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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은 혼란기에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양반들은 족보를 만들어 가족 집단 전체가 상민과는 통혼하지 않거나 역시 일종의 양반들의 명단인 청금록, 향안 등을 제작하고 향약 등 향촌 기구를 이용해 신분을 확실히 나타내었다. 양반들은 거주지를 중심으로 동약을 실시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하여 동족 마을을 건설하고 이런 방도 역시 모방 위험이 있자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이나 사우를 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농민들은 양반 행세를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농민들은 혼란기에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양반들은 족보를 만들어 가족 집단 전체가 상민과는 통혼하지 않거나 역시 일종의 양반들의 명단인 청금록, 향안 등을 제작하고 향약 등 향촌 기구를 이용해 신분을 확실히 나타내었다. 양반들은 거주지를 중심으로 동약을 실시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하여 동족 마을을 건설하고 이런 방도 역시 모방 위험이 있자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이나 사우를 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농민들은 양반 행세를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가난을 이기지 못한 농민들은 횃불을 들고 다니며 무차별로 화공을 가하는 명화적이 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막장 집단 중에는 단이라는 호칭을 붙일 정도로 큰 집단들도 있었다. 평양의 폐사군단과 천민들로 구성된 채단, 떠돌이들로 구성된 유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산천과 민간인들을 불태우고 온갖 전쟁범죄를 다 저지르고 다녔으나 하도 막장 집단이라 선전선동으로도 민심을 얻지 못하였고 양반들에 의해 손쉽게 진압되었다.
가난을 이기지 못한 농민들은 횃불을 들고 다니며 무차별로 화공을 가하는 명화적이 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막장 집단 중에는 단이라는 호칭을 붙일 정도로 큰 집단들도 있었다. 평양의 폐사군단과 천민들로 구성된 채단, 떠돌이들로 구성된 유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산천과 민간인들을 불태우고 온갖 전쟁범죄를 다 저지르고 다녔으나 하도 막장 집단<ref>이런 막장 집단은 민중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중국 역시 좌파답게 민중사학이라 이런 역사를 숨기나 예를 들자면 증국번은 유교의 영향을 받아 언더도그마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처음에 청나라가 망해가던 원인이 전부 귀족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조직할 때 몽골은 물론 지배층인 만주 귀족 출신도 입대를 막았다. 그는 초기에는 한족 민족주의적 성향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조직한 상군은 한족이든 만주족이든 보는 사람마다 죽이고 집집마다 불살라 버릴 정도로 막장 집단이었고 온갖 전쟁범죄를 다 저질렀다. 그래서 그는 귀족들의 입대도 받게 되었으며 민족주의적 성향이 사라져 청나라에 충성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조직한 상군 때문에 한족과 만주족 양측에 의해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같이 종군하던 귀족 출신들이 옹호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ref><ref>그는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밤을 새서 공부를 해도 한 문장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여 그 광경을 본 도둑이 답답해서 그의 뺨을 때리고 넌 공부하지 말라고 하고 나갔으나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약간 우둔하고 우직한 인물이라 그런지 자기 세력을 조직하지 못하여 상군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래도 민중 징집병들이 그를 따랐던 이유는 별것 없고 그의 밑에 있으면 결국 승리하고 전쟁범죄 같은 걸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규제가 별로 없는 녹턴 노벨즈나 문라이트 노벨즈 등을 보면 막장스러운 작품들이 인기가 좋은데 민중들에게 그런 걸 실제로 해도 되는 상황이 왔다고 보면 된다.</ref>이라 선전선동으로도 민심을 얻지 못하였고 양반들에 의해 손쉽게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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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5일 (금) 11:38 판

한국사의 시대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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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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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정보
국호 대조선국(大朝鮮國)
영토
서력 1726년(영조 2년)의 조선 영토와 주변국을 나타낸 지도이다.
존속기간 음력 서력 1392년 7월 17일~서력 1910년 7월 25일(518년 8일)
양력 서력 1392년 8월 5일~서력 1910년 8월 29일(518년 24일)
성립 이전 고려왕조
멸망 이후 일제 강점기

틀:다른 뜻 설명

조선(朝鮮)은 1392년부터 1897년까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통치하였던 왕조이다. 공식 명칭으로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며, 때로 대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명칭을 어보(御寶), 국서(國書) 등에 사용하였다. 흔히 조선왕조(朝鮮王朝)라고 부르며, 일제 강점기에는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고도 불렀다. 1392년 고려왕조의 뒤를 이어 이성계가 건국한 나라이다. 1897년부터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조선이라는 국호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조선이라는 이름을 쓴 왕조는 역사상 두 개이나 여기서는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를 다룬다. 국호의 유래는 고조선이다. 그리고 고대국가였던 조선은 고조선 항목을 참조.

