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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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秉熙. 이명은 손규동(孫奎東)·이상헌(李祥憲), 자(字)는 응구(應九), 호(號)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는 의암(義菴). 대한민국독립운동가, 동학 제3대 교주이자 천도교 초대 교주.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1년 4월 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북이면 금암리 대주마을)에서 청주 관아의 서리인 손의조(孫懿祖)와 그의 둘째 부인인 경주 최씨 최정성(崔正成)의 딸의 서자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성격이 매우 거칠었다고 한다. 아버지한테 "왜 적서차별을 하느냐"고 따지기도 했고, 술을 퍼마시고 도박장에 출입하고, 낭인단을 만들어 두목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12살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관가에 공금을 전달하러 가다가 길가에서 아사(餓死) 직전의 사람을 만나자, 그를 주막에 데려가 공금으로 밥을 사 먹여 목숨을 구해 주었으며, 자신의 집에서 공금 1,000냥을 훔쳐서 사형을 머지않아 당하게 될 친구의 아버지 구명 운동에 썼다고 한다.

잡지 <신인간> 146년 1월호 '이야기 교사(敎史)에 따르면, 17살 때 괴산 삼거리에 갔을 때 어떤 수신사(修信使)가 말에 역인(驛人)을 매달고 가는 것을 보고 즉시 달려가서 역인을 풀어줬다. 이에 마복이 화를 내자, 손병희는 마복에게 대들며 그딴 짓을 시킨 수신사 면상을 보자고 한 뒤 수신사를 몽둥이로 때려눕히고 훈령을 적은 문서를 빼앗아 연못에 던져버렸고, 수신사는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어릴적에 망나니로 지내면서도 의협심만은 남달랐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러다 21세 때인 1882년 10월 5일 조카 손천민(孫天民)[1]과 동학접주 서순택의 권유를 받아들여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아 망나니 짓을 그만두고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성실하게 수도했다. 1884년에 처음으로 동학 제23대 교주 최시형을 찾아뵈어 사제(師弟)의 의를 맺고 수제자가 되었고, 1890년 진천군에 거주하며 21일 밤낮으로 동학 교리집을 익히니, 사람들이 '손학자(孫學子)'라 부르며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1892년 초대 교주 최제우의 신원 운동을 전개하고자 상경하여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하였으나 조정의 무시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1893년 3월 중순 충북 보은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해 '보국안민'과 '척왜척양'을 부르짖으며 보름 동안 농성했다. 이때 그는 충주를 근거지로 한 충의포 도소의 대접주가 되어 충청도 일대 동학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1894년 2월 10일 전라도 정읍 고부면에서 전봉준이 봉기하여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농민들에게 쌀을 고루 나눠줬다. 이후 전봉준 등이 이끄는 동학 남접(南接)은 1만에 달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정읍관아를 점령한 후 기세를 몰아 5월 31일 진주성을 함락했다. 그러나 최시형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北接)은 반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며 남접을 비판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남접, 북접을 가리지 않고 토벌하려 들자, 최시형은 1894년 9월 18일 각 포의 두령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이때 손병희는 중군 통령에 임명되어 북접 소속의 10만에 달하는 농민군을 지휘했다. 북접 산하의 농민군은 9월 중순부터 한달동안 경기도 일대를 휩쓸고 충북 보은으로 집결했다. 이후 보은수비대를 격파하고 전봉준의 농민군과 논산에서 합세한 뒤 공주 우금치에서 음력 10월 23일부터 11월 15일까지 일본군과 격돌했으나 참패했다.

동학군은 순창으로 패주한 뒤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손병희는 충청도로 북상했다가 추격이 심해지자 12월 24일 잔여부대를 해산하고 민가에 숨어지냈다. 1895년 음력 3월 29일 전봉준이 처형된 뒤, 관군은 최시형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에 최시형은 체포되기 전에 후계자를 선정하기로 마음 먹고,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등 북접의 대표적인 지도자 3인을 불러놓고는 손병희를 북접 대도주에 임명했다. 이후 최시형이 끝내 체포되어 1898년 6월 2일 처형되면서, 손병희는 정식으로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다. 그러나 관군의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고, 그보다 먼저 동학에 입도했던 김연국이 그가 교주가 된 것에 반발해서 동학 내부의 분열도 심각했다.

