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넘어옴)
이 문서는 리브레 위키 사용자들의 추천으로 좋은 글로 인증된 문서입니다!
Ledibug-Labin-PinkTerrorBird-Featured.png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공화국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697~1797
Flag of Most Serene Republic of Venice.svg
국기
Coat of Arms of the Republic of Venice.svg
국장
표어
산 마르코 만세!
(Viva, San Marco!)
나라 정보
수도 에라클레아(697~742)
말라모코(742~810)
베네치아(810~1797)
공용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베네토어
국교 카톨릭
정부유형 선출직 의원 내각제
배네치아 공화국은 근년의 공화국으로서는 가장 강력한 공화국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정략론

베네치아 공화국(Republicca di Venezia)은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치아 지역에 위치하던 이탈리아계 해양 공화국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베네치아에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경으로 추측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로마 말기 야만인들의 침공으로 벌벌 떨던 마을 주민들이 그 도시 신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때 신부가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하자 하느님이 개펄로 도망치라고 했고, 그 마을이 그렇게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810년에는 베네치아에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서로마 제국[1]의 황제인 피핀이 침입해 온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존재하는 마지막 비잔티움 제국령이었다. 육지와 가까운 편이었던 베네치아의 수도[2]를 점령하고 그들을 추적하였으나.... 베네치아의 복잡한 개뻘에 갇히고만 함선들은 결국 화살 공격을 받고 모두 불타버린다. 그 뒤 베네치아 공화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덤.

15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내륙부와 달마티아 연안의 영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밀라노 공국을 쳐서 포 강 연안을 따라 유럽행 교역로를 완성하는 한편, 헝가리가 내전에 휩싸였을 때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알바니아에 이르는 아드리아해 동안을 장악하였다. 1463년 필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의 모도네에서 터키 소속의 함선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르고스를 함락 당하였으나, 헝가리, 알바니아,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페라라 제후국의 에스테 후작을 고용하여 오스만 제국을 공격한다. 하지만 1468년 알바니아 군의 지도자였던 스칸데르베그가 사망하고, 오스만군에 의해 1469년 베네치아의 영토였던 에우보이아가 함락된다.[3] 1477년 말 베네치아 공화국의 첩보는 중대한 정보를 얻었다. 이는 나폴리 왕국이 헝가리 왕국과 손을 잡아 오스만 제국과 강화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드리아해 서안을 장악하고 있는 나폴리 왕국에 의해 아드리아 해를 통한 교역이 막히게 되고, 또한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이 각각에게 해 방면과 달마티아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과 단독 강화를 결정하게 된다. 협상은 1년 간 난항을 격었고, 중간에 오스만군이 다시 스쿠타리를 공격하였으나, 1479년 1월 25일 강화 협상이 타결되었다.

1499년에서 1503년까지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의 걀과로 코로네와 모도네를 상실하였으나 케팔로니아섬과 이타카섬을 얻었다. 그리고 1508년에 캉브레 동맹 전쟁이 발발한다. 기존의 로마냐 지방을 두고 교황령과 경쟁하다가 최악의 사태가 온 것이다. 돌린 적국만 해도 교황청,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스페인,페라라 공국 등. 당대 유럽의 슈퍼파워라 할 수 있는 나라들이 다 모여서 순식간에 베네치아는 본토 속령을 상실하였다. 1575년에는 베네치아 전역에 흑사병이 돌아서 17만 5000명에 이르는 인구가 1581년에는 12만 4000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이후 베네치아의 인구는 다시 수복하지 못하였다.