개요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받은 이성계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이후 500여 년 동안 존속됐다. 조선은 유교에 의한 통치 이념을 기본으로 임금과 신하에 의한 치를 중요시했다. 조선이 통치하는 동안 한반도에서는 한글의 창제와 과학 기술 및 농업 기술의 발달 등이 이루어졌으며,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외침을 극복하고, 현재의 한민족과 한국 문화의 직접적 전통의 기반이 되는 문화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은 사실상 이민족한테 거의 시달리지 않았던 왕조이기도 하다. 일단 조선시대에는 전반적으로 왜구의 침입이 그 전왕조인 고려에 비해 드물었다. 조선이 왜구의 침입을 몇 번 받았기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1]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에는 아예 왜구한테 침입당하지도 시달리지도 않았으므로 조선은 양난 이후 250년이 넘는 기간 내내 평화를 누렸다. 또한 15세기 중반부터는 왜구의 침입 자체가 꽤 드문 사건이었다.[2]또한 17세기부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해적금지령으로 인해 왜구 자체가 사라져서 조선이 왜구한테 시달리는 일도 더 이상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이 500년 내내 왜구한테 시달렸다는 주장은 거짓말에 불과하다.[3] 간혹가다 17세기이후에도 왜구가 존재했으며 왜구는 해적이므로 조선을 침입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왜구 자체는 확실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적금지령으로 인해 사라졌다. 실제로 15세기 중반부터는 황산대첩과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의 영향때문인지 16세기까지 왜변이 몇번 없었다. 즉,오히려 조선은 왜구한테 시달리지 않았던 기간이 길었다. 조선시대에도 왜구침입은 있었지만 보통 사이에 2~30년의 간격, 길게는 60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났다.

역사

조선 전기

임진왜란병자호란

임진왜란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다. 전쟁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나눠지는데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명나라는 일본과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었고 일본이 다시 한번 쳐들어 온게 정유재란이다.

병자호란은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 그리고 국호를 청으로 바꾼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다. 조선은 청나라의 대군에 참패하였으며 청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게 되었다.

간혹가다가 조선이 화교왕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붕당 정치

숙종의 환국정치로 건강한 붕당문화가 완전히 사라져 서로 죽고 죽이는 개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세도 정치

정조 사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세도 정치가 시작된다. 이는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의 결과로, 정조도 본인이 그렇게 일찍 죽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권력이 왕 1인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어린 세자가 즉위함으로써 대리청정을 실시하는 왕후, 그리고 그와 연결된 외척(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을 꼽을 수 있다.)이 득세하여 횡포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상호견제라는 붕당이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1당, 아니 1가문 독재였다. 그 후 헌종, 철종의 치세 때에는 더욱더 악화되어 민중의 삶이 낙후되었다. 결국 전정, 군정, 환곡을 아우른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지친 농민들은 임술 농민 반란을 일으킨다.

이는 철종이 사망하고 즉위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많이 달라진다.

흥선대원군의 집권

갑오개혁 이후

역대 국왕

외우는 법

조선의 역대 국왕에 대해 외울 때, 앞글자를 따서 외우곤 한다.


