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일 (1858년)

이종일 (1858년).PNG

李鍾一. 호는 묵암(默庵), 옥파(沃波). 필명은 천연자(天然子), 중고산인(中皐散人), 중헌(中軒).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천도교 신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군 북이면 반계리(현재 원북면 반계리)에서 성주 이씨 이교환(李敎煥)과 청풍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 말기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한 문열공 이조년(李兆年)의 20세손으로, 그의 가문은 고려말 권문세족으로 조선전기까지 누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 6대조 이육진(李陸津) 이래로 관직을 지낸 사람이 없어 한미한 가문으로 쇠락하였다.

이종일의 전반기 생애와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자신의 인생역정을 기록한 <묵암비망록(黙菴備忘錄)>에서 대략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글을 좋아했다고 한다.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5세이던 1872년 상경하였고, 1873년 문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가 누구의 문하에 들어갔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이종일 본인은 김윤식의 집을 왕래하며 개화사상을 배우고 사제의 연을 배웠다고 밝혔으므로, 그의 개화사상 형성에 김윤식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외부대신을 지낸 이도재(李道宰)에게도 개화사상을 전수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5세이던 1882년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일본의 선진문물을 보고 큰 자격을 받아 조선도 시급히 개화해야 한다는 의지를 굳혔다. 이후의 관직 경력은 기록이 부족해서 확인이 어려우나, 1895년 내부 주사를 지낸 사실이 <구한국관보> 1895년 4월 13일자 기사에서 확인되며, 1898년 중추원 의관에 피임되어 10개월간 재임한 사실도 3.1 운동 직후 심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그는 정작 중추원에 큰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제국신문> 1899년 1월 24일, 2월 22일, 1903년 6월 4일, 1907년 2월 9일자 등에 잇달아 사설을 실어 자체적인 의결권 없이 단순히 내각에서 교부하는 사항에 대해서만 의견을 개진하는 중추원에 대해 "허수아비나 다름없다"며 거센 비판을 가했다. 1907년 학부 산하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된 기록도 있으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종일은 평소 실학 관련 서적을 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묵암비망록 1919년 3월 10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제국신문을 창간하던 40대 초기에 나는 유학사상에서 새로운 진취적인 개화사상을 품게 되었다. 그때 나는 실학관계 서적을 탐독하였다. 그 실학사상이 곧 개화사상의 태동을 암시한 것임을 스스로 깨닫고 터득하게 되었다. 20여년 전 나는 구사상에서 신민족주의사상을 체즉한 결정적인 계기를 갖게 되었다. - 독립사상이 개화사상에서 자강, 근대지향성, 개화성의 강한 힘을 발산하였던 것이다. 즉 독립사상의 원류는 곧 실학사상이다.