17세기 초에는, 주교가 베네치아 안에서 가지는 지위를 두고 교황청과 대립하게 된다. 당시 반종교개혁의 바람이 가톨릭 세계에서 불고 있었지만 베네치아는 세속적인 편에 속해 있었다. 예를 들면 종교재판소에 경우 판사 3명 중 1명은 성직자가 아닐 정도로 말이다. 당시 본토 속령에서 농업을 통해 세를 불리던 교회에 세금을 거둘려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교황청은 베네치아에 성무 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에 베네치아는 강제로 성직자 들에게 성무를 하게 하는 것으로 응수하였고, 이 대립은 베네치아가 세금을 '소극적'으로 걷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후 1645년 6월, 몰타 기사단을 치는 것처럼 꾸민 오스만 함대가 크레타에 상륙하였다. 상륙지점에 있던 성 토데로 요새는 이를 공격하려고 달라붙은 터키군 500명과 함께 폭☆발함으로써 15년간 이어지는 크레타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8월 22일에는 칸니아(현 하니아)가 함락되었다. 그 뒤 크레타를 차례차례로 정복하여 베네치아에게 남은 요새는 스피날롱가와 수다 그리고 그람보우사, 마지막으로 칸디아(현 그리스의 이라클리오)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요새들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다.[4] 한편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이 끝나고 지중해에서 싸우고 있던 베네치아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럽에서는 스웨덴에서 몰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모여들었고, 또한 크레타를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의 자유민들 역시 자원해서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몰타 기사단, 토스카나, 그리고 베네치아가 자체 보유한 함선들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였으며, 유럽의 주요 왕가에서는 기부금을 보내왔다. 한편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오스만군은 베네치아령 달마티아를 공격한다. 하지만 크레타와 달리 주민의 지원을 무한정으로 얻을 수 있었던 달마티아에서는 되려 영토를 얻기까지 한다.

한편 칸디아에서는 1648년 5월부터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요새에서는 매우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오스만군에게는 이런 소문이 돌 정도로 매우 치열한 전투였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들은 저 요새 안의 사람만이 아니다. 그 동안의 전쟁에서 죽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유령이 되어서 저 요새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9년 9월, 이 성채의 수비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는 '이 전쟁이 계속되어서 베네치아가 이기더라도 베네치아가 입을 피해가 더 클 것'[6]이라는 생각으로 오스만 제국에 항복한다. 처음에 시작할 때 민간인 포함 22,000 명 정도되던 요새 내부의 인구는 3,6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이는 베네치아에서 야전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강화를 추진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1. 수다, 스피날롱가, 그리고 그라보우사를 제외한 크레타 전역을 오스만군에게 양도한다. 단 위의 3 요새는 연공금을 바칠 필요 없이 유지되는 베네치아의 고유한 권리이다.
  2. 또한 베네치아가 달마티아에서 얻은 영토 역시 베네치아령으로 인정한다.

크레타 전쟁이 끝나고 15년 뒤 1683년에는 크레타 전쟁 당시 칸디아의 수비대장이던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를 베네치아 해군사령관으로 선출하였다. 그 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랑 동맹을 맺고 터키 제국을 공격한다. 당시 유럽 쪽 국경에 전력을 집중하던 터키는 에게 해 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맥을 못 추렸다. 684년 8월에 산타 마우라 섬(현 그리스 레프카타섬)을 점령한 뒤 차례로 프레베자와 보니차를 차례대로 되찾는다. 그 뒤에 모레아(현재의 필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발을 돌리는데, 1685년에는 모레아 남단의 모도네와 코로네를 되찾는데 성공하였으며, 같은 해에는 아르고스와 나우플리온(현 그리스의 나플리오)를 다음 해에는 모레아에 위치했던 베네치아의 기지를 수중에 두는데 성공하였다. 모로시니가 이끄는 베네치아 군은 계속 전진하여 파트라스(현 그리스의 파트라)를 함락하고 레판토도 되찾으며, 코린토도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모르시니 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아서 미스트라를 정복하고 스파르타를 수중에 넣는 데 성공한다. 1687년 9월에는 아테네마저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7] 전쟁은 1699년에 카를로비치 조약으로 인해 끝나서 필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을 베네치아가 손에 넣는 걸로 끝난다.

1796년의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는 결국 일장춘몽으로 끄탄게 된다. 1714년 시작된 전쟁으로 카를로비치로얻었던 땅을 다 잃었을 뿐 만 아니라 크레타의 수다와 스피날롱가 등의 크레타 쪽 영토도 잃게 된 것이다. 그리스에서 모든 발판을 잃은 베네치아는 그나마 코르푸 섬 공방전으로 아드리아 해를 베네치아의 만으로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알바니아와 달마티아 쪽에서 영토를 늘릴 수 있었다는 점?

그 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베네치아군은 당시 질적이나 양적으로(특히 육군은)매우 뒤떨어져서 베네치아가 비무장 비동맹을 펴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만들었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군이 침공하였고, 중과부적이라 여긴 베네치아는 항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본토 대부분과 그리스의 섬은 프랑스에게 본토 일부와 달마티아, 이스트리아 지방, 그리고 베네치아 시가는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가게 된다.

