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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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을 촉발시킨 기미독립선언서를 기획하고 서명한 인사들. 개신교, 천도교, 불교 계열 인사들이 참여했다.

결성[편집 | 원본 편집]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 계열 인사들은 1912년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조직한 이래 민족운동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러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붕어하고 고종 독살설이 조선 각지에 확산되어 민심이 격양되자, 천도교 인사들은 지금이 민족운동을 일으킬 호기라고 판단했다.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와 국권반환 요구서를 보내는 한편,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계획을 세웠지만, 천도교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저명한 인사들을 민족 대표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전 참정대신 한규설, 전 이조판서 윤용구, 전 궁내부 대신 박영효, 전 학무부 협판 윤치호, 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등 거물급 대신들과 접촉하였으나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다. 이에 개신교, 불교, 가톨릭, 유교 등 타 종교 인사들과 접촉했는데, 가톨릭 계열은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신부 등 조선 독립운동에 부정적인 서양 선교사들의 반대로 참여하지 않았고, 유림 측은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데다 시일이 촉박해 비밀 유지 차원에서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오직 개신교와 불교 인사들이 호응했다.

1919년 2월 27일, 경성부 재동에 위치한 보성고등보통학교장이자 천도교 인사 최린의 자택에 천도교, 개신교, 불교 인사들이 비밀회동을 열었다. 천도교는 중앙교단 차원에서 도사, 장로를 중심으로 최고위직 간부 15명이 참여하였고 기독교계에서는 장로교 6명, 감리교 10명, 도합 16명이 연대 의사를 밝혔다. 불교계에서는 2명이 이름을 올렸다. 선언서 명단 첫머리에는 거사를 성사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손병희 천도교 교주가 영도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다음으로는 기독교를 대표해 길선주·이필주 목사가, 네번째로는 불교 대표로 백용성 스님이 배정되었다. 이후부터는 종교의 구분 없이 배열하였는데 종교 간 연대를 이뤄낸 최린 교장과 이승훈 장로는 각각 30번째와 17번째 이름을 올렸다.

조직적·개인적 차원에서 이름을 빼거나 빠진 경우도 있었다. 함태영 장로는 기독계의 후사를 도모해야 한다는 이유로 명단에서 빠졌고 참여 의사를 밝힌 유학자 김창숙은 모친의 병환으로 뒤늦게 연락을 받는 바람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다.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최남선은 “학자로 남겠다”는 이유로, 송진우 중앙학교장과 교사 현상윤은 “교육 활동에 매진하겠다”며 연대서명을 사양했다. 이날 밤 천도교가 소유한 인쇄소 보성사에서는 철저한 보안 속에서 선언서 2만 1천부가량이 인쇄되었다. 이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뒤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1]

명단[편집 | 원본 편집]

천도교[편집 | 원본 편집]

  • 손병희: 천도교 3세 교주. - 기미독립선언서 영도자.
  • 권동진: 천도교 전도사, 민족문화운동본부 제1분과 위원장.
  • 권병덕:천도교 도사(道師).
  • 김완규: 천도교 법암장(法奄長).
  • 나용환: 천도교 공선관장(共宣觀長).
  • 나인협: 천도교 도사(道師).
  • 박준승: 천도교 경도사(敬道師).
  • 양한묵: 천도교 법도사(法道師).
  • 오세창: 천도교 현기관장(玄機觀長).
  • 이종일: 천도교 전도사, 민족문화운동본부 회장.
  • 이종훈: 천도교 장로.
  • 임예환: 천도교 전도사.
  • 최린: 천도교 전도사, 보성고등보통학교장.
  • 홍기조: 천도교 도사(道師).
  • 홍병기: 천도교 장로.

개신교[편집 | 원본 편집]

불교[편집 | 원본 편집]

민족대표들의 이후 행적[편집 | 원본 편집]

천도교[편집 | 원본 편집]

