한 대한민국정당이다. 창당 후 당이 해산할 때까지 줄곧 여당이었다. 창당할 때는 100년 정당을 만들자는 포부를 가졌으나…….

영문으로는 Opened Our Party지만, 그냥 Uri Party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열린우리당에 반대하고 비야냥거리는 쪽에서는 닫힌너네당이라는 속어를 쓰기도 했다. 그 외에 약어로 우리당을 사용했는데, 타 정당에서는 우리라는 일반명사를 독점하는 행태라고 비판하며 약어로 열우당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약어는 또 열등한 거 같다는 늬앙스라서 우리당의 반발이 있었는데 두 의견 모두 일리 있어서 결국 우리당에서는 계속 우리당으로, 다른 당에서는 열우당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서로 묵인한 듯.그냥 린우당으로 하면 어떨까?

창당 배경[편집 | 원본 편집]

근원적 배경을 올라가자면 19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야당진영에서 민주화운동의 거두로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한 김대중의 복귀에 대하여 찬반으로 양분되어 찬성측은 새정치 국민회의로 이동했고, 반대측은 민주당에 잔류했다. 이후 15대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되자, 反3김, 反DJ를 외치던 인사들은 한나라당으로 향했고[1] 反DJ보다 反한나라당을 선택한 인사들은 국민회의에 합류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다.

이후 노무현은 새천년 민주당 16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 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지만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참패[2] 이 패배로 노무현의 대선후보 위치가 흔들리고 야당의 대안후보로 정몽준이 떠오르면서 민주당 내에서 일부가 탈당하거나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여 정몽준을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후보단일화 논의 끝에 노무현이 단일후보가 되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때의 앙금은 상당히 오래 가게 된다.

이처럼 승리 속에 잠복되어 있던 여당 내 갈등은 대북송금 특검을 계기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에 불법송금이 있었다는 문제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특검을 수용하고 이로 인해 국민의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이 구속되자 민주당 구주류(이른바 동교동계)의 반발이 매우 거세지며 충돌이 심각해졌다. 이에 당시 민주당 신주류에서는 분당 불사를 외치는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결국 천신정(정배, 기남, 동영) 트로이카가 중심이 되어 분당을 기획했다.

당 외부에서는 개혁국민정당2003년 3월 재보궐선거에서 승리, 친노인사인 유시민이 원내에 진출하면서 신당론에 불을 지피고 있었으며, 한나라당에서도 구 민주당 출신으로 당내 소장파이며 反DJ 성향을 지닌 의원들이 합류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민주당 신주류들이 속속 탈당하였으며[3] 개혁국민정당 소속 의원 2명(김원웅, 유시민), 그리고 한나라당 탈당파 5인, 이른바 독수리 5형제[4]가 합류하여 2003년 11월 11일 정식으로 창당하게 된다. 뒤이어 경남지사 김혁규가 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세를 불렸다.

개혁정치의 시동과 실패 : 전략의 부재와 운의 부족이 겹친 패배의 연속[편집 | 원본 편집]

정당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에 있어 열린우리당은 2004년 제17대 총선을 제외하고 다 졌다!

우선 17대 총선은 초반에는 민주당과 2,3위 자리를 다퉜으나, 정동영 효과[5]로 지지율이 점차 상승해 한나라당과 1위 자리를 다퉜다. 그렇지만 3월 12일 이전만 해도 우리당과 한나라당의 1당 다툼 속에 한나라당이 조금 우세하리라는 전망이 많았다. 열린우리당은 창당 및 정부여당 효과를 등에 업고 지지율이 빠르게 상승중이긴 했으나 기존 지지층을 민주당과 나눠먹어야 하는 문제때문에 실질 의석 수에서 손해를 보리라 관측된 것.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로 인해 탄핵후폭풍이 정가를 강타하면서, 민주당은 말 그대로 멸망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한나라당도 죽다 살아났으며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살짝 넘기는 152석을 획득하며 대승리를 거둔다! 6공화국 이래 총선에서 1개 정당이 과반 이상을 획득한 것은 처음이었다.[6][7][8] 한때 200석까지 바라보았으나 정동영 당시 당 의장의 노인폄하실언으로 많이 깎아먹었음에도 이 성과였던 것.[9]