그러던 중 유길준이 집필한 <서유견문>을 읽은 그는 동학에 서양 사상을 접목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관군의 추적을 피하고 문명개화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1901년 3월 동생 손병흠과 이용구를 대동하여 원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일본인에게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수중에 든 돈이 바닥나버려서[2] 미국행을 포기하고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선진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정세를 두루 살폈다. 그 과정에서 조선에서 망명한 권동진, 양한묵, 오세창 등 여러 인사와 교제하여 그들이 동학에 입교하게 하였다. 그는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으로 '충청도 부자' 행세를 했는데 이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본 체류 시절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의 자제 64명을 일본에 유학시켜 선진문물을 배우도록 하였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아동문학가이자 나중에 그의 사위가 된 소파 방정환(方定煥), 춘원 이광수(李光洙)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또 일본 체류시절 소위 '삼전론(三戰論)'을 통해 독자적인 개화 자강책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무렵 일본과 러시아가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일본과 러시아간의 전쟁이 곧 벌어질 거라는 소문을 듣고, 1902년 9월 한국의 의정대신 윤용선에게 '비정개혁안'을 보냈다. 그 내용은 국회의 개설, 종교의 승인, 재정과 정치의 개선, 유학의 장려 등이었다. 그러나 윤용선은 비정개혁안을 '요언(妖言)'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전달한 이인숙을 체포하려 했다. 이인숙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손병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손병희는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일본의 힘을 빌려 한국 정부를 전복해 신정부를 조직하는 것만이 보국안민을 이룰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손병희는 일본과 러시아가 싸우면 일본이 반드시 이길 거라 여기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러시아는 지리적으로 불리하다.


둘째, 러시아는 극동의 단 한 개의 부동항을 얻고자 함이나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강하다.

셋째, 일본은 청일전쟁 때와는 달리 새로운 무기제체를 도입하고 독일에서 전술을 배워서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이윽고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뤼순항을 기습 공격해 러시아 함대에게 타격을 입힌 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손병희는 1904년 여름 권동진과 함께 철도회의 의장인 타무라 이요조(田村怡与造)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군대를 상인의 행색으로 변장하여 은밀히 각지의 항구 중에서 상항(商港)으로 사용되지 않는 항구로 출병하여 동학의 신도 약 10만 명과 함께 한양을 공격하면 반드시 러시아군을 이길 수 있다. 그리하면 동양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전에 아우 손병흠을 한국에 보내어 그 계획을 동학 신도들에게 전하고 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손병흠은 1903년 8월 3일 임무를 완수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다가 부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게다가 1904년 10월에는 타무라 역시 심장병으로 급사했다. 하지만 손병희는 포기하지 않고 일본 정부와 직접 접촉하여 1904년 1월 교토부를 통하여 군자금 1만엔을 헌납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손병희를 러시아쪽의 스파이로 의심했다. 주한일본공사관은 일본 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상헌(손병희)은 친러시아 스파이 이근택 일파의 지시를 받고 2년전 도일한 자이다. 도일 후 각처에서 처첩과 함께 동거하면서 호화스러운 생계를 영위하며 또 학생 20여명에게 매달 학자금을 지급 할 뿐 아니라 지난 5월중 교토부에 군자금 1만엔을 납부하는 등 그는 항상 거금을 움직이며 이는 보통의 부유한 한국인일지라도 하기 힘든 일로서 위의 재원(財源)은 한국조정 또는 친 러시아파로부터 나오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1만엔의 헌금은 일본 정부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며 지원하고 있는 학생들은 훗날 그의 부하가 되어 다방면에서 해를 끼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조규태 교수의 논문 <일제의 한국강점과 동학계열의 변화>에 따르면, 손병희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까지는 표면적으로는 일본을 지지하면서도 안으로는 1890~1892년부터는 조희연의 소개로 경위원총관(警衛院總管)인 이근택(李根澤), 궁내부의 민치헌(閔致憲)등 친러시아파의 고관과의 접촉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관을 통하여 고종의 측근과 관계를 맺고, 손병희 쪽 사람들을 궁내에 취직을 시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손병희는 전쟁 발발 후에는 일본을 전폭 지원했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손병희는 1904년 5월경에도 일본군에 1만엔을 헌납했다고 한다.

1904년 2월, 손병희는 홍병기, 박인호 등 동학 지도자 40여 명을 도쿄로 불러서 "보국안민과 한국의 정치개혁을 위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함께 러시아를 공격한다. 제정을 공고히 하고 국권을 지키고 우리 한국을 재생하는 길은 거기에 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동학의 내부에 사회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하부 조직인 '민회'의 조직을 명령했다. 1904년 4월 한국에 돌아온 동학 지도자들은 '대동회'를 결성하여 개화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다 한 국 정부가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각국에 통지하자, 동학 지도부는 1904년 7월 대동회를 중립회로 개칭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중립회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고, 전국 각지의 동학 신도가 중립회의 결성을 위해 한성부로 모이자 일본군이 평안도 각지의 주둔지에서 동학신도를 체포했다.