경제[편집 | 원본 편집]

15~16세기 경 베네치아의 영토 및 교역 루트

초기[편집 | 원본 편집]

역사 항목에서도 볼 수 있지만, 초창기 베네치아가 가진 거라곤 갯벌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베네치아는 바다를 바라보게 된다. 이는 피사를 제외한 이탈리아 4대 해양 도시국가(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가 바다로 가게 된 이유랑 비슷하다. 주변 지역이 농업에 불리한 환경이었던 것.[8] 베네치아 공화국이 비잔티움 제국의 속국이었을 당시에는 관세적인 면에서 이점을 누릴 수 있어서 콘스탄티노플에서 싼 가격에 물품을 사서 유럽에 파는 중계 무역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 뒤 이슬람 제국이 대두하게 된다. 그렇게 되자 베네치아 상인들은 흑해 연안에서 슬라브 이교도 노예나 모피를 사오거나,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치품을 사거나, 북아프리카에서 금을 사고 목재를 팔거나, 레반토나 알렉산드리아[9]에서 향신료를 사는 등 사업 루트를 다각화 하였고, 이내 동지중해 무역을 지배하게 된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제 4차 십자군으로, 이를 통해 베네치아 인의 경쟁자들인 피사나 제노바 인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하여 동지중해 무역을 완벽하게 지배하게 된다.[10]

1200년에는 유럽에서 기축통화의 위치를 차지하는 베네치아 두카트를 발행한다.

또한 베네치아는 무다라는 상선 시스템을 이용하였다. 이는 봄에 출발해서 가을에 도착하는 정기 상선을 보내는 것으로 처음에는 동지중해 지역에만 보냈지만 후에는 영국에도 보내는 광범위한 무역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중기 : 대항해시대의 도래[편집 | 원본 편집]

콘스탄티노플이 이스탄불로 바뀌게 되는 등 터키가 부상하더라도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무역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11]

물론 문제는 바스쿠 다가마의 아프리카 우회항로 발견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인도의 향신료를 직접 들어오게 하자, 베네치아의 레반토 무역은 순식간애 빈사 상태가 되지만... 되려 터키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포루투칼은 이집트보다 훨씬 센 터키를 상대해야 했기에, 동지중해로 향신료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인도 항로 발견은 동지중해 향신료 교역을 완전히 보내지는 못하게 한 것. 이는 네덜란드가 향신료 산지를 완전하게 장악한 뒤로 동지중해 향신료 교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대항해시대가 베네치아로 하여금 교역을 포기하게 만든 것도 있다. 바로 염료와 설탕. 이는 대서양 열강들이 신대륙을 개척하면서 대규모 염료 산지와 설탕 플랜테이션을 개발하면서 망하게 된 것이다. 또한 , 교역 역시 스페인이 남아메리카로부터 대규모로 들어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편 대항해시대가 도래하자 흥하게 된 사업들도 있었다. 그 예가 바로 견직물모직물 공업이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내에서 가장 안정적인 국가에 속한 덕에 주변의 불안정한 국가로부터 장인들이 많이 들어온 데다가, 원료가 되는 견사나 양모를 많이 들여올 수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무라도 섬으로 대표되는 유리공예나 아르도 출판사로 대표되는 출판업 등도 발전하게 된다.

말기[편집 | 원본 편집]

말기에는 베네치아의 해운업이나 상업의 경우는 완전히 망해버리고 만다. 모직 공업이나 견직 공업역시 영국 등의 기상으로 쇠퇴해버리고 만다. 대신에 본토 속령의 농업에 치중하면서 먹고살게 된다.[12]

정부 체제[편집 | 원본 편집]