이후 2004년 6월 5일 재보궐선거에서는 광역단체장 4개를 모조리 내주며 패배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들중 제주도를 빼면 모두 총선에서도 우리당이 고전한 지역(부산, 경남, 전남)이었고, 기초단체장에서도 수도권에서는 패했지만 충청권에서 승리(대전 동구, 대덕구 및 충남 당진군)하였고 무엇보다 총선 후 2달밖에 안 지나서 패배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같은 해 10월 30일 재보궐선거도 기초단체장 5석이 걸렸는데 하나같이 열린우리당 약세지역이라 패배는 당연시 여겨졌고, 그 와중에 강원 철원군수 선거에서 승리하여 오히려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2005년부터였다!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 당시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경선을 했는데 이게 역설적이게도 선거법 위반 사유를 늘려주는 부작용을 낳았다. 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중 재보궐 사유를 발생시킨 경우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상락 (경기 성남 중원) 선거법 위반 : 2005. 4. 30 재보궐
  • 이철우 (경기 포천/연천) 선거법 위반 : 2005. 4. 30 재보궐
  • 오시덕[10] (충남 공주/연기) 선거법 위반 : 2005. 4. 30 재보궐
  • 복기왕[11] (충남 아산) 선거법 위반 : 2005. 4. 30 재보궐
  • 김맹곤[12] (경남 김해 갑) 선거법 위반 : 2005. 4. 30 재보궐
  • 김기석 (경기 부천 원미 갑) 선거법 위반 : 2005. 10. 26 재보궐
  • 신계륜 (서울 성북 을) 불법 정치자금 수뢰 : 2006. 7. 26 재보궐
  • 이호웅 (인천 남동 을) 불법 정치자금 수뢰 : 2006. 10. 25 재보궐
  • 안병엽 (경기 화성) 불법 정치자금 수뢰 : 2007. 4. 25 재보궐
  • 구논회 (대전 서 을) 사망 : 2007. 4. 25 재보궐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측 귀책사유로 재보궐을 치른 곳은 위와 같이 총 10곳이며 이중 지병으로 작고한 故구논회 의원을 제외해도 9명이다. 그야말로 공천받기 위해, 그리고 공천 후 당선을 위해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선거법 위반이 속출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열린우리당이 총선 채 1년도 안되어 과반의석이 붕괴되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어쨌든 자당 귀책사유가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재보궐을 치뤄야하니 후보 공천을 해야 하는데 이 공천에서부터 우리당은 온갖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2005년 4.30 재보궐 당시 충남 아산 지역구인데, 우리당은 1년 전인 17대 총선때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한 이명수를 영입, 공천했다. 문제는 이명수가 자민련에서 아직 탈당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 이명수 본인도 당연히 탈당된줄 알고 우리당에 입당, 공천받았다. 정확히는 자민련에서 이명수를 출당조치했고, 이명수는 출당된줄 알았는데 자민련의 당 내 의결기구에서 아직 출당안을 승인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선거관리위원회는 이중당적으로 후보등록 불가를 통보하며 우리당의 아산 선거는 망했어요. 이후 급히 후보를 임좌순으로 교체하지만 결국 졌다.[13][14]

같은 선거의 공주/연기 선거구에서도 우리당은 전 자민련 출신 이병령을 공천한다. 이병령은 전 유성구청장으로 자민련 소속이었다가 총선을 위해 구청장직에서 사퇴한 후 17대 총선에 유성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 탄핵을 반대하기에 탈당했고 당선된 후 우리당에 입당하겠다고 했으나 정동영 의장에게 설사 당선되도 입당을 받아주지 않겠다는 반박을 당하며 근소한 차로 낙선된 사람이었다.당선되면 안받아준다고 했지, 낙선해도 안받아준다고는 안했습니다. 이처럼 불과 1년 전에 입당을 거부한다고 공개선언한 사람을 영입해 다른 지역구에 공천을 주니 제대로 선거가 될 리가 있나. 결과는 또 망했어요.