이용구는 일본군의 탄압을 막기 위해 1904년 8월 임진섭과 조동원을 송병준에게 보내 "동학은 배일(排日)이 아니므로 동학신도 100만명의 생명을 돕기 위해 일본의 조선주둔군을 알선해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햇다. 송병준이 요청을 승낙하자, 이용구는 일본으로 돌아가 손병희에게 송병준이 이끄는 일진회와의 제휴를 건의했다.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 조희연과 상의한 끝에 민회의 명칭을 '진보회'로 결정하고, 그 활동을 이용구에게 일임했다. 진보회는 1904년 10월 8일 회장 이용구, 부회장 권종덕(權鍾德) 체제로 결성되었다. 진보회의 강령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 황실의 안전 확보


2. 정치 개선

3. 재정 긴축에 의한 인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4. 궁중의 간신 배척

5. 군비 축소와 지방 경위대의 폐지

1904년 10월 20일 진보회는 전주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때 전주의 일본경찰주둔소는 진보회의 중심인물 2명을 체포하여 조사했다. 한명은 전라북도 임실 출신이고 또 한명은 전라북도의 남원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조선의 국정문란은 해당분야의 대신들이 사적인 권한을 휘두르고 미혹에 빠져 있어 우리 진보회원이 대거 경성에 올라가서 상소를 올려 당국의 여러 관을 면직시켜 국정개혁을 단행하려고 하는데 그 표시로 반드시 진보회원은 단발을 한다.”라고 진술했다. 진보회 회원들은 ‘개화인’이라는 증표로 단발을 실행하였는데, 그 수가 6만명에서 2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진남포의 부영사 하리타니 나리야키(梁谷成章)는 1904년 10월 14일 일본 정부에 "진보회원들이 청원서를 강서의 병참지부에 제출했는데, 그 중엔 '오늘날, 만국이 개명하는 시대를 향해 동맹국인 일본을 우러러보고 갈망하고 있다. 일본을 모방해야만 고통받고 있는 한국을 구제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보고를 올렸다.

1904년 12월 2일, 진보회와 일진회가 병합하여 '합동일진회'가 되어 일본군의 물류 운송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05년 6월 10일부터 10월 20일까지 군수품 운반에 동원된 회원은 114, 500명이었는데 그중 사망자는 49명에 달했다. 그들은 또 러시아군과 접촉하여 정보를 얻어내 일본군에 알리는 일도 수행했다. 이때 들어간 경비는 19만엔을 초과했는데, 일본 측으로부터 받은 임금은 63,530엔이었으며 합동일진회 회원들의 부담금은 164,230엔이었다. 또, 북진운송과 함께 1904년 10월부터 1905년 9월까지 경의선 철도공사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손병희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손병희는 1905년경 <준비시대>를 출간했는데, 거기에서 철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철도는 사람의 혈관과 같다. 이 중요한 사업을 외국인에게 경영을 맡기면 안 된다. 일본은 철도의 주권을 외국인에게 판매하거나 양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렇지만 동족의 우방에게 철도의 경영을 맡기는 것은 오히려 행운이다. 우리나라의 정부는 역신(逆臣) 을 등용한 탓에 전국의 철도를 외국인에게 팔아버려서 지금 당장 다시 사 들일 수가 없다. 장래에 철도를 다시 사 들이기 위해서 자금을 준비하고, 철도부설의 방법을 배워서 철도에 관한 운영을 할 수 있는 인력을 키워야 한다. 벌써 국내에는 외국인이 부설한 철도가 있으니 그곳에 가서 일을 하고 기술을 배우면 금방 몸에 익힐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일본군의 철도 공사를 협조함으로써 세 가지의 수확을 얻고자 했다. 먼저, 한국에 대한 일본군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한국정부의 탄압에서 동학을 지키려고 했다. 두번째로는 일본의 동맹국으로써 한국을 일본과 같은 승전국의 지위를 얻고자 했다. 세번째로는 무지몽매한 한국인에게 철도부설을 통해 부설방법과 관리 그리고 근대적 지식을 전하고자 했다. 손병희는 훗날 3.1 운동으로 인해 재판을 받던 중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면 동양이 파멸된다고 생각하여 할 수 있는 한 일본을 지원했다. 그리고 경부선과 경인선을 부설했을 당시 많은 원조를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일진회의 친일활동에 한국인들이 분노하면서 동학이 매국 단체로 매도되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1월 5일 급히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 1906년 2월 16일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의 다동에 설치하였다. 이후 교세 확장에 힘쓰며 이용구 일파를 회유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그해 9월 이용구 등 62명을 출교 처분하는 등 교단 정비에 나섰다. 그러나 이용구 등이 교단의 재정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재단의 재산 상당 부분을 잃었다. 이로 인해 그는 한동안 집세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해 대문을 봉쇄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김연국이 천도교에서 이탈하여 시천교를 세우자, 시천교에 입교한 사람이 20만 명에 달했고, 천도교의 대교구는 72개에서 23개로 축소되었다. 손병희는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끼니마다 쌀을 조금씩 모아 교단에 바치는 성미제(誠米制)를 실시해 교단의 재정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박인호가 3.1 운동 직후 재판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각 교구에서 모은 쌀을 금전으로 환전하면 매년 10만 원 정도 됐는데 그 중 5만원은 해당 지방에서 쓰게 하고 5만원은 중앙총부로 보냈다고 한다.

