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태

김도태.jpg

金道泰.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1년 9월 11일 평안북도 정주군 아이포면 대산리(현 평안북도 정주시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제1기로 졸업한 뒤 경기도 용인에 자리한 삼악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12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왔고, 1916년 일본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그 후 귀국하여 1918년 재령군의 명신중학교(明新中學校)에서 지리와 역사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2월 7일, 최남선은 기독교측 인물들과 교섭해 독립선언 계획에 동참시키기 위해 현상윤으로 하여금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경영을 핑계로 상경하라도록 하라는 연락을 했다. 이에 현상윤은 정노식(鄭魯湜)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정주군 사람인 김도태에게 이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김도태는 이에 따라 2월 8일 경성을 출발하여 이튿날 정주에 도착하여 이승훈의 집으로 갔다. 그러던 중 오산학교 교사 박현환(朴賢煥)을 만나 이승훈이 선천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박현환에게 최남선의 연락사항을 알린 뒤 선천에 가서 이승훈에게 연락하게 했다. 이승훈은 연락을 받은 뒤 2월 11일에 급히 상경하여 최남선과 만나 기독교 측이 독립선언에 참가하는 데 동의했다.

이 일로 체포된 김도태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1] 이후 1921년 휘문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25년간 재직했다.

1938년 일제의 해군기념일(5월 27일)을 맞아 러일전쟁 시기에 발발한 쓰시마 해전트라팔가 해전, 유틀란트 해전과 함께 세계 3대 해전으로 소개하는 글을 매일신보 1938년 5월 27일자 기사에 게재했다. 그리고 1942년 소년·소녀들에게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의 기후와 지리를 설명하는 글을 게재했다. 이외에도 여러 건의 친일성 논설을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8.15 광복 후, 1945년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며, 조선지리학회(朝鮮地理學會) 회장을 지냈다. 1949년에는 공군사관학교 교수를 맡았다. 1956년 12월 26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김도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김도태가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성 논설을 여러 건 매일신보에 게재한 일을 근거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그를 포함시켰다.[2] 하지만 그가 친일을 목적으로 그런 논설을 게재한 것이 맞는지, 단순한 정보 제공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에 관한 논란이 일었고, 결국 친일인명사전 수록은 보류되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