경북 영천의 경우 우리당 귀책사유 선거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승리를 위해 민주정의당 12~13대 의원 정동윤을 영입하였는데 이게 지지층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영천이라도 이겼으면 다행인데, 근소한 차로 또 졌다!

경기 성남 중원의 경우 당 문제보다는 선거구 환경, 즉 운이 너무 안 좋았다. 전체적으로 당시 여권성향 지지층이 많은 선거구였고 후보도 16대 국회에서 이 지역구 의원이었던 조성준 전 의원을 공천했다.[15] 그러나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정치활동을 한 민주노동당 정형주 후보가 득표력이 상당하였기에 민주노동당도 첫 수도권 지역구 의원을 만들기 위해 모든 당력을 투입했고, 민주당도 김강자 전 총경을 공천하여 결국 셋이 서로 표를 깎아먹다가 한나라당 신상진 후보가 당선되었다. 우리당은 또 망했어요.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아예 패색이 짙어 아무도 나서려는 사람이 없다보니 광역단체장 선거에 장관진들을 차출시켜 장관 선거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서울시장 후보 전 법무부 장관 강금실, 경기지사 후보 전 정보통신부 장관 진대제, 경남지사 후보 전 행정자치부 장관 김두관, 충남지사 후보 전 행정자치부 장관 오영교, 대구시장 후보 전 환경부 장관 이재용, 부산시장후보 전 해양수산부 장관 오거돈, 경북지사 후보 전 행정자치부 장관 박명재[16]가 그 대상으로 무려 장관 출신만 7명이었으나 모두 낙선.[17] 그밖에도 인천에선 후보가 없어 자민련 출신 최기선 전 인천시장을 영입했으나 졌고, 대전에선 한나라당 출신 현직 시장 염홍철을 영입[18]하여 당선이 유력했으나, 선거운동기간 중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피습당한 사건의 여파로 대전마져도 졌다.[19][20]

결국 2006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은 텃밭 전북[21]에서만 승리하고 다 졌으며, 기초단체장 및 광역의회에서도 수도권에선 말 그대로 괴멸당해 서울특별시의회나 경기도의회의 경우 비례대표 1명씩을 제외하면 다 한나라당 후보였다. 그야말로 한국 선거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패였다. 그나마 기초의회는 이때부터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 2, 3위로 당선된 경우가 많았는데 기초의회마저 소선거구제였다면...

이후로도 2006~2007년 재보궐 선거가 있었지만 이미 당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전략같은건 없었다.(...)

목표와 지향점[편집 | 원본 편집]

100년 정당을 만들겠다는 말이 지향하는 것은 전국정당, 정책정당이었다.

당시 한국의 정치지형은 영남, 호남, 충청 삼남지방을 기반으로 한 세 개의 지역정당이 경쟁하고 있었으며, 세 정당간에 뚜렷한 정책적 차이점이 분명하지 않았다. 물론 정당에 따라 정책과 지향 이념의 차이는 있었지만 세 정당은 모두 근본적으로 보수계열 정당이었으며 전국선거에서는 각자의 지역기반을 묶어두고 타 지역에서는 당의 대표중심인물을 내세우며 선거를 치루고 있었다.

열린우리당은 그런 지역적, 인물적 한계를 뛰어넘어 특정지역이 아닌 전국 모든 지역에서 고른 지지와 득표를 받고 인물이 아닌 정책에 기반하는 정당을 지향하였다.

이처럼 이상은 드높았다. 이상만 드높아서 문제였지.

왜 망했나?[편집 | 원본 편집]

지향성 문제 : 하나의 당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넓은 이념적 스펙트럼[편집 | 원본 편집]

가장 큰 문제는 당 내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다는 것, 그리고 현실의 진성 지지층과 당정의 정책이 엇박자를 내었다는 것이었다.