손병희는 새로 모집한 재원을 기반으로 언론, 출판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일본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활자 등 인쇄시설을 기반으로 1906년 2월 27일 박문사(博文社)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그해 6월에는 천도교 기관지로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하였는데 초대사장은 오세창이 맡았다. 만세보는 일진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문명개화, 문화계몽 등에 앞장섰다. 그러나 운영난으로 인해 창간 1년만에 폐간되었다. 손병희는 이와 더불어 교육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천도교의 독자적인 종교적 자각을 토대로 서구 근대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신식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봤다.

1907년 12월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7년간 운영하다가 보성학원의 창립자 이용익의 아들인 이종호가 반환요청을 하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천도교가 7년간 보성학원을 운영하는데 소요된 경비는 대략 20만여 원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여자 교육기관인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대학교)가 경영난에 빠졌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매월 10원씩 보조금을 지급하였으며, 이밖에도 보창학교, 양명학교, 창동학교 등 20여 개의 사립학교에 매달 일정액을 지원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 이후 손병희는 북한산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고 전국 각지의 지도급 간부들을 이곳으로 불러 '연성회(練性會)'라는 수련회를 개최했다. 천도교는 국권 상실 후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이종일이 사장으로 있던 보성사 사원들은 비밀결사체인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등을 꾸려 활동했다. 이들은 또 군자금을 모아 독립의군부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1913년에는 '천도구국단'을 꾸려 민중봉기를 계획하기도 했다. 천도구국단의 명예총재는 손병희, 단장은 이종일, 총무는 보성사 직원 장효근이 맡았다. 다만 손병희는 이종일 등의 민중운동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일제의 지배가 강고한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이유였다.

1916년 11월 천도교 서울교구장 장효근이 손병희와 만나 민중운동을 협의했다. 장효근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즈음에 천도교도가 결연히 일어나서 독립만세를 절규해야 자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손병희에게 민중운동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청했고, 손병희는 이를 승낙했다. 하지만 손병희는 여전히 민중봉기에 회의적이었다. 1917년 5월 민중봉기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긴 했지만, 방법론을 둘러싸고 이종일과 견해차를 보였다. 묵암비망록 8월 31일자 일기에 따르면, 손병희는 인명희생을 우려하여 일본에 독립을 청원하는 방식을 택하자고 주장했고, 이종일은 "그런 무기력한 방법보다는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직접 봉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던 1918년 1월 8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하자, 이종일은 손병희에게 결단을 내려달라고 촉구했다. 1918년 2월 28일자 묵임비망록 기록에 따르면, 이종일은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가 독립을 선언한 사실을 거론하며, "동의하지 않는다면 단독으로라도 봉기하겠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결국 손병희는 1918년 5월 5일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훈 등과 상의하여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 3원칙을 결정하고, 9월 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이종일은 농어민, 상인, 노동자, 학생층을 동원할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독립선언서 작성을 맡았다. 그는 일단 손병희의 뜻대로 평화적인 시위를 하되, 일본의 탄압이 거세지면 동학농민군처럼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하지만 손병희는 이종일이 쓴 독립선언서가 너무 과격하다며 최남선이 대신 쓰게 했다. 그러나 최남선은 기한 내에 선언서 작성을 마치지 못했고, 민중동원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금이 부족했으며, 원로 교섭도 지연되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에, 결국 1918년 9월 9일 봉기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919년 1월 상순,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측근 3명을 불렀다. 그는 국권 회복 방안으로 다음 여섯 가지를 신중하게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1. 무력봉기 여부