초기에는 베네치아의 시민들이 베네치아 민회를 선출하고, 이들이 베네치아의 도제를 선출하였다. 도제의 경우 임기는 종신직이었으며, 베네치아의 공직 중 유일하게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었다. 이는 도제가 베네치아의 국가 원수로서 자기자신을 꾸미기 위한 일종의 품위 유지비 형식으로 지급된 것이다. 또한 200명 미만의 원로원을 선출하여 1500명 정도의 민회의 비효율성을 보완해 주었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랑 스페인이 대두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한다. 첫 번째로 정치에 참여하는 계층인 귀족[13]이 되는 것을 힘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 뒤 200명 미만의 원로원으로서는 일을 결정하는 데 비능률적이라는 판단에[14] 10인 위원회장 3명과 내 도제 보좌관 6명과 도제를 칭하는 inner circle(내륜)과 10 위원회 위원 7명, 본토 속령 총독관 3명, 40인 위원회[15] 위원장 3명, 그리고 국가 감시관[16] 3명을 합쳐 outer circle(외륜)이라 칭하고 그 외에도 군 최고사령관과 주요 국가 대사를 합쳐 40명이 정치를 담당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또 효율적인 판단을 위해 10인 위원회를 설치한다. 이름과 달리 도제와 도제 보좌관 7명, 그리고 위원장 3명과 위원 7명, 그리고 옵저버인 국가 감시관 1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머 초기에는 첩보 활동을 담당하였으나 그 뒤 중요사항 의결에 참가하는 기관으로 변하였다. 그 외에도 주요 의결 사항에는 6인 위원회 6명과 원로원 의원애서 뽑은 존타 15명 가량을 추가하여 의결하기도 한다.

한편 베네치아는 가톨릭 국가이기도 하나 매우 세속적인 경향을 보인다. 위에서도 보았지만 종교재판에 참가하는 판사 3명 중 1명은 성직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 판사가 다른 판관의 의견래 불만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라도 하면 그 성직자는 아주 망해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베네치아의 주보성인인 복음사가 성 마르코의 유해가 모셔진 산 마르코 대성당의 경우에는 도제의 개인 성전이여서 베네치아 대주교좌는 베네치아 리알토 광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규 한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베네치아의 도제 중에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한 도제도 있었다.
  • 유럽 최초의 공공 도박장은 베네치아에서 운영되었다.
  • 베네치아에서 건설 관련을 담당하는 '물의 행정장관'은 취임할 때 업무 태만은 사형이라는 선서를 해야만 했다. 이는 그만큼 베네치아가 을 중요시 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 베네치아의 국립 조선소인 아르세날레는 한때 세계 최대의 공정을 자랑했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오도아케르의 멸망 이후에 세워진 서로마 제국을 의미한다.
  2. 당시의 수도와 지금의 수도는 위치가 달랐다.
  3. 이때 베네치아의 수뇌부가 받았던 타격은 꽤나 되었었다.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적에게 오는 보급을 막음과 동시에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전 때리면 상대가 먼저 GG하리라고 생각했었지만, 해군이 아무것도 못하고 후퇴만 하자, 그대로 함락되어 버린 것. 그때 해군 제독은 종신 추방형 및 전 재산 몰수를 받았다.
  4. 단 칸디아는 제외, 칸디아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
  5. 15년간 평생을 바쳐 싸워서 옷도 다 헤이해지고, 몰골 역시 유령 비슷하게 변할 정도였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하다.
  6. 당시 전쟁에 쓰던 돈은 베네치아 전체 세입을 넘었었다.
  7. 이때 베네치아인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공성하던 중 터키군이 파르테논 신전에 화약을 보관히 두었고, 베네치아 군의 대포가 명중하여 파괴되고 말았다.
  8. 피사의 경우는 주변의 강을 통해 농업품을 모아 교역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9. 이 루트를 통해 베네치아의 주보성인인 복음사가 성 마르코의 유해가 들어온다.
  10. 물론 후에 이 조약은 풀리게 되고, 제노바의 지원으로 비잔틴 제국이 다시 들어서게 될 때에는 이 꼴을 베네치아도 당할 본다. 로비를 새로운 황제에게 엄청나게 했다고(...)
  11. 되레 터키의 부상이 베네치아가 교역하는 면에서는 유리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터키가 향신료 교역루트에 있는 토호들을 확실히 잡아놔서 향신룟값을 낮추어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터키 때문에 베네치아가 점차 망해갔가는 사실은 건너뛰어주자
  12. 이 때문에 위에서 말한 교황청 사이에서 일어난 성무 금지 파동이나 나폴레옹이 본토를 유린할 때 큰 충격을 먹은 이유가 본토 속령의 농업 발달이었다. 베네치아가 갯벌 뒤로 들어가서 방어전에 나서면 사실상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의견도 있었으니...
  13. 참고로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피선거권만 있을 뿐 거지가 되어서 매표를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가.
  14. 그렇다고 원로원의 권한이 0으로는 떨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15. 원로원과 상호 견제를 위해 설치한 제정 및 사법 담당 기관
  16. 감찰 업무를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