  • 손병희: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2년 5월 초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 5월 19일 경성부 숭인동 상춘원(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에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 권동진: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2월 22일 출옥 후 천도교 구파 세력의 영수로 자리잡았고, 자치론을 배격하는 운동을 벌였다. 1926년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과 연합하여 6·10 만세운동을 추진했으며, 신간회 창립에 적극 참여해 신간회 본부 부회장, 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한 민중대회를 기획했으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천도교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고, 8·15 광복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 위원장, 신탁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 위원장, 신한민족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47년 3월 39일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권병덕: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마포 경성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천도교를 탈퇴하고 1923년 자신을 동학 초대 교주 최제우의 재림이라고 자칭하는 이상룡(李相龍)을 후원하여 수운교 창시에 기여했다. 그러나 수운교 내부의 권력 분쟁에서 패배하자 수운교를 탈퇴하고 가회동에 근거를 둔 김연국의 상제교(上帝敎)에 들어갔고 서대문 안 영성문 옆에 약방을 경영하며 생활했다. 1932년 천도교에 복귀한 뒤 천도교 포교와 역사서 집필에 힘쓰다 1943년 7월 13일 경성부 신설정 자택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김완규: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고 농업에 종사하다 8·15 광복 후 민생협회 회장, 3.1 운동 기념행사 명예회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성지부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49년 6월 21일 서울 종로구 명륜4가 자택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나용환: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이후 천도교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고, 천도교가 신파와 구파로 갈리자 신파에 가담했다. 1936년 8월 19일에 사망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나인협: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이후 천도교 포교 활동에 주력하면서 서북 청년들이 주도하는 문화운동을 후원했다. 천도교가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자 신파에 참여했다. 8·15 광복 후 평안남도 성천군에 머무르면서 천도교 원로로 활동했으나, 김일성이 공산주의 국가 건설에 몰두하는 걸 반대했다가 체포되어 6개월 동안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6·25 전쟁 발발 후 월남하여 부산 범일동 피난민촌에서 어렵게 지내다 1952년 4월 16일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박준승: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이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천도교 포교 활동에 전념했고, 천도교가 신파와 구파로 분열될 때 양측의 화해를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1927년 3월 23일 유행성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양한묵: 체포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갖은 고문을 받다가 1919년 5월 26일 옥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오세창: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2월 22일 출옥했다. 이후 정치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대신 서예활동과 고서화 수집에 몰두했으며, 천도교가 신파와 구파로 분열될 때 구파에 가담했다. 8·15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과 인민공화국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나 두 단체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탈퇴한 뒤 김성수 등이 주도한 한국민주당에 가담했다. 뒤이어 권동진과 함께 신한민족당을 결성해 부당수를 맡았다. 6·25 전쟁 발발 후 대구로 피난갔다가 병을 얻어 1953년 4월 16일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이종일: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2월 22일 출옥했다. 출옥 직후 3·1 운동 3주년인 1922년 3월 1일 또다시 천도교 교인을 중심으로 3·1 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계획하고, 자주독립선언문 초고를 2월 20일에 직접 작성해 김홍규에게 인쇄하도록 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인쇄물이 모두 압수당했다. 이후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을 역임하여 한글맞춤법을 연구했다. 1925년 8월 31일 경성부 죽첨정 정목 31번지 자택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이종훈: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천도교 개혁운동과 비밀 결사에 참여하다가 "불온한 문서를 배포하여 교단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1922년 5월 12일 제명되었다. 6월 13일 제명이 취소되면서 교적이 다시 회복되었다. 그후 신파 인사들이 천도교연합회를 조직해 천도교와 분리하였으나, 그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천도교에 합류했으며, 신파와 구파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만주에서 천도교 신파가 고려혁명당을 결성하여 무장 투쟁을 시작하자, 이에 참여하기 위해 만주로 가서 고려혁명당에 가입했으나, 고령인데다 건강이 좋지 않아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못하고 국내와 만주를 왕래하며 정양했다. 1931년 5월 2일 만주에서 사망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임예환: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천도교 포교 사업에 힘을 쏟았고, 천도교가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자 구파에 가담했다. 8·15 광복 후 고향인 평안남도 중화군에 머물렀으나, 그가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불분명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최린: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2월 22일 출옥했다. 이후 천도교 포교 활동을 맡다가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고 조선체육회, 조선기근구제회, 조선어사전편찬회 등 각종 사회단체에 활동했다. 한편 '민족개량주의'를 표방하며 자치론을 내세우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맹비난을 받았다.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그해 8월 내선일체와 대동방주의를 내세우는 시중회를 조직한 뒤 본격적으로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37년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한 뒤 내선일체를 설파했으며, 전국 각지를 돌며 학병 권유, 징병 찬양, 전쟁에 쓸 물자 징발 독려 등 일제를 지원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8·15 광복 후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고 천도교단에서 제명되었으며,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게 체포되어 공판을 3차례 받다가 4월 20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납북되어 1958년 12월 말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 홍기조: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6일 출옥했다. 이후 천도교 포교 활동에 전념하다 말년에 병에 걸려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고, 1938년 7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하양리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홍병기: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천도교 혁신 활동에 주력하다가 보수파 인사들에 의해 좌절되자, 1922년 12월 천도교를 탈퇴하고 천도교 연합회를 조직해 신파 인사들을 이끌었다. 1922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연합해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아 무장 항일 투쟁을 꾀했다. 그러나 만주 군벌의 비협조로 인해 무장 투쟁이 어려워지자, 정의부, 천도교연합회, 형평사와 연합하여 고려혁명당을 결성해 일제에 맞섰다. 그러나 당 조직이 탈로나면서 1927년 1월 19일 만주에서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으로 소환되었고, 1928년 4월 20일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1928년 10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9년 7월 5일 가출옥했고, 이후엔 경성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8·15 광복 후 삼일동지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 운동을 벌였다. 1949년 1월 17일 행당교를 지나던 중 군악대원을 실은 트럭에 치여 중상을 입고 국방부 제2육군 병원으로 호송되었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월 26일에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개신교[편집 | 원본 편집]