2. 대중시위 수단

3. 외교활동 전개

4. 국민대회 개최

5. 독립청원서 제출

6. 독립선언문 발표

1월 21일 고종이 승하했다. 이때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조선 전역에 퍼지자 민심이 격양하였다. 그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각계 주요 인사들을 포섭하여 민중운동에 협조하게 하였다. 이후 2.8 독립선언의 주도자 송계백이 귀국하였을 때 그와 연락하여 재일교포들의 동향도 파악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중진들을 모이게 한 뒤, 지금이 개벽할 적기라며, 세계 평화를 조성하는 분위기에 발맞추어 독립을 주장하되, 비폭력적이고 무저항적으로 시위를 벌이라고 지시했다. 그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라고 지시한 데엔 동학 농민 혁명 때 무력 봉기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후에 심문을 받을 때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조선 민족대표자와 일본정부와 협의하여 평화롭게 목적을 수행하려고 한다. 만일 불행하게 일본 정부가 이것을 용납하지 않을 때에는 어디까지든지 계속하여 그 운동 목적을 수행할 작정이다.

손병희는 3.1 운동 자금 조달에도 힘을 기울였다. 김규식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필요한 경비 10만원 중 3만원을 천도교 측이 지불하였으며, 서울에서 3월 1일 시위를 벌일 때 기독교 측의 경비 5천원은 천도교 측에서 전부 부담했다. 천도교 인사들은 총 100만원의 독립기금을 모으기 위해 1918년 4월 4일 열린 부구(部區)총회에서 중앙대교당 및 중앙총부 건물 신축을 결의했다. 건축자금 명목으로 모은 돈 가운데 일부를 독립기금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실지로 교당 건축성금으로 모인 1백만 원 가운데 건축비로 쓴 돈은 27만여 원이었으며, 대부분은 독립기금으로 사용되었다. 성금은 남자들은 짚신을 삼고 여자들은 삯바느질 품삯을 모은 돈이었다.

손병희는 독립선언에 가담할 인사 포섭을 권동진, 오세창, 최린에게 맡겼으며, 그 외의 구체적인 사안은 이들에게 위임했다. 세 사람은 먼저 윤용구, 박영효, 한규설, 윤치호 등을 대상자로 선정해 접촉했으나 "때가 좋지 않다", "병이 있다"며 거부당했다. 심지어 손병희 본인이 이완용을 직접 만나 민족대표로 끌어들이려 했다고 한다.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 심사위원을 맡았던 유광렬이 손병희의 사위 방정환으로부터 전해들었다며 증언한 바에 따르면, 손병희는 "매국노를 독립거사에 참가시킬 수 없다"는 측근의 반발을 무릅쓰고 직접 만나서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이완용은 내가 2,000만 동포에게 매국적이라는 이름을 들은 지 이미 오래이오. 이제 새삼스러이 그런 운동에 가담할 수는 없소. 이번 운동이 성공해 독립이 되면, 먼 다른 동리 사람들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 동네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외다. 손 선생의 이번 운동이 성공해 내가 그렇게 맞아 죽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올시다." 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듯 관료 출신 인사들 포섭에 실패하자, 천도교 측은 종교계 인사들을 포섭하기로 결정했다. 기독교 측과 교류가 깊었고 청년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최남선이 선두에 섰다. 그는 김도태를 통해 이승훈 목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승훈 목사는 2월 11일 상경하여 천도교 인사들과 접촉하여 천도교 측의 거사 추진 상황을 확인한 뒤, 다음날 선천군으로 돌아와서 장로회 인사들과 논의하고, 다시 감리회 지도자들과도 협의했다. 2월 22일, 기독교 측 대표 격인 이승훈과 함태영은 최린의 집을 방문했다. 당초 기독교 인사들은 독립청원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하는 방식을 택했으나, 천도교 측의 설득을 받아들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양측이 연대하여 서명하기로 하였다. 2월 24일 이승훈과 함태영은 다시 최린을 만나 양측의 연대를 최종 협의하고 독립운동 추진 방법에 대해 세부적인 합의를 이루었다.

1.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2시로 하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2.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인쇄하여 서울에서는 독립선언 당일 군중에게 배포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며, 지방에는 이를 분송(分送)한다.

3. 독립선언서를 각 지방에 분송할 때 서울에서의 일시 및 독립선언서 배포 절차를 전달하여 각 지방에서도 서울을 따르게 할 것.

4.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기초와 독립선언서 인쇄는 천도교 측에서 담당할 것.

5.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분송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에서 각각 담당할 것.

6. 일본 정부와 일본 귀족원·중의원의 양원에 보내는 통고문은 천도교 측에서 담당하여 보내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 측에서 담당하여 보낼 것.