묵암비망록에 따르면, 그는 박은식, 이동녕, 남궁억, 양한묵 등과 함꼐 실학서적을 돌려보고 담론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직접 실학관련 서적을 저술하려고 계획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정약용이 집필한 <묵민심서>의 애국애족사상에 감복하여 '다산학'을 받들기로 하였고, 수령의 부정부패상을 규탄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주장한 대목에서 감동하여, "이것을 오늘에 재현한다면 우리나라도 복락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정약용의 이념과 최제우의 동학사상을 접목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수차례 실학의 이용후생정신을 개화사상의 근저로 할 것을 역설했다. 그는 개화를 "인간의 지헤를 개발하여 사상과 풍속과 의식을 전개, 발달시켜 나가는 것"이라 정의하였고, 그 단계와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개화는 학문 배우기에 힘쓰고 근면성실한 것을 근본으로 해서 시운이 변하는 이치를 알아 예전의 그른 것을 고치고 새롭고 좋은 것을 받아들여 날마다 새롭고 또 날로 새롭게 하여 만물이 열리게 하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개화의 목적을 부흥민력(復興民力), 의식개조(意識改造), 자강자주(自强自主)에 두었다. 이를 위해 신문 창간과 학교 설립을 중요시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유학자들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 의병항쟁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위정척사론을 "나라를 지키고 방위한다는 사상의 이념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므로 민족의 방위 운동과 동류"라고 하였고, 의병항쟁에 대하여도 부국강병에 유용한 "충요적위군애국사상"이라 하였다. 이렇듯 이종일은 개화를 지향하면서도 구국을 위해서는 위정척사사상과 의병항쟁까지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종일은 1896년 이상재의 권유로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그는 독립협회의 간부직을 직접 맡는 것은 고사하였으나, 독립협회의 주요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독립협회를 후원했다. 그는 회원들에게 정약용의 실학사상과 동학의 보국안민 사상을 고취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회장을 선출할 때 윤치호를 추천하여 회장으로 선출하였으며, 만민공동회 개최 때 참여(參與)로 추대되어 고종에게 '건의(建議) 6조(條)'를 상주했다. 또한 독립협회 기관지인 <독립신문> 창간에도 관여했으며, 묵암비망록에서 서재필 등이 만민공동회에서 한로은행 및 러시아인 재정고문과 군사고문을 초빙하는 것을 폐지하라고 주장한 건 자신과 협의했던 사안이라고 기술했다. 이로 볼때 그는 자신을 독립협회의 고문이라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몸담고 있던 또 하나의 단체는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였다. 이 단체는 1898년 3월 그가 주도하여 조직한 민권운동단체로 설립목적은 '민권의 총합(總合)과 정부의 비정(秕政)에 대한 비판'을 활동목표로 내걸었다. 회원 수는 약 40여명이었는데 매주말 실학과 동학사상 교리를 강의하는 강좌를 열었다. 독립협회와는 상호 보완적인 애국계몽단체였다. 이종일은 주말에 회원들에게 실학과 동학사상을 강론하며 민권운동을 역설했다. 이들은 독립협회 회원과 함께 만민공동회에 공동 참여하고 연설회를 개최했으며, 외국에 이권을 양도하는 걸 반대하는 상소를 함께 올렸다. 도한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으로 위축되었을 때 대한제국민력회원들이 동원되어 독립협회를 원조하기도 했다.

평소 신문 간행에 관심이 많았던 이종일은 1898년 1월 유영석·이종면·이종문 등의 권유로 정교·장효근·염상모 등과 함께 신문을 창간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해 8월 회원들을 중심으로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했는데 이종일이 사장을 맡고 유영석·이종면 등이 신문제작 등 운영에 참여하였다. 1898년 8월 10일 창간된 <제국신문>은 민권운동, 여성해방, 정부의 비정(秕政) 비판 및 대안 제시를 편집방침으로 내걸었다. 이 신문은 창간호부터 제호와 기사 전체를 한글로 제작해, 한자로 도배되다시피 했던 다른 신문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제국신문이 일반 민중과 부녀자 계층을 주요 타겟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제국신문의 주지는 "민중을 계몽하고 개화를 촉진하며 또 민중의 의식구조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1898년 8월 10일자 <고백> 기사에서, 제국신문 편집인들은 창간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우리나라의 법도와 풍속을 날마다 고쳐 몇해안에 서양의 문명제국과 동등히 되어 남에게 수치를 받지 않기를 바람.


둘째, <제국신문> 창간일을 기점으로 제국신문 기사를 역사 기록처럼 여겨 풍속과 사적을 개선하길 바람.

이종일은 제국신문에서 경영자, 사원, 기자로서 1인 3역의 고된 일을 감내해야 했다. 발행부수는 창간시 2천부였고, 3천부 또는 3,500부를 발행하기도 했지만 후에 다시 2천부로 환원되었다. 제국신문은 창간후 13차례나 휴간, 정간되었다. 화재나 사고, 검열 등 일제의 탄압과 함께 재정난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부녀자 계몽을 위해서라도 제국신문을 가능한 한 오래 이어가고자 노력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한문전용 <황성신문>을 '숫(雄)신문', 한글전용 <제국신문>을 '암(雌)신문'이라고 불렀다. '암신문'이라는 것엔 비하의 의미도 있었지만, 이종일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장차 국가발전을 위해 여성을 키우고 활용해야 한다며 여권신장과 여성해방을 강조했다.

