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는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약 2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이 지구 곳곳을 항해하며 신항로를 개척하던 시기를 가리킨다. 영어로는 더 에이지 오브 디스커버리(Tha Age of Discovery) 또는 더 에이지 오브 익스플로레이션(The Age of Exploration).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Tha Age of Discovery, 즉 발견의 시대라고 칭하지만 이는 유럽인 관점에서의 표현으로 유럽인들이 발견했다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에는 이미 현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즉, 유럽인들 입장에서나 발견한 거지 보편적인 관점에서는 발견이라고 할 수 없어서 모험과 항해의 로망을 담아 대항해시대라고 일본에서 통칭했고 이 표현이 그대로 한국으로 넘어왔다. 반면, 중국에서는 영문 표기를 존중하여 지리대발견이라 통칭한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포르투갈의 국가전략[편집 | 원본 편집]

포르투갈유럽의 외곽인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한 말 그대로 유럽의 끝자락이었다. 그렇다고 농경이 잘 되거나 광물이 산출되는 것도 아니어서 포르투갈은 국가 성장을 위해 필히 해상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런데 유럽의 핵심 해상무역권은 한자동맹을 중심으로 한 북해-발트해 무역권과 지중해 도시국가들이 주도하는 지중해 무역권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포르투갈은 그 위치상 어느 한 쪽에도 낄 수 없는 나라였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은 일찌감치 국가전략을 해상진출, 그것도 신항로 개척으로 잡았다. 포르투갈은 1415년 세우타를 점령하여 아프리카 진출의 토대로 삼은 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이 건재하던 15세기 초반, 제일 먼저 먼 바다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이슬람 세력의 대두와 항해국가들의 타격[편집 | 원본 편집]

11세기 이래 이탈리아에서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급속도로 성장하며 지중해 해상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이고, 후발주자로 스페인아라곤 왕국이 새로운 해상제국을 건설, 지중해의 3대 해상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국가들이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은 오스만 제국의 급성장때문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 지방을 석권한 데 이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면서(1452년) 동지중해 무역이 급격히 쇠락하게 된 것이다. 특히 콘스탄티노플과 흑해 교역권에 집중했던 제노바 공화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고,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전후로 아테네 공국 등을 상실하여 동지중해 무역기반을 상실한 아라곤도 심각한 피해를 받았다. 베네치아도 오스만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전쟁에 나섰으나 참패하고 큰 타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인도-중동-유럽으로 이어지는 중개무역이 거의 차단되다시피 하였으며 지중해 해상국가들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유럽인들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15세기 :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항해[편집 | 원본 편집]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은 말 그대로 국가백년대계가 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항해왕자 엔리케의 적극적 후원 속에 1419년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하여 포르투갈령으로 삼고 아프리카 항해의 전진기지로 삼았으며, 이후 약 20여년간 대서양, 사하라 사막, 아프리카 등을 조심스레 수색하다가 1444년카보베르데와 아프리카 최서단 베르데 곶까지 도달했다. 이후 카보베르데는 마데이라 다음에 위치하는 포르투갈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20여년이 지나서야 시에라리온과 기니만에 도달했다.

엔리케가 죽은 후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항해는 보다 더 적극성을 띄었다. 약 50여년에 걸친 항해로 충분한 경험과 항해기술, 지식이 습득되고 베테랑 선원들과 원양항해용 선박이 준비되었다고 판단하자 포르투갈 왕실은 탐험가들에게 독점교역권 부여를 약속하며 보다 적극적인 항해를 독촉했다. 마침내 1471년 현재의 가나 지방에 도달하여 상관을 개설하였고, 상투메 프린시페를 발견했으며, 이후 마침내 적도를 넘어 1482년에 콩고 강 하구에 도달하고 1486년에는 지금의 나미비아 지방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이때즈음에 포르투갈 왕실과 모험가들은 계속되는 항로의 연장에도 불구하고 공포에 떨고 있었다. 아프리카 항로가 연장되었음에도 마땅한 무역항로는 개척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인도를 가기 위해 필수적인 아프리카 최남단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즉 아프리카 대륙이 남쪽으로 계속 이어져서 남극까지 육지로 연결된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1488년, 마침내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최남단(훗날의 희망봉)에 도달함으로서 포르투갈은 그동안 상정했던 최악의 상황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이 확인된 이상 이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이때즈음 포르투갈은 기존 아프리카 항로에서 상아와 황금, 노예 교역으로 어느 정도 이득을 보고 있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인도였다.

16세기 전반기 포르투갈 : 후추와 정향이 넘치는 향신료의 천국으로[편집 | 원본 편집]

1492년, 희망봉 발견으로 들떠 있던 포르투갈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스페인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인도 서회항로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안그래도 콜럼버스의 서회항로 개척 제안을 무시한 바 있는 포르투갈 왕실이었던지라 이 사실에 큰 충격을 먹었고, 다시 한 번 인도 항로를 닥달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를 목표로 하는 항해를 개시, 희망봉과 아프리카 동해안 주요 도시들을 거쳐 마침내 1498년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이후 포르투갈은 항로를 확대하여 페르시아 만의 주요 항구에 상관을 개설하고, 도전해오는 이슬람 함대를 격파했으며, 지방 토호국을 물리치고 고아와 디우를 점령하여 자국영토로 삼는 등 본격적으로 인도양 항로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흘러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후추는 포르투갈에 돈벼락을 안겨다 주었다. 1505년 고아에 포르투갈의 총독부가 설치되어 인도양 항로를 관장했다.

