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종

묘호 문종(文宗)
생몰년도 음력 서력 1414년 10월 초3일~서력 1452년 5월 14일
양력 서력 1414년 11월 15일~서력 1452년 6월 1일
재위기간 양력 서력 1450년 3월 30일~서력 1452년 6월 1일
음력 서력 1450년 2월 17일~서력 1452년 5월 14일
부모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아버지 세종
동복형제

누나 정소공주(貞昭公主), 여동생 정의공주, 남동생 수양대군(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臨瀛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평원대군(平原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

배우자 정실: 휘빈 김씨(徽嬪金氏), 순빈 봉씨(純嬪奉氏),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
후궁: 숙빈 홍씨, 숙의 문씨, 소용 유씨, 소용 권씨, 소용 정씨, 소용 윤씨, 사칙 양씨, 상궁 장씨
자녀 경혜공주, 단종(端宗), 경숙옹주
후임 왕 단종
시호 문종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
(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생몰장소 탄생 한양(漢陽) 사저(私邸)
사망 경복궁(景福宮) 강녕전(康寧殿)
향(珦)
휘지(輝之)

문종(文宗)은 조선의 제5대 임금이다.

세자빈 문제[편집 | 원본 편집]

세자 시절 문종은 3번이나 세자빈을 맞이했지만, 결혼생활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13세에 맞이한 첫 부인은 김씨였다. 그녀는 세자보다 4년 연상인 17세였는데, 세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여 초조해하다가 ‘호초’라는 이름의 궁녀를 통하여 각종 해괴한 주술들을 알아내어 시행했다. 암수 이 교접하다 흘린 액체를 구하여 가지고 있기도 했고, 세자가 총애하는 궁녀들의 신발을 훔쳐다가 그것을 태워 재로 만들어 세자에게 몰래 먹이려고도 했다. 그러나 김씨의 부적절한 행위는 곧 시부모인 세종과 소헌왕후에게 발각되었고, 김씨는 세자빈 자리에서 폐출되어 친정으로 쫓겨났으며, 호초는 처형되었다.

15세가 된 세자는 동갑내기 봉씨를 2번째 세자빈으로 맞이했다. 세종은 김씨가 세자와 어울리지 못한 이유를 외모 때문이라고 짐작하여, 2번째로 세자빈을 간택할 때는 “외모가 아름다운 처녀를 고르라”고까지 지시했다. 이러한 기준으로 선발된 봉씨였으니, 그녀의 미모는 상당히 출중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세자는 봉씨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세종은 학식이 높은 궁녀(상궁)를 시켜 봉씨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하였으나, 시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봉씨는 <열녀전>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내가 어찌 이것을 배워 생활하겠는가”라며 <열녀전>을 뜰에 던져버리는 무례를 저질렀다. 또한 그녀는 을 좋아하여 대낮부터 얼큰하게 취해 있었을 때가 많았고, 간식을 몰래 숨겨놓고 먹었으며, 시종들을 폭행했고, 담장 밖으로 바깥 세상을 엿보았으며, 궁궐의 음식과 재물을 사사로이 친정에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종종 남녀 간의 사랑 노래 내지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는데,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아무 일도 아니지만 당대 상류층 여성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음란한 행위였다.

세자와 봉씨의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두 사람의 사이에서 좀처럼 아이가 없으니, 세종은 세자에게 명문가 출신 후궁 3명을 붙여주었다. 3명의 후궁은 권씨, 정씨, 홍씨였는데, 후궁들은 총애를 받았고 특히 권씨는 곧 세자의 아이를 임신했다. 이에 봉씨는 무척 불안해하며 후궁들을 시기했다. 세종은 봉씨를 꾸짖는 한편, 세자에게도 “후궁 소생의 아이도 귀하지만 정실 소생의 아이가 더 귀하니, 세자빈과의 관계에도 힘쓰라”고 당부했다. 얼마 후에 봉씨도 자신이 임신했다고 밝혔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무척 기뻐했고, 임신한 봉씨를 각별히 살펴주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봉씨의 태아가 유산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봉씨는 “뱃속에서 단단한 것이 나와서 이불 밑에 있다”고 말했으나, 세종이 궁녀들을 시켜 살펴보았더니 그런 일은 없었다. 즉 애초에 봉씨는 임신하지 않았던 것이다(거짓말 내지는 상상임신).

언젠가부터 봉씨는 자신에게 무심한 남편 대신에 다른 대상으로 눈을 돌렸는데, 바로 궁녀들과의 동성애였다. 봉씨는 자신의 처소에서 일하던 ‘소쌍’이라는 궁녀를 특히 각별히 총애하여, 자신의 곁에 두고 독차지하려고 애썼다. 소쌍은 “세자빈께서 시종들 중에서 유독 나를 유별나게 사랑하고 집착하여, 나는 너무나도 무섭다.”며 불안을 호소했지만, 일개 궁녀에 불과한 그녀는 세자빈인 봉씨에게 맞서거나 피할 수 없었으며,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또한 소쌍은 본래 ‘단지’라는 동료 궁녀와 친했는데, 봉씨 때문에 단지와 가까이 지낼 수 없게 되었다. 즉 봉씨, 소쌍, 단지는 ‘삼각관계’가 된 것이다.

물론 가짜 임신 소동이 그랬던 것처럼, 봉씨의 동성애 및 삼각관계도 곧 들키고 말았다. 어느 날 세자는 자신의 방을 청소하던 소쌍에게 “자네가 세자빈과 동침한다던데 사실인가?”라고 물었고, 놀라고 겁에 질린 소쌍은 순순히 모든 사실을 자백하고 말았다. 봉씨는 자신의 행위들을 부정했으나, 구체적인 진술과 증거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미 김씨를 쫓아낸 전례가 있었던 세종은 2번째로 맞이한 맏며느리 봉씨의 갖가지 기행들을 참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봉씨 역시 쫓아내버렸다. 폐위되어 친정으로 쫓겨난 봉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는 ‘친정아버지 봉여(奉礪)가 딸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봉여는 딸이 폐출되기 3개월 전에 사망했다. 어찌되었건 폐출된 지 얼마 안 되어 2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봉씨의 죽음은, 그리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김씨와 봉씨를 쫓아낸 세종은, 이제 더 이상 외부에서 새로운 규수를 간택하지 않고 기존에 있던 후궁들 중에서 1명을 세자빈으로 진급시켰다. 세자는 3명의 후궁들 중에서 홍씨를 제일 좋아했으나 세종은 권씨를 택했는데, 권씨가 3명 중에서 제일 연장자이고 세자의 딸(경혜공주)도 낳았기 때문이다. 3번째로 세자빈이 된 권씨는 세자와 잘 지내며 아들(단종)도 낳았지만, 아들을 낳고 며칠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했으며(향년 23세), 훗날 ‘현덕왕후’로 추존되었다.

한편 세자(문종)는 더 이상 세자빈을 맞이하지 않았고, 즉위 이후로도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문종은 어린 단종을 두고 사망했고, 할머니(소헌왕후)도 어머니(현덕왕후)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 아무런 보호막도 없었던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되었다. 만약 수렴청정을 해줄 할머니나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단종은 무사히 왕위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오해[편집 | 원본 편집]

  • 문약한 성격과 건강하지 못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는 편견과 달리 문에 모두 능했다. 그 수양대군이 열폭했을 정도라니 가히 그 능력을 짐작해볼만하다
  • 으로서는 짧은 재위기간을 가졌지만 세자 시절 노쇠한 세종을 대신해 대리청정한 기간이 길다. 특히 세종의 마지막 치세 10년의 성과는 전부 문종의 업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