요즈음 여성들이 방속에 갇혀 있는 폐습은 이제 반드시 깨어버려야 한다. 여성의 능력이 깊은 물속에 파묻혀 있으므로 이 재능을 발휘하도록 하고 국력을 배양하는 길에 쓴다면 우리나라의 발전은 명확한 것인데도 다수의 정부고위관료들이 이런일조차 알지 못하니 통탄할 일이다.

- 묵암비망록 1898년 10월 31일자 일기.

1906년, 일찍부터 호감을 품고 있던 동학에 입교한 그는[1]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한 뒤 창간한 <만세보>에 관여하였다. 또 1907년 11월에 결성된 대한협회 조직에도 참여하여 권동진과 함께 평의원을 맡았으며 대한협회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기도 했다. 이밖에 1908년 1월 19일 서울 신문로 보성소학교에서 열린 기호흥학회 창립총회 때 임시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천도교회월보> 과장, 보성사 회장을 역임하면서 천도교의 역사를 정리한 <본교역사>와 <동경대전>의 번역을 맡았다.

이종일은 교육 문제에도 힘을 쏟았다. 1894년 보성소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898년에는 민영환 등과 함께 사립 흥화학교 설립에도 참여했다. 또 1902년 2월에는 동농 김가진, 지석영 등과 국문(國文)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의무교육 실시와 함께 교육기회 평등을 강조하였다. 양반뿐만 아니라 평민이나 상민들에게도 교육기회가 부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육이야말로 민중 개화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자 구국의 길이라고 여겼다.

한일병합 후, 이종일은 조선 총독부로부터 작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하면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제의 수작(授爵) 교섭을 거절하다. 듣건대 소위 '조선귀족령'에 의해 작위수여식이 거행되었다 한다.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이 새로이 어깨를 번쩍이게 되었다고 하니 우리 동포로서 이 같은 수치가 또 있겠는가. 나도 작위 수여를 교섭 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 묵암비망록 1910년 10월 20일자 일기.

이종일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놓고 손병희와 논의한 끝에 1차 민중봉기, 2차 무장투쟁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민중봉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고, 이종훈, 임예환에게 농어민의 실태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1912년 1월 이종훈과 임예환은 피해실태 현장조사를 벌였다. 이종훈은 경기도 근처의 농민을, 임예환은 서해안 일대의 어민을 조사했다. 그 결과, 농민의 80%, 어민의 60% 이상이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이종일은 보성사 사원을 중심으로 '범국민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겉으로는 순수한 종교적 집회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중봉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집회일은 1912년 7월 15일로 정하고, 사전에 집회 취지문, 건의문, 행동강령 같은 것들을 전부 직접 작성하였다. 그런데 집회 이틀 전인 7월 13일에 종로경찰서에 계획이 발각돼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지만 단순한 생활개선운동이라고 항변해 며칠만에 풀려났다.