  • 길선주: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개신교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종말신앙론을 주창했다. 1935년 8월 평안북도 선천군 월곡동교회에서 부흥회를 주관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졌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설교를 지속하다가 11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이끌던 중 또다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졌고, 그날 오전 9시에 사망했다.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이필주: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고, 창씨개명신사참배를 거부하다 1942년 4월 21일 병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김병조: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외교 선전 및 한일관계사료집 편찬 작업에 적극 관여했다. 또한 지방선전부 이사를 맡아 지방 선전대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임정의 활약상을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고 독립운동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심각한 내부갈등을 겪자 환멸을 느껴 상하이를 떠나 서간도로 가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만주를 장악하자, 1933년 4월 조선으로 귀국하여 총독부의 회유를 뿌리치고 정주군 덕연면 덕흥동 묘두산 아래에서 은둔하였으며,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공산화 조치에 반대해 반소, 반공 운동을 전개하다 1946년 12월 24일 체포된 뒤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1952년 봄에 사망했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김창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2월 22일 출옥했다. 192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시카고 한인감리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수행했다. 귀국 후 중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한편, YMCA에 여러 글을 기고해 기독교 전파를 위한 사회 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목회 활동을 중단하고 만주로 이동하여 이상촌 건설 운동을 하였으나, 일제 당국의 의심을 사자 1945년 입국하여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은거해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았다. 8·15 광복 후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좌익 활동을 전개하였고,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발해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장, 기독교민주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북한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6·25 전쟁 발발 후 북한군이 진주한 서울에 와서 기독교민주동맹을 재건하여 북한 주도의 통일을 역설하였고, 강량욱이 이끄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함께 북한의 개신교 신자들을 회유해 북한 당국에 충성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종전 후 공산권 주도 국제평화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전쟁 범죄를 일삼는다고 비난했다. 1959년 9월 29일 평양에서 뇌일혈로 사망했고, 1990년 북한에서 제정된 조국통일상 표창 및 명예 칭호를 추서받았다.
  • 박동완: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잡지 <신생명>의 주간을 맡아 여러 편의 논설을 개재하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에 관해 설파했다. 1926년 신간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담하여 민족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이 점차 거세지자 1928년 8월 25일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한인들을 상대로 포교 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민족의식을 일꺠우고자 노력했다. 1941년 2월 23일 호놀룰루 병원에서 병사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박희도: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이후 신생활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잡지 <신생활> 발간을 이끌었으나, 사회주의 선동기사를 개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923년 1월 17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5년 1월 1일 출옥했다. 이후 흥업구락부, 신간회에 참여하여 민족운동에 힘을 썼지만, 1926년 연정회에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치권을 허락받자는 운동을 전개하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급기야 제자이자 친구의 부인인 윤신실을 강간했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중앙보육학교장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시중회에 가담해 조선 민중을 개조시켜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게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 촉구, 내선일체 찬양, 물자 헌납 지지 등 여러 편의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6월에 조선언론보국회에 참여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천황을 위해 목숨바쳐 싸우자"고 부르짖기도 했다. 8·15 광복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게 체포되어 조사받다가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1952년 9월 25일 사망했다.
  • 신석구: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목회 활동에 전념하다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다 번번히 구금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남아서 공산정권에 맞서 기독교 수호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살다 1950년 10월 10일 평양을 버리고 도주하던 북한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신홍식: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목회 활동에 전념하다가 1935년 병환에 걸려 은퇴하였고, 1939년 3월 18일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병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양전백: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목회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1927년부터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아 서울의 피어선성경학원에 머물며 교회사 자료를 수집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의 집필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도중에 병을 얻어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33년 1월 17일 평안북도 선천군 천북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오화영: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2년 5월 5일 출옥했다. 이후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요한, 의사 이용설, 목사 박연서 등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사후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 일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며칠간 취조를 받아야 했다. 이후 흥업구락부에 참여했다가 1938년 5월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은둔하다가 8·15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에 선출되었고, 조선민족당을 결성해 당수로 추대되었다. 또한 반탁운동에 압장섰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독립전취(戰取)전국대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발발 직후 납북되었다. 1956년 7월 2일에서 3일까지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최고위원 3인 중 1인, 상무위원 11인 중 1인,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한동안 그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가 2002년 통일신보 보도를 통해 그가 1960년 9월 2일 평양직할시 남산병원에서 사망해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유여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6일 출옥했다. 이후 목회 활동에 전념했으며, 양실학교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등 계몽운동에도 참여헀다. 1934년 신병으로 목회 활동을 중단한 뒤 조선중앙일보 신의주지국 고문을 맡았으며, 자긴의 설교를 모은 책, 동서고금 위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책 등을 출간하고 이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 전액을 고아들을 위한 사업에 기부했다. 1937년 1월 13일 의주군 자택에서 병사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이갑성: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2년 5월 5일 출옥했다. 이후 실력양성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흥업구락부 간사, YMCA 이사, 신간회 발기인 등을 맡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출옥 후 자동차수리업소인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을 맡다가 1931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제중약국을 경영했다. 하지만 1937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근 7년간의 행적이 묘연하다. 일각에서는 일제의 밀정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총독부에 넘겼다는 주장을 제기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정당통일기성회 위원장, 남조선과도입법위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고,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선거법 제정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승만 정권의 핵심 인사로 활동하다 이기붕 중심의 후계체계가 가동될 때 영향력이 축소되자 1956년 10월 사상계에 '우리는 사회악에 항쟁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해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 그러나 4·19 혁명 후 이승만의 집권에 공헌한 전력이 문제가 되어 공민권 제한 조치를 받을 뻔했다.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자 이를 찬양하는 글을 게재하였으며,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 등을 맡아 박정희 정권 창출에 기여했다. 1963년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 참여했으며, 1965년 광복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81년 3월 25일 사망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 이명룡: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그 후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고 정주산업발기 총회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에 가담하였다. 8·15 광복 후 평양에서 조만식이 조직한 조선민주당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나, 소련 군정의 탄압을 받자 1947년 4월 25일 월남하여 서울 홍제동에 기거했다. 월남 후 애국동지원호회 고문, 3·1정신성양회 고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열사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김구, 윤봉길, 이동녕 등 임시정부 인사 7명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에 운동장을 만들려 하자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56년 11월 12일 학생들에게 3·1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강연을 하러 가던 중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이승훈: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22년 말에 출옥했다. 이후 오산학교 경영에 힘을 쏟았으며,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여 1923년 4월 초에 출범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총회의 중앙부 집행위원 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했다. 또한 동아일보 사장을 맡기도 했고, 물산장려운동에 창여하기도 했다. 1930년 5월 8일 용동 주민들의 자치조직인 자면회(自勉會) 사람들과 자택에서 모임을 가졌다가 모임이 끝난 후 돌연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이튿날인 5월 9일에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 정춘수: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 6개월 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5월 5일 출옥했다. 이후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신간회, 흥업구락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나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39년 9월 28일 감리교회 감독으로 당선된 뒤 "국가의 팔굉일우의 정신으로 대동아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며 일제에게 적극 협조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인사들을 교직에서 모조리 몰아냈으며, 애국기(愛國機) 헌납을 위해 전국 39개 예배당을 폐쇄, 매각하였다. 8·15 광복 후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한 자신에게 비난이 쏟아지자 돌연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6·25 전쟁 발발 후 피난길에 오르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의 정인환의 집에 지내다 1951년 10월 12일 병사했다.
  • 최성모: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이후 목회 활동에 전념하다가 1924년 6월부터 만주 봉천성으로 이주하여 현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기독교를 전파했다. 이후 귀국하여 목회 활동을 수행하다 병에 걸리자 경기도 수원에서 요양하였고, 1936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불교[편집 | 원본 편집]