7. 조선민족대표로서 각 서면에 연명할 사람은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십수 명을 선정하도록 할 것.

8. 독립운동에 참가를 요구하고 있는 불교도도 연명에 참가시킬 것.

기독교 측과 협의를 이룬 뒤, 최린은 불교 인사 포섭에도 나섰다. 2월 24일 밤 서울 재동 43번지에 거주하는 한용운의 집을 찾아가 설득하였고, 한용운은 즉석에서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뒤이어 서울 종로 3가 대각사의 백용성도 가담하였다. 한편 유림 측 인사들도 접촉하였으나, 참여 의사를 밝힌 김창숙은 모친의 병환 때문에 응하지 못하였고 나머지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무위에 그쳤다. 반면 서울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들은 한때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할 계획으로 선언서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최종적으로 민족대표들과 연대하기로 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장로회 7명, 감리회 9명), 불교 2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은 정작 "학자로 남겠다"며 선언서 서명을 거부했다. 2월 27일 밤 최린의 집에서 각 종교별 대표자들이 모여 독립선언서 날인 순서를 정하였다. 논의 끝에 손병희를 영도자로 모시기로 하고 제일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 다음은 기독교를 대표해 길선주(장로회)·이필주(감리회) 목사가 2번과 3번을, 네 번째로는 불교 대표 백용성의 이름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재동 손병희 집에서 최종 점검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행사 장소를 당초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선언식에 참석한 학생과 시민들이 일경과 충돌하여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3월 1일 오후 1시, 손병희는 권동진 등 측근 4~5명과 함께 태화관에 도착했다. 오후 2시 예정대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 1실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이때 인근 6호실에 열혈청년 6명을 극비리에 잠입시켜 당시 상황 일체를 기록하도록 하였는데, 그 중엔 <3.1운동비사(秘史)>를 펴낸 이병헌도 있었다. 그러던 중 대표들이 태화관에 따로 모였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강기덕 등 학생 3명이 태화관으로 찾아가 항의했다.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하기로 해놓고 왜 이곳에 있는가. 이와 같이 학생들을 기만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파고다 공원에 가서 독립선언서는 다른 곳에서 발표하기로 되었다는 것을 말해달라. 어서 공원으로 가서 발표하라.

이에 손병희와 최린이 나서서 다수의 사람이 모인 곳에서 선언문을 발표할 수 없으며, 단지 선언서를 모든 사람에게 배부하면 그것이 곧 선언이 되니 굳이 공원에 갈 필요 없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는 결코 너희 학생과 함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그렇게 말하러 갈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이에 강기덕 등이 다시 항의했지만, 그들은 학생들이 알아서 하라며 태화관에서 내보냈다. 그후 한용운은 참석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건넸다.

조선독립선언을 하기에 이르러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래 계속해서 분려(奮勵)해야 한다.

이에 참석자들은 만세 삼창을 하였지만, 선언문 낭독은 생략하고 눈으로 선언문을 읽었다. 이즈음 누군가 종로 경찰서에 인력거꾼을 시켜 선언문을 보냈고, 점심식사를 하고 있던 중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민족대표들은 순순히 체포되어 남산 왜성대로 압송되었다. 경무총감부에서 1차 취조를 마친 후 일행은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몇 차례의 심문을 거쳐 4월 4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고, 8월 상순 경성고등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재판부는 당초 이들을 국사범으로 간주하고 '내란죄'를 적용해 극형에 처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회에서 조선인의 반감이 클 것을 우려해 이들에게 가벼운 형벌을 내리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고, 이에 따라 고등법원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명목으로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으로 내려보냈다. 손병희는 재판과정에서 "장차 조선이 독립되면 민주정체로 할 생각이었으며, 조선이 독립되더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문: 피고 등은 독립을 선언하면 어떤 순서에 의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답: 나는 세계가 개조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에 보내면 일본정부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조선을 독립시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문: 조선이 독립되면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는가.