이종일은 신생활운동의 실패를 계기로 공개적인 집회는 일제의 탄압 때문에 불가능하니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기독교 및 불교 인사들과 연합을 도모하였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자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지식인을 포섭하여 1912년 10월 31일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조직했다. 총재에는 손병희를 추대하고, 자신은 회장을 맡았다. 이 조직은 민족문화수호를 내걸었지만 실상은 민중시위를 도모하기 위한 비밀결사체였다. 회원은 1백여 명에 달했는데 민중동원을 위해 수차례 강연회를 열었다. 이종일은 서간도에 설립된 부민단(扶民團)처럼 장차 이 본부를 민족운동이 구심체로 키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편 1914년 8월 또다른 비밀결사인 <천도구국단>을 조직했다. 본부는 보성사에 두었으며, 손병희를 명혜총재로 추대하고 자신은 단장에 취임했다. 천도구국단은 섭외부로 하여금 이 시점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승패 여부를 조사했다. 2개월에 걸친 조사, 분석 끝에, 섭위부장 신영구로부터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묵암비망록 1914년 9월 25일 및 11월 19일자 일기에 따르면, 손병희는 천도구국단이 독립국가 건설의 수임기구로서 준비할 것을 이종일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또한 이종일은 이른바 '삼갑(三甲)운동'을 주창하였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 1904년 갑진개화운동이 일어났듯이, 1914년 갑인년에도 뒤이은 대중봉기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15년 2월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윤치호, 양기탁, 한규설, 이상재, 윤용구, 김윤식, 박영효, 남정철 등과 접촉하여 삼갑운동에 협조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때가 좋지 않다", "건강이 나쁘다"며 거절했다. 단지 이상재만 "천도교 측에서 나선다면 나는 기독교도들을 동원해주겠다"며 동참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이리하여 삼갑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대중봉기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우선 신중론을 견지하던 손병희를 설득하는 한편, 원로대신과 종교계의 포섭에 노력했다. 1917년 5월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손병희가 민중봉기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으나, 방법론을 둘러싸고 이종일과 견해 차를 보였다. 묵암비망록 8월 31일자 일기에 따르면, 손병희는 인명희생을 우려하여 독립청원을 주장했고, 이종일은 "그런 무기력한 방법보다는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직접 봉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던 1918년 1월 8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하자, 이종일은 손병희에게 결단을 내려달라고 촉구했다. 1918년 2월 28일자 묵임비망록 기록에 따르면, 이종일은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가 독립을 선언한 사실을 거론하며, "동의하지 않는다면 단독으로라도 봉기하겠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결국 손병희는 1918년 5월 5일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훈 등과 상의하여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 3원칙을 결정하고, 9월 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이종일은 농어민, 상인, 노동자, 학생층을 동원할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독립선언서 작성을 맡았다. 그는 일단 손병희의 뜻대로 평화적인 시위를 하되, 일본의 탄압이 거세지면 동학농민군처럼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하지만 손병희는 이종일이 쓴 독립선언서가 너무 과격하다며 최남선이 대신 쓰게 했다. 그러나 최남선은 기한 내에 선언서 작성을 마치지 못했고, 민중동원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금이 부족했으며, 원로 교섭도 지연되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에, 결국 1918년 9월 9일 봉기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에서 붕어했다. 이후 조선 각지에서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이 극도로 악화했다. 이종일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확신하고, 민족운동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얼마 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2월 15일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손병희를 찾아가 보고하였고, 손병희는 "묵암의 오래 전부터의 민중시위운동을 속히 결단하지 못했음이 민망할 뿐이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3.1 운동 준비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손병희 등 천도교 핵심 인사들이 그가 너무 과격하다고 여기고 독립선언서 작성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그를 대신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는데, 손병희의 지침을 받들어 가급적 온건한 표현을 썼다.

천도교측은 기독교 측 연락책인 함태영을 통하여 기독교 측의 동의를 얻었다. 선언서 인쇄와 배포는 이종일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2월 16일 밤 오세창으로부터 신문관에서 제작한 선언서 조판(組版)을 전달받아 20일부터 보성사에서 비밀리에 인쇄에 돌입하였다. 이후 2월 25일 2만5천매, 27일 1만매 등 총 3만5천매를 인쇄하였다. 2월 28일밤 가희동의 손병희 집에서 열린 최종 점검회의에 참석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다음날인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과 함께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 그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인쇄, 배포한 독립선언서의 일부 오자를 수정하며 크게 낭독했다. 뒤이어 한용운의 인사말과 만세 삼창이 있었고, 이내 일경이 들이닥쳤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남산 왜성대로 끌려갔다.

이종일은 옥중에서 일제 형사들의 고문으로 나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일부 민족대표들을 질타했으며, 한용운, 이승훈처럼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칭송했다.[2] 또한 일본 경찰, 검사와 판사의 심문에 대해 의연한 태도로 일관했다. 3월 1일 당일 경무총감부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형사가 물었다.

그대가 대표자의 1인이 된 동기를 말하라.

이종일이 답했다.