동시에 포르투갈인들은 인도 동쪽엔 뭐가 있을까? 하는 의문과 동쪽으로 가면 여기랑 비교 안 되게 향신료 많이 나옴이라는 현지 상인의 말에 동남아시아로 나가기 시작했다. 1511년 알퐁소 데 알브켈케가 동남아시아 교역의 요충지인 말라카를 점령하였고, 1511~12년에 걸쳐 향료제도라 불리는 몰로카 제도까지 나아가기에 이른다.

1513년에는 마침내 중국에 도달하여 광저우 일대에서 교역을 시작하고 마카오에 상관을 두었으며, 1542년에는 일본의 타네가시마에 도달하여 마침내 유럽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치는 기나긴 대항로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전반 스페인 : 인도를 가다 우연히 걸린 로또[편집 | 원본 편집]

카탈루냐-아라곤 연합왕국(훗날의 스페인)이 신항로 개척에 나선 것은 배경에서도 설명했듯,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지중해 무역권을 상실하면서 아라곤의 해상세력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아라곤 해상세력들은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고,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항해에 자극받던 왕실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서의 레콩키스타가 끝나면서 여유가 생기자 서회항로를 약속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 자금과 선단을 주어 항해에 나서게 했다.

사실 서회항로는 약 60여 년 전에 포르투갈이 이미 시도했다가 포기한 바 있는 항로였다. 당시 포르투갈은 아조레스 제도까지 발견하고 서쪽으로 더 나아갔으나 가도가도 끝이 없는 망망대해에 질려 이건 절대 못가는 항로라고 판단하고 포기했던 것이다. 괜히 포르투갈이 콜럼버스의 서회항로 제안을 가치없다고 판단한 게 아니다.

그러나 신항로에 대한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던 스페인 왕실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콜럼버스의 서회항로 계획을 지원했고, 1492년 떡하니 서회항로가 개척된 것이다. 이후 1502년까지 콜럼버스의 추가 항해와 다른 모험가들의 항해로 새로 발견한 곳이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땅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후 스페인이 원했던 향신료는 나오지 않았지만 대신 멕시코와 남아메리카에서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쏟아져 나왔다.

1519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 선단이 출발하여 남아메리카 동해안을 탐사하고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출구(마젤란 해협)를 발견하였으며 세계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하여 필리핀을 발견했다. 이후 마젤란은 현지인과의 교전 과정에서 죽었지만 항해는 계속되어 1522년에 스페인으로 돌아왔고, 이후 스페인은 아메리카와 필리핀을 식민지로 확보한다.

16세기 후반 ~ 17세기 : 신흥세력의 급부상과 항로의 안정[편집 | 원본 편집]

16세기 중후반부터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와 같은 후발주자들이 맹렬히 신항로로 뛰어들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17세기에 이르면 포르투갈 세력은 본국이 이베리아 연합으로 묶여있는 사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동남아시아와 인도에서 거의 축출되었고, 스페인의 신대륙 식민지들은 잉글랜드 해적의 공격과 약탈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처럼 무게추가 빠르게 신흥국가들에게로 넘어갔고, 신항로도 이들에 의해 독점되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무역대신 해외식민지의 경영으로 국가전략을 바꿨고,[1] 유럽의 향신료시장은 리스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다. 이후의 지리적 발견도 이들에 의해 주도되어 오세아니아 대륙의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에 의해 발견되었다.

17세기 초중반, 원거리 무역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건 단연 네덜란드였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주식 회사라 불리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지금의 인도네시아 자바에 상륙하여 첫 상관을 세우고, 포르투갈과 말루쿠의 향료산지를 찝적 거리는 영국세력에 승리하며 동남아시아 무역제국의 기초를 세웠다. 또 아시아로 항해하는 선박에 물품을 제공하기 위해 남부 아프리카의 희망봉에 전초 기지를 설립했다(1652). 나중에 이 전초 기지는 케이프 식민지[2]라는 식민지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의 계속된 확장으로, 네덜란드의 상관은 페르시아, 벵골, 말라카, 시암, 포모사(대만), 나가사키에 이르었다. 1670년대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150척의 상선, 40척의 군함, 50,000명의 직원과 10,000명의 규모를 지닌 거대 조직이었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유럽인들의 주도하였다는 전제긴 하지만 신항로가 개척되었고, 그동안 각자의 지역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상호간에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제 어느 특정 지역에서의 사건이 멀리 떨어진 다른 문화권, 다른 지역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물자와 사람간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고추, 담배, 커피와 같은 작물들이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으며 반대로 서양식 화기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대륙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서유럽 국가들은 발빠르게 근대 민족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며 세계제국의 기틀을 다졌고, 이때 확고부동해진 서유럽의 절대적 우위는 21세기 초인 오늘날까지도 흔들리긴 하지만 유지되고 있다.

각주

  1. 스페인의 경우 이즈음부터 해안 거점위주에서 체계적인 부왕령(Virreinato)체제로 변화를 꾀했다.
  2.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기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