열린우리당의 당 내 스펙트럼은 중도좌파에서부터 보수우파까지 매우 넓었다. 이는 당 해산 후 소속인물들의 이후 진로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임종인 의원은 한미 FTA 반대로 단식농성을 하고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좌파적 성향의 의견을 낸 인물로, 열린우리당 해산 후 진보계열 정당 외곽에 있다가 2015년 현재 국민모임에 합류했다. 반면, 유재건 의원은 열린우리당 해산 후 자유선진당에, 강길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등 보수적 성향의 의원들도 상당했다. 당 창당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대구의 박승국 의원이 우리당에 입당했다.

즉, 서양처럼 이념과 지향점을 추구하는 정당이 만들어진게 아니라 정당을 만들고 이념과 지향점을 추구하다보니 당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린것. 이미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현실권력을 바라보고 만들어진 정당이 가진 문제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당 4대 강령으로서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건설, 한반도 평화통일을 내세웠으나 이는 어느 정당이나 다 추구하는 목표다. 이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각자의 이념에 따른 충돌이 발생하는데 열린우리당은 이 충돌의 제어에 실패했다.

현실 정치/정책과 지지층의 충돌 역시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참여정부, 그리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여러 차례 지지층과 충돌했는데 대표적으로 4대 입법[22]의 처리 과정에서 끝내 한나라당과 타협하여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이루지 못해 비판받았고,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여 지지층의 실망을 불러왔으며[23] 정책적으로는 이라크전 파병과 한미 FTA 체결 등으로 지지층 상당수의 반발을 샀다. 이라크 파병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였고, 한미 FTA는 자유무역시장 확대의 세계적 조류 속에서 시장 선점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진보성향의 지지층들이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뚜렷한 지역기반 없는 전국정당의 허울[편집 | 원본 편집]

우선 전국정당론도 당시 청와대 전 민정수석 문재인의 부산정권 발언으로 인해 그 진의를 의심받았다. 무엇보다 전국정당으로 자처하기엔 영남권에서의 성적이 매우 안 좋았는데, 대구경북에선 아예 당선자가 없었고, 그나마 17대 총선에서 부산 1명, 경남 2명, 울산 1명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경남 2명은 김해, 즉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고향이었기에 대통령 버프를 받은 거고, 울산 울주의 강길부 의원은 2008년 한나라당으로 간다. 부산의 1명도 한나라당 출신 후보 1명이 무소속 출마하면서 표 분산이 된 덕에 겨우 당선된 것.[24]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경남에서 기초단체장 2석을 획득하지만 두 명 모두 이후 한나라당으로 간다.[25]

이후 행보도 전국정당이라기엔 너무 미약했고, 오히려 당세가 위축될 수록 호남과 영남, 그리고 충청에서 지역정당에게 참패를 거듭했다.[26] 결국 열린우리당이 해산할 때까지 지역기반이라고는 전북이 유일했으며 그마저도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전국정당을 목표로 삼는다고 했으나, 수도권의 경우 인구 상당수가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상경자들이거나 상경 2~3세대고, 아직 친척과 가족간의 연이 튼튼한 한국에선 지역의 민심이 바로 수도권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이러한 지역기반의 부실은 수도권에서의 고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역민들은 중앙정계에서 확실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없으면 지역정당대신 세력이 보다 강한 다른 정당을 택하기도 하는데 그나마 우리당을 지지하던 호남 및 영남 지지층들도 이런 이유로 각각 민주당과 한나라당으로 이탈했다. 특히 호남의 경우 호남 홀대론과 부산 우대에 대한 불만으로 우리당 지지를 철회했다.

물론, 전국정당으로 가고자 하는 노력은 80년대 이후 민주당계 정당 중에서는 독보적일 정도로 열심히 하긴 했다. 영남권에 계속해서 의미있는 후보들을 내세웠고, 어느 정도 의미있는 성적을 내긴 했다. 대표적으로 17대 총선에서 경북 구미 을에 출마한 추병직(40.3%)이나 2005년 10.26 재보궐에서 대구 동 을에 출마한 이강철(44.0%[27])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국지적이었고, 무엇보다 확실한 지지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영남에만 공을 기울이는 모습은 전국정당이 아니라 영남의 2등 정당같다는 평가를 들었다.