답: 민주정체(政體)로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생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유럽전쟁이 한창일 때 교도들과 우이동에 갔을 때,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란 것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문: 피고는 천도교를 생명으로 한다는 것이고, 사람을 훈화해야 할 지위에 있으면서 정치의 와중으로 뛰어 들어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다는 것은 피고의 사상에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그것은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모했는데,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래도 종교가가 정치에 관계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문: 그러나 역사상 순정한 종교는 정치와 혼효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데, 천도교는 정치에 대한 비밀결사이었기 때문에 이번 조선독립을 기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국가가 종교를 도와주면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 한에는 종교는 정치에 붙어가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종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 것이다. 나는 조선이 독립국이 되더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독립 후에 벼슬길에 나아간다고 한다면 정치상의 야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할 수가 없지만, 나에게는 종교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손병희에게 보안법, 출판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에 산입) 판결을 내렸다. 손병희가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신청을 한 것에 대해선 기각하였다.[3]당시 그는 1919년 11월 28일 뇌일혈로 쓰러져 병감에서 치료받고 있어서, 최종 판결 때 침대에 누운 채로 재판에 출석했다. 그래서 최종 판결 후 실제로 감옥에 투옥되지 않고 보석금 1500원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상춘원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그는 천도교가 분열될 기미를 보이자 이를 수습하려 애썼다.

당시 천도교단은 손병희, 최린, 이종훈 등 대부분의 교단지도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신진 지도부가 대체했다. 이들 그룹은 주로 청년들로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기존의 천도교 지도부와 신진 지도부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오지영, 최동희 등 신진세력은 자신들을 혁신세력이라고 칭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원로들을 포섭했다. 이종훈은 이들에게 호응했고, 1922년 1월 17일 종법원 종법사 겸 경기도 교구순회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이리하여 기존 세력과 혁신세력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손병희는 1922년 4월 구관제의 부활을 선언했다. 교단은 손병희의 뜻에 따라 구관제를 부활했고, 그동안 혁신 세력을 지지했던 원로들도 대부분 구파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종훈은 중립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신파와 함께 했다. 이로 인해 이종훈은 불온한 문서를 배포하여 교단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홍병기, 오지영, 정계완 등과 함께 1922년 5월 12일 제명되었다가 6월 13일에 제명이 취소되었다.

1922년 5월 19일, 손병희는 상춘원에서 뇌일혈 증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62세. 그가 죽은 뒤 천도교는 끝내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손병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980년 청주 삼일공원에 그를 포함해 충북지역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00년에는 그의 생가터에 ‘의암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또한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산 28-1에 위치한 그의 묘소는 2012년 10월 19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사상[편집 | 원본 편집]

교정쌍전(敎政雙全)[편집 | 원본 편집]

손병희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명리전>에 나타난 '교정쌍전'의 개념에서 잘 나타난다. 교정쌍전이란 종교가 정치화되고 청지가 도덕화될 때 둘이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즉, 그는 권력의 도덕화와 도덕의 권력화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봤다. 이는 유가의 도덕정치와 유사하지만, 도덕의 자각이 모든 사람에게 제한없이 완전히 열렸다고 본 점에서 도덕이 성현이나 사대부에게 한정되었던 유가와는 다르다. 그는 이러한 교정쌍전 이념을 발판삼아, 천도교를 한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종교운동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교정쌍전이 이뤄지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단계를 추진해야 한다고 봤다.

첫째, 백성이 도덕을 아는 인격체가 될 수 있도록 문명계몽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통해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평등하며,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자각하여, 자발적으로 근대화에 뛰어들게 하여야 한다고 여겼다.


둘째, 첫째 단계에서 자각한 백성을 민회운동으로 조직화하고 세력화하여 새로운 국가건설의 실질적 토대로 삼고자 했다. 그는 민회운동을 통해 한국의 산업화를 이뤄내어 서구와의 경제력 경쟁에 나서며, 문화나 언론에서 서구 근대성에 대응할 수 있는 자기방어 능력을 형성하게 되면 자기보전을 할 수 있다고 봤다.

셋째,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도덕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신국가를 수립하고 독립을 쟁취해, 도덕적으로 완전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손병희는 천도교의 일차적 과업으로 백성의 자각을 설정하고, 문명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는 한편 자각한 백성을 조직화하고 세력화하는 민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오세창을 사장으로 하는 <만세보>를 창간하여 문명개화와 애국계몽의 여론을 형성하는 통로로 활용했다. 그가 목표로 삼은 문명은 근본적으로 도덕에 기초했다. 도덕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이 선이 되고 무엇이 악이 되는지를 밝혀 사람이 가야 할 길과 행해야 할 행위를 규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이 어떻게 하여 생겼고, 악을 피하고 지극한 선에 이르는 길을 밝힌 것이 문명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문명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도덕의 풍화가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성하여 풍기가 크게 열리고, 세도가 높이 성하여 인사가 크게 새로워지고, 물품을 받아 흥성하니 이를 문명의 성대라 이르느니라.