산군
해군

모아서 쓰면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이 된다. 보통 나리 나리 개나리... 노래에 맞추고 마지막에 종을 붙이는 식으로 외우는 편

평가

동시기 일본과의 비교

본격적으로 한반도와 일본열도간의 국력차가 역전된 시기로 평가된다. 과거엔 '조선은 일본보다 정치, 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었는데 메이지유신으로 역전되었다' 라는 평가가 있었으나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만 봐도 이미 일본이 에도 막부 시절 네덜란드 등과 접촉하면서 난학을 발전시키고 문물이 발전하여 이런면을 통신사들도 배워야 한다고 느꼈다는 부분이 있다. 심지어 일본의 우수한 문물은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의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조선 초부터 존재하고 있으며 이 논의들을 살펴보면 종이, 안료, 무기, 광물지식, 화폐경제 등 제조업과 산업분야에서 조선보다 더 발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대표사례 물론 화약, 도자기나 기타 다른 문물은 조선이 일본을 앞선 경우도 존재했지만 임진왜란 이후엔 그마저도 우위가 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조선초에도 제법 격차가 있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양국의 질적 역전은 고려시대에 발생했을 소지도 충분하기에 이 문제를 조선의 문제로만 돌리기도 곤란하긴 하다. 전근대 농업사회의 국력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로 결정되는데, 이미 일본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인구면에서 한반도 국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 절대치의 추월 시기는 통일신라 시기다, 가마쿠라 막부 초기다 등등 다양하나 일단 조선 초부터 일본인구는 한반도를 한참 능가한 시점이었다. 국토면에서도 일본은 혼슈 하나가 압록-두만 이남 한반도보다 약간 더 크고 규슈와 시코쿠 또한 만만치 않게 크다.

게다가 일본은 태평양에 바로 맞닿아 있고, 한반도보다 남쪽에 있어 기후가 훨씬 따뜻하고 강수량 역시 높다. 때문에 농업 부분에서도 당연히 한반도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17세기에 들어서야 정착한 모내기법 또한 일본에서는 풍부한 강수량 덕분에 이미 15세기 부터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미 조선시대 이전부터 일본은 큰 국토와 축복받은 기후 덕에 월등한 생산력을 보여주었다. 거기다 전근대 일본은 세계적인 은 생산지[4]로서 당시 세계 은 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쯤되면 조선이 일본보다 우월한 국가라고 하기 어렵다.

농민들의 삶

조선은 이전 왕조에 비해 민본주의적 경향이 강했고 일종의 민중으로 볼 수 있는 농민들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수리 시설을 갖추지 않으면 피해가 클 확률이 높지만 성공할 경우 수익이 좋은 이앙법을 저수지 등도 없이 그냥 할 정도로 막장적 성향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제언사를 설치하고 제언절목 등을 반포하여 국가와 양반들에게 수리 시설 관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이런 투기적인 성향은 큰 피해를 불렀고 양반들은 큰 손해를 본 농민들의 토지와 심지어 그 농민 자신과 가족들까지도 노비로 매매하여 지주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농민 출신들은 민중사관적 교과서에서는 저항 정신으로 표현하나 땅이 비옥한 곳에는 올벼를 심어 미리 베어 먹거나 궁답을 조금씩 깎아 먹고, 또는 볏단을 크게 묶었다가 나중에 빼돌리기, 탈곡할 때 대충 태질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타작하는 방법 등을 동원하여 양반들에겐 불신을 주었고 결국 양반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소작을 주려고 하게 되었다. 이들은 아예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머슴들을 고용하거나 아니면 가난하나 같은 양반 출신들에게 주로 소작을 주거나 노비들을 감시하는 일[5]을 맡겼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자 점점 토지가 양반들에게 몰리게 되었다.

노비가 된 농민들은 도망을 통하여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특히 남성의 경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그 경향이 더 심했다. 이들은 가족이 있든 말든 그냥 혼자서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이런 현실에 맞추어 아버지가 노비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양민으로 삼는 법[6]이 속대전에 등재되었고 어차피 주인에게 재물을 바치지도 않았기[7]에 노비들의 숫자는 잠깐 증가하였다 장기적으로는 줄게 되었다. 의외로 구체적으로 살피면 일반적인 군역을 면할 특권이 있었던 양반들은 그것이 가벼운 탓도 있겠으나 자신들에게 부과된 군역을 성실히 수행하였고 농민들은 그냥 안 나갔다. 이는 조선만이 아닌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조선도 명나라의 제도로 인하여 이론상 정규군은 물론 봉족과 잡색군 같은 예비군을 포함하면 병력이 100만 명[8][9]에 가까웠으나 군역의 대상인 농민들이 이에 따르지 않아 이런 대군이 소집되는 일은 없었다.