지도부의 단명 등으로 인한 구심점 부족[편집 | 원본 편집]

열린우리당은 3년 9개월여동안 당 의장만 11명에 달할 정도로 지도부가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 당 내 권력이 계속해서 흔들리며 뚜렷한 리더십이 서지 못했고 내부에서 갈팡질팡 우왕좌왕을 거듭했다. 그 약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 김원기 : 창당준비위원회 임시의장. 임기 약 3달. 그래도 창당준비위 임시의장이니 큰 문제는 없다.
  • 2. 정동영 : 초대 의장. 임기 약 4달. 창당 첫 의장. 입각을 위해 사퇴
  • 3. 신기남 : 상임중앙위원으로 승계. 임기 약 3달. 부친 친일파 의혹으로 사퇴
  • 4. 이부영 : 상임중앙위원으로 승계. 임기 약 4달. 4대입법 실패로 사퇴
  • 5. 임채정 : 당 의장 권한을 갖는 임시집행위원회의장. 임기 약 3달.
  • 6. 문희상 :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로 선출. 임기 약 8달. 2005년 하반기 10.26 재보궐 패배로 사퇴
  • 7. 정세균 : 비상집행위원회 체제하 임시 당의장. 임기 약 2달.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입각위해 사퇴
  • 8. 유재건 : 정세균의 뒤를 잇는 임시 당의장. 임기 약 1달.
  • 9. 정동영 : 2006. 2.18 임시전당대회로 선출. 임기 약 4달.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참패로 사퇴.
  • 10. 김근태 :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 임기 약 8달.
  • 11. 정세균 : 신임 의장으로 추대. 임기 약 6달. 최후의 지도부

창당준비위원장인 김원기를 빼도 무려 10명에 달하는 의장이 3년 6개월을 책임졌으며 그중 가장 긴 지도부가 8개월에 불과했다. 잦은 선거패배로 인한 책임론에 휩싸이기도 했고, 당 지도부를 입각시키기 위해 자진사퇴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잦은 교체는 당 지도부가 허울에 불과하다는 인식만을 심어주었다.

이는 안 그래도 취약한 열린우리당 원내구조에 악영향을 끼치며 악순환을 만들었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17대 총선으로 당선된 의원 152명 중 초선이 108명에 달할 정도로 지나치게 초선 비율이 높았다. 이를 두고 108번뇌라고 비야냥거리기도 했다. 물론 열린우리당이 총선 기준으로 신당인데다 기존 정당의 현역 의원들이 추가적으로 합류하지 않았기 때문이긴 하지만, 여의도 정치를 처음 경험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정신이 팔려 제대로 통제되지 못해 당의 분란을 가속시켰고 이는 허약한 지도부와 함께 상쇄효과를 일으켰다. 우리당으로선 총선때 너무 많은 의석을 획득한 것이 독이 된 셈이다.

그 와중에 차기대권주자로 유력하던 정동영과 김근태는 요직 중의 요직인 통일부 장관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여 국민들의 실망감만 키웠다. 이 싸움에서 패하는 쪽은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게 되었는데, 2015년 현재 통일부의 위상이 크게 내려가고 보건복지부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생각하면 참... 결국 정동영이 이겨서 통일부 장관을, 김근태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았다.

최후[편집 | 원본 편집]

당세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당도 잘 알고 있었다. 이때문에 일부에서 미국식 완전국민참여경선제, 즉 오픈 프라이머리의 도입을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 도입하는 방안까지 추진했으나 결국 대선에 후보를 내기도 전에 망했다.

당내 의원 몇몇이 2007년 들어 탈당을 시작했고, 김한길계가 집단 탈당하여 중도개혁통합신당을 만들며 의석수가 크게 줄었으며,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계까지 가세하며 당 외부에서 대안정당이 빠르게 모색되자 우리당 탈출 행렬은 가속화되어 의석수가 72석까지 크게 감소하였다. 특히 당 의장까지 지낸 정동영, 김근태 두 계파의 탈당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2007년 8월 18일, 마지막 전당대회에서 우리당 탈당파가 중심이 된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의결, 8월 20일 합당과 동시에 해산되었다.

