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운하

Jamon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3월 29일 (월) 12:05 판 (사건사고 추가)
수에즈 운하

수에즈 운하(Suez Canal)는 이집트운하다.

좁게는 지중해홍해라는 두 바다 사이를, 넓게는 대서양인도양이라는 두 대양을 연결하는 수면식 운하. 이집트 본토와 시나이 반도를 가로지르며, 파나마 운하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운하로 꼽히며 세계 해운 및 물류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역사적인 운하이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해야 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던 기존 유럽-인도 및 동아시아 항로가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배가 이 운하를 지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역사

놀랍게도 수에즈 운하는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존재했다. 단, 이때의 운하는 바다와 바다를 연결한 게 아니고 나일 강과 인근 호수를 연결한 것으로, 그 목적도 인도와 유럽 항로 연결같은 수천 년 후의 수준이 아니라 이집트의 홍해 영도에서 산출되는 자원을 이집트 중심부로 보다 쉽게 운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선박기술상 운하의 수심이나 폭도 현재에 비교하면 상당히 작았고, 그러한 이유로 왕조가 바뀌는 동안 이용이 줄고 관리가 안 되면서 모래바람에 파묻혀 사라져 버렸다.

이후에도 이집트를 지배하는 나라들은 모두들 수에즈 운하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나 그 필요성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공사 규모가 매우 커서 공사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잠시 이집트 원정을 온 프랑스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수에즈 운하의 필요성을 깨닫고 공사를 검토했으나 아부키르 만 해전 패배와 뒤이은 본국 귀국으로 말 그대로 구상만 하고 말았다.

수에즈 운하 공사가 본격화된 것은 1859년의 일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겉으론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었지만 사실상 무함마드 알리의 통치하에 준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페르디낭드 M. 레셉스(Ferdinand M. Lesseps)가 적극적으로 운하 공사를 강권, 수에즈 운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이후 대규모 노동력과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10여년만인 틀:날짜/출력 운하를 개통[1]시켰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프랑스가 영국의 해상패권에 도전한다고 생각, 적극적으로 운하 공사를 방해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 주식회사는 불과 2년 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로 운하 건설의 가장 큰 스폰서였던 프랑스가 곤경에 처하고, 최대주주였던 이집트 정부는 재정적 곤란에 빠지게 된다. 이에 이집트 정부는 정부 보유 지분 전체를 매각하고자 했고, 이를 운하 공사를 가장 열심히 반대했던 영국 정부가 전량 매입하면서, 결과적으로 운하 건설에 반대하던 영국이 수에즈 운하 통제권을 쥐기에 이른다.

이후 수에즈 운하는 1956년까지 영국의 통제하에 놓였다가 이집트 나세르 정권의 운하 국유화 조치로 이집트 통제로 넘어갔고,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이 발발하였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결국 수에즈 운하는 쭈욱 이집트의 손에 남게 되었다. 1966년 제3차 중동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시나이 반도를 획득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이집트-이스라엘 양국간 접경으로 바뀌고 이 때문에 몇 년간 운하 이용이 통제되던 시기도 있었지만 1978년 시나이 반도가 이집트에 반환되면서 운하 통행이 재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효과

아시아유럽의 항로가 말 그대로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보름, 길게 잡으면 1달에 가까운 시간이 단축되어서 유럽-아시아 항로를 운행하는 선박은 거의 대부분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고 있다. 운하를 관할하고 있는 이집트의 경우 운하의 통행료를 받아서 국고에 상당한 보탬이 되고 있다. 또, 대항해시대 이후 쇠퇴했던 지중해 해운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런던이나 암스테르담, 낭트 등지에서 바로 대서양으로 향했던 항로가 이제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 수에즈 운하를 거치게 되었던 것. 이 때문에 스페인과 프랑스의 지중해 항구가 성장했고 이탈리아그리스에서 해운업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대로 아프리카 남단 항로 시절의 중간기착지들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포르투갈카보베르데네덜란드가 개척한 남아프리카 식민지가 대표적인 예인데, 남아프리카의 경우 다행히도 수에즈 운하 발견 이전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어 번영을 계속 누릴 수 있었지만 다른 곳들은 그냥 어촌으로 전락했다.

수에즈 운하의 인도양쪽 입구인 아덴만 일대에는 엄청난 해운물동량과 소말리아의 불안한 정치상황이 결합하여 해적들이 준동하고 있다. 하지만 해적의 준동에 따른 보험료 상승비용은 아직까진 항로 단축에 따른 비용절감보다 작기에 운하 이용 빈도를 떨어트리진 못하고 있다. 더구나 희망봉을 돌아가는 코스를 택한다고 하여도 결국 소말리아 인근 해역을 지나가야 하는 것은 매 한 가지다. 조금 멀리 피해갈 수는 있겠지만 해적들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면 도로아미타불.

사건사고

2021년 3월 에버 기븐(Ever Given)호가 수에즈 운하에서 좌초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인해 운하가 통제되었다.

각주

  1. 사실 이쪽 동네는 딱히 험한 지형 등이 없이 거의 사막 지역이기 때문에 1850년대의 중장비와 기술력만으로도 공사 체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늘 돈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