농민들은 혼란기에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양반들은 족보를 만들어 가족 집단 전체가 상민과는 통혼하지 않거나 역시 일종의 양반들의 명단인 청금록, 향안 등을 제작하고 향약 등 향촌 기구를 이용해 신분을 확실히 나타내었다. 양반들은 거주지를 중심으로 동약을 실시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하여 동족 마을을 건설하고 이런 방도 역시 모방 위험이 있자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이나 사우를 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농민들은 양반 행세를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가난을 이기지 못한 농민들은 횃불을 들고 다니며 무차별로 화공을 가하는 명화적이 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막장 집단 중에는 단이라는 호칭을 붙일 정도로 큰 집단들도 있었다. 평양의 폐사군단과 천민들로 구성된 채단, 떠돌이들로 구성된 유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산천과 민간인들을 불태우고 온갖 전쟁범죄를 다 저지르고 다녔으나 하도 막장 집단[10][11]이라 선전선동으로도 민심을 얻지 못하였고 양반들에 의해 손쉽게 진압되었다.

각주

  1. 17세기 부터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왜구가 침입했다 류의 기록이 없다.
  2. 15세기 중반부터 임진왜란까지 대략 150년인데 이 기간동안 일어난 왜변은 10번 이하이다.
  3. 만약 정말로 조선이 500년 내내 왜구한테 시달렸다면 19세기말까지 왜구가 존재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또한 임진왜란 종전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면 조선왕조실록에 임란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는 사건이 기록되었겠지만, 실제로는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은 전혀 없다.
  4. 광산이란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산에서 자원이 많이 나온다. 평지는 산지에 비해 넓은 공간을 활용한 많은 식량과 도시 형성을 바탕으로 문명적인 것에 유리하다. 그래서 과거의 중국 문명이 도자기나 비단 등을 팔며 은 같은 자원을 세계적인 규모로 수입했었다.
  5. 하층민들은 같은 하층민인 마름보다 양반 출신을 선호하였다. 이는 부모 문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층민 마름의 횡포는 같은 하층민들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6. 남성 노비가 도망쳐서 양민 여자와 했기 때문이다.
  7. 심지어 중앙 관청의 노비들 역시 잡을 방도가 없어 이름만 남게 되자 순조 때 6만 6,000명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8. 실제로는 최대 병력이 30만 명 내외로 생각되고 있으며 많으면 50~60만까지도 추정된다.
  9. 사실 실질적으로 보면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병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민중들을 믿지 않고 일종의 하찮은 무사 계층을 인구의 5~10%까지 만들어 대군을 유지했다.
  10. 이런 막장 집단은 민중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중국 역시 좌파답게 민중사학이라 이런 역사를 숨기나 예를 들자면 증국번은 유교의 영향을 받아 언더도그마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처음에 청나라가 망해가던 원인이 전부 귀족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조직할 때 몽골은 물론 지배층인 만주 귀족 출신도 입대를 막았다. 그는 초기에는 한족 민족주의적 성향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조직한 상군은 한족이든 만주족이든 보는 사람마다 죽이고 집집마다 불살라 버릴 정도로 막장 집단이었고 온갖 전쟁범죄를 다 저질렀다. 그래서 그는 귀족들의 입대도 받게 되었으며 민족주의적 성향이 사라져 청나라에 충성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조직한 상군 때문에 한족과 만주족 양측에 의해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같이 종군하던 귀족 출신들이 옹호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1. 그는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밤을 새서 공부를 해도 한 문장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여 그 광경을 본 도둑이 답답해서 그의 뺨을 때리고 넌 공부하지 말라고 하고 나갔으나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약간 우둔하고 우직한 인물이라 그런지 자기 세력을 조직하지 못하여 상군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래도 민중 징집병들이 그를 따랐던 이유는 별것 없고 그의 밑에 있으면 결국 승리하고 전쟁범죄 같은 걸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규제가 별로 없는 녹턴 노벨즈나 문라이트 노벨즈 등을 보면 막장스러운 작품들이 인기가 좋은데 민중들에게 그런 걸 실제로 해도 되는 상황이 왔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