참 씁쓸한 말로인 것이, 마지막 전당대회가 치뤄진 곳은 일산 킨텍스로 전당대회가 열린 8월 18일 이곳에선 코믹월드 행사가 있었고, 코믹에 참가한 덕후들은 우리당이 해체하건 말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또, 이날 흡수합당에 반대하는 시위자 중에는 우리당 진성지지층 외에도 허경영같은 인사가 해체 반대를 주장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28]

의의[편집 | 원본 편집]

  • 상술했듯, 전국정당과 정책정당 지향에 불을 지핀 것은 우리당이 가지는 중요한 의의다. 실패해서 문제지.(...)
  • 한국 정당정치사상 진보계열 정당을 제외하고 최초로 진성당원제를 도입했다. 정확히는 기간당원제로, 진성당원제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다. 당비를 내는 당원만을 당원으로 인정하며 이 당원들에게 당직 및 공직선거 당 후보 피선거권 및 당직선거의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간당원제가 역으로 민심을 제대로 수용못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당이 망해가던 2007년 1월 29일 기간당원제가 정식 폐지되었다.
  • 기존의 원내총무를 원내대표로 승격시킨 첫번째 정당이다. 원내총무가 사실상 당 총재나 대표 밑에서 제한적인 임무를 수행하던 것에 비해, 원내대표로 승격시키면서 그 권한과 책임을 늘리고 원내운영의 독립성을 인정해준 것이다. 2015년 6월 국회법 사태 와중에 재조명되었다.