그렇지만 그 도덕은 일상 생활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손병희는 당대의 여러 제도와 생활양식 등에 대해서 적극적인 개방 자세를 보였다. 근대적 실용학문을 소개하는 글들을 만세보에 실어서 문명개화 의식을 널리 알리려 노력했으며, '경쟁시대', '국민의식', '애국심', '자유', '부강', '근대 교육', '생산이익', '국민의 자유' 등의 개념 등을 자주 사용했다. 만세보에서 제시한 국가론은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에 의한 계약론과 존 로크의 개인주의적 계약론을 양 극단으로 보고, 국가는 인민들의 일반의지로 탄생한 것도 아니고 개인들의 계약을 통해서 탄생한 것도 아니라, 국가와 인민의 절충적 타협으로 탄생한 것이라는 게약론을 설파했다. 또한 국가원수,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국가제도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천도교가 왕정 이외의 새로운 국가형성에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줬다.

손병희는 근대적 흐름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07년 동학경전에 관한 주석서를 출간했다. 이 주석서들은 먼저 동학의 재해석을 시도했으며, 전통적 도덕에 바탕을 두면서도 변화하는 근대성을 흡수, 소화하려 하였다. 특히 국가를 보존하고 인종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강토를 보존하는 핵심으로 "국민의 자유대로 자활력을 득하는 것"을 강조했다. 참 자아를 찾아 활동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새로운 국가 형성의 관건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기 성찰을 이루기 위해 보성학원을 인수하고 동덕여학교를 지원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교점쌍전이 달성되어 건설될 새 국가의 정치체제로는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될 수 있는 공화정체가 적합하다고 봤다.

인물개벽론[편집 | 원본 편집]

동학은 초대 교주 최제우부터 '개벽 사상'을 핵심 교리로 간주하였다. 최제우는 이 사회의 세계의 총체적인 위기, 즉 하늘과 땅과 만물이 처한 위기와 그 문제의식에 대한 한울님의 응답으로서, 세상이 새롭게 창조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개인은 주문을 외우고 영부(靈符: 신령스러운 부적)를 부착함으로써 질병을 이겨내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며, 사회적으로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이러야 하고, 세계사적, 문명사적으로는 다시 개벽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제우가 처형된 뒤 동학 제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내 마음과 삶을 먼저 개벽하고 새계 개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울님의 개벽이 성취되려면 개개인이 먼저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밝혔다.

손병희는 이러한 동학의 개벽사상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개벽은 하늘이 처음 열리고 땅이 처음 열리는 것, 즉 선천개벽이 아니라 다시 열리는 것, 즉 후천개벽이며, 사람과 만물이 새로워지는 것에 무게중심을 뒀다. 그는 기존의 동학이 추구한 '서학의 극복'을 '서학의 수용'으로 전환하고, 서구의 개화문명을 수용하여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는 교단 체제를 재정비하고 언론출판을 활성화하고, 교육과 문화 계몽등을 추진하는 등 일련의 '제도개벽'을 실시했다. 제도개벽은 손병희가 일본 망명을 통해 서구문명의 실체를 접하는 경험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의암의 개벽사상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일본의 앞선 문명을 지켜보고, 서구문물을 대거 수용하여 한국의 근대화와 동학의 개벽을 동시에 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진보회를 통해 개화혁신운동을 전개하고, 동학 대신 천도교라는 근대적 명칭의 '종교' 체제를 표방하였다. 또한 근대적 교육의 강화, 언론 등 근대 문물을 수용하고, 자주독립긱반의 구축과 전개를 주도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후학들이 신문화운동을 전개하도록 격려했다.

하지만 서구 문물을 수용하는 것에서 개벽이 완성된다고 본 건 아니었다. 그는 서구문물 역시 부패와 폭력성이라는 문제점이 있다고 봤고, 이를 다시 극복하여 '문명개벽'을 이뤘을 때 비로소 세상이 완전히 새로워진다고 여겼다. 그는 당시 세계를 ‘일 년의 가을’이자 ‘하루의 저녁때’와 같아서 물질의 번성과 사상(공기)의 부패에 따른 위기와 불안이 팽배하고, '큰 시기가 한 번 바뀔 때'라고 진단했다. 즉, 세상을 지배하는 기운은 ‘무섭게 죽이는 가을바람이 쓸쓸하게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불어오’는 유형의 개벽을 당하여 ‘정신상으로 무형의 개벽’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라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사람과 물건이 개벽하는 때’, 즉 인여물개벽의 시기라 하였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손병희의 큰형 손병권(孫秉權)의 아들로, 손병희보다 4살 많았다.
  2. <천도교창건사>에 따르면, 오사카에 체류할 당시 그의 수중에는 60여 원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3. 독립운동관련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