  • 백용성: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개신교 목사들이 한글로 된 성경책을 읽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출옥 후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해 '불경의 한글화 작업'을 주도하여 불교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일본 불교의 영향이 갈수록 심화되자 조선 불교계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선학원을 개설했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이 없자 자신의 승적을 버리고 대각사를 세운 뒤 대각교(大覺敎)를 선포하면서 신불교운동을 전개했다. 1940년 2월 24일에 사망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한용운: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2년 5월 출옥했다. 이후 물산장려운동 등 각종 민족운동에 참여했으며,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섰다. 이후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을 맡았으며,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이에 호응하여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또한 팔만대장경의 핵심 부분만 추려서 <불교대전>을 간행했으며, 불교 잡지 <유심>을 간행했다. 1940년부터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 일제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44년 6월 29일 중풍으로 사망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각주

  1.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빠졌다. 길선주는 황해도 장연군에서 설교를 마친 뒤 한양으로 돌아오는 게 늦어져서 오후 6시에야 경성역에 도착했고, 김병조는 평안북도 도내 여러 지방을 비밀리에 다니며 만세시위 전파와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유여대는 의주 읍내 서교회당 부근 공터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모아놓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했으며, 정춘수는 원산에 가 있다가 3월 1일 늦은 오후에야 경성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