각주

  1. 빈민운동의 대부라 불리던 故제정구 의원이 대표였다.
  2.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중 호남 3곳과 제주도에서만 승리했고, 한나라당은 수도권 석권을 포함하여 광역단체장 11곳을 차지한다. 자민련은 충청남도 1곳에서만 승리. 서울의 경우 구청장 25개 중 22개를 한나라당이 차지했다.
  3. 단, 신주류 외에도 일부 합류파가 있었다. 당장 2004년 3월 12일 탄핵 당시 투표함을 던지며 분개하던 송석찬 당시 의원은 동교동계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2002년 후단협 소속이었다.
  4. 김부겸,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김영춘. 이중 김부경, 안영근, 이부영은 1997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할 때 민주당 출신이었으며, 이우재는 민중당 출신이었고 김영춘은 애당초 상도동계였다.
  5. 정동영 의원이 당 의장으로 선출되, "젊은 개혁지도부"라는 인식을 주어 지지율이 빠르게 상승하였다.
  6. 1990년부터 1997년까지의 민주자유당-신한국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이건 정상적인 선거가 아닌 3당 합당과 야당의원과 무소속 의원 영입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과반수를 만든 결과이다. 13대 국회 하반기때는 민주자유당이 개헌선을 넘어섰지만 선거를 통한 결과는 아니었고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이 얻은 의석은 149석(총 의석 299석)이었고,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얻은 의석도 139석으로 과반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7. 이후 총선을 통한 과반 달성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2번째로 기록했고, 이어 새누리당 이 19대 총선에서 과반을 3번째로 기록했다. 거기다 중도 과반붕괴한 열린우리당과 달리 2015년 현재까지 과반을 유지중이다.
  8. 6공화국 이전으로 거슬러가면 4.19 혁명 이후 2공화국 체제에서 민주당 (1955)가 75%를 차지하긴 했다. 다만 이땐 민주당 외 제대로 된 정당이 자유당뿐인데다 그 자유당이 3.15 부정선거로 스스로 붕괴한 뒤라서...
  9. 젋은 층의 투표독려 취지로 한 발언이였으나, 노인을 폄하한다는 뉘앙스가 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10. 피선거권 회복 후 자유선진당에 입당,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공주시장에 출마하나 낙선, 이후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재도전하여 당선된다.
  11. 피선거권 회복 후 민주당 후보로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아산시장에 출마하여 당선,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 재선한다.
  12. 피선거권 회복 후 민주당 후보로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김해시장에 출마하여 당선,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 재선하였으나, 2015년 11월 27일 기자들에게 돈 봉투를 돌린 죄로 시장직을 상실했다. 특히 2012년 선거에서 새누리당 김정권 후보에게 이겼는데, 김정권 후보는 김맹곤 의원직 상실로 치뤄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으로 당선된 경력이 있어 라이벌 매치로 관심을 끌었다.
  13. 이후 이명수는 우리당을 탈당한 후 국민중심당으로 민선 4기 충남지사 선거에 출마하나 낙선, 자유선진당으로 아산 지역구에서 18~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2015년 현재 새누리당 소속이다.
  14. 이명수를 대신해 급히 공천받은 임좌순은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아산시장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임좌순은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다. #
  15. 조성준의 경우 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잔류했지만, 민주당 내 소장파로 탄핵에 반대하여 탈당, 2004년 3월 우리당에 입당했다. 17대 총선때 아예 자민련 후보로 출마한 전력이 있던 이명수보다는 당 정체성도 나았고, 지역구와 무관계한 인물도 아니었다.
  16. 박명재는 이후 새누리당에 입당, 2013년 4월 재보궐 경북 포항 북/울릉 국회의원 재보궐로 당선된다.
  17. 장관은 아니지만 서범석 전남지사 후보도 교육인적자원부 차관 출신으로 역시 내각 출신 후보였다.
  18. 이 과정에서 대전시장을 노리던 초선의원 권선택(대전 중)이 반발하여 탈당, 국민중심당에 입당했다. 이후 권선택은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18대 총선에서 재선하나 19대 총선에서 낙선했고, 이후 새누리당과의 합당에 반발하고 탈당, 민주당에 입당한 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 민주연합 후보로 대전시장에 출마, 당선된다.
  19. 그 유명한 박근혜의 대전은요? 발언이 이 때 나온 것이다. 피습 후 치료를 받던 박근혜 대표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20. 염홍철은 낙선 후 중소기업청장을 역임한 뒤 당적을 정리했다가 자유선진당에 입당,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출마, 4년 전 자신을 이긴 박성효 한나라당 후보에 설욕하며 당선되고 2014년 선거에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임기를 마쳤다. 다만 시장 재임중 소속 당이 새누리당에 흡수되면서 박성효와 불편한 동거를 해야했다.
  21. 당의 핵심인물인 정동영의 지역기반이었다.
  22.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언론개혁법, 과거사 진상규명법. 지지층에서는 4대 개혁입법이라고 부르고 반대층에서는 4대 개악입법이라 칭하기에 중립적으로 4대 입법으로 표기함.
  23. 단, 대연정은 당이 아닌 청와대(즉 당시 대통령)가 주도했다.
  24. 부산 사하 을 조경태 의원.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이 탈당 후 무소속 출마하여 한나라당 표가 분산되었다. 그래도 조경태는 지역구 관리에 성공하여 2008년, 2012년에는 표분산 없이 자력으로 당선되었다.
  25. 밀양시장 엄용수, 함양군수 천사령
  26. 2005년 4.30 공주연기 재보궐은 겉으로 보기엔 우리당 후보가 무소속 후보 정진석에게 패한 것이지만, 사실 정진석은 심대평이 준비하고 있던 충청신당(훗날의 국민중심당)이 창당 전에 내놓은 후보나 마찬가지였다. 2007년 4월 재보궐 대전 서 을에서는 아예 후보를 내지 않고 국민중심당에게 협조했다.
  27. 역대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대구에서 거둔 최고득표율이다. 김부겸이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40.4%였다. 물론 수성구가 동구보다 더 보수성이 강한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재보궐에서 보통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고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적인건 분명하다.
  28. 허경영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대선 예비후보 등록까지 한 상태였다. 물론 그의 행보를 생각하면 다분히 이벤트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