나는 광무 2년(1898년)부터 약 10년간 제국신문 사장으로 있었는데 민족적 사상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제 조선은 합병은 되었으나 독립국이 되려면 선언서의 대표자 1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3월 10일 경무총감부에서 형사가 물었다.

피고는 일한합병에 반대하는가.

이종일이 답했다.

바로 연방제도라면 모르지만 식민지로 된 것은 반대한다.

형사가 재차 물었다.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을 독립하려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

이종일이 답했다.

그렇다. 시기가 오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이종일은 똑같은 심문이 계속되자 법리론을 들며 일본인 판사를 질타했다.

여기는 복심법원인데 어떤 이유로 또 초심을 하는가? 무슨 조건으로 법률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오? 재판소 소송법을 보아도 복심법원에서 초심을 하는 것은 못 보았소. 형사소송법에 있는데 형사소송법 220조, 그 외에 얼마를 보아도 없소.

이종일은 최종심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도 스스로 '민족운동의 요람처'라고 여긴 보성사의 앞날을 매우 염려했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체포된 보성사 총무 장효근을 보호하기 위해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과정에서 장효근이 관계하지 않았다고 위증했다. 그러던 1919년 6월 28일 밤 11시경, 보성사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전소되었다. 이에 그는 보성사가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한 곳이어서 일제가 일부러 방화했다고 여겼다. 종로경찰서는 실화라고 주장하였으나 그는 "분명 거짓"이라며 "일제가 절치부심했을 것"이라고 여겼다.[3] 그는 독립운동의 재기를 꾀하기로 마음먹고, 출옥한 장효근이 면회올 때마다 조직을 재편성하라고 당부했다.

1921년 12월 22일 만기 3개월을 앞드고 가출옥한 그는 일제 형사들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2차 3.1 운동을 계획했다. 3.1혁명 3주년이 되는 1922년 3월 1일을 기해 보성사 직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제2의 독립선언식을 한다는 것이었다. 2월 20일에 직접 '자주독립선언문'을 기초하였으며, 한문으로 작성한 초고를 번역하여 보성사에서 김홍규로 하여금 인쇄하도록 했다. 그는 선언문에서 "그들은 우리 (민족)대표를 갖은 모욕과 혹독한 문초로 위협하였으나 투항하지 않았다"며 "민중 각자는 짚단 위에 잠자도 창을 베개로 하여 온 누리가 자주독립 되게 하면 어찌 한나라에 대한 공로로만 끝이겠습니까."라며 민중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그러나 1922년 2월 27일 보성사에서 선언서를 인쇄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압수되면서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이종일의 말년은 매우 불우했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동생 이종칠(李鍾七)의 아들 이학순(李學淳)을 입양하였는데, 그가 옥중에 있던 1920년 6월 25일 이학순이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게다가 출옥 당시 64세의 고령인데다 몸이 피폐해져서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손병희가 생존했을 때는 더러 지원을 받았으나, 손병희가 1922년 5월 19일 사망한 뒤에는 그마저도 끊겼다. 먹을 끼니조차 없어서 온종일 굶주리길 반복하다 결국 1925년 8월 31일 경성부 죽첨정(현 서울 종로구 평동) 자택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아현동 화장장에서 화장된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36년 5월 이태원 공동묘지가 헐리게 되자 집안동생뻘이자 천도교 간부 출신인 이종린의 알선으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종일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1966년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했다. 1978년 이종일기념사업회가 발족하였으며, 1986년에는 충남 태안의 생가가 복원되었다. 또 2009년 8월에는 생가지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현재 그가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서울 종로구 조계사 뒤편 옛 보성사 터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각주

  1. 사실 이종일은 1898년 초부터 동학 교주 손병희와 왕래하며 시국에 대해 환담했는데, 손병희가 입교를 권유하자 때가 되면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묵암비망록 1898년 12월 19일, 1899년 3월 9일) 당장 입교하지는 않았지만, 1898년부터 손병희를 동지라고 표현했다.
  2. 묵암비망록 1919년 3월 2일, 3월 5일자 일기.
  3. 묵암비망록 1919